•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명월관 단골들

명월관의 주요고객, 단골들

명월관은 궁중의 연향요리가 민간에 선보인 '요릿집'이라는 공간이었지만 단순히 음식만을 먹고 즐기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명월관은 대령숙수였던 안순환이 자체 개발한 교자상 요리를 매개로 왕족, 귀족, 친일파 정치인,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인, 예술인, 체육인 등 다양한 부류의 유력인사들이 모여 정치를 논하고 예술을 펼치는 복합 커뮤니티 공간이었다.
또한 명월관은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속해 있던 '제 단체들의 기념행사를 비롯한 대규모 연회가 펼쳐지던 컨벤션 공간'이었으며, 농상공부대신이었던 친일파 조중응이 가택에서 치러지던 회갑연을 궁중요리가 차려진 명월관에서 처음으로 벌인 이후소위 상층 계급의 고급
잔치가 벌어지던 친교 공간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1903년에 명월관이 개업하여 1948년에 폐업될 때까지 당대의 유명한 인사들은 모두 명월관의 손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를 거론할 수는 없어, 명월관과 관련이 깊었던 당대의 기생 이난향의 기록과 근대 잡지, 신문기사를 토대로 명월관을 드나들었던 단골들을 추려보았다.

왕족, 귀족(관료)
이름 주요활동
의친왕 이강
(義親王 이강) 1877~1955
민비의 적대 속에 일본?미국 등을 전전하며 자랐다. 1919년 그를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는 대동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끝내 붙잡혀 돌아오고말았다. 이 수사 과정 중에 명월관 지점 주인 ‘황원균’이라는 자가 경찰에 출두해 수사를 도운 일이 있다. 탈출에 실패한 이후 죽 연금 당했으며, 광복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천대를 받으며 힘들 게 살다가 사망하였다.
민병석 (閔丙奭) 1858~1940 친일파, 명성황후의 지원을 받던 여흥 민씨 가문의 한 사람으로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위하여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1910년 한일합병 조약 체결에 적극 협력하기도 하고 국내 한일합병 반대 세력의 무마에 힘써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박영효 (朴泳孝) 1861~1939 친일파, 급진 개화파의 주요인물로 갑신정변 및 갑오개혁의 주체.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받아 일본 세력보다는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더욱 견제하였다. 1882년 제물포 조약 사과 사절로 일본에 갈 때 그가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을 처음 사용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였다.
이재극 (李載克) 1864~1927 친일파, 1879년부터 관료를 지내며 1903년도 법무대신에 임명되며 일제와 밀착하여 황실을 감시하는 일본의 눈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고종을 협박하는 일을 맡았고, 1910년 한일합병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준용 (李埈鎔) 1870~1917 흥선대원군의 손자. 188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차근차근 올라 도승지에 이르었다. 1894년 법무협판 김학우 피살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2개월 만에 특전으로 석방되었다. 김홍집내각의 내부협판?통위사에 등용되어 주차일본공사가 되고 후에 육군참장이 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때 일본 측의 압력으로 내부협판에서 밀려나 극렬한 배일주의자 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하고 말았다.
한창수 (韓昌洙) 1862~1921 친일파, 1888년 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승정원가주서부터 1895년 한성재판소 판서, 한성사범학교 교장, 1897년 외국어학교 교장까지 역임. 1898년 이후 주차영국?독일?이탈리아 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근무했다. 1906년 보빙대사 이재완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중추원 고문과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민영찬 (閔泳瓚) 1873~? 친일파, 명성황후 민씨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 귀국 후에는 김옥균 등의 개화운동에 참여했다. 파리, 스위스 등 외국의 행사에도 많이 참여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1905년 외교사절로 쌓은 공로를 치하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제에 협력하였다.
일제 강점시 귀족 정치인 및 독립운동가
이름 주요활동
손병희 (孫秉熙) 1861~1922 천도교의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 1882년 동학에 입교,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서울 태화관에서 낭독하였다.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했고 보성, 동덕등의 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최린 (崔麟) 1878~1958 일제강점기의 천도교 인사.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독립운동가이다. 하지만 1933년 말 신파를 주도하며 자치론을 내세워 친일행각을 벌였으며, 1937년에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를 설파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58년 사망하였다.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동학농민운동에 가담. 1905년 백담사에 가서 승려가 되어 불교를 개혁하는 작업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6년 <님의 침묵> 을 출판하였고 조선불교청년동맹을 만들어 많은 활동을 하다가 중풍으로 사망하였다.
고영희(高永喜) 1849년~1916년 조선 후기 · 일제강점기의 정치가로서 갑오개혁에 참여했고, 독립협회 조직 시 참여하였다.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대신 자리에 올랐으며, 고종 양위에 강력히 반대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때에는 찬성 쪽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한일신협약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하여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되었다.
