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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 - 손병희, 주옥경 편

내용요약 - 달빛에 기대 숲은 잠이 들고

1.

천도교 제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자택인 제동, 아침부터 전화벨이 끊이지 않고 울려댔다. 부엌에서 무를 썰어 담고 있던 주옥경은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본다.


손 선생께서는 그저 짧게 몇 마디하고는 더 이상의 긴 대화는 하지 않으셨다. 뭔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에 차마 무슨 일인가하고 묻고자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옥경은 생각한다. 지금껏 선생의 저런 모습을 뵌 적이 있었던가. 옥경은 짐짓 모르는 체 하고 곰국을 끓여낸다. 말없이 드시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옷장을 열어본다. 잠시 고민하다 솜을 두둑히 넣은 한복을 골라 내 놓는다.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차분히 손 선생의 안색을 살펴본다. 태산 같은 그의 위풍을 느끼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인듯하다. 잠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생각들에 잠겨있을 때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손선생이 말문을 연다.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들 안심하고 있길 바란다. 집에서 열심히 수도에 힘쓰라.”

<가족에게 당부를 하는 손병희> <가족에게 당부를 하는 손병희>

옥경을 포함한 모든 식구들은 선생을 배웅하면서도 누구하나 입을 열지 못한 채 자가용을 타고 떠나는 모습만을 마음 조리며 배웅했다. 가족들은 영문을 모를 터였지만 주옥경만은 얼마 전부터 손 선생과 손님들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던 터였다. 손님들이 와 밤늦게 돌아갈 때까지 문밖에서 혹여나 생길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늘 경계를 쉬지 않았던 주옥경이었다. 밤 깊은 시간 안방에서 선생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해야 합니다. 단지 참가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을 뿐······”

선생이 준비하고 있는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 말 조각만으로도 알아채기에 충분했다. 사실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었던 것이 선생은 오늘의 거사를 앞두고 돈을 여러군데에다 분산해 놓으셨다. 집에 있는 주옥경에도 따로 거금을 맡겨놓았던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다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만이 그녀의 근심이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 따위가 지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주옥경은 선생이 남겨 놓은 뒤 식어버린 국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옥경은 문득 만감이 교차해온다.


2.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주옥경은 8살 어린 나이에 평양 기생학교 들어갔었다. 기생학교에서는 국어, 작문, 회화 등 기본 교양에서부터 서화, 가곡, 무용 등을 엄격히 가르쳤고 주옥경은 그중에서도 서화와 서도에 특별한 재주를 보였었다. 열아홉 되던 해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드나들던 서울의 유명한 요리집인 명월관에 기생 생활을 시작해 기생조합을 만들어 수장인 향수를 맡기도 했었다. 그녀의 나이 22살, 산월(山月)이 라는 기명(妓名)으로 기녀생활을 할 때였다. 좀처럼 보기 드문 캐딜락에서 나이 지긋한 한 신사가 내려서는 것을 본 것이다. 그를 처음 본 옥경의 느낌은 마치 큰 산을 보는 것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고고한 모습을 자랑하던 평양명기 산월도 그 자리에서 왠지 모를 기세에 눌려 버리고 말았다. 그 분이 바로 천도교 제 3대 교주, 의암 손병희선생이었다.

이후 손 선생은 명월관을 찾을 때마다 산월과 함께 있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마음속에서 아버지 같고 스승 같으며 거목 같은 느낌의 손병희선생에게 산월은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손선생 역시 그런 옥경을 누구보다 아끼고 감싸주었다. 30여년의 나이 차이는 둘 사이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듯 그저 서화를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교감들을 나누게 했다. 산월은 그렇게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존경하는 손병희 선생의 아내, 주옥경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3.


주옥경을 뒤로 한 채 제동을 떠난 손병희의 캐딜락이 명월관의 별관인 인사동 요릿집 태화관 앞에 멈춰 선다. 미리부터 연락을 받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은 직접 나서서 태화관의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쳤다.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손님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순환의 눈에 비친 것은 천도교교주인 손병희 선생이 오신다는 좌석에 기독교?불교 등 다른 종교계의 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불교대표 한용운 스님이 들어서는가 하면 기독교대표 오화영 목사도 들어섰고 오세창 ? 최린 ? 권동진씨 등 보기 드문 손님이 한방에 모이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손병희 선생이 도착하자 어느 틈엔가 태화정 동쪽 처마에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이윽고 손병희 선생을 위시한 민족대표 33인중 이날 참석한 29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을 향해 태극기에 경례한 다음 육당 최남선 선생이 지으신 독립선언문을 낭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 3창이 우렁차게 터져 나왔고 독립선언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손병희는 안순환을 불러 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라 했다. 순식간에 헌병과 순사들이 인력거를 가지고 태화관에 들이닥쳤으나 민족대표들은 태연자약하게 자동차를 갖고 오라고 호령했고 7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의연히 필동 자리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갔다.

<독립선언을 마치고 경무총감부로 가는 민족대표들> <독립선언을 마치고 경무총감부로 가는 민족대표들>

4.


오후 5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 갑자기 울려대는 전화소리에 심장이 갑자기 쿵-하고 내려앉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주옥경은 전화기에 떨리는 손을 가져가며 입술을 물고 눈물을 삼킨다. 수화기를 들자 다급한 목소리로 선생이 경무총감부로 체포되어 갔다는 것이다. 전화기를 손이 하얗게 되도록 힘주어 잡아 본다. 눈물방울이 하얗게 된 손등위로 떨러져 흘러내린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선생님은 위도 안 좋으시고 치아도 불편하신데 그곳에서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 리가 없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주옥경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마음과 달리 더디고 더딘 발걸음만이 가는 길에 자꾸 마음 조리게 했다.


5.


아무리 찾아도 서대문 형무소근처에 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근처의 집주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정을 해봤지만 통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담 밑에 있는 초가하나를 발견하고는 옳다구나 여기다 하는 생각에 집주인을 불러 보았다.

“이 아가씨가 무슨 소릴 해! 여기는 송장 갖다놓은 방이라구. 젊은 여자가 겁도 없이. 빌리긴 여길 어떻게 빌려 쓴다는 거요! 나 참. 선소리 말고 얼른 돌아가시게. 여긴 당신같은 아가씨가 드나드는 곳이 아니야!”

곱게 차려입지 않더라도 주옥경을 아가씨로 착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주옥경의 나이 겨우 28세. 집주인의 호통에는 그런 주옥경이 안쓰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주옥경의 옥바라지가 시작되었다.

하루는 손 선생일행이 재판을 받으러 법정에 갔을 때 주옥경은 급한 마음에 버선발로 뒤쫓아갔고 재판소 뜰에서 대기하던 손병희는 그런 옥경을 어느 틈엔가 알아보고 뜰에 무심히 피어있는 꽃 한송이를 꺾어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옥경은 눈물을 감추려고 애써 태연하게 웃어보이기 까지 했다. 만 마디의 말보다도 더 많은 대화가 그들 사이에서 오갔다.

<꽃을 꺾어 주옥경에게 흔드는 손병희> <꽃을 꺾어 주옥경에게 흔드는 손병희>

1년 남짓 옥고를 치른 손병희 선생은 인사불성이 되어 출감, 상춘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결국 1922년 5월 19일, 옥경의 품안에서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의암 손병희선생을 떠나보낸 후, 주옥경은 그의 유택(幽宅)이 가까이 있는 봉황각에 25년 동안 기거하면서 '수의당'이라는 당호 그대로 '의암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