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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색영화회 사건 편

내용요약 - 있는 자들의 놀이

1946년 11월, 해가 저물자 하나 둘 가로등 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때이른 폭설이 쏟아져 내린 탓일까. 거리는 평화롭다 못해 고요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런 거리와는 반대로 명월관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오늘도 조선 최고의 요릿집을 찾는 부잣집 자제들의 술판이려니 했다. 밤늦도록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섰다.

그러나 그 사이에 몇몇의 근사한 복장의 인사들도 무슨 작당모의라도 하는 양 2층 한 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저 매양 있는 돈많은 인사들의 술판이려니 싶다가도 들쭉날쭉한 차림새를 보아하니 그러하지도 않아 보였다.

하루 종일 때 아닌 눈 때문에 마당이며 대문이며 쉼 없이 오가며 비질로 하루를 소모한 명월관 허드렛일 담당 춘석의 눈에는 뭔가 수상한 분위기만 느낄 뿐 당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여명이나 되는 인사가 모두 한 방으로 몰려 들어간 뒤에 춘석은 뭐 대단한 모임자리가 생기나 부다 하면서 그렇게 흘려버리고 늦은 저녁밥을 한 술 뜨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부터 그런 수상스런 모임자리가 한 두 번 더 있었을까. 12월 7일이었다. 순경 몇이 득달같이 쳐들어와 기생 최선을 잡아갔다. 춘석은 무슨 일인가 큰일이 났구나 싶었지만 허드렛일을 하는 처지라 그러한지 누구하나 이 사안을 귀뜸해 주는 이가 없었다.괜한 궁금증에 속을 끓이고 있는데 던져진 신문 한자락을 주워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도색영화 상영한 각 요정을 엄벌하라.
최근 시대 각 용정에서 눈으로 차마 못 볼 세기말 적인 춘화를 8밀리 영화 필름으로 만들어 질탕하게 놀기에 지친 모리배들이 밀실을 만들고 영사를 하여 기생들과 음탕한 노름노리를 하는 일은 극도의 분격으로 사고 있는 11월 28일(1946년) 명월관에서 이러한 도색 영화 노름이 있던 것을 비롯하여 국일관, 청향원, 난정 등에서도 같은 사건이 있었음이 판명되어 당국에서는 이와 같이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요정과 인물들을 엄벌에 처하고자 주범을 7일 체포하고 8일 기생 최주 등을 호출 취조하였는데 장통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번 도색영화 사건은 전국도상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로 일반사회에서도 비난이 자자하니만치 관계자와 요정을 엄벌에 처할 예정이다.”(자유신문 1946.12.09자 기사)

<도색영화를 보는 사람들> <도색영화를 보는 사람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온 장안은 명월관의 도색영화상영 건으로 말이 들끓었다. 춘석은 이 무슨 변고인가 싶어. 기사 내용을 보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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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경찰청은 명월관 기생 최선을 잡아들이고 당시 도색영화를 봤던 인사들이 하나둘 취조를 받게 되는데 그 안에는 상업은행 지점장 등 유력인사들 또한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상황이 이지경까지 이르자 도색영화 상영을 주도한 상인 김린이가 자수하면서 수사는 불이 붙었다. 도색필름 제공자인 충무로 악기상 김재영과 영상기 대여자인 신당동 사진사 정화세까지 검거됐고, 명월관뿐만 아니라 국일관, 청향원, 란정 등 서울 시내 주요 요정에서도 수차례 도색영화 상영이 이뤄졌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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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47년 2월8일 오전 11시40분. 서울 재판소 4호 법정에서는 이른바 도색영화(桃色映畵) 사건의 첫 번째 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도색영화 상영의 주범으로 법정에 선 두 피고 인 김재영과 김린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예끼, 니놈들이 사람이냐. 짐승이냐”

“세상에 남녀가 홀라당 벗고 그짓하는 걸 봤다더라고”

“천하에 미친 놈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다 굶어 죽게 생겼는데
있는다 하는 것들이 세상에 드러운 짓은 죄다 골라하니 원,
이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러나! 에라~ 퉤!”

“아니 그걸 당최 어떻게 찍었다는 거여?”

<김재영과 김린에게 화를 내는 판사와 손가락질 하는 방청객들> <김재영과 김린에게 화를 내는 판사와 손가락질 하는 방청객들>

방순원 심판관이 방청객들의 소란에 모두 퇴장을 명하고 말았다. 잠시 술렁이던 법정에서는 입회 검찰관과 담당 변호사, 기자들만 남자 피고들의 진술이 시작됐다.

“아름다운 조선의 남녀풍기를 어지럽힌” “추잡하고 에로틱한 남녀 나체 군상의 활극”의 문제의 도색영화는 김재영이 1945년 11월 전 동아장미상사 이사로 일했던 일본인 관정희(管政喜)로부터 건네받은 것이다. 당시 한 신문은 거금 1천원이었는데 일반 영화 관람료 20원인걸 기준해 보면 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은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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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론은 음란물 상영이라는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질타보다 고급 요정을 폐쇄하고 이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라는 요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국근로자동맹 등은 1946년 12월8일 성명서를 발표해, “수백만 동포들이 여전히 기아와 추위 속에 떨고 있는 참상을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다. 대중식당을 제외한 고급 요정은 전부 전재 귀환동포에 개방 제공하기를 엄숙히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1946년의 조선은 그야말로 도탄지경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는 자국민의 귀국 자금 마련을 위해 통화를 남발했고, 국민들은 1년 만에 물가가 10배로 뛰어오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토지를 불법 거래하고 식량 등을 매점매석하는 등 이권 챙기기에 정신없는 악질 모리배들까지 설쳐댔다. 해방 이후 서울은 힘있는 자만 숨쉴 수 있는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뒷짐지고 불구경했을 뿐이다. 시민에게 싸게 팔 요량으로 진도에서 사들인 고구마 5천여 가마가 갑자기 알코올 양조용 원료로 둔갑한 고구마 사건, 미국에서 배급용으로 들여온 비스킷을 서울시장과 일부 상인이 담합해 폭리를 취한 비스킷 사건 등과 함께 도색영화 사건 또한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시 당국은 적산 요정을 개방하여 전재민(戰災民)을 입주시키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흐지부지였다. 김재영은 벌금 1만원, 김린이는 벌금 5천원을 언도받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삼삼오오 모여 분개했다. 그러나 힘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한잔 술에 욕설이나 퍼부으며 엄한 밥상에 화풀이가 다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요정들은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어쩌면 포르노보다 더한 정치 협잡과 거래가 이뤄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민들의 가난과 굶주림과 힘있는 자들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보이지 않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그 강을 아무도 메울 수 없었던 거짓말 같은 암울한 옛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