송병준(宋秉畯) 1857∼1925 조선 후기의 친일파로 1908년 이지용과 함께 친일단체인 대한실업협회, 국민협회를 조직하였다. 한일 병합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 국민협회를 조직하여 신일본주의를 표방했고, 시사신문을 발행하였다. 민족지 《동아일보》 등을 탄압했으며. 도쿄에서 양근환에게 살해되었다.
민원식(閔元植) 1886~1921 조선 후기의 친일파로 1908년 이지용과 함께 친일단체인 대한실업협회, 국민협회를 조직하였다. 한일 병합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 국민협회를 조직하여 신일본주의를 표방했고, 시사신문을 발행하였다. 민족지 《동아일보》 등을 탄압했으며. 도쿄에서 양근환에게 살해되었다.
윤치오(尹致旿) 1869~1949 윤치오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친일 개화파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한때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 생활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에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 학무국장과 일본 유학생 감독을 지냈고, 얼마 후에 4년간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이지용 (李址鎔) 1870~1928 한말의 친일파로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1904년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에 조인하였고, 1905년 내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 찬성, 조인에 서명해 을사5적이 되었다. 일제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고,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용구 (李容九) 1868~1912 조선 후기 친일파 중의 한 명으로 동학당을 진보회로 고쳤다가, 일진회에 합병시켰다. 손병희가 천도교를 재편, 친일세력 출교처분을 내리자, 시천교를 창설하여 교조가 되었다. 일진회 총위원장·회장으로 친일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한일합방 건의서' 를 만드는 등 친일행동을 자행하였다.
이완용 (李完用) 1858∼1926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미국과의 외교를 맡았다가 후에 친러파로 변모하여 아관파천등을 계획하여 실행하였고, 다시 친일파로 변모하면서 을사조약 체결을 강력하게 지지하여 결국 내각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 선 최악의 매국노이다.
조중응 (趙重應,) 1860~1919 한말의 문신·친일파로서,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을 지내며 매국활동을 했다. 한일합방 때 조약 체결에 찬성한 매국 7역신의 한 사람이다. 후에,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에 올랐다.
조만식 (曺晩植) 1883~1950 한국 정치가 겸 독립 운동가로서,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을 형성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43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끝까지 반대했다.
조병옥 (趙炳玉) 1894~1960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 운동가 겸 정치가. 한인회 · 흥사단 등의 단체에 참여, 독립운동을 했고, 신간회 창립위원 · 재정총무를 역임했다. 광복 시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윤치호 (尹致昊) 1865~1945 정치가로서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을 조직하여였다. 후에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이듬해, 105인 사건으로 10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하여,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유학주(兪鶴柱) ?~?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부회장 및 총무원 그리고 평의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일진회 및 친일활동에 참여. 평리원에 판사로 있으며 의병활동을 탄압하였다.
윤시병(尹始炳) 1851~1932년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개화파 인물. 초기 일진회 조직시 동생은 평의원으로 자신은 일진회 회장 자리를 맡아 일진회를 주도하였다. 을사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선언서 작성에 참여 후, 일진회 내에서 불화가 생기자 결국 일진회를 버리고 또 다른 친일단체인 조선노동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재곤 (李載崑)
1859~1943

조선 후기의 정치인으로 정미칠적중 한사람. 비서원경, 종정원경 등을 지냈으며,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 때는 학부대신으로 친일에 앞장섰다. 이후 각종 친일 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장헌식 (張憲植) 1869.9.21~? 대한제국 때의 친일관료 중 한사람. 대한제국 때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교장, 한성부윤 등의 자리에 있다가, 국권피탈 후 충청북도·전라남도의 지사로 있었다.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7번이나 중임하였다.
한남규(韓南奎) 1874년 ~ ? 대한제국 말기의 일진회 회원. 농상공부 주사를 지냈으며, 일진회가 결성된 후 지부회장 평의원 등 활발한 친일활동을 했다. 1909년 일진회가 세운 대한노동회의 총무원을 맡았고,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인 1911년에는 함경남도 도참사에 임명되었다.
이관구 (李觀求) 1885 ~ 1953 이관구는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삼달양행과 상원양행을 설립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 및 독립군 양성 등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8·15광복 후 대한무관학교 최고 고문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의용실기(義勇實記)’가 있다.
이원직 (李元稙) 1871~1945 이원직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3·1운동에 참가하고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정의도 등과 함께 황해도 사리원과 서울의 연락을 담당하는 비밀기관인 교통국을 설치했고, 임시정부 발간물을 배포하고 독립공채를 통해 군자금 모금을 위해 노력했다.
