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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환 약전

1.어린시절

명월관 설립자 죽농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은 조선 궁중 최고의 주방장인 대령숙수로 연향음식을 책임지던 전선사 사장이었으며, 근대 최초의 조선 요릿집인 명월관을 설립한 사업가이다. 그는 조선 요리를 세계화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궁중음식을 민간에 보급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독상 문화였던 음식상 차리기를 여럿이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교자상을 개발하여 이후 한정식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명월관으로 명성과 부를 축척한 안순환은 후에 명월관 상호를 판매하는 사업적 마인드를 가졌고, 다시 식도원을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한 근대 초기의 최고의 주방장, 마지막 대령숙수이며 뛰어난 사업가였다.
안순환의 호는 죽농으로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의 21세손(世孫)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그의 아버지가 5, 6세 즘에 영남에서 서울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참봉을 지낸 아버지 송석재(松石齋) 안순식(安舜植)과 숙인(淑人) 청주(淸州) 한씨(韓氏) 사이에 1871년 2월 8일에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안순환이 태어날 무렵 그의 어머니 청주(淸州) 한씨(韓氏)가 삼각산(三角山) 신이 호랑이 새끼를 품에 던지는 태몽(胎夢)을 꾸었다고 한다. 안순환은 그 태몽만큼이나 어릴 때부터 모습이 걸출하였다고 한다.
젖도 채 떼기 전인 두 살 때 친모를 갑자기 여의게 된 안순환은 이웃마을에 전(全)씨 부인의 수양(收養)아들로 입양되었다. 전씨 부인 밑에서 양육되며 5세에는 국한문(國漢文)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양 된지 7년만인 9세에 전씨 부인마저 별세하였고 안순환은 본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본가로 돌아온 안순환은 이미 노쇠한 부친으로 인해 생활고를 다시 겪어야만 했고 가족이 과일과 땔나무를 마련해서 팔아야 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6세에는 서당에 입학을 하였으며 유교정신이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독서습자(讀書習字)와 언어행동(言語行動)을 철저하게 배워 유풍을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그때의 상황을 “놓아먹던 말이 굴레를 받았다”고 만년에 회고한 바를 보면 성장기 동안 엄중한 가정교육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2.청년시절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당시 우리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군역상인을 대동한 군대를 파견하였다. 1882년 8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한 후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인천은 1884년 4월 청국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청나라 상인의 활동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1898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면서 산동(山東)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중국 사람들이 대거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인천에는 10여개 중국인 대상(大商)들이 중국 산동성 지역에서 소금과 각종 곡물을 들여왔다. 많은 청상들이 인천에서 무역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요릿집이 문을 열게 되었다. 최초의 중국 요릿집은 공화춘(共和春)이었다. 그 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었던 스튜어드호텔도 중국인들이 매입하여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중화루(中華樓)라는 요릿집을 열었다.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일본요릿집은 이가도(井門榮太郞)란 사람에 수동(壽洞))에 낸 정문인데 1887년에 열었고 삼년 뒤 1890년에 아비루(阿比留民)가 남산에 화월(花月)별장을 요릿집으로 열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였던 안순환은 자라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한 듯 하다. 그 중 재미있는 일화는 15세에 돼지 장사를 하던 일이다. 넘치는 힘과 현실에 대한 불만을 술과 완력으로 풀어가던 안순환은 마음을 다잡고 성실히 살아보고자 돼지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지게에 돼지를 두 마리나 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힘이 좋았고, 두 마리의 돼지를 진 채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돼지를 팔았다고 한다.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자수성가(自手成家)해서 가족이나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1890년(庚寅年)에 결혼을 하고 “내가 남을 부러워하는 것 보다 남이 나를 부러워하게 살겠다”를 그의 좌우명으로 삼아 21세에 서화상(書畵商)의 길로 들어서서 고서(古書) 고화(古畵) 고물(古物)을 교역하는 재리판(財利版)에 활발하게 생활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일찍 자립한 안순환은 몇 년은 머슴신세에 있기도 했고, 몇 년은 주인집 하인으로, 또 몇 년은 음식점 조수로 지내는 등 온갖 험한 일들을 겪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안순환은 음식에 관해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고 후에는 음식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가 되었다.

25세에는 안순환은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하고 이어서 무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사퇴하였다. 청년시절 그의 마음에 새긴 성근정직(誠勤正直) 네 글자는 그의 삶의 좌표가 되었다고 한다. 타고난 기개와 힘을 지닌 안순환은 문(文)보다는 무에 더 능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과 마음만큼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3.전선사 사장 안순환

왕의 식사는 아침인 조수라, 점심인 주수라, 저녁인 석수라 세 끼 수라 외에 간식이 있다. 왕의 음식은 주방 상궁들이 수발을 든다. 음식은 만드는 이들을 주방내인이라 하는데 평상시 왕과 왕비의 조석 수랏상을 준비한다. 그들은 임무에 따라 장식(掌食), 장찬(掌饌), 전선(典膳), 상식(尙食) 등의 직임을 갖고 있다.
수랏상은 밥과 밑반찬으로 이루어진 기본 음식에 반찬들이 차려지는데, 반찬을 12개의 접시에 담아 차리는 12첩 반상이 기본이다. 12첩 반상은 오직 왕이나 왕비만을 위해 차려지고 사가에서는 찬수에 따라 9첩 반상이나 7첩 반상 또는 5첩, 3첩 반상을 차렸다. 수랏상 음식은 각 전각에 딸린 음식 만드는 수라간에서 만들어낸다. 수라간에는 생과방(生果房)과 소주방(燒廚房)이 있는데 찬요리를 담당한 생과방에서는 조석 식사 외에 음료와 다과류를 만들었으며, 더운 요리를 담당한 소주방은 수라를 장만하던 내소주방과 크고 작은 잔치 때 다과와 떡을 만들던 외소주방으로 나뉘었다.
이들과 함께 내시부의 내시들도 궐내 음식물의 감독 임무를 맡았다. 음식관련 업무를 맡는 내시들은 음식을 직접 만드는 일보다는 관련 업무 전체를 주관하는 일을 주로 했다. 내관들 중에 음식관련 업무를 맡은 상선(尙膳). 상온(尙溫). 상차(尙茶)가 있었다. 특히 상선은 종2품 벼슬로 식사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일상적인 음식의 조리는 여성인 상궁들의 일이었지만, 환갑인 고희연과 같은 잔치를 할 때나 연향을 베풀 때는 음식을 만드는 전문적인 남성주방장을 청해 일을 시켰다. 이들이 바로 숙수(熟手)이다. 숙수 중에 궁중에 전속되어 궁중의 연향요리를 도맡아 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대령숙수(待令熟手)라고 불렀다.
대령숙수들은 각각 조리의 영역에 따라 직분이 나뉘었다. 밥을 짓는 일은 반공(飯工), 두부 요리는 포장(泡匠), 고기 요리는 별사옹(別司饔), 떡은 병공(餠工), 술은주색(酒色), 차는 다색(茶色) 등으로 역할이 분화되어 있었다. 이들은 궁중의 큰잔치 때 마련되는 숙설소(熟設所)에서 요리를 만들었다. 비록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출퇴근을 하면서 궁중을 드나들었다. 궁중에 전속되어 있는 이들 대령숙수들은 40명에서 50명 정도였다. 대령숙수는 연회 시 대전어상을 차려낸다. 대전어상은 왕에게 드리는 음식상으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거나 대비의 회갑 축하나 혼인처럼 큰 궁중 연회가 열릴 때 차리는 음식상이다. 전국 각지에서 공급된 최고의 재료로 차린 연회의 잔칫상은 조선 최고의 차림상이라 할 수 있다. 대령숙수는 궁중 음식문화의 정점인 연회음식을 하는 사람이다. 안순환은 바로 조선왕조 마지막 대령숙수였다.

관청 근무기 (1899년 ∼ 1910년)
궁내부 주임관(宮內府 奏任官)이며 전선사장(典膳司長) 안순환
임금이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의 의미를 넘어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파악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임금은 식사를 하면서 식재료를 통해 가뭄이나 장마 같은 천재지변의 유무나 전국 각지의 농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임금이 식사를 하는 것은 바로 각 지역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정보 파악의 현장인 것이다. 임금의 음식을 관리하던 조직이 전선사이다.

