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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환, 유길준 편

내용요약 - 안순환의 심술

1909년 어느 화창한 5월의 봄날, 경회루는 사람들로 붐볐다.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장구 소리며 기생의 창 소리도 들려온다. 그리고 중간 중간 일본인들의 환호 소리가 들린다. 이들은 일본인 관광객들이다. 한성부민회가 일본인들의 한국 관광을 기획하여 이곳저곳 좋은 곳을 관광시키고, 마지막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날 이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경희루에서 기생들의 장구소리에 소리하는 기생과 그것을 보는 일본인들> <경희루에서 기생들의 장구소리에 소리하는 기생과 그것을 보는 일본인들>

조선 기생들의 창을 듣고 일본인들은 환호를 보낸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초청해준 유길준 회장에게 다시 박수를 보낸다. 유길준은 만류하다 일어서 목청을 가다듬는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이었던 그의 일본어는 유창하다.

“이렇게 조선 땅에 오신 일본인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과 수십일 함께 지내게 되니 정말 우리는 친 혈육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오릅니다.”

<일본인을 접대하는 유길준의 모습,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안순환> <일본인을 접대하는 유길준의 모습,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안순환>

일본인들도 감정이 도취되어 그의 말을 경청하던 그 때, 혼자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딸깍 거리며 들렸고 좌중은 순간 집중력을 잃고 부산스러워졌다.

“험험, 그래서 이렇게 내선일체를 도모하는 관광단을 파견해주신 천황폐하께.......”

그때 다시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곳엔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있었다. 유길준은 이를 무시하고 더 큰 목소리로 좌중의 귀를 사로잡았고, 원래 길었던 인사말을 반 정도로 뚝 잘라 축약하였다. 그리고 다시 풍악이 울리고 일본인들은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유길준이 안순환의 자리로 간다.

“많이 드셨는가.”
“뭘 말이오?”
“고기며 술이며 마음껏 들게. 이런 날 아니면 언제 가게를 비우고 놀아볼 텐가?”

안순환이 다시 술잔을 채우려 하자 유길준이 병을 빼앗아 직접 따라준다.

“어디어디 다녀오셨소?”
“조선 팔도 좋다는 곳은 다 다녔지. 우리 조선엔 정말 아름다운 곳이 많잖은가.”
“본국인 일본만 하겠습니까.”
“험, 그, 그렇지. 그렇고말고.”

유길준은 주변 일본인들의 눈치를 보며 웃는다.

“이 고기는 어디서 해오셨소? 또 이 냉채는 어디서?”

유길준은 그제서야 눈치를 챘다.

“아, 이건......, 혜천탕에서 예약한 음식일세.”
“핏, 떫고 신 냉채하며, 비릿하게 덜 구워진 고기하며......, 참.......”
“그래? 아이고, 이거 못 쓰겠구만. 다음부턴 내 꼭 명월관에 음식을 주문하도록 해야겠네.”
“됐습니다. 뭐, 우리도 주문 손님들이 많아서.......”

유길준은 술 한 잔을 더 권하고 저 일본인 관광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뜬다. 그때 일본 관광단의 대표가 갑자기 말한다.

“항라무를 보고 싶습니다.”
“예?”

그 일본 관광객은 항라(亢羅)로 지은 옷이 있어야 출 수 있다는 항라무를 추라는 것이다.

“지금은 의상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할 수가…….”

이 때 유길준이 끼어들어 소홍의 말을 막는다.

“옷이 어디에 있느냐?”
“원각사에 두고 왔습니다.”
“어서 가지고 오너라. 안사장님, 열쇠가 있으시지요?”

당시 안순환은 원각사도 잠시 맡아 운영하고 있었던 지라 그에게 열쇠가 있었고, 유길준은 손을 뻗었다. 안순환은 답이 없었다. 소홍이 그에게 다가가 열쇠를 달라 하자 그는 술잔만 들이켰다. 일본인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유길준은 안순환을 보챈다.

“안 사장, 왜 이러시오, 열쇠를 주게.”

안순환은 답하지 않고 유길준을 한 번 쳐다보았다. 답답한 유길준은 애가 타고 일본인들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에게 다가가 일본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냐며 멱살잡이를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유길준은 애써 이들을 말리고 안순환에게 다그친다. 그래도 안순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순환과 유길준 주위의 일본인> <안순환과 유길준 주위의 일본인>

결국 화가 난 유길준은 경시청에 연락을 넣는다. 뽀이 하나를 불러 귓속말을 하자 그는 서둘러 달려 나간다. 유길준은 안순환에게 다가온다.

“안 사장, 지금 명월관에서 요리를 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심통을 부리시는 거요?”

안순환은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고 유길준은 더욱 속이 타 들어갔다. 성격 급한 그로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당장 그를 때려눕히는 것이었으나 주변 눈도 있을뿐더러 안순환과 사이가 틀어지면 그와 연이 닿아있는 수많은 친일 관계자들을 놓치는 꼴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는 깊이 숨을 마시고 내뱉고를 하며 열을 식힌다.

이 날 결국 경시청에서는 원각사에 사람을 보내 자물쇠를 부수고 항라 옷을 가져다주었다. 경시청의 말단 직원이 옷을 가지고 경회루로 오자 안순환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일본인들은 안순환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소홍의 춤이 시작하니 그들은 다시 숨을 죽이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안순환의 모습은 처량하기도 하지만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이었을 것이리라. 그가 이런 아이 같은 심술을 부린 것이 과연 명월관에 음식을 주문하지 않은 유길준에 대한 유치한 보복이었을까. 아니면 일본 관광단을 혈육이라 부르며 온갖 아양을 다 떠는 한성부민회의 이러한 행태 때문이었을까.

<항라무를 치는 기생과 그것을 보는 일본인> <항라무를 치는 기생과 그것을 보는 일본인>

5월의 경회루는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르고 아름답다. 안순환은 투명한 호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귀여운 또는 시니컬한 심술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