문인
이름 주요활동
김팔봉(김기진) (金基鎭 ) 1903~1985 문학평론가, 시인이자 소설가. 호가 팔봉(八峰)이라 김팔봉으로도 불렸다. 1925년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만들었으며, 영화사 등에서 활약하였고, 문학평론가로서의 집필도 많이 하였다. 이후에 조선 문인부 국회 상무이사 등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가 되기도 하였다.
백석 (白石) 1912~1995 시인.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 《고향》 《북방에서》, 《적막강산》은 토속적이고 서정적인 시로 유명하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을 사용하여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광수 (李光洙) 1892~1950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쓴 소설가.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무정》, 《흙》등을 비롯하여 수 많은 논문과 시편이 있다.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일제 말에는 창씨개명을 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이태준 (李泰俊) 1904~?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으며,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은 인물과 성격의 차분한 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켰다.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주요한 (朱耀翰) 1900~1979 시인이자 ·정치가.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고, 광복 후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경제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친일 문필활동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최남선 (崔南善) 1890~1957 한국의 사학자·문인. 잡지《소년》을 창간,〈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 계몽적인 소설을 썼으며,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19년에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민족대표 48인 중 하나였지만, 이어 친일 활동을 하였다.
최현배 (崔鉉培) 1894~1970 한글학자. 조선어학회를 창립하였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하였다. 광복 후에는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잡았으며 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등이 있다.
김동인 (金東仁) 1900~1951 1920~30년대에 활동한 간결하고 현대적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한 소설가. 최초의 문학동인지《창조》를 발간하였다. 사실주의 수법을 사용하였고,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주요 작품은《배따라기》,《감자》,《광염 소나타》,《발가락이 닮았다》,《광화사》등이 있다.
김억 (金億 ) 1896~?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시인. 1923년에 간행된 그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이다. 에스페란토의 선구적 연구가로서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를 발표하여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를 남겼다. 김소월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등단시킨 공적을 남겼다.
박종화 (朴鍾和) 1901~1981 시인 겸 소설가. 카프가 등장했을 때, 민족과 역사를 떠난 문학은 없다고 역설하며 스스로 민족을 주제로 하는 역사소설을 썼다. 주요 작품은 《흑방비곡(黑房?曲)》, 《금삼(錦衫)의 피》 등이 있으며 문화훈장 대통령장 등을 수상하였다.
방인근 (方仁根) 1899~1975 소설가. 종합문예월간지 《조선문단》을 간행하여 문단육성에 크게 기여했다. 1930년 《문예공론》 편집을 맡으면서 잡지 편집에 전념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하늘과 바다》, 《화심(花心)》, 《쌍홍무(雙紅舞)》 등이 있다.
변영로 (卞榮魯) 1897~1961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로 발송한 시인.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이 유명하며 주요 작품으로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定界碑)》, 《논개》 등이 있다.
안석영 (安夕影) 1901~1950 영화인이자 삽화가. 나도향(羅稻香)의 연재소설 《환희(幻?)》의 삽화를 그렸다. 1934년 《춘풍(春風)》이 영화화된 이후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심청전》 감독을 시작으로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감독으로 활약하였다.
윤백남(金性洙) 1888~1954 소설가, 극작가 겸 연극영화인. 1917년 백남(白南)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여러 편의 영화를 감독·제작하였다.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 《대도전(大盜傳)》을 발표하였으며, 1922년 예술협회 소속 극단 예술좌(藝術座)에 참여한 데 이어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신극운동을 전개하였다.
장지영 (張志暎) 1987~1976 한글학자로 한글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한글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사전 편찬에 진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투옥되었다. 광복 후에는 한글학회 이사, 연세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최독견 (崔獨鵑) 1901~1970 소설가 겸 언론인. 조선일보에《승방비곡(僧房悲曲)》을 연재하여 주목을 끌었다.《난영(亂影)》《자색봉투》《향원염사(香園艶史)》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고, 8·15광복 후에는《평화신문》 부사장, 《서울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면서《양심(良心)》《낭만시대(浪漫時代)》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화가
이름 주요활동
김용진 (金容鎭) 1878~1968 호는 영운(穎雲)ㆍ향석(香石)ㆍ구룡산인(九龍山人). 한말에 수원군수 및 내부의 지방 국장을 지냈으며, 이후 그림에 입문하고 풍류생활을 즐기며 서화에 전념하였다. 글씨는 안진경체(顔眞卿體)의 해서(楷書)와 한예(漢隸)를 주로 썼고, 그림은 사군자와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부채를 제작해 기증하는 등의 친일행적을 벌인바 있다.