안순환은 28세에 탁지부(度支部) 전환국 건축감독(建築監督)으로 궁중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판임관(判任官) 육등(六等), 전환국 기수(技手)를 거친 후에 임금의 음식을 책임지는 궁내부(宮內府) 전선사(典膳司) 장선(掌膳)과 주선과장(主膳課長)을 겸무(兼務)로 궁내부를 출입하였다. 처음에는 참봉(參奉)의 벼슬로 시작하여 전환기국수로 옮겼으며 후에 천거되어 주선(主膳) 과장(課長)에 이르렀다가 정 3품 이왕직사무관을 지냈다.

전선사는 궁중의 각종제사, 연회, 평시 음식의 조리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고종 32년(1885년) 사옹원(司饔院)이란 이름을 전선사로 고쳐 새로 궁내부 소속으로 만든 기구이다. 이곳에서 내외소주방의 주방 상궁들과 대령숙수들을 관리하였고, 공물 또는 진상의 형태로 궁중에 들어오는 진상품을 관리하였다. 또 궁중의 일상생활인 제향(祭享)· 빈례(賓禮)· 사여(賜與) 등에 사용하는 일체의 일을 감당하는 일이 전선사에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나라가 기울고 1910년 대한민국이 합병 문서에 의해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기까지 전선사는 최소의 인원만을 남겨두고 나인과 별감, 내시 등 모든 인원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1907년 국운이 기울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총감부에서는 궁내부를 없애버렸다. 그 후 안순환은 정3품 이왕직사무관(李王職事務官)을 제수 받았지만, 몇 개월 후 스스로 퇴직을 하게 되었다.

궁 안의 음식과 온갖 연회를 진두지휘하던 안순환은 대궐을 나올 무렵 요리사들을 모았고, 없어진 궁내부로 인해 갑자기 직장을 잃은 궁중의 남자요리사인 대령숙수(待令熟手)들이 그를 따라 나섰다. 안순환은 지금의 동아일보(東亞日報) 일민미술관 자리인 황토(黃土)마루에 1909년 명월관(明月館)이라는 조선 궁중 요릿집을 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를 계기로 안순환은 실업경영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4. 최초의 투 잡족-명월관 주인 안순환(1903년)
1) 전선사 사장과 명월관 설립

안순환의 삶이 크게 변화한 것은 명월관을 시작하면서이다. 안순환은 1903년 무렵 조선 최초의 요리집 명월관을 황토마루(현 동아일보사 터)에 개설한다. 명월관은 임금이 먹던 궁중요리를 일반인이 맛볼 수 있는 최초의 공간이며 동시에 조선 최초로 다양한 요리들을 즐길 수 있는 요리집이었다

안순환은 왜 명월관을 열었을까?

안순환은 자신의 글로 요릿집 개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왕래가 끊어지고 나라 도읍지에 내외인간에 더불어 교제할 자리가 없었으니 이천만민 무리의 나라로서 이러하니 한심한 생각을 하고 보니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외국인이 다녀갈 적 엔 그 나라정도를 알고자 할진대 요리점과 병원과 공원을 한 두 번식 본 후 라야 그 나라의 지중함이 어느 정도에 이른 것을 알지니 이러함에 이르러서는 그 수치를 면코자 우리나라에서 남의 나라에게 자랑 꺼리 될 만한 조선 요리를 발명하여 관민상하 없이 혼례피로와 각 향연회며 내 외국인 교제하는 데와 모든 사업 기초상 의논하는 자리를 만들고 우리나라도 이런 것이 있다는 표시가 되게 타인을 사양하여 영업기관을 설비한 바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지금과 같은 요릿집이 존재하지 않았다. 손님의 접대는 집으로 불러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당시 고관대작들은 외국의 공사관들과 만남을 위해 요릿집을 이용했다. 당시 서울에는 소공동을 중심으로 청요릿집들이 있었고, 진고개를 중심의 로 일본요릿집이 있었다. 서울에 대거 진출한 일본인들은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집단적으로 거류하게 되었다. 자연히 술과 여자가 있는 일본 요릿집이 문을 열었다.

청나라 요릿집이나 일본 요릿집이 저마다 성업 중이니 자연 우수한 조선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요릿집이 문을 연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안순환은 1903년 조선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요릿집 명월관을 열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렸고, 이 회담에서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했다. 이후 일본은 '한국정부는 시정개선(施政改善)에 대해 일제의 충고를 허용한다'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의 길을 열었다. 그 후 한일의정서 시행세칙을 내세워 군사행동과 토지의 점령·수용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며, 8월 22일 '한일 외국인 고문초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하게 하고, 군사·재정·외교 고문을 파견했다. 1905년 2월에는 협정에도 없는 경무고문과 학부참여관을 파견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해나갔다. 이 같은 정지작업을 거쳐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의로 체결 ·조인하였다. 황제의 결재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한다.

순종이 즉위하자 통감부는 제일 먼저 고종에 의해 기능이 강화되었던 궁내부의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간다. 궁내부 소속 전선사도 예외일수 없었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수차에 걸친 궁내부 관제 개정으로 폐관 또는 퇴관 된 이가 주임관 166명, 해고 된 자는 역원(役員) 3809명, 여관 232명, 권임(權任) 순검(巡檢) 이하 317명에 달했다. 안순환 역시 자의 반 타의 반 궁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궁중의 대령숙수(待令熟手)들이 안순환을 따라 나서고,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폐지되자 어전(御殿)에서 가무(歌舞)를 행하던 궁중기녀(宮中妓女)들까지 명월관으로 모여 들면서 안순환의 사업가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는 명월관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점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관청 근무기 동안 서구출입으로 견문을 넓힌 그는 선진국을 대표하는 문화와 형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조선 요리집을 개관하는 이유가 국익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안순환은 조선 요리를 발전시켜 세계적인 요리로서 명성을 얻게 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다. 그는 조선 요리의 장점을 이야기 하고 세계 다른 나라들의 요리와 비교하여 조선요리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요리에 대하여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없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조선 요리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 요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안순환에게 ‘요리집’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안순환의 안목

어려운 가정형편에 방황하던 안순환은 21세에 서화상(書畵商)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고서(古書) 고화(古畵) 고물(古物)을 교역하는 재리판(財利版)에 활발하게 생활하며 서화상을 하는 동안에 각종 고서들과 고화들, 고물들을 만지고 취급하며 교역하면서 다양한 고서적들과 그림들, 각종 물건들을 접하게 되었다. 서화상의 경험들이 안순환에게 예술적인 안목을 기르게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궁중에 들어가 일한 후부터 각종 궁중의 화려함과 아름다움들을 접하게 된 안순환이 궁중연회를 담당하고 궁중의 음식들을 담당하는 동안 그의 안목은 점점 키워져 갔다. 궁중의 음식은 눈으로 즐기고 맛으로 즐긴다고 한다. 예술적인 안목이 없다면 시각과 미각을 만족시키는 궁중의 음식들을 관장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안순환의 예술적인 안목은 대령숙수로서, 안순환을 자리 잡고 인정받게 만들었다. 전선사장으로 지내는 동안 각종 공물들을 파악하는 능력과 더불어 궁중의 각종 연회음식들을 책임지고, 지시하게 되면서 미적인 감각과 예술에 대한 안목들이 점차 커져갔다.

궁중에서 각종 음식들을 접하며 음식에 대한 안목을 기른 안순환은 명월관을 시작하면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명월관에서 궁중에서 기른 음식에 관한 안목과 사업적인 마인드로 인해 명월관은 다른 요릿집과 차별화된 독특한 곳으로 만들어졌다.

호화롭고 웅장하면서도 정연한 모습의 명월관은 그 주인의 안목과 손길이 구석구석 반영되어 있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명월관의 온갖 실내 장식들과 각양각색의 호화로운 요리그릇들만 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점이었다. 향긋한 술냄새와 기녀들의 화장품 냄새, 궁중악사들과 기녀들의 공연,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맛의, 고종이 좋아했다는 냉면까지 맛 볼 수 있는 다양한 궁중음식들. 이를 통해 시각과 후각, 청각, 미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명월관의 예술적인 면들이 실 경영자인 안순환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과언이 아니다.

