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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은 단순한 요릿집이 아니었다.

내용요약 - 요리 속에서 국사를 논하고 풍류에 젖다.

한국 최초의 조선요릿집 명월관

# 명월관 옛 터
# 대한제국 황실, 궁중요리 장소
# 마지막 황제, 순종
# 매일신보 기사, 재현장면

한국 최초의 조선요릿집이라 알려진 명월관은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인 옛 황토현 네거리, 동아일보 본사 자리에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대한제국 때 황실의 일을 맡아보던 궁내부의 주임관(奏任官)을 지낸 안순환이었다. 그는 궁중내 음식 잔치와 그 기구를 보관하는 일을 맡아하였던 전선사장(典膳司長)이란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랬던 안순환이 서울에서 제일의 요리점 주인이 된 것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에 대해 일인들의 간섭이 너무 심한 데 분통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1909년 요리점 명월관을 개점하게 된다.

또한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명월관의 규모였다.<매일신보>는 “최초의 요리점. 내지에서도 다 안다. 조선에서 제법 요리점이라고 할 만한 신식 요리점”이라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기사를 보면, 1906년 확장공사를 했고 불탔을 당시엔 삼층 건물이었다. 삼층 모두 합쳐 연건평 300평에 스무 개의 별실이 있었다. 1919년 총독부 1년 예산이 약 7700만원이었고 화재 손해액이 6만원 이상이니, 지금 국가 예산과 비교하면 일개 음식점 자산가치가 웬만한 중소기업 이상인 셈이다.

왕의 요리, 세상을 만나다

# 궁중요리(이미지 위주)
# 조선요리, 대령 숙수, 상궁들의 요리 모습
# (또는 요리 만드는 모습 재연)
# 교자상 위에 화려하게 차려진 요리

왕이 살아 있던 시절, 왕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안순환의 명월관은 바로 그 왕의 요리를 일반인들에게 제공하였다. 명월관을 만든 안순환은 숙수(궁중 요리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순환은 단순한 요리사가 아니었다. <일성록> 1908년 기록을 보면, 안순환은 전선사(典膳司) 장선(掌膳)에 임명된다. 전선사는 궁중의 음식을 책임지는 기관으로 장선은 총책임자다. “전선사 장선 안순환을 내부대신 송병준의 일본 파견 시 수행할 것을 명하다”라는<고종시대사> 1909년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때 내각총리대신이 이완용이다. 그런 직책의 안순환이 궁에서 나와 차린 것이 명월관이며 명월관은 왕의 요리를 세상에 나오게 하였다. 안순환은 그가 명월관에서 선보였던 조선요리를 이렇게 말했다.

"조선음식은 첫째, 제철에 나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 많고. 둘째, 양념으로 인해 음식 맛이 좋고. 셋째, 음식배열의 규칙이 정연하고. 넷째, 여러 가지 음식을 한상에 모아 놓아서 손님을 접대하는데 좋다"고 했다.
-1928년 5월 1일자 <별건곤> 식도원주(食道園主)에 '조선요리의 특색'중에서

친일파 이완용의 별장에서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을 하다

# 기미독립선언 관련 화면
# 손병희 29인의 애국지사(또는 33인 자료)
# 태화관을 거처간 역사속 인물 관련 자료
# 독립선언문
# 명월관, 이완용

명월관을 떼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일화 중 하나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이다. 1919년 2월 28일 저녁, 민족대표들이 손병희의 집에 모여 최후의 회합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독립선언 장소는 탑골공원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모임에서 이곳 태화관(명월관 분점)으로 장소가 바뀌었던 것이다.

태화관은 근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여 있다. 이 집은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왕자인 영부대군(永膚大君)의 딸네 집으로, 영부대군이 당시 영의정 구치관(具致寬)의 아들을 사위로 맞으면서 새로 지어준 집이었다. 그 후 인조가 왕자시절 이곳에서 지냈으며, 철종때 안동 김씨 세도가 김흥근(金興根)이 살았던 까닭에 이 집은 ‘이문(里門) 안 대신댁’으로 불려왔다. 김흥근은 이 집 마당에 부용당(芙蓉堂)이란 연못을 파고 태화정(太華亭)이란 정자를 짓는 등 집을 잘 가꾸었다. ‘태화’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의 빈인 경빈(慶嬪) 김씨가 살았기 때문에 순화궁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경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 집을 탐낸 이완용의 형 이윤용(李允用)이 광무(고종)황제의 윤허를 받아 이 집을 차지했다. 1910년 일본이 국권을 강탈하고 그 이듬해인 1911년, 이윤용의 동생 이완용이 이 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종로구 옥인동에 양옥집을 크게 지어 1913년 그곳으로 옮겨갔고, 순화궁은 비워 두고 있었다.
명월관이 화재로 불타면서 안순환이 비어있는 이 집을 명월관의 지점으로 삼게 되었고, 처음에는 태화관(太華館)이라 했던 것을 후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고쳐 쓰게 된 것이다. .

그런 태화관이 독립선언의 장소가 된 것은 뜨거웠던 당시 청년학생들의 열기탓에 큰 사고가 일어날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도 있었고 당시 거사가 있을 장소인 탑골공원과 인접했던 이유도 한몫했다. 태화관(명월관)의 단골이었던 의암 손병희선생의 안순환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장소를 준비시킨 것은 어쩌면 이 집이 매국노 이완용 소유의 집이라는 점에서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일당에 대한 복수의 뜻도 담겨 있었을지 모른다.