노수현 (盧壽鉉) 1899~1978 호는 심산(心汕).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의 동양화과에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가르침을 받아 독자적인 화풍의 동양화가로 거듭났다. 조선일보에서 삽화가로 활동하며, 최초의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를 연재해 명성을 얻었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설립, 교수를 지내며, 우수한 제자를 많이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동양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상범 (李象範) 1897~1972 호는 청전(靑田).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0회 연속 특선을 차지한 실력 있는 독자적인 화가이다. 동아일보에서 삽화가로 활동할 때,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되었다.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 <나팔수> 와 같은 삽화를 기고하는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무용가
이름 주요활동
최승희 (崔承喜) 1911~1969 일본에서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연구생으로 활동하다가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하여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이후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다. 일본군 위문공연으로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을 받았고,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였다.
조택원 (趙澤元) 1907~1976 일찍이 조선상업은행의 스포츠 선수로 뛰었을 만큼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 보성전문 법과를 중퇴하고 무용으로 전환하여, 일본의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무용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서양 춤을 배운 뒤에 프랑스에서 유학했으며, 이후 한국 무용협회 이사장, 예총 고문, 무용협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언론인
이름 주요활동
김성수 (金性洙) 1891~1955 호는 인촌(仁村).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뒤엔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여 민족자본 육성과 경제자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동아일보> 를 창간하였다.
송진우 (宋鎭禹) 1889~1945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출감한 해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 사장직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반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다 결국 암살당했다.
방응모 (方應謨 ) 1890~1950 <동아일보> 의 정주 지국장을 거쳐, 평안북도의 광업소를 인수해 재산을 모은 뒤, 언론 사업을 비롯한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1933년 조선일보사의 경원권을 인수해 조만식을 사장으로 출발했으나, 같은 해 <조선일보> 를 주식회사로 등기하고 9대 사장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배영 궐기대회에서 황군만세를 선창하는 등의 친일행위를 하였다.
체육인
이름 주요활동
손기정 (孫基禎) 1912~2002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하다가 1932년 신의주 대표로 제2회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2위를 차지하였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에 참가하여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하였으나, 일본의 지배하에 일본의 대표팀으로 간주되어 수상하는 아픔을 겪었다. 광복 뒤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체육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서윤복 (徐潤福) 1923~ 숭문중학교 재학시절부터 마라톤 선수생활을 시작. 1947년 제 5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으며, 이후 런던 올림픽 대회에도 참가하여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로 활약하였다.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후,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로 육상발전에 기여했고 육상지도자로서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서정권 (徐廷權) 1912~1984 1929년 일본 복싱의 창시자 와타나메 시지로에게 권투를 배웠다. 1920년 제5회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이후, 1931년 프로로 전향하여 신기록을 세우며 복싱의 신으로 불렸다. 1932년에는 한국 프로권투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 원정길에 올라 4연속 KO승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원용 (李源容) 체육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함께 스포츠를 보다 대중화시키려는 의지로,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 전문 월관지 조선체육계사를 설립하여 창간하였다.
허성 (許城) 1923년 한국 야구를 본궤도로 올려놓은 조선야구협회의 창립멤버. 같은 해에 하와이 원정을 떠나는 중앙YMCA 야구단을 인솔하였다. 미시간주 디트로이드 중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었으며, 귀국 후 서울 청년회에서 체육 교사로 발탁되었다.
음악인
이름 주요활동
이상준 (李尙俊) 1884~1948 12세에 상경하여 정동에 있는 피어슨 성경학교에서 신교육과 손풍금을 배웠으며 이후 평양의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조선정악전습소에 입학하여 한국가곡을 전공하며 김인식으로부터 서양음악을 배워 우리 전통음악을 서양식 악보로 바꾸어 출판하였다. 다양한 교재, 민요곡집의 출판하여 우리나라 근세 음악발전에 기여하였다.
교육인
이름 주요활동
신해영 (申海永) 1865~1909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출신으로 학부 편집국장과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거쳐, 1907년 재일한국유학생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원한경 (元漢慶) 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 한국명은 원한경이고, 초기 선교사 원두우의 아들로 한국에서 3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영국에서 한국과 관련된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맞아 ‘제암리학살사건’과 같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관용 (李灌鎔) 1894~1933 파리위원부에서 조소앙과 함께 국제사회주의자 회의에 참가희망 전문을 내었고, 1919년 8월 9일 한국독립승인안 통과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대한적십자사 유럽지부장 자격으로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적십 자사 총회 참가하기도 하였다.
기타
이름 주요활동
안창남 (安昌男) 1900~1930 한국 최초의 비행사. 휘문고보를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아카바네 비행기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배웠다. 그리고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워서 비행사 시험에 합격했다. 중국의 혁명전선에 참가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