2) 본격적인 명월관 운영

황토마루 명월관

지금의 세종로와 신문로, 종로가 엇갈리는 네거리 남쪽 고개를 황토마루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나 있는 대로 양편으로 의정부, 육조, 중추원, 사헌부, 한성부 등의 관아건물들이 자리한 육조거리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로 난 간선도로와 만나면서 끝이 나고 그 남쪽이 바로 황토마루가 되는 것이다. 황토마루 남쪽으로는 군기시가 있었고, 지금 정동일대에는 태조의 비 신덕왕후의 정릉과 그 원당인 흥천사가 있었으며 그 남쪽으로 태평관이 자리하였다. 경복궁과 서울의 주산인 백악이 빚어내는 경관은 이 황토마루 위에서 바라볼 때 장관을 이루었다. 이 터는 원래 우포도청이 있던 자리로 당시는 공터였다.

안순환은 회색의 2층 한양(韓洋)절충식의 건물을 지어 명월관을 열었다. 아래층은 온돌이며, 2층은 마루 바닥을 깔고 대문은 서쪽으로 냈다. 마당에서 직접 2층으로 올라가도록 화강석으로 계단을 놓은 명월관은 호화롭고 웅장하면서도 정연한 자태를 느낄 수 있었다. 실내장식들과 다양한 요리그릇들은 한없이 호화로운 자태를 자랑하였고, 명월관 내 어느 곳에서나 향긋한 술 냄새와 기녀들의 화장품 냄새로 취할 듯 하였다. 2층에는 귀한 손님들을 위해 매실이란 이름을 가진 특실 방을 하나 만들었다. 아주 귀한 손님이나 그윽한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아래층은 온돌을 깔고 2층은 마루 바닥에 양탄자를 깔거나 다다미를 깔았다. 겨울에는 숯불을 피운 화로가 등장하였다. 방은 자수병풍과 서화로 장식하였다.

안순환은 명월관(明月館) 설립에 자신은 표면에 나서지 아니하고 김동식(金東植), 정원익(鄭元益) 두 사람 사장으로 삼았다. 아마도 궁중 전선사 사장 일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요릿집 주인을 공개적으로 하기에는 타인의 시선을 고려한듯하다.

1906년 7월 14일자 <만세보(萬歲報)>에 실린 ‘명월관 광고’는 명월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저희 관(館)은 개점 이후로 고객의 사랑을 받아 날로 번창하오니 감사함을 무엇이라 말할 길이 없습니다.

특히 날씨가 날로 더워지는 때를 맞이하여 좌석을 매우 청결하게 정리하고 위생을 갖추었으 며, 국내외의 각종 술과 엄선한 국내외 각종 요리를 새롭게 준비하고 주야로 손님을 맞으려 합니다.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외(市內外)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어 음식을 배달하기도 하는데, 진찬합(眞饌盒)과 건찬합(乾饌盒), 그리고 교자음식(校子飮食)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마련해 두었습니다.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면 가깝고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군자의 후의를 표하오니 여러분께서는 많이 이용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요 음식 물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새롭게 개량하여 만든 각종 교자음식, 각국의 맥주, 각종 서양 술, 각종 일본 술, 각종 대한(大韓) 술, 각종 차와 음료, 각종 양과자(洋菓子), 각종 담배, 각 종 시가, 각국 과일, 각종 소라, 전복, 모과. 황토현기념비전(黃土峴紀念碑前) 본관 주인 김인 식(金仁植) 고백(告白).”

이 광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월관에서 조선 궁중음식을 개량한 교자상을 주 메뉴로 판매했다는 것이다. 특히 단체 회식은 물론이고 회갑과 혼례 연회를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말 그대로 조선 음식을 판매하는 첫 번째 전문 음식점이 바로 명월관이었다. 더욱이 교자상을 배달까지 했다니, 지금의 한정식 출장 요리의 역사가 여기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조선음식을 판매하고 연회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교자상을 배달까지 해 주는 조선 최초의 요리집의 탄생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안순환의 최고 경영자로서의 면모

안순환은 시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경영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안순환의 능력은 명월관에서 최대로 발휘하였다.

1903년 황토(黃土)마루에 명월관(明月館)이라는 조선 궁중 요릿집을 열고 실업경영자가 된 안순환은 그동안 궁중에서 사람들과 각종 공물, 진상품을 관리하던 능력을 발휘하여 명월관을 경영해 나갔다. 명월관 자체가 최초의 요릿집이라는 점 외에도 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점과 신식 건물에서 화려하게 치장하고 꾸며놓은 명월관의 내부, 궁중에서 일하던 악사들과 관기들이 있다는 점 등에서 시작부터 엄청난 화제를 몰아왔다. 자신이 겪어왔던 일과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십분 활용하여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안순환은 명월관의 최고 경영자로서 명월관에 오는 손님들을 자부심으로 맞이하였다. 조선 요리계의 원로로 이미 유명해진 그는 거드름부리는 태도로도 유명해질 만큼 자신이 운영하는 명월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명월관에 찾아 온 손님들을 보며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요리가 어떤지 묻기도 하는 등 명월관 관한 안순환의 자부심과 애정은 남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명월관으로 명성과 부를 축척한 안순환은 명월관 화재 이후 명월관의 상호를 판매하는 사업적 마인드를 가졌다. 그 후에는 다시 식도원을 설립하였고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두 번째로 요리집을 성공시킨 근대 초기의 최고의 주방장이며 뛰어난 사업가라고 였다.

3) 명월관의 명 요리들

요릿집의 생명은 무엇보다 음식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요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안순환은 개량해서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고 싶어 했다.

“나는 구 한국시대에 다년간 궁내부 뎐선과(典膳課)에 잇섯슬 뿐안이라 이래 수십년 동안을 료리업에 종사하야 실디로 조선의 음식은 다 맨드러도 보고 연구도 하며 또 일본에 가서 궁내성의 료리 맨기는 것도 시찰하고 그 외에 중국 료리 서양 료리도 대개는 내 손으로 맨기러도 보고 먹어도 보고 또 연구도 하야 보앗슴니다. 그런데 외국 료리 중에는 중국 료리가 비교뎍 발달이 되야 가지수도 상당히 만코 음식의 맨기는 방법이라든지 원료라든지 다 상당하며 서양 료리도 또한 상당히 발달되고 영양질이 만흔 것 갓슴니다. 일본 료리도 담박하기로는 꽤 담박한 듯함니다. 그런데 조선 료리는 중국 료리나 서양 료리나 일본 료리보다 우수한 특뎜이 몃가지가 잇슴니다. (중략) 외국 사람들이 조선에 와서 초대(招待)를 바들때에 무엇보다도 조선 음식의 풍부하고 찬란하고 교묘하게 잘 차려 노흔 것은 누구나 다 감탄함니다. 엇던 때에는 사진도 박어가고 또 자기의 가족에게 조선 음식의 조흔 것을 드러서 편지도 하는 것도 보앗슴니다. 모르는 사람은 조선 음식의 가지 수가 청 료리나 양 료리만 못하다고 하지만은 결코 그럿치 안슴니다. 조선 음식은 실제에 가지 수가 퍽 만슴니다. 떡 하나만 말하야도 30여종이요 신선로(神仙爐)도 종류가 여럿이올시다. 조선 음식을 다소 더 개량만 한다면 아마 세계에 우수한 료리가 될 것이다.”

안순환이 추구하는 사업은 민가의 일상식이나 잔치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회의 주안상이 주가 되는 요릿집이기에 요리에서 멋과 맛의 조화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궁중에는 겸상(兼床)이란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 한명당 본상과 곁상을 마련하였다. 은그릇에 탕조치, 장산적, 삼합장과, 김치, 튀각, 편육, 숙채, 생채젓갈, 포자반 등으로 12첩상을 차였다. 거기에 별찬으로 육회, 어회, 어채, 수란을 곁들인 왕실만의 요리를 그대로 적용하여 명월관은 장안의 최상급 요리를 접할 수 있는 곳으로 인기를 끌었다. 고급스러운 음식들로 고위 대신들의 입맛을 만족시켜 고위대신들과 그들의 자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의 중요한 요리 개발로는 교자상 요리를 들 수 있다. 안순환은 궁중음식을 개량하여 술상차림인 건교자(乾交子)와 밥상차림인 식교자(食交子)를 개발하였다. 원래 교자(交子)란 궁중연회가 끝난 후에 임금이 민간에 하사하는 사찬(賜饌) 중에 한 상에 30인분의 음식을 차리거나, 한 그릇에 10인 분의 메밀국수를 담아 하사한 음식을 여러 명이 둘러앉아 먹던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안순환이 명월관에서 교자상 음식을 새롭게 개발하면서 4인 둘러앉아 가득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으로 의미가 변하였다. 이것은 현재 한정식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교자상에 올라오는 요리는 약주, 신선로, 전골, 찌개, 찜, 육포, 어포 같은 포, 건어, 전, 편육, 회, 생채류, 나박김치, 초간장, 간장, 겨자즙, 과일, 떡과 한과들이었다.

