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한글날 편

내용요약 - 과연, 주시경의 제자.

1926년 11월 4일 아침. 식도원(사진1)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9시가 되자 백여명의 사람들이, 곧 수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 상석이라면 상석인 곳에 앉은 김정진과 장지영선생은 사람들 수가 늘자 흐뭇한 표정이다. 김정진은 조선어학회의 전신 한글학회 회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그가 입을 연다.

<한글날 기념식의 장지영 선생> <한글날 기념식의 장지영 선생>

“일본어가 만연하는 이 판에 그래도 한글을 지키겠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그는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말을 곁에 있던 신명균이 이어갔다.

“네, 기대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되어 저도 놀랍습니다.”

장지영도 거들고 싶었으나 신명균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는 긴장해있던 차였다.

“알다시피 이런 회합은 항상 일본 놈들의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잖소. 다소 걱정스럽습니다.”

김정진과 신명균도 걱정스러운 듯, 손에 쥔 원고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 날이 바로 한글 반포 480돌, 즉 8회갑 기념식 연 날이다. 사람들이 다 차자 장지영이 일어나 개회를 알린다.

“우리 민족의 얼과 숨이 깃든 한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반포한 지 정확히 480돌을 맞았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회갑을 7번이나 지내고 이제 8회갑의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글이 더욱 장수하여 후손에게 널리 그리고 자유롭게 쓰일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일제의 탄압에서 우리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자리하신 모든 분이 한글 반포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큰 박수와 함성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곧 김정진 선생의 인사말이 시작된다. 주시경선생의 뒤를 이어 누구보다 한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는 한글의 반포를 축하할 뿐 아니라 우리 후손에게 전해줄 방법적인 측면을 모색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오늘의 회합이 끝난 후 있을 조선어사전 편찬에 대한 논의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김정진의 연설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 저 끝 자리에서부터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으나 청각이 예민한 장지영이 제일 먼저 그 소리를 알아챘다. 어떤 청년이 조용히 경청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무언가 나누어주는 것이 보였다. 장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소리 나는 곳에 최현배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교토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해 지금은 연희 전문학교 조교수로 부임한지 몇 년 이 되어 간다. 그는 얼마 전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가입했기 때문이 장지영이나 다른 오래간 활동한 선배에게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한글을 사사 받았기 때문에 조선어학회에 꼭 필요한 인재 중 하나이다.
그런 그가 김 선생의 말씀 중에 저 무엇하는 짓인가 싶어 장지영이 사람을 시켜 그를 앉히라 일렀다. 어린 뽀이가 그에게 가 말을 전했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던 것을 계속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조금씩 동요하며 귓속말을 하는 이도 있고 혼자 피식 웃는 사람도 있었다. 장지영은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김 선생의 연설이 끝나고 몇 가지 안건을 논의한 후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음식이 나오자 장지영은 당장 최현배를 불렀다.

“장선생님, 부르셨습니까?”
“자네 그게 무슨 짓인가? 김선생님 말씀 중에... 도대체 무얼 한 게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무슨 종이쪽지를 돌리지 않았는가.”
“김선생님 말씀을 방해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사죄드립니다, 선생님.”

곁에 있던 김정진 선생은 음식을 들며 웃어 보였다.

“이리 내보게. 이리 내보래도!”

장지영은 집요하게 최현배를 다그쳤다.

최현배가 고개를 떨구며 내보인 종이에는 일본어가 적혀있었다. 그 글의 제목은 ‘일선동조’. 그것은 조선 지배를 위해 일본이 조작한 역사관인 식민사관 중 하나이다. 즉 일본의 조선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글이었다.

장지영은 주시경의 제자 최현배가, 그것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어를 연구한다는 그가 이런 글을 왜 사람들에게 돌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오늘처럼 뜻 깊은 날, 이 무슨 해괴 망칙한 일인가.

“자네, 대체 이게 ...당장 나가게.”
“선생님, 이것은 제가...”
“듣고 싶지 않아. 당장 나가.”

장지영은 생각했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그가 배워온 것은 철학이 아닌 식민사관이 틀림없다고. 그는 변절한 친일자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최현배는 장지영에게 무언가 변명하려 팔을 잡자 장지영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 식도원 대문이 벌컥 열리고 갑자기 일본 경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놀라 바닥에 엎드린다. 도망가는 아이들과 청년 몇을 잡아 꿇어 앉히는 일본 순사. 그는 장지영에게 걸어온다.

“장선생, 왜 이리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겁니까?” “그건... 그게...”

그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듯 손에 잡히는 청년 하나를 몸수색 시키고 포박했다.

“무슨 일이라도 벌이고 있는 겁니까, 장선생?”

장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사이 경찰들이 사람들을 묶기 시작했다.

“치안유지법에 대해 못 들어보았던 모양이오.”

치안유지법은 작년에 제정된 법으로 조선인을 탄압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군중을 모으거나 선동하는 것이 내란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장선생을 묶어라.”

이 때 최현배가 벌떡 일어나 가슴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를 제압하려는 경찰의 손을 뿌리치고 최현배는 그 종이를 순사를 향해 던졌다. 순사는 땅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최현배 주변부터 저 앞마당 끝까지 모인 사람들 모두 가슴팍이건 신발 밑이건 종이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김선생의 연설 중, 최현배가 급히 나누어준 그 종이였다.

<일본 순사에게 종이를 던진 최현배와 그것을 보는 일본 순사> <일본 순사에게 종이를 던진 최현배와 그것을 보는 일본 순사>

“일, 선, 동, 조...?”

순사는 아주 못마땅한 듯, 입을 실룩거렸다. 그리고는 종이를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

“이번엔 돌아간다만, 앞으론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속임수 따위가 오래 가지 못 할 게니까.”

그는 수십명의 경찰과 대문을 빠져나갔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지영은 최현배를 바라보았다. 최현배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그리고 그의 마음을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운 듯, 그는 최현배를 마냥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그의 체면에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았던지, 그는 최현배의 어깨를 토닥였고, 부끄러운 미소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