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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편

내용요약 - 소풍

어디선가 피아노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니 소리는 점점 크게 웅장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현란한 음들의 움직임이 보이는듯하다.

‘아, 광염소나타다!’

김동인은 어두운 방안에 누운 채 상상 속에서만 들어오던 그 연주를 마침내 들었다. 이런 곡이었군.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하고 김동인은 큭큭-하고 웃는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올 정도의 기력은 이제 그에게는 없었다. 동인은 문득 생각한다. 밖이 한동안 어수선하더니 요즘은 통 조용한 것이 아무도 없는듯하다. 무슨 일인지 나가볼까. 아니다 안다한들 뭐 달라질까. 그저 만사가 다 귀찮기만 하다. 일어날 것도 없다.

동인은 그저 누워 다시 잠이나 청해보려는데 다시 피아노 소리가 이어진다. ‘거 참, 잘도 치네. 잘도 쳐.’ 동인은 그렇게 누운 채 광염소나타에 젖어 있었다. 서울 신당동 그의 자택에서의 일이었다.


**


1913년, 동인은 책보를 들고 집을 나와서는 모란봉을 거닐며 대충 바닥에 주저앉아 손에 닿는 돌멩이들을 던져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뭣 때문에 그 학교를 다녔는데, 제 깐 놈이 감히! 만나기만 하면 네 깐 놈은 아주 반병신을 만들어버릴 테니······”

김동인이 이렇게 혼잣말처럼 아는 욕지거리를 총동원해 읊어대고 있는 대상은 유일한 친구였던 주요한을 향한 것이었다. 자기를 두고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버린 게 서운하고 분하기도 하고 혼자서 덩그마니 남겨진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공자로 자라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었던 안하무인이었던 동인이 그런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동인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미련 없이 일본유학의 길을 올랐다.


동경에서 명치학원을 다니며 소학교 동창인 주요한과 함께 문학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사재를 털어 문예 동인지 <창조> 를 창간하면서 거기에 단편 <약한 자의 슬픔> 을 내어 문단에 오른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그 고향 친구 주요한이 가장 큰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맞수인 주요한은 <학우> 에도, 일본 시가 잡지에도 발표할 수가 있었지만 김동인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를 알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가 글을 지어 여러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했지만 한 번도 실리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잡지를 스스로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주요한의 권유보다도, 조선문학 건설보다도 이 굴욕감이 제일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동인은 잡지를 창간하고 문단에 데뷔를 해보니 문득 문학이라는 거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필력에도 자신이 있었고 머릿속을 떠도는 의식들의 실마리들을 하나둘 씩 엮어내는 동안 동인은 묘한 쾌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동인은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늘 남아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동인은 명월관에서 김옥엽이라는 기생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동인은 왠지 옥엽이 좋았다. 평양으로 내려간 김동인은 보석 알렉산델을 사서 옥엽에게 보냈다. 그는 이 반지에다 편지를 첨가했다. 때에 따라 빛은 변하나 본질이 변하지 않는 보석을 너에게 주노라고, 둘은 서로 편지 왕래를 했다. 진남포를 고향으로 둔 김옥엽이 후다닥 평양으로 올라왔다. 둘은 사람 눈을 피해 진남포의 옥천에 보림사를 헤매곤 했다.

옥엽을 진남포에 두고, 밀회를 한 지 한달 만에 김동인은 아내 김혜인에 의해 여관에서 걸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진남포에서 밀회를 즐기는 김동인과 김옥엽> <진남포에서 밀회를 즐기는 김동인과 김옥엽>

기생으로 돌아간 옥엽이 사내들에게 불려다니는 것을 보며 동인은 모친을 졸라 기어이 첩으로 삼아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아냈다.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김동인은 명월관으로 내려온다.

“옥엽아, 내 허락을 받았다. 너를 첩으로 들이기로 허락받았어.”

옥엽은 기쁜 듯 김동인에게 안긴다.

“그러나 당분간 평양에서 지내야 한다.”
“그럼 살림을 준비해야잖아요?”
“살림...? 그렇지......”

김동인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옥엽에게 건넨다. 차비 정도 받을 양이었던 옥엽은 큰 돈에 놀란다. 여염집 살림 10번은 차리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옥엽은 방금보다 더 기뻐 다시 동인의 목에 매달린다.

“정확히 이틀 뒤, 첫 차를 타고 오너라. 내 역에서 널 기다릴 게야.”

동인은 평양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그녀와 공공연하게 신혼살림을 차릴 생각을 하니 그는 하늘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찬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 그는 역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아직 올 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그는 그 기다리는 시간도 즐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 두 시간이 지났을까. 첫차가 도착했다. 그는 옥엽의 모습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를 놓쳤을까 역 앞까지 나가 서성이던 그는 다음 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차에도 옥엽은 없었다. 그 다음 차, 그 다음, 그 다음 차를 기다리는 김동인. 결국 밤이 되었고 막차 하나를 남겨놓은 상황이다. 그런 그 앞에 저 멀리 막차가 온다. 그 막차에도 옥엽은 없었다. 그는 막차가 떠나고도 한참을 역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김옥엽을 기다리는 김동인> <김옥엽을 기다리는 김동인>

후일 친구 유지영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의 부탁으로 옥엽을 찾아가보니 옥엽의 집엔 다른 남자가 있었다며 옥엽은 더 이상 자네 여자가 아닌 것 같다는 유감스러운 내용이었다. 김동인은 그 날로 그녀와 주고받았던 편지,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옷 등을 모두 내다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잊겠노라고 다짐했다.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 고작해야 기생 년이···’하는 심정으로 김동인은 더욱 많은 여자들을 만나며 할 수 있는 모든 유흥을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마음속에 아예 ‘옥엽’이라는 두 글자를 칼로 도려내버리기로 한 것이다.

<기생들과 술을 먹는 김동인> <기생들과 술을 먹는 김동인>

첫째 아내 혜인도 떠나고 옥엽도 버렸다. 그리고 며칠 전 부터는 둘째 아내인 경애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 적막하기만 하다.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납덩이처럼 무거워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다. 목소리를 쥐어 짜 사람들을 불러보아도 목소리가 입 밖으로 채 나오기 전에 사그러들어 버린다.

어제부터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좀 적어놓을 걸 그랬지. 어디서도 단 한 번 들어본 일이 없는 엄청난 저 연주를 혼자만 듣고 마는 것이 아쉽기까지 하다. 참 내, 아쉽군, 아쉬워.

동인은 그렇게 찬 냉방에 누워서 이래저래 상념에 빠져 있었다.

‘어쩌다가 이리 되었던가. 아니지 누굴 탓하고 누굴 원망하겠나. 그저 원없이 더 할 수 없을 만큼 놀고, 마시고, 쓰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억울할 것도 없고 서운할 것도 없네 그려. 나만큼 운 좋은 사내가 또 있을려구. 이제는 정말 더 놀라고 해도 못 놀겠네. 허허허’

김동인은 그렇게 미소지으며 상상속의 광염소나타를 감상하며 신당동 자택에서 서서히 식어갔다. 1951년의 저녁. 그렇게 그는 미지의 세상으로 긴 소풍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