다양한 한상 차림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요리는 신선로(神仙爐)였다. 상의 가장 중앙에 오르는 신선로는 ‘먹어서 입이 즐겁다.’라는 뜻의 열구자탕(悅口子湯)이다.

영조대왕대에 이표(李杓)란 역관이 쓴 <수문사설>이란 책 식치방(食治方)에 열구자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열구자탕(熱口子湯)으로 신선로입니다. 끓이고 익히는 기구가 별도로 있다고 했고, ‘큰 합과 같은 모양에 발이 달려있고 가녘에 아궁이가 하나 달려있다. 합의 중심에 하나의 둥근 통을 세워 뚜껑의 바깥까지 높이 나와 있다. 그리고 뚜껑은 중심에 구멍을 뚫어 원통이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이 원통 안에 숯불을 피우면 바람이 아궁이로 들어가고 불길은 뚜껑 위의 구멍으로 나간다. 이 합의 둘레에 돼지고기, 물고기, 꿩고기, 홍합, 해삼, 소의 양, 간, 대구, 국수와 썰은 고기, 만두 등을 둘러놓고 파, 마늘, 토란 등 적합한 것들을 고루 섞어놓고 맑은 장국을 넣고 끓이면 자연히 불이 피어남에 따라 모든 음식물의 국물이 우러나와 서로 합하여져서 맛이 매우 좋을 것이다. 몇 사람이 둘러앉아 젓가락으로 집어먹고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데 뜨거울 때 먹는다. 바로 이것을 잡탕이라 한다. 대체로 이러한 맛이 뛰어난 음식물은 눈 내리는 밤에 나그네들이 모여 앉아 회식하는데 매우 적당한 것이다. 만일 각상으로 앉은자리라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풍속에서는 본래 각상으로 음식을 먹는 예절이 없으므로 이러한 기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기구를 사 가지고 와서 야외에서 전별하는 모임에서나 겨울밤에 모여 앉아 술자리를 벌릴 때에 매우 좋았다.’ 이것으로 보아 신선로 틀을 중국에서 가져 왔나 봅니다. ‘우분죽(藕粉粥)은 연뿌리를 뽑아서 가는 줄기와 가운데 속이 비어있는 곳은 버리고 다만 머리와 끝의 두 끝 만을 취하여 깨끗이 씻고 껍질을 벗기고 칼로 썰어서 엷은 조각으로 만들어 햇볕에 말려 완전히 마른 후에 맷돌에 갈아 체로 쳐서 가구로 만든다. 이가로 1냥 중에 설탕가루 2돈 중씩 섞어서 사발에 담고 냉수를 조금 넣고 저어 탄다. 여기에 펄펄 끓는 물을 붓고 저으면 마치 율무죽이나 토란을 반쯤 익힌 것과 같이 된다. 이것은 김 수장의 수본에 의하면 진정부와 양주부와 고우현에서 진상하던 물품으로 만드는 법과 죽 쑤는 법이 이와 같다고 한다. 본초강목에 이 연뿌리가루에 관한 글이 없으므로 막연하여 알 수 없다.’ 라고 하며, ‘을미년에 글쓴이가 연경에 갔을 때에 관원 중에 한사람이 병이 들어서 침을 맞느라고 여러 차례 왕래를 했는데 침을 놓은 후에는 매번 이 죽을 주었다. 나에게도 권하기에 먹어 보았더니 매우 좋았다. 집에 돌아온 후에 장로라는 의사가 기록하여 놓은 것을 보았는데 그는 만력년간의 사람으로 그의 기록에 비로소 이 가루를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연뿌리의 물기가 다 마른 후에 가루로 만드는데 마치 천화가루나 칡뿌리 가루를 만드는 것과 같다. 선왕께서 몇 해 동안 병으로 고생을 하실 때에 입맛이 없어 음식을 드시지 못하고 또 혈료로 고생을 하셨다. 나는 이 정승에게 아뢰어 상국이 역내관인 김수장에게 분부를 해서 구해오게 하였더니 중국 땅에 들어가서 먼저 이것을 얻어서 보내왔다. 선왕께서는 단 음식을 좋아하시지 않았으므로 몇 차례 뜨시다가 그치셨다.

신선로는 들어가는 재료가 다양하여 골고루 맛을 즐기는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어우러져 내는 국물 맛이 그윽하고 깊어 음식 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으뜸으로 쳤던 것이다.

이외에도 아름다운 색의 조화를 이루는 구절판요리가 교자상에 올라왔다. 구절판은 밀가루나 메밀가루로 전병을 붙이고 가장자리에 애호박나물, 표고, 또는 석이, 목이버섯을 제육편육과 당근 숙주나물 미나리나물에 황백지단 육회용 고기에 볶은 콩팥 천엽을 둘렀다.

이외에도 대표적인 음식으로 명월관 냉면이라 이름 붙여져 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던 냉면이 있었다. 명월관 냉면은 면발꾸미 가운데에 편육을 얹고 나머지 빈곳에는 배와 잣을 덮은 것으로 배는 칼로 썰지 않고 수저로 얇게 저며 얹었다. 국물은 육수가 아니고 배를 많이 넣어 담근 시원한 동치미 말국을 사용하여 달고 시원했다. 이 냉면은 고종 황제도 좋아했다고 한다.

명월관의 술은 궁중 나인 출신의 ‘분이’라는 이가 담그는 술을 대어서 썼다. ‘분이’로만 알려진 그녀는 그 무렵 술 만드는 솜씨가 상류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이름이 나 있었다. 안순환은 이름난 ‘분이’의 술을 씀으로 명월관이 각종 음식들과 더불어 술로도 이름이 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약주, 소주 등을 팔았었는데 나중에는 손님의 기호에 맞추어 서양식의 맥주나 정종 등의 일본술도 팔았다.

4) 명월관의 꽃 1패 기생

명월관은 궁중음식과 함께 임금님의 관기였던 예기들이 명월관에서 공연을 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명월관으로 모여든 기생 중에는 뛰어난 명기와 상궁이나 나인 출신의 아리따운 자태를 지닌 기녀들이 많았다.

기생들은 1패, 2패, 3패로 계층을 나누고 있었다. 구한말에 ‘패’라고 하는 것은 무리나 조를 짠다는 뜻으로, 기생의 처지가 창류의 첫 머리라 ‘패’라고 불렀다. 1패 기생은 각 고을 관비 중에서 선발하여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여악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연희나 교제 석상에서 없어서 안 될 필수적인 존재였다. 여기에 양민 계급의 아녀자도 교방(敎坊)에 적을 두어 관청에 들어가 공적인 역할을 봉행(奉行)하기도 하고 집에서 손님을 받아 행하(纏頭)를 얻어 생업으로 삼았으며 교방에서 기예를 익혔다. 그러다가 서른이 넘으면 기생노릇을 그만두고 출가하기도 했으며 기생어미로 전업하기도 하고 또 술을 팔아서 생업으로 삼기도 했다.
2패 기생은 은근자(殷勤子)라 한다. 은근자라 함은 도둑을 양상군자라고 하듯이 은밀히 몸을 파는 것을 가리킨다. 이 2패 기생은 주로 남의 집 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3패 기생은 답앙모리(더벅머리)라고 불리며 손님을 받는데 잡가 정도는 하지만 기생처럼 노래와 춤을 하지 못하는 몸도 파는 유녀를 가리킨다. 3패는 당시 서울 각 처에 흩어져 있었는데 광무 연간에 한곳으로 모아 남부의 시동을 3패의 거주 구역으로 정하기도 했다. 이들 집을 칭상화실(稱賞花室)이라 불렀다.