개량 교자상에 출장 뷔페까지 선보인 명월관

# 만세보 명월관 광고
# 당시 요릿집 기사들
# 당시 명월관 교자상에 오른 요리들
# 만드는 과정 일부 삽입
# 독상형식의 교자상과 개량 교자상 상차림

명월관에서는 조선 음식을 약간 개량한 교자상을 주 메뉴로 판매했는데 이는 독상형식이었던 것을 안순환이 명월관을 열면서 여려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형태로 개량한 것이라 한다. 당시 1906년 7월 14일자 <만세보(萬歲報)>라는 신문에 ‘명월관 광고’라는 내용에서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저희 관(館)은 개점 이후로 고객의 사랑을 받아 날로 번창하오니 감사함을 무엇이라 말할 길이 없습니다. 특히 날씨가 날로 더워지는 때를 맞이하여 좌석을 매우 청결하게 정리하고 위생을 갖추었으며, 국내외의 각종 술과 엄선한 국내외 각종 요리를 새롭게 준비하고 주야로 손님을 맞으려 합니다.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외(市內外)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어 음식을 배달하기도 하는데, 진찬합(眞饌盒)과 건찬합(乾饌盒), 그리고 교자음식(校子飮食)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마련해 두었습니다.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면 가깝고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후 생략)”

이것으로 보아 단체 회식은 물론이고 회갑과 혼례 연회를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말 그대로 조선 음식을 판매하는 첫 번째 전문 음식점이 바로 명월관이었다. 더욱이 교자상을 배달까지 했다니, 지금의 한정식 출장 뷔페의 역사가 여기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교자상요리의 시작이 바로 이곳 명월관인 것이다. 교자상 차림에는 술과 안주를 주로하는 주안상 형식의 건교자(乾交子), 밥상 형식의 식교자(食交子), 주안상과 밥상 형식의 얼교자(얼치기상) 등 3가지가 있다.

명월관에서는 겸상이 없는 궁중 의례를 따라 손님 일인당 본상과 곁상으로 은그릇에 탕조치(장조치, 젓국조치. 조치는 찌개를 가리키는 궁중용어), 편육 등 12첩상과 육회 등의 별찬을 냈다. 훗날 외국 요리도 제공했다. 궁중 나인 출신이 약주·소주를 만들었고 나중엔 맥주와 일본 정종도 팔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어 일자리를 잃은 기생들은 기생조합을 만들어 명월관에 최고의 ‘선수’들을 보냈다. 명월관은 곧 전 조선에 널리 알려졌다.

식도락(食道樂)에 풍류(風流)가 빠질까

# 1900년대 초 기생들
# 평양기생학교
# 명월관의 기생들의 모습
# 명월관애 드나들던 문인, 정치관련 인사들의 자료 인서트

1907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일패 기생들이 관청에서 풀려 나왔다. 결국 이들은 사설 권번(券番)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명월관, 식도원, 국일관, 장춘원, 고려관, 태서관과 같은 요릿집을 드나들며 손님들의 접대부 노릇을 했다.

조선 말기의 기생은 세 종류로 나뉜다. 그중 가장 고급에 속했던 일패(一牌) 기생은 관에 소속된 관기를 일컬었다. 서울에서는 내의원에 소속된 여자들이 주로 일패 기생의 역할을 했다. 이들은 양반관료들의 각종 연회에 불려가서 악기와 춤, 그리고 노래와 시문(詩文)으로 주연(酒宴)의 분위기를 돋웠다.

이렇듯 장안 제일의 요리점 명월관에는 많은 기생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했던 궁중기생과 인물과 성품,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러니 자연히 명월관은 자연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드는 유명한 사교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땅을 팔아서라도 명월관 기생 노래를 들으며 취해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런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기생의 접대를 받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명월관에서 식사를 하며 기생과 놀 경우 그 경비는 서울을 하루 종일 관광하는 비용보다 몇 배가 비쌌다. 1934년 경성관광협회에서 나온 <조선요리연회안내서>라는 작은 책에는 음식 한 상(6인분)에 6엔, 9엔, 12엔이라고 적혀 있다. 하루 동안 택시를 빌려 다섯 군데를 돌 경우 4엔을 냈던 당시 물가와 비교하면, 그 값이 얼마나 비쌌는지를 짐작하고 남는다. 여기에 기생의 화대까지 보탤 양이면 명월관과 같은 요릿집을 드나드는 일은 여간 부자가 아니면 안 되었다.

초기에는 한말 고위 관직에 있었던 인사들과 친일파 거물들이 드나들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그들의 자제들도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그후에는 동경유학생, 문인, 언론인, 신흥 부호들도 자주 드나들었으며, 외국에서 잠입한 애국지사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밀담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미식은 사교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19세기 초 로스차일드 가문의 응접실에서 빅토르 위고, 발자크가 앙토냉 카렘이 만든 음식을 먹었고, 하인리히 하이네는 시를 읊었다. 명월관에도 고관대작·문인·언론인 등 당대의 엘리트들이 모여들었다. 송병준 등 거물 정치인은 물론, 최남선·이광수·김기진·백석 등 문인들이 명월관에서 술을 들이켜며 새벽까지 이곳 명월관에서 고담준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