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의리적 구토 편

내용요약 - ‘영화의 날, 1027’

1.


1919년 10월8일, 매일신보에 기사 하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최초의 연쇄활동극 영사>
'단성사주 박승필이 오륙천원의 많은 돈을 들여서 우리 조선에서는 처음 되는 활동사진 연쇄극을 영사한다. 처음 박을 것은<의리적 구토>라는 각본을 박을 것인데 장소는 명월관 지점, 청량리 홍릉 부근, 장충단, 한강철교 등이더라' 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인 10월 27일, 다시 박승필에 의해 매일신보에 또 하나의 기사가 실렸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의 활동 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여기던 바 한번 신파 활동사진을 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혀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천원의 거액을 내어 본월 상순부터 경성 내 좋은 곳에서 촬영하고 오는 27일부터 본 단성사에서 봉절개관을 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 제씨는 한번 보실 만한 것이올시다.”

1907년 문을 연 단성사가 회생의 기운을 얻은 때는 1918년. 광무대의 소리꾼이자 당대의 ‘흥행사’였던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곧장 수하에 있던 이를 일본에 보내 촬영술을 배우게 하고 영사기를 들여오고 신극좌의 배우 김도산과 함께 연쇄극<의리적 구토>를 만들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경성 시내 장면이 나오는 첫 장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등 반응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평소 40전 하던 상등석의 관람료는 1원으로 올랐고, 하등석도 80전에 팔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대성공을 거둔 의리적 구토 상영모습> <대성공을 거둔 의리적 구토 상영모습>

2.


이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신파극을 전문으로 하던 단성사에서 연극은 김도산 등이 전속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는 사실 영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구미영화와 일본영화에 빼앗기고 있는 관객을 어떻게 하면 되찾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대 최고의 변사인 김덕경이 김도산에게 ‘의리적 구토’의 대본을 가지고 새롭게 우리의 영화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답답해하던 마음에 돌파구를 찾은 김도산은 그길로 단성사 사주인 박승필을 찾아갔다. 호탕한 성격의 박승필은 김도산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면서 흥행의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히 도산을 떠보고 있었다.

“활동 연쇄극을 직접 박자구? 글쎄,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의외로 시큰둥한 박승필의 반응에 되려 애가 달은 김도산은 더욱 더 목소리에 힘을 실는다.

“조선 최초란 말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만들기만 하면····!”

박승필이 그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다만, 활동극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과연 이러한 투자가 수지타산이 맞는 것인지 그 여부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승필은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을 한다. 최고가 되려면 남보다 앞서가야지. 나중이라는 것은 없다. 박승필은 이미 본능적으로 이 건에 대한 성공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거금 5천원을 활동극 제작비로 내어 놓는다. 난다하는 만석꾼도 전재산이 천원정도라고 봤을 때 오천원이라는 돈은 거액의 투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김도산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생애 최고의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의리적 구토 촬영 모습> <의리적 구토 촬영 모습>

3.


물론 극본은 김도산이 맡았다. 연출도 주연배우도 바로 신극좌의 김도산이었다.<의리적 구토>의 내용은 즉 이렇다.

주인공 송산은 본시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모친을 잃고 계모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라난 몸이었다. 집안이 워낙 부유하고 보니 재산을 탐내는 간계로 말미암아 가정엔 항상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우심했다. 송산은 이리하여 새 뜻을 품되 이 추잡한 가정을 떠나 좀더 참된 일을 하다가 죽으려는 결심을 하는데 우연히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고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다. 한편 계모의 흉계는 날로 극심해 가서 드디어는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까지 모의하게 된다. 송산의 신변이 위태로워짐을 알게 된 의동생 죽산과 매초가 격분해서 정의의 칼을 들려 하지만 송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를 말린다. 송산인들 어찌 고민이 없을까마는 그는 오직 가문과 부친의 위신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디자는 것이었다. 그러하자니 자연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운 송산은 매일 술타령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송산의 은인자중도 보람이 없이 드디어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 계모 일당의 발악이 극도에 올라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자, 송산은 죽산과 매초의 독촉도 있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정의의 칼을 드는 것이었다.

모든 준비가 이뤄지고 미야카와 소노스케 일본 오사카 덴카쓰 기사를 고용해 명월관을 비롯한 경성의 명승지 감들이 필름에 담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모역을 할 배우가 없었다. 김도산은 고민 끝에 계모역에 신극좌의 단원인 김영덕을 여장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김도산의 염원은 1919년 10월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단성사에서 막이 올랐다. 입장료는 특등석 1원 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으로 평상시 1등석이 40전인 것에 비해 비싼 가격이었다. 참고로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이 10전이었다. 이처럼 높은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외국의 배우나, 일본인이 아닌 우리 배우가 나오는 활동극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일에 큰 의미를 둔 것은 지금까지 조선에 소개된 영화는 겨우 3~4분짜리였고, 조선인이 직접 만든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본인이나 서양인이 가지고 들어온 영화는 도시 전경이나 춤추는 모습, 기차가 달리는 모습 등 매우 초보적인 영상뿐이었다. 한국인은 주로 신파극을 했으며, 극장이란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아닌 연극을 상연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의 <<의리적 구투>>라는 활동연쇄극의 등장은 한국인이 돈을 대고, 한국인 연출자, 한국인 배우가 만든 영화로도 화제를 모으게 된 것이다.후에 이날을 기념해 만든 것이 바로‘영화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