1패 기생들이 명월관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은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로 궁중의 관기들이 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08년 기생 단속령과 부기(婦妓) 단속령이 공표 되었다. 관기제도가 폐지로 갈 곳을 잃었던 궁중과 지방의 각종 기생들은 서울로 모여들어 한성기생조합을 조직하였다. 더불어 1894년 갑오개혁 시 홍범14조의 실시로 격이 낮추어진 교방사(敎坊司)가 통감부의 구조조정으로 1907년에는 장악과(掌樂課)로 개칭되며 거리로 내쫓겼던 궁중악사들이 안순환의 명월관에 합류했다. 이제 대령숙수가 만드는 궁중요리와 궁궐의 관기와 악사들이 함께 펼치는 제대로 된 향연을 명월관에서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궁중 연회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조선최고의 요리를 안순환은 명월관의 교자상에 올렸고, 이 요리는 당시 고관대작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안순환의 명월관 이름을 더욱 크게 떨치게 한 장본인은 명창 기생과 악공들이다. 특히 궁궐 교방사 출신들의 기생들은 단연 명월관의 꽃이었다. 이들은 15세가 되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에 소속되어 본격적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연주, 시, 책읽기, 대화법, 식사예절 등을 배웠다. 왕족과 고관이나 한학적 교양이 높은 유생들을 상대하던 이들은 빼어난 교양과 예의범절 익혔으며 문장에도 능한 해어화였다.

당시 기생들은 명월관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다. 기생들은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 운영되고 있었다. ‘한성기생조합’에 속한 이들 기생들로 조선시대의 명기인 설매(雪梅), 홍장(紅粧), 자동선(紫洞仙), 소춘풍(笑春風), 상림춘(上林春), 관홍장(冠紅粧), 승이교(勝二喬), 옥매향(玉梅香), 성산월(星山月), 황진이, 계생(桂生), 무운(巫雲), 만덕(萬德) 등 명기의 전통을 잇기에 충분한 기생들이었고 춘외춘, 채련. 김원주, 옥향, 신릉파, 이부용, 김영희, 장채옥, 강초월, 이화선 등 쟁쟁한 교방기 즉 1패 기생들을 안순환은 명월관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 1패 기생들은 명월관을 찾는 주요 고객인 고관대작들의 술벗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친일파 송병준은 애첩 산호주를 앞세워 한성기생조합에 속하지 않는 평양기생들을 모아 1913년 ‘다동기생조합’을 조직했다 평양명기 소홍, 춘도, 명옥, 산월, 명화, 보경, 진홍, 화희, 영월, 섬홍, 운선, 진홍 등이 ‘다동기생조합’에 들어왔다. 그들은 기생제도가 강희 3년(1904)에 폐지되자 평양에서 몸만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이들이었다. 서울에서 지내던 기생들에게는 대개 기생서방이 있어 유부기라고 불렸는데, ‘다동기생조합’의 기생들은 무부기였다. 고관대작들은 서울출신의 유부기보다는 서도의 무부기를 더 좋아했다.

1914년 기생조합은 일본식 이름을 흉내 내어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성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조합은 대정권번으로 각각 바뀌었고, 한남권번과 경천권번 등 많은 권번이 생기게 되었다. 권번마다 권번화가 정해져있어 모란화 하면 한성권번, 국화 하면 대정권번, 월계화 하면 한남권번, 해당화 하면 경화권번을 뜻하여 꽃이름으로 소속권번을 불렀다. 기생들은 명월관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권번에 모여 있다가 명월관에 온 손님이 기생을 호명하면 즉시 인력거가 권번으로 달려가 호명된 기생을 태워 모셔오는 것이었다. 요릿집이나 개인 집에서 연석이 벌어지는 사랑놀음에 갔다 오면 기생들은 시간에 따라 돈을 받게 되었다. 시간에 따라 계산해 주는 돈도 기생이 자기 손으로 직접 받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기생이 돈을 직접 만진다는 것은 천하고 상스러운 것으로 알아 그들은 일을 마치면 시간을 적은 전표를 받아와 권번에 맡기면 권번에선 돈을 찾아오는 방식으로 기생의 체통을 살렸다. 요릿집과 권번은 이러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기생들과 함께 명월관의 공연문화를 꽃 피운 사람들은 음악을 하는 궁중의 정통 예인들이다. 궁중음악은 왕실의 쇠퇴로 급속하게 붕괴되고 있었다. 갑오경장 직후 772명에 이르렀던 궁중 악사는 1907년에는 305명으로, 1908년에는 270명으로, 1911년에는 81명으로, 1917년에는 57명으로 줄었다. 따라서 궁중 악사들이 밖에서 음악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대다수는 낙향해 농사를 짓거나 장사로 끼니를 이어나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명월관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갔다. 고종이 맛있게 먹었다는 냉면이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멀리 퍼지자 너도나도 한 그릇씩 먹어보자는 통에 주방에는 냉면부를 따로 둘 정도였다. 신선로와 냉면의 명성은 이미 장안에 자자해져서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는 냉면을 아예 명월관냉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명월관 꿩김치인 명월생치침채(明月生雉沈菜), 명월관 동치미도 유명하였다.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 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자 명월관은 자연히 장사도 번창하고 명실공히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드는 일류 사교장이 되었다. 특히 토요회의 회원인 자작 송병준, 후작 박영효, 자작 이재곤, 민병석, 남작 조동윤, 민영찬, 김용진 등과 의친왕 이강공, 평양 감사를 지냈고 후에 이왕직 장관을 지낸 민병석, 윤 황후의 아버지이신 윤태경 부원군, 민충정공의 아우인 민영찬, 조 대비의 조카 되는 조남승, 참판을 지낸 구용산, 이지용 등 합방으로 은사를 입은 당대의 거물급들이 거의 모두 드나들었다. 명월관은 부동의 으뜸자리를 지키며 새로운 향락문화를로 자리잡아 갔다.

명월관에서 식사를 하며 기생과 놀 경우 그 경비는 서울을 하루 종일 관광하는 비용보다 몇 배가 비쌌다. 1934년 경성관광협회에서 나온 <조선요리연회안내서>라는 작은 책에는 음식 한 상(6인분)에 6엔, 9엔, 12엔이라고 적혀 있다. 하루 동안 택시를 빌려 다섯 군데를 돌 경우 4엔을 냈던 당시 물가와 비교하면, 그 값이 얼마나 비쌌는지를 짐작하고 남는다. 여기에 기생의 화대까지 생각하면 명월관과 같은 요릿집을 드나드는 일은 여간 부자가 아니면 안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고관대신들이나 그들의 자제들이 모여들었으나 그 뒤에는 동경유학생, 문인, 언론인, 신흥갑부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은 당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궁중나인이나 궁중 출입 기녀들과 전국 군청, 관아, 도청, 선화당에서 관기로 이름난 요염한 기녀를 만나기 위해 명사나 갑부, 각종 부호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이로 인해 손님의 수가 갈수록 불어나 넘치기 시작했다.

5) 요릿집에서 연회장으로 영역을 확장한 명월관

요릿집에서 수연잔치는 이번이 효시

융융한 화기와 불번 불요한 잔치

지난 십삼일은 자작 조중응씨 모당의 수연이라 전에는 집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빈객과 친척을 청하여 경축하는 뜻을 표하던 터이러니 금년에는 집안은 협착하고 빈객은 많아 명월관 한 채를 치우고 남녀의 친척과 빈객을 청하여 잔치를 벌였는데 열한시 반부터 도자작은 그 모당에 헌수하는 잔을 드린 후 일반 가족과 또는 내외 친척이며 경축하기 위하여 온 객의 헌수도 있은 후 오후 한 점부터 삼층 위에서 식당을 열고 도자작의 인사가 있은 후 남작 한창수씨는 내빈을 대표하여 답사를 진술하였으며 당일의 남자의 내빈은 리완용백 리재곤자 임선준자 리윤용남 한창수남 민영기남 리근호남 리근상남 한상룡 등이오 부인 내빈에는 리완용씨부인 리용직씨부인 도민희씨부인 기타 백여 명이 내빈이 당에 가득 하여 경하하는 뜻을 표하더라. 이날 광교 다동 신창 세조합의 기생 백여 명은 각각 경축하는 소리와 춤을 새로이 연습하여 연석을 번화케 하였으며 조자작은 즐거운 날을 당하여 기꺼운 기운이 얼굴에 나타나며 아래위 층으로 다니며 수고로움도 잊어버리고 손님 접대하기에 분주하며 잔치는 극히 질소하고도 번화하여 성연을 이루었는데 자래로 조선에서 행하여오던 바 집안에서 잔치를 하노라고 여러 사람이 분주하고도 도리어 만족히 손님을 접대치 못하는 폐가 없고 질서 있고 규율 있는 잔치로는 아마 이번의 조자작 모당의 수연으로써 전일 불규칙한 습관을 개량하는 일반의 모범이 되겠더라.

