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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과 산홍 편

내용요약 -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산다는 것

사동 이지용 자택,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안, 침묵이 가득한 이 방에 들리는 것이라곤 마작패 딸그락거리는 소리뿐이다.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인물들은 이지용, 그리고 하야시 곤스케와 박제순이다.

한참 마작 패가 돌려지고 담배 한 모금을 빨고, 돈을 걸고, 한숨을 쉬고, 술 한 모금을 넘기고, 다시 마작 패가 돌려지고. 그 때 하야시가 입을 연다.

<마작을 하는 이지용, 하야시, 박제순> <마작을 하는 이지용, 하야시, 박제순>

“슬슬 배가 고파오지 않소?”

그도 그럴 것이 하야시는 그다지 도박을 즐기지는 않았다. 심심풀이로 또는 박제순이 이지용을 소개하는 자리로 이 곳에 왔는데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이지용을 보니 좀 의아하기도 했다. 여기에 박제순도 더한다.

“그래, 이대신, 배라도 좀 채우고 다시 잡읍시다.”

이지용은 말이 없었다. 하야시가 박제순을 보며 헛기침을 한다. 박제순이 이지용의 눈치를 보고는 패를 접는다.

“난 오늘 잘 되지도 않고, 슬슬 일어나야겠어.”

어쩌면 이지용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독방에 갇혀 한 가지만 바라보고 맹렬히 믿는 그의 이러한 성격이 그를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고종의 종질이기도 한 이지용이 소유하고 있던 한강변 언덕 위의 우람하게 솟은 양옥집은 도박으로 날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중부 사동(寺洞)의 자택은 완전히 도박장이 되었다. 굳게 닫힌 문 안에는 소위 귀현신사(貴顯紳士) 한무리가 항상 모여서 무뢰한들처럼 도박에 혈안이 되어 있곤 했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을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 요즈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억대 도박판이 매일 벌어진 셈이다. 나라가 망하여 백성은 굶주리는데 그는 도박귀족으로서 도박판에 엎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귀공자의 청아한 풍모도 없고 위용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풍격도 없었다. 다만 도박배들과 무리지어 무뢰한의 대열에 끼어가고 있는 이지용일 따름이었다. 그가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도박장에서는 믿기 어려웠다.

박제순이 던진 마작 패의 소리에 이지용이 고개를 든다. 어리숙해 보이는 눈빛, 그러나 그 조그만 실눈 속에는 야욕이 반짝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 명월관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 자락이라도 좀 들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떠할지요.”

하야시의 제안에 이들은 차를 타고 명월관으로 이동한다.

명월관은 이미 이들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시, 이지용은 명월관의 안순환에게 귀띔하여 조용한 방을 예약하기도 했다. 이들이 들어서자 머

리를 조아리는 기생들과 웨이터들, 이들의 얼굴을 모를지라도 이러한 광경만으로도 당시 이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들이 방에 들자 주안상이 차려지고 기생 세 명이 들어왔다. 이지용의 술잔에 술을 따르려 하자 이지용이 술잔을 내팽겨 치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장을 불러, 어서 사장을 오라 해!”

하야시와 박제순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접시를 집어 던지는 이지용> <접시를 집어 던지는 이지용>

“네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게냐? 이대신, 왜 이리 역정을 내시는가.”

곧 안순환이 방으로 들어오고 이지용은 화를 다소 가라앉히고 읊조린다.

“산홍을 데려와.”
“이대신, 산홍은 지금 출타중......”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데려와.”
“오늘은 그냥 술이나 드시고 가시지요. 서비스 안주를 원하시는 대로 대령하겠습니다.”
“하하하. 술이나 먹고 가라. 당신, 명월관으로 돈 좀 벌었다지? 이제 이 요리집 문 닫고 뒷방 노인네 신세가 되고 싶은가?”

안순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10분이나 지났을까. 곧 기생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마치 방안에 매화라도 핀 것처럼 은은향 향내가 풍겨나오고 그녀의 얼굴에선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미모와 자태에 이지용은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앞서 큰 목소리를 내었던 것과는 다르게 산홍을 곁에 앉히고 술을 받는 이지용은 조용히 그녀에게 속삭인다.

“네가 날 이렇게 서운케 대하면 쓰겠느냐.”

이 날 이 들은 술을 마시며 한일의정서를 만들기까지의 방향을 논의했다. 그리고 자리가 파할 때 즈음, 이지용은 그녀에게 다시 말을 던진다.

“내일 내가 널 데리러 올 것이다. 내 첩으로 살며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야. 하하하.”

이지용이 그렇게 자리를 뜨자 동료 기생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부러움을 표했다.

“언니, 어서 짐을 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너무 부럽다. 내일 당장 양장부터 맞춰 달라 하세요. 금부치며 패물이며 마음껏 사달라 하세요.”

산홍은 차갑게 그들에게 쏘아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의 방 불이 꺼지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녀가 짐도 싸지 않고 저렇게 밤을 지새우는 것이 의아하였다.

다음 날, 날이 밝고 정오가 되자 산홍은 그 어느 때 보다 단정하고 말끔한 모습을 하고 툇마루에 앉아 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실력은 이미 소문이 자자한 지라
동료 기생들이 그 기술을 배우고 싶어 곁에 줄줄이 붙어 앉아 구경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 이지용이 나타난다.
“내 어디서 나는 향취인가 했더니. 네 난의 향기가 저 대문 밖까지 전하여 지는구나. 하하하.”
동료 기생들이 자리를 피하고 이지용은 한 짐 되는 돈가방을 턱 하니 난이 그려진 종이 위에 놓는다.

<산홍에게 돈가방을 주는 이지용과 외면하는 산홍> <산홍에게 돈가방을 주는 이지용과 외면하는 산홍>

“어서 가자. 돈 가방을 들어라. 내가 들어주랴.”

산홍은 돈가방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다시 종이를 탁탁 치며 구겨진 곳을 편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아주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것을 아십니까.”
“뭐라?”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역적이라고?”
“더 창피를 당하시기 전에 돌아가시지오.”

이지용은 화를 참지 못해 산홍의 뺨을 때린다. 쓰러진 그녀는 다시 일어나 단정히 앉는다. 이지용은 더욱 화를 내며 연신 그녀의 뺨을 때리고 먹이며 벼루를 그녀에게 내던졌다. 먹물이 그녀의 얼굴과 옷, 사방에 튀었고, 그녀의 입술에선 피가 서려 나왔다.

이지용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고, 그의 뒷모습에 대고 산홍은 말을 덧붙였다.

“이 옷의 먹물을 평생 지우지 않으리라. 내 저고리에 맺힌 먹물처럼 평생 조선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살 것이다.”

주변 기생들이 그녀를 방으로 들이려 했으나 그녀는 꼿꼿이 앉아 다 그리지 못한 난을 완성하였다. 그녀의 그림 속 난(蘭) 향기가 명월관을 가득 채웠다.

산홍의 난향(蘭香)에 젖은 명월관의 풍경위로 산홍의 한숨같이 뱉어낸
시 한수가 고고히 흐르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


이지용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는 등 결코 깨끗치 못한 인물로 통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최응은 매관매직으로 재물을 모아 9개나 되는 곳간에 온갖 보화를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했는데, 이지용도 그런 집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을까. 한편 주일공사를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주한 일본 공사관과 밀통하였고 결국 1만 엔의 로비 자금에 넘어가서 한일의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만다.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요 일제의 훈장을 3개나 받았으며 "합병"시 백작을 수여받은 이지용이었지만 산홍의 기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연 수당 3000원을 받아 도박에 탕진하다가 1928년 사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