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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 10대 사건

명월관 10대 사건
년도 내용
1919년 3·1 기미독립선언서(태화관) 낭독
1919년 대동단과 의친왕 망명 미수 사건
1919년 의문의 명월관 화재사건
1919년 한국 최초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의 촬영
1920년 명월관 분점 태화관에서 발생한 노래 결투 (기생 vs 감리교인)
1920년대 명월관 대 식도원의 요리대결
1924년 친일파 박춘금의 김성수, 송진우 협박사건
1926년 한글날 제정(식도원)
1936년 손기정 환영파티 및 무용가 최승희와의 만남
1947년 도색 영화 사건
사건1. 3·1기미독립선언서(태화관)낭독

1919년 2월 초, 최린(崔麟), 손병희(孫秉熙),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최남선(崔南善) 등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초안 작성을 최남선에게 위임. 최남선은 이를 몰래 작성하여 최린에게 전달, 최린은 손병희 등의 동의를 얻어 2월 27일까지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끝마쳤다. 원고는 오세창(吳世昌)이 천도교(天道敎)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사장 이종일(李鍾一)에게 넘겼고,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10시까지 2만 1000장을 인쇄했다. 인쇄된 선언서는 천도교당 전국의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선포되었다.

그 와중에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아침 명월관의 분관인 태화관(泰和館)에 모였고,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韓龍雲)이 일어나 이를 낭독한 다음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든 후, 자진신고, 투옥당했다.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탑동(파고다) 공원에서는 각급 학교 학생 ·시민 약 5,000명이 모여 정재용(鄭在鎔)이 선언서를 낭독했다.

사건2, 대동단과 의친왕 망명 미수 사건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세력은 이 세력들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를 세울 궁리를 하게 된다. 첫 번째가 신한혁명당이 고종황제를 망명시키려고 외교부장인 성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다가 발간된 사건이고, 두 번째가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이자,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키려는 계획이다.

1919년 11월 9일 의친왕은 밤 10시경 명월관에 도착해서 대동단의 이민하(본명은 전협(全協))등과 만난다. 이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것처럼 속이고 평복을 입고 만주로 탈출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지만, 결국은 만주 안동에서 잡혀서 본국으로 송환당해 곤욕을 치루게 된다.

사건3, 황토마루 명월관 화재로 전소

1919년 5월 23일, 명월관 본점 집고각(集古閣)에서 불이 나서 전채 소실된 사건을 의미한다. 집고각은 이미 한 번 불이 난 경력이 있으므로 화재자체는 가능한 것이지만, 화재 바로 전날 22일에 보험회사에 보험을 들었다는 점에서 고의화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수 있다. 명월관 분점인 태화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서 낭독 등으로 입장이 곤란해진 친일세력들이 이 문제를 덮기 위하여 이런 사건을 고의로 벌인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보험은 ‘풍국(豊國)보험회사에 이만 원의 보험을 계약하고 보험료도 금 일백 원을 회사에 지불하였다‘는 것이나, 보험회사가 보험금 전부를 지불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

사건4. 한국 최초 영화<의리적 구토>의 촬영

1919년 10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상영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 1962년에 제정된 ‘영화의 날’이다. 이 영화는 당대 최고의 변사인 김덕경이, 단성사 최고의 배우였던 김도산에게 ‘의리적 구토’의 대본을 가지고 새롭게 우리의 영화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는 곧바로 단성사 사주 박승필에게 찾아가, 이 제안을 현실화시켰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는 오륙천원의 예산으로 조선의 명소를 돌아다니면서 찍을 것인데, 그 장소가 바로 ‘명월관 지점, 청량리 홍릉 부근, 장충단, 한강철교(1919년 10월8일, 매일신보 참조)’ 등이다. 이 당시 명월관은 조선의 명소에 해당할 만큼 유명세를 지녔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건5. 명월관 분점 태화관에서 발생한 노래 결투(기생vs감리교인)

