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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 편

내용요약 - 탈출(脫出)

1919년 조선총독부, 아침 점호가 끝났지만 조선총독부 고위 경찰 간부인 지바의 일장 훈시는 10시가 되어가는 데도 끝이 나지 않는다. 조선 귀족들의 감시를 맡고 있는 사복 경찰관들에게 최근 귀족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며 했던 말을 또 반복,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 때 제3부 경위반 주임이 다가와 귓속말을 전한다.

“어젯밤 의친왕 이강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

지바는 목소리를 높아졌지만 곧바로 놀란 기색을 숨기고 경찰들을 해산시킨다.

“자세히 보고하라.”
“어제 밤 10시경 이강의 저택 후문에서 키 큰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해 뒤따랐는데 명월관 지점에서 놓쳤다고 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지바는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누군가에게 다시 자세한 보고를 받고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는지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제 밤 10시의 실제 상황은 지바가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이강의 저택, 사동궁 창에 누군가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커튼을 걷어 젖히고 마치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라도 하듯 큰 창 중간에 서서는 좌우로 걸어보기도 하고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떼며 초조하게 서 있다. 그는 의친왕 이강이다. 그의 곁에 김가진이 다가와 귓속말을 하자 이강은 커튼을 닫는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강은 최효신을 찾는다. 무릎 정도의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효신은 화장을 곱게 하고 그의 앞에 선다.

“골평동에서 만나는 것이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거든 꼭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너라.”
“전하, 부디 몸 조심...”

효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이강이 효신의 손을 꼬옥 잡는다. 효신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어서 자리를 피하고 이강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 김가진이 좀 떨어져 이강을 바라본다. 잠시 후 결심이 선 듯 이강은 김가진을 따라 나선다.


24시간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이강은 평소처럼 밝은 색 양복과 구두를 신고 외출을 나간다. 그 눈들을 의식하지 않고 이강은 평소처럼 밝은 색 양복과 구두를 신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다. 후문을 빠져나가는 이강과 김가진. 그들은 잰 걸음으로 명월관을 향한다.

명월관에 당도하자 계획된 대로 기생 하나가 그들을 맞이해 방으로 모신다. 방에 들어가자 이강과 똑같은 체격과 키에 얼굴까지 닮은 한 청년이 일어나 크게 인사한다. 이강은 그 모습을 보고 허허 웃는다.

“여기에 이강이 하나 더 있구나. 허허.”

이강이 긴장을 놓을까 김가진이 말을 먼저 잇는다.

“어서 준비하라.”
기생 하나와 미용사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들어와 이강의 머리를 다시 손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놓은 콧수염과 턱수염을 한올 한올 얼굴에 붙인다. 큰 뿔테 안경을 씌우고 옷을 새로 입힌다. 입고 왔던 밝은 색 양복을 벗자 기다리던 청년이 곧 그 옷을 입는다. 좀 구겨진 듯한 헌 양복을 입는 이강. 그리고 목에 두꺼운 털이 감긴 코트를 입히고 중절모를 씌웠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흘렀다. 김가진이 들어온다.

<변장하는 의친왕 (이강)> <변장하는 의친왕 (이강)>

“전하, 정확히 20분 후, 밖으로 나가시면 인력거가 보일 것입니다. 그것을 타십시오. 골평동 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이강의 얼굴엔 이미 웃음이 사라졌다. 곧 김가진과 그 청년은 명월관을 나서며 다소 부산스럽게 음식이 좋지 않아 사동궁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며 떠벌이기 시작했다. 김가진이 기생을 나무라며 소리를 높이는 동안 이강은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김가진과 가짜 이강이 사라진 지도 20여분. 이강에게는 20년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이강이 명월관을 나서자 김가진의 말대로 인력거가 서 있다. 올라타자 인력거꾼은 아무 말도 없이 어디론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났을까. 인력거가 멈추자 이강은 눈치를 채고 서둘러 인력거를 내린다. 그리고 그 앞 열려 있는 조그만 문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작은 마당을 지나 방으로 들자 그 곳에 김가진이 서 있었다.

“무사히 오셨습니다. 전하.”
“효신은 아직...?"