명월관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져 가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명월관은 요릿집으로만이 아닌 각종 연회장으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궁궐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각종 진미들과 궁궐의 예기들과 명기(名技)들이 모여 있던 명월관이 연회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건 어쩌면 예견된 일일지도 모른다. 명월관이 연회장으로 사용되면서 최초로 요릿집에서 수연잔치를 하게 되면서 문화적 공간으로서의 장을 열었다. 이로써 명월관은 연회의 공간이라는 새로운 기능으로 발전하게 된다.

6) 명월관 인사동 분점에서 일어난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사건과 명월관 영업정지

1919년 3월 1일. 11시가 넘자 명월관 인사동 분점으로 한두 명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명월관 인사동 분점은 원래 중종반정 때 공신 구수영의 집이었는데 후일 안동 김씨 김흥근의 소유가 되었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 이씨의 순화궁이 되었다. 그러다가 순화궁이 이전하게 되자 이완용이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 집에는 태화정과 부용당이란 아름다운 정자가 있었고 부용당 앞에는 영조가 친필로 잠용지란 현판을 걸게 한 연못이 있었다. 인현왕후의 생가인 이곳에서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태화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완용이 집주인이 되면서 자꾸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가 조카 한상용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난데없는 소나기가 오며 벼락이 때려 정원에 있는 고목을 분질러버렸다. 또 이유도 없이 항아리 6개가 깨어지기도 했다. 그런 일을 두고 사람들은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에게 하늘이 벌을 준 것이라고 수군댔다. 괴이한 변괴가 잇따르자 이완용은 급기야 이 집을 팔려 내놓았고 황토마루 명월관이 화재로 불타버리자 안순환은 인사동에 명월관 분점을 열게 된 것이다.

이날 안순환은 천도교 손병희 교주가 주최하는 중요한 모임이 내일 점심에 있으니 다른 손님들을 받지 말고 33인분의 점심을 준비하고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평소 명월관의 중요한 손님인 손병희 교주의 예약이라 단순한 종교적인 모임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니 천도교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 집에 들러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안순환은 뭔가 불안했다.

최린을 통해 모임준비를 부탁한 손병희 교주는 황토마루 명월관 시절부터 가끔씩 들러 대정권번의 산홍이를 불러 곁에 두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사람들을 모아 술자리도 베풀어 안순환에게 늘 고마운 손님이었다. 그는 황토마루 명월관이 불이 나서 최근 순화궁터의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변함없이 이곳을 찾아주곤 했다.

당초 독립선언은 고종황제의 국장날인 3월 3일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국장날에 거사를 한다는 것은 붕서한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 피하였고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계 민족대표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결국 3월 1일로 날짜가 잡혔고 서울에 있는 민족대표들이 어제 손병희의 재동 집에 모여 발표장소만 명월관 인사동 분점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날부터 명월관 인사동 분점의 영업은 정지되었다.

기미독립선언 이후 일인들은 한국 사람이 세 사람만 모여 있어도 감시하기 일쑤였다. 요릿집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애국지사들은 요릿집에 잠입하게 되고 명월관은 우국지사들의 연락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명월관 인사동 분점은 1921년 2월에 감리교 단체에 이십만 원에 팔려 그곳에 태화여자관이 설립된다.

明月館支店이 太華女子館으로


경성안에잇는남감리교(南監理敎)에서는 미국에잇는녀자선교부의경영으로 돈이십만원을 내이어 시내명월관 지뎜태화관(太華館)을사서그곳에 태화녀자관을설시하고 예수교전도와 기타녀자교육과 밋녀자사회에 유익인사업을 경영할터인대 사무는삼월초순경부터 개시할터 이라더라

5. 원각사 사장 안순환

1908년 7월 안순환은 요릿집 명월관과 함께 예술 공연 단체인 원각사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원각사의 전신은 1902년 8월에 세워진 협률사이다. 협률사는 기녀들을 뽑아 연희를 교습시켰다. 9월 17일로 예정된 칭경예식이 콜레라의 만연과 영친왕의 두진(痘疹)으로 연기되자 그 동안 가무를 연습했던 사람들은 협률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기녀 광대등을 모집하여 희대에서 가무의 공연과 활동사진 상영 등을 계속하였다. 그곳에서는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라는 이름으로 기녀들의 춤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 경서도 명창들의 소리 재인들의 무동춤 등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연희와 새로운 판소리형식인 대화 창이 연희되었다. 그러자 조정대신들이 협률사가 나라의 풍속을 망치고 국민들의 심신을 흐리게 한다고 고종에게 건의함으로써, 1906년 4월말 경 폐지되고 말았다.

1908년 1월 하순, 협률사 해체 이후 이 건물을 사용하던 관인구락부가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그해 7월 안순환과 이인직이 이 건물에 그 동안 준비해온 원각사를 개설했다. 그곳에서는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華容道)》 등 판소리를 상연했는데 그 이전과는 다른 형식의 판소리로 장안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공연된 소리꾼 하나가 부르던 전통적인 판소리와는 다른 대화창이었다. 이는 말 그대로 창을 대화형식으로 주고받는 창극의 초기형태이다. 이는 안순환과 이인직의 생각에 합류한 강용환과 이동백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동백은 1866년 2월 3일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에서 출생하여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살다가 소리하는 이들을 따라다니며,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중고제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김성옥의 아들인 김정근 명창의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하다가, 순창 출신으로 당대에 손꼽히는 동편제 명창인 김세종 문하로 옮겨서 몇 년간 학습을 하고 서편제의 시조로 알려진 박유전의 제자인 이날치(1820-1892)에게 공부를 하였다. 여러 스승을 거치며 소리를 다듬은 그는 그 중에서도 중고제인 김정근의 소리를 근본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고제 명창이라 부른다. 서른일곱 살 경인 1902년에 서울에 상경 선배 명창 김창환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여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고종은 그에게 당상관인 문관으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제수 할 정도로 아꼈다.

백포장의 배경막과 조명으로는 천장의 백전구가 고작이었지만 조명과 무대를 꾸몄고 〈춘향전〉의 경우 사실적인 연기 없이 순전히 창으로만 불렀지만 혼자서 부르던 판소리를 역할을 나누어 시도했으며 몇 시간에 걸쳐야하는 완창이 아니라 재미있는 부분을 추려내어 공연하였다. 그리하여 남녀 역을 남녀명창이 맡고 각각 배역에 맞는 의상을 갖춘 것 등은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새로운 시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사실적 연기가 강조되어 보는 재미를 보탰으며 공연 소도구도 갖추어지기 시작하였으며, 무대장치도 점점 나아져갔다. 이 같은 형식은 판소리에서 너름새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과 청나라사람들을 따라 들어온 창희(唱戱)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서울에는 청계천2가 청국인 거리에 창희를 전문적으로 하는 청국관이 설립되어 서울에 거주하는 청나라 사람들이 이를 즐겼는데 당대의 판소리명창들은 이것을 통해 우리와 다른 다창(多唱) 또는 분창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강용환, 이동백 이들은 창희의 고정관객이었다. 그들은 공연 절목이 바뀔 때마다. 어김이 없이 그곳을 찾아가 경극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연구했다. 또한 인천에 일찍이 개설된 1897년 인천좌(仁川座), 1905년 가무기좌(歌舞技座)등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문을 연 공연장의 공연 또한 새로운 자극이었다. 인천 가무기좌에선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신구극과 마술 공연을 주로 올렸다. 이들은 공연장 객석을 일본 전통 마루형식인 다다미로 꾸며 놓고 우물 정(井)자 형태로 막은 뒤 안내와 시중을 드는 음식장사가 궤짝을 들고 다다미 사이를 다니면서 먹을 것을 파는 전형적인 일본식극장이었다. 1985년 문을 연 인천 협률사도 원각사의 창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천협률사는 원각사보다 14년이나 빨리 개관된 국내 최초의 공연장이었다. 협률사를 만든 이는 인천갑부로인 부산출신의 정치국(丁致國)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재산을 모아 용동에 벽돌집을 지어 협률사 문을 열고 창극이나 줄타기와 땅재주, 승무 등 공연을 열었던 것이다

이인직은 이동백과 안순환을 앞세워 전속단체를 재구성하고, 배우는 김창환 등 명창 40명과 가기(歌妓) 24명을 두었다. 당대 최고의 국창 이동백이 단장이었고, 안순환이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원각사는 협률사 때와 마찬가지로 판소리 민속무용 등 재래의 연희를 주로 공연하였으며, 판소리를 분창하여 만든 창극을 올리는 한편 1908년 11월 15일 자신의 작품은 은세계를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 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인직의 신연극 은세계는 그 작품의 끝에 의병과 대립하는 가운데 고종의 폐위의 당연함을 주장하는 이야기를 붙여 넣어 보는 사람들에게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게 된다.
이인직 신연극으로 올린 공연 은세계가 실패로 돌아가자 안순환과 이인직이 의욕적으로 창설한 원각사는 휴연(休演)에 들어갔다. 은세계의 흥행실패로 휴관 상태에 들어간 원각사의 경영 부실로 조선상업은행장 김시현이 원각사의 운영권을 가져갔다. 안순환은 이인직과 더불어 원각사 일에서 손을 뗐다.