조선 중기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서 지었던 순화궁은, 조선이 망하면서 일제에게 넘어간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에 분노한 군중들이 이완용의 집을 태워버리자, 일제가 그에게 순화궁을 준다. 1912년 명월관이 이 건물을 이완용으로부터 빌려 ‘태화관’이라는 명월관 분점으로 사용하다, 1919년 독립기념선언문 낭독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아마 골치가 아팠던 이완용은 1921년 미국선교사들에게 이 집을 매각한다. 이후 이 공간은 ‘태화 여자관’이라는 이름으로 감리교인들의 포교지가 된다. 이 사건은 명월관을 팔아넘기는 것에 반대하던 기생들과 감리교인들이 노래와 찬송가를 부르며 신경전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기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월관은 끝내 감리교단체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건6. 안순환, 명월관 팔고 식도원 개업

안순환은 1921년 명월관이라는 옥호를 ‘장춘관’에 팔고(돈의동 명월관이 된다), 이후 한성은행, 지금의 태평로1가 인근에 ‘식도원’을 차린다. 1920년대는 따라서 돈의동 명월관과 안순환의 식도원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
식도원은 투자자본이 수 십 만원을 넘으며 일 년의 매상도 명월관에 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면적도 수 백 평에 이르고 점원도 5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식도원의 자랑은 음식과 건물의 아름다움에도 있지만 내외국의 손님들이 자주 찾는데 있었다.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조선음식의 정통함을 맛보기 위해서 식도원을 찾는다고 한다. 게다가 방석, 병풍의 배치와 거문고, 장고를 치는 기생들의 실력에 몇 시간씩 보내고 갔다고 전해진다.

사건7. 친일파 박춘금의 김성수, 송진우 협박사건

일제는 민족적 색채가 강한 동아일보를 탄압하기 위해 정치 깡패 박춘금을 일본에서 불러들였다. 1924년 3월 김성수와 송진우는 명월관에서 박춘금 일당에게 포박되어 육혈포로 협박으르 당하게 된다. 박춘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김성수는 오히려 박춘금에게 호통을 치지만 송진우는 거금 3,000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나온다.
이후 4월9일 민간유지 40여 명이 총독부의 비호 아래 벌어진 이 ‘식도원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벌인 집회는 강제 해산됐고 관련 기사를 게재한 신문도 모두 압수되고 언론탄압은 교묘한 형태로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박춘금사건은 총독부의 언론탄압 실상을 일반에게 알리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파장은 의외의 곳으로 번져나갔다.
민족 대변지를 자처하는 동아일보의 사장이 총독부 끄나풀인 폭력배에게 사과를 하고, 그 내용을 친필로 써준 것은 동아일보의 품위를 떨어뜨린 일이라는 것이었다.

사건8. 한글날 제정(식도원)

1926년 11월 4일은 한글 반포 480돌, 즉 8회갑 기념식 날이었다. 이 날 식도원에서는 장지영, 김정진, 최현배 등 한글학자들과 수백명의 지지자들이 모여 한글날을 공식 제정, 발표하게 되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우리의 정신을 지키는 일을 한글날 제정으로 이끌어 낸 선각자들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어 낸 사건이라 하겠다.

사건9. 손기정 환영파티 및 무용가 최승희와의 만남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민족의 영웅을 맞아들이는 환영파티가 열리게 된다. 이 연회에 조선의 무용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 최승희가 그녀의 후원인의 한사람이었던 여운형의 초대로 자리를 같이하게 된다.

당시 민족의 영웅이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언론에 알려지자마자 결혼설이 유포되는 등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사건10. 도색 영화 사건

1946년 12월 수도경찰청은 명월관에서 20여명의 주객들이 불법 16mm 도색영화를 관람했다며 취조에 들어갔다. 이 도색필름은 명월관뿐만 아니라 국일관, 청향원 등 서울시내 주요 요정에서 상영됐음이 드러난다.

각 요정에서 덧문까지 걸어 잠그고 비밀리에 당시 거금 1천원(당시 영화 관람료 20원)의 관람료를 받고 상영된 이 영화는 직접적인 성행위 장면을 담고 있는 분명한 포르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