김가진은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그녀를 기다렸다. 마치 1년, 아니 한평생 같은 1시간이 지나자 김가진이 시계를 꺼내보는 횟수가 조금씩 잦아진다.

“무슨 일이 생긴 듯합니다. 전하 혼자만이라도 어서...”
“아니 된다.”

이강은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입술이 마르고 목도 타고 가슴이 답답하다. 어쩌면 조국을 위해 그를 상해로 망명시키려는 김가진보다 효신을 기다리는 이강이 더욱 초조하고 암울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2시간이 흘러가고, 김가진이 힘들게 입을 뗀다.

“가셔야 합니다.”
“안 돼, 효신을 기다릴 것이다.”
“전하, 나라의 앞날이 걸린 문제이옵니다. 부디 마음을 다잡으시고 이제...”

째깍째깍 거리는 초침을 느끼며 손이 하얗게 되도록 시계를 쥐고 있던 이강의 손이 떨린다. 김가진의 채근이 계속되자 이강은 쥐고 있던 시계를 바닥에 던지고 만다.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다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을.”

이강은 입을 다문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자 이강은 조용히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주어들고는 시침을 다시 맞춘다. 그리고 집을 나선다. 이강의 입은 소태를 문 것처럼 쓰디 쓰다. 집을 나서자 어제 내렸던 인력거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인력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올라타자 이번에도 인력거꾼은 아무 말 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이강은, 자신의 신세가 그리고 조국의 신세가 허망하고 서러워 눈물이 맺힌다. 거기에 무슨 일이 생겼을 효신 생각이 겹치자 눈물은 코트 위로 떨어진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안동역. 지금의 단둥 열차역이다. 그는 이미 타야할 열차를 놓친 터라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단지 사람들에 휩쓸려 이리저리 몸을 맡길 뿐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붐비는 매표구 곁을 헤집고 열차로 가까이 다가가는데 순간 누군가 그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놀라 손을 펴보니 열차표 한 장이 쥐어져있다. 이강은 곧 열차에 오른다. 그간 정들었던 사동궁, 그리고 효신을 생각하니 자꾸만 목이 메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멀리서 일본 경찰들 3명이 무리를 지어 누군가를 찾는 듯 바삐 움직인다. 이강은 구석진 곳을 찾아 몸을 웅크리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누군가 다가와 그 곁에 조용히 앉는다.

“실례합니다.”

이번 탈출 사건을 만든 이상설이다. 이강은 관심 없는 듯 바라보다 곧 그를 알아채고 눈인사를 했다. 이상설은 천연덕스레 가방에서 책 따위를 꺼내 보는 척 했다.

열차가 떠나기 전 경적을 울려댄다. 그 때 일본 경찰 3명이 열차에 올라타 이강 쪽으로 다가온다. 이강은 잠이 든 척 머리를 창 쪽으로 기댔다. 이강과 이상설을 지나쳐 가는 경찰 3명. 이강의 심장은 방망이질을 치고 심장소리에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다. 그에게 지금 이 순간은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이런 그의 마음을 눈치 챈 듯, 이상설은 이강을 진정시키려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지긋이 누른다. 아직 열차는 떠나지 않고 출발을 알리는 경적만 요란하다.

갑자기 이 때 일본 경찰 3명이 이상설에게 다가왔다.

“신분증”

이상설은 다소 놀랐지만 침착하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이강 역시 위조된 신분증을 내밀었다. 자세히 둘의 얼굴과 신분증을 살펴보던 경찰이 신분증을 돌려주려는 데 이강의 손에서 은반지가 반짝 빛난다. 효신의 은비녀를 녹여 만든 은반지. 자신을 잊어도 이 반지만은 꼭 간직해 달라며 이강에게 건넨 반지다. 반지가 빛나는 순간, 경찰의 눈빛도 번뜩였다.

<의친왕의 체포를 명하는 일본 경찰> <의친왕의 체포를 명하는 일본 경찰>

“체포하라”

이 외마디 소리에 이상설과 이강은 힘없이 열차 밖으로 끌려 나가 압송된다. 이강은 어째서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끌려가는 이강의 뒤로 기차는 마지막 경적 소리를 울리며 무심히 떠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