6. 식도원 사상 안순환
1) 1919년 명월관 실화 사건과 상호 판매

1919년 안순환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기미년 만세운동의 주요인물들이 명월관의 분점이었던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본점이었던 황토마루 명월관이 화재로 소실된 것이다.
1919년 5월 23일 오전 6시경 황토마루 명월관의 별채 집고각(集古閣) 화재로 황토현 네거리에 있었던 명월관이 불타버렸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이 낮은 기와집뿐이었기 때문에 명월관은 우뚝 솟아 보였는데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얽히고 설킨 갖가지 사연과 일화를 남긴 채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장안의 술꾼들은 놀이터를 잃었고 기생들은 생업터전을 상실했지만 술집이 명월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화제는 화인을 놓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친일정객들이 나라 팔아 받은 돈으로 거들먹거리던 곳이었기 때문에 시원하다고 말하는 노인네들이 있는가하면 기생에게 욕본 고관이 분풀이로 불을 질렀다는 얘기. 가산을 탕진한 아들 때문에 화가 상투 끝까지 치민 시골양반이 시킨 일이라는 등 자기들 나름대로 그럴싸한 추측을 했지만 정확한 화인은 가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명월관이 불타기 하루 전인 1919년 5월 22일에 화재보험에 가입되었다는 점이다. 보험료는 단 일백원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보험에 가입한 그 다음날 명월관에서 화재가 방생했고 보험료로 이만원을 받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200배에 해당하는 보험료를 받게 된 것이 기막힌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큰 액수이므로 세간에서 고의적 방화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불이 난 명월관은 같은 해 흥산주식회사(興産株式會社)에 넘어갔고, 이것을 다시 이종구가 샀다. 이종구는 역관 출신의 중인 이규진의 자제였다. 당시 중인들은 개항이 되자 일본, 미국 영국 청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외국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지고 이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 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으며 발전된 문화를 가장 먼저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황토마루 명월관이 불타버리자 안순환은 당시 명월관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던 장춘관 주인 이종구에게 명월관 상호를 판매하고 자신은 정원익(鄭元益)을 물주로 내세워 지금의 조흥은행 본점 자리에 ‘식도원(食道園)’이란 요릿집을 다시 차렸다.

명월관 옥호를 확보한 이종구는 장춘관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지금 있는 건물로는 무교동의 지점이 있긴 하여도 밀려오는 손님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2층짜리 양옥으로, 외벽은 타일로 장식하고 건물 현관 앞에는 큰 마당을 만들었다. 또한 별채 주방을 건물 안으로 수용하였다. 장춘관에서 옥호를 바꾼 새로운 명월관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2) 식도원의 설립과 성공

명월관 장춘관의 성공은 줄지어 새로운 조선요릿집의 개업을 불러왔다. 봉춘관, 세심관, 영흥관, 혜천관 등 다동과 인사동을 중심으로 군소 요릿집들이 하나둘 문을 열었고 남산과 진고개 주변의 일본식요정인 정문루, 파주정, 송엽정, 매월정, 한양정 등과 용산 부근의 팔경원, 화가의 가, 옥급강, 북해루가 생기면서 서울에는 요릿집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명월관과 식도원이었다.

남대문통(南大門通) 일정목의 전차 길에서 바로 드려다 보이는 곳에 금색 찬연하게 간판을 놉히 부친 크다란 반양제 집 한채가 잇스니 이것이 식도원(食道園)이라. 명월관과 식도원은 반도에서 서로 손곱는 큰 료리점들이다. 료리점이라하면 이밧게도 國一館도 잇고 松竹園도 잇고 또 太西館도 잇지만은 력사가 무척 긴-점과 투자한 자본이 만헛든 점과 료리를 잘 만드는 점에 잇서 서울서는 명월관과 식도원을 그중 낫게 친다. 이제 이 두 료리점 진영을 배부하여 보리라.

明月館―자본은 30만원, 1년 賣上20만원
명월관은 삼십만원이나 드려서 경영하고 잇는 개인의 영업긔관인데 음식점 영업에 30여만원을 던젓다면 놀날 일이라 아니 할 수 업다. 현재 본점이 드러 안저잇는 토지의 평수가 1,200여평으로 땅갑을 한평에 백원씩 치면 그것만 12만원이요 만일 50원씩 치드라도 6만원에 달하며 양식과 조선식으로 지은 건물 총평수가 6백여평에 달하는 터이니 어지간이 큰집인 것을 알 수 잇겟다. 이밧게 음식 만드는 긔구와 손님방에 가처논 비단방석과 수노은 평풍과 장고 가야금, 거문고. 젓재, 피리, 등속까지 모다 치면 30만원이란 말도 괴이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러케 크다라케 버리고 안즌 이 료리점에서는 그러면 얼마나 되는 영업을 하고 잇는가 즉 얼마나 음식을 팔고 잇는가. 최근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음식점 영업이란 세월이 조흔 때와 그른 때가 잇서서 똑갓지 아니하나 평균 일년에 20만원 한달잡고 1만5,6천원 하로잡고 5백원씩은 팔닌다고 한다,(이것은 무교졍 부근에 잇” 지점 것 까지 합한 계산인데 지점건물은 자긔소유자가 아니라 매월 5백원씩 주고 엇은 셋집이다.) 그리고 명월관 본지점을 합하야 사용하고 잇는 사람수가 얼마나 되느냐 하면 120여명을 헤인다, 물론 이 속에는 손님을 안내하는 뽀-이와 음식을 만드는 쿡과 인력거 차부까지 다 들엇다.
명월관은 력사가 꽤 깁다. 20여년전에 안순환(安淳煥)씨가 경영하든 것을 긔미년 이듬해에 전 긔 안씨로부터 흥산주식회사(興産株式會社)에서 매수하엿다가 다시 현재 경영자인 리종구(李鍾九)씨가 삼만원을 주고 사드려(긔구와 상호「器具와 商號」만이고 가옥은 별물이다.) 이래 열두해 동안을 경영하여 내려오는데 음식은 고유한 조선료리에다가 서양료리식을 가미하여 한다. 이럭저럭 약 40만원의 큰돈을 명월관을 중심삼고 운전하고 잇는 리종구씨는 엇더한 사람인가 하면 원래 잡화상과 주식취인소(株式取引所)를 하엿섯고 녯날 구한국시대에는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를 마추엇다, 원적이 서울인데 그 아버지는 륙군정위(陸軍正尉)요 군관학교 교장(軍官學敎 敎長)을 지낸 리규진(李圭振)씨로 명문출이엇슴을 알 수 잇겟다.

명월관은 장차 엇던 인물을 더욱 배치하고 엇더한 방법으로 손님에게 써-비스하야 료리점계에 패권을 잡으랴는고 미상불 흥미잇는 일이다.

食道園―경영자는 安淳煥씨, 자금20만원
그러면 한편 식도원(食道園)은 엇더한가 식도원은 실로 조선료리계의 원조라할 유명한 안순환(安淳煥)씨가 출자주의 유력한 일인이요 따로 정웍익(鄭元益)씨가 실제 경영하는 중이라 한다.
아마 료리방면에 다소라도 소양이 잇는 이 처노코 안순환씨를 모르는 이가 드무리라 녯날 구한국 때에는 상감님이 잡수시는 음식을 짓는 국수(國手)엿다, 그때 궁내부(宮內府)에는 조선팔도에서 음식 잘 짓는 그 방면의 재인들이 만히 모듸어 잇섯는데 그 중에서도 안순환씨는 특출하여 나종에 음식짓는 곳의 무슨 벼슬까지 하엿다, 그러다가 합병통에 세월이 글너지자 혼자 독립한 영업을 버릴 작정으로 궁내부를 나와서 처음 황토마루 부근에 집을 어더 가지고 조고마한 료리점―조선식 료리점으론 시조라 할만하다―를 경영하다가 그것이 불이 낫다, (불난집터를 김성수씨가 사가지고 거기다가 집을 지엇스니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보는 광화문통 네거리의 동아일보사다) 그러자 다시 명월관을 경영하다가 10여년 전에 남대문통에 식도원을 건설하고 지금 경영하는 중이다.

식도원도 투하자본(投下資本)이 수십만원을 넘으며 일년 매상고가 명월관보다 못하지 안타고 전한다, 헌재의 건물은 백여간의 큰집이요 그 토지도 수백평이라 시가(時價)로 처도 이 토지 급 건물의 가격이 거액을 산할 것 갓다.
식도원의 사용인원은 50여명을 너머 헤인다든가 드른 즉 안순환씨는 풍류객으로 갓을 쓰고 팔도 유생(儒生)들과 더부러 각금 시회(詩會)도 열고 승지강산을 찻기도 하여 풍류(風流)를 아는 50여세의 중로인이라 하는데 년전에는 안씨 족보를 위하여 수만원을 던지엇다고 까지 전한다.
식도원의 자랑은 음식과 건물에도 잇겟지만 내외국 손님들이 만히 와주는데 특색이 잇겟다, 아마 외국서 온 손님들로 조선정조(朝鮮情調)를 맛보자고 식도원을 찻지안는 손님이 드무리라, 주단으로 까라노흔 방석우에 매란국죽을 그린 평풍밋헤서 금란일다, 옥화로다, 하는 긔생의 장고소리를 드러 가면서 도연히 꿈속가튼 몃시간을 보내게 한다 함이 식도원의 특색이리라.
동경에는 관광국(觀光局)까지 잇서 돈만흔 나라 부자들을 끌기에 분주한데 조선서 다소라도 외국인의 주머니를 털게 할 수 잇는 긔관이라면 이러한 료리점 뿐이 아닐가.

어느쪽이 勝할가

명월관과 식도원은 어느 것이 칭패(稱覇)할가 력사와 음식 만드는 우열과 손님에게 써-비스하는 태도와 운전자금과 건물과 경영하는 사람의 수완에 딸려 이것은 결정될 판인데 아무튼 수삼년만 더 두고보면 알어질 것 갓다.

식도원의 규모는 명월관에 비하면 작았다. 명월관 본점은 1,200여 평이고 양식과 조선식으로 지은 건물 총평수가 6백여 평이나 되는데다가 종업원의 수가 120여 명 정도나 되는 반면 식도원은 종업원이 50명 정도로 절반쯤이었다. 그러나 명월관에 비해 작지만 식도원 역시 백여 간의 방을 가진 큰집이고 땅도 육백 평은 넘어 보였다.

화려하고 기생들의 향긋한 분 냄새로 가득했던 명월관과는 달리 식도원의 특실은 양반가의 사랑치장으로 꾸몄다. 마치 산수의 형상을 한 무늬의 먹감나무 문갑이 둘러있고 아랫목에 보료를 깔고 장침(長枕)과 안석(安席)을 두어 주빈의 자리를 만들었다. 혹시 모를 시회(詩會)를 위해선지 연상(硯床)과 필통(筆筒)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벽에는 날아갈 듯 한 초서(草書) 대련 족자가 걸려 있었다.

또 안순환의 식도원은 명월관과는 달리 일식을 특미로 내면서 총독부 관리들의 입맛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명월관은 조선의 정통 음식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조선궁중의 요리들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궁중의 악사들과 기녀들의 기예를 볼 수 있던 곳이라면 식도원은 변해가는 고객과 세대에 맞춘 개방적인 요리집이었다. 규모는 명월관에 비해 작았지만, 명월관 못지 않은 크고 웅장한 집을 요리점으로 사용하였다.

명월관과는 달리 식도원의 고객 대부분은 은행 회사 등 실업가와 관리계급의 사람이 많은 까닭에 경제공황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식도원의 주요 고객은 서울사람들이었고 외국인이 해마다 늘어 30%를 차지했다. 식도원을 찾아오는 외국인 중에는 일본인이 대다수였다. 교통이 점점 편리해짐으로 외국인들이 조선에 많이 찾아오며, 조선 사람들의 경제력이 줄어가고 외국인의 경쟁력이 늘어가기 때문에 외국인 고객이 증가하게 되었다.

30년대에 들어서자 명월관과 식도원의 고객들이 변하게 된다. 궁중에서 직접 연회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고관대작들과 달리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의 풍류객들에게는 식도원의 가볍고 깔끔한 요리가 명월관의 정격요리보다 입에 닿았는지 모른다. 게다가 식도원을 들락이는 일본인들의 식성을 감안한 짠맛보다는 단맛이 강조되고 화학조미료 아지나모도의 감칠맛이 보태지며 명월관의 정격요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황토마루 명월관 당시의 고관 대작들의 놀이터로부터 시작하여 친일파들이 거들먹거리며 돈 쓰는 곳으로, 다시 나라를 빼앗기고 출세 길이 막힌 양반 집 자손들이 울분을 달래는 장소로, 돈보다도 신문화에 매력을 느낀 기생과 유학생 언론인 문인과의 로맨스가 엮어지는 은밀한 장소로, 총독부 관리들의 접대장소로 변해 감에 따라 손님들도 많이 달라졌다.
그들은 고관대작의 젊은 자제들이거나 일본에서 유학을 끝내고 온 유학파관료 또는 새롭게 문을 연 언론사의 기자들과 문학을 문인들이나 신학문을 공부한 지식인들로, 낡은 시대의 질서를 벗어나 자유스러움을 탐닉하려하는 이상주의자이며 일본을 통해 서구와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이었다. 이전에 명월관을 드나들던 정통 사대부들과 달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요릿집에서 만나는 일패기생들도 신여성에 못지 않은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반가의 아낙들이 유교적 질서 속에서 순응하며 정통적 사고와 윤리적 덕목을 지키는 한국적인 여인들이라면 그들은 이 같은 신분의 속박을 벗어나 있는 여인들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요릿집의 문화는 이들 중심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요리의 중심이고 마지막 보루라는 명예가 과연 어느 집인가를 가려볼 때가 된 것이다.

7. 성공한 사업가 안순환

당시 이왕직 장관은 일본인 시노타 치사구가 맡고 있었다 .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 이왕직장관이었던 이재극의 뒤를 이어 이왕직 장관이 일본인으로 임명 된 것이었다 . 이왕직 . 이 기구는 1910년 1월에 황실령으로 공포된 이왕직관제가 마련되어 생겨난 기구이다. 이왕직은 일본 관내대신의 관리에 속하는 관서로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존속되었는데 이왕직사무소는 1911년 2월 1일에 개청되었다 . 그곳에는 서무 회계 장시(掌侍) 장사(掌祀) 장원(掌苑)의 5계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합병 이후 순종은 왕실 인사와 예산 편성 권한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인 이왕직(李王職) 직원임명이나 상벌까지도 모두 일본 궁내부 대신 소관이었으며,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았다. 또 일본 황실로부터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조선 왕실에 관한 일체의 사항은 이왕직을 통해 일본 궁내부에 보고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일본 천황의 통솔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안순환의 또 다른 일면은 서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호는 죽농으로 난죽을 잘 그렸다. 그는 해강 김규진과 함께 명찰을 돌아다니면서 글과 그림의 편액을 많이 남겼다.

1930년 안순환은 시흥군(始興君)에 선조인 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창건하고, 사재를 털어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단군묘(檀君廟)를 세운다. 이후로 안순환은 유학자의 삶을 추구한다. 그는 유교의 종교화를 통해 유교부흥을 시도한다. 그는 조선 유교회를 창립하고 능력을 갖춘 유학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운영하였다. 안순환은 강습생을 위해 사재를 아낌없이 투자하여, 전국에서 선발된 유생은 무료로 교육을 받게 하였다. 이렇듯 안순환의 만년은 유학자와 교육자의 삶을 추구하다 임오년(1942년) 8월 20일에 72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