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가평리계서당

연혁
계서당 계서당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

지정일 : 1984년 1월

소유자 : 성기호(13대 종손)

소재지 :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건축시기 : 조선시대

가평리 계서당(溪西堂)은 1984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된 곳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인 계서(溪西) 성이성(1595~1664)선생 이 살던 곳이다. 본 건물은 그가 광해군(光海君)5년(1613)에 건립하여 문중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힘쓴 곳으로 사랑채 부분은 후대에 증개축(增改築)된 것으로 추측된다.
성이성은 창녕사람으로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1561~1629)선생의 아들이다. 창녕성씨는 고려 후기 사람 으로 호장중윤(戶長中尹)을 지낸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한다.
성씨(成氏)가 영주 봉화에 입향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선조 때 부용당 성안의(成安義) 대에서 비롯되었다. 부용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창녕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 우부승지(右副承旨),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를 지냈다. 남원부 사로 나아가서는 4년을 선치(善治)하여 이름을 높이고 광한루 옆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성이성(成以性)의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로 부용당 성안의(成安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계서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업 이 뛰어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다. 병진년인 161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지만 광해군대의 혼란과 아버 지의 명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4년(인조 12) 정언에 임명된 이후 부수찬을 거쳐 부교리·지평·수찬·사간 등 주로 언관직을 역임하였다. 언관으로 있으면서 곧은 말을 하여 주위의 견제를 받아 관직은 그리 오르지 못하였으나, 왕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 진주부사(晋州 府使)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세 차례나 어사(御使)로 등용되었을 정도 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사생활과 마음이 아울러 검소하여 훗날 증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贈通政大夫弘文館副 提學)을 추서(追敍)받았으며 1695년(숙종 21)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다. 1786년(정조 10)에 영천의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계서유고』가 있다.
이와 같은 청렴의 상징인 계서 성이성 선생은 최근에 더욱 조명을 받고 있다. 바로 “춘향전”주인공인 ‘이몽룡’어사의 실존 인물로 밝혀 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이성의 현손인 성 섭(成涉)의 교와문고(僑窩文藁)에 춘향전의 어사출도 장면과 흡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밝힘으로써 실존 인물인 성이성 선생의 행적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사랑채 측면 대청에는 전백당(傳白堂)이라는 현판이 있다. 전백당은 계서 성이성 선생의 청백함을 이어 온 집을 뜻하는 것으로 계서선생의 후손들 역시 그의 청렴함을 깊이 새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계서 성이성 선생의 신위는 고택의 우측 사당에 모셔져 있다.
선생의 묘소는 봉화군과 연접한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뒷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청백리로 제수 받은 선생의 행적을 담은 비석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가평리 계서당은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되어있으며 13대 종손이신 성기호씨 내외가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가평리 계서당 가평리 계서당
사당내 신위 사당내 신위
계서당 현판 계서당 현판
문화와 전통
‘춘향전 이몽룡’ 실존인물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선생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위치한 계서당은 조선중기 문신인 계서 성이성(1595~1664)선생이 살던 곳이다. 성이성은, 창녕 사람으로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 선생의 아들로 인조 5년(1627) 문과에 급제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한국 4대 국문소설중 하나인「춘향전」의 주인공 어사 ‘이몽룡’의 실존인물이 지낸 곳으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춘향전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의 연구논문 발표를 통해 “이몽룡이 경북 봉화에 살던 실존인물 이었다”는 주장에 상당한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를 고증하기 위해 최근 봉화군에서는 “고전소설 「춘향전」의 역사적 인물 (이몽룡=성이성)고증 용역결과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실제인물로서 계서 성이성 선생의 행적을 소설의 내용과 대조?분석하는 작업이 검증되고 있다.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춘향전 비교연구> 등 굵직굵직한 저서를 내놓으며 지난 30년 동안 「춘향전」연구에 괄목한 연구를 일궈온 설교수에 의해 근 3백년간 구전설화, 각종소설, 드라마, 영화, 판소리 등의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는 ‘춘향전 신화’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설교수는「춘향전」에 감춰진 ‘역사적 진실과 창작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계서 성이성은 16세(1611년)때 부친이 광주목사로 승차함에 따라 함께 남원을 떠났다.

둘째, 성이성은 그로부터 28년(1639년)후 호남 암행어사가 되어 다시 남원을 찾았다. 그는 소년시절의 스승 산서 조경남을 모시고 광한루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남원에 들려 암행어사로서 실질적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셋째, 남원의 진사 조경남(1570~1641)은 율곡의 제자 조헌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의병장 출신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시대 사회상을 잡록과 설화집으로 편찬한 대작가이다. 조경남은 자서전을 지었고, 제자 성이성을 이도령의 모델로 하고 관리 부패상을 대표하는 가상인물 변부사와 춘향을 연계시켜「춘향전」을 창작(1640)했으며, 자신의 잡록에서 소개했던 <금준미주 시>를 춘향전의 주제시로 부각시켰다.

《금준미주 시(金樽美酒詩)》
“金樽美酒千人血” (금잔미주 천인혈)
“玉盤嘉肴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
노래 소리 높은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또한 높더라


설교수는 또한 춘향전의 전반 인물은 당시 유행하던 민간설화나 판소리에서 따온 듯하나, 후반부의 이몽룡 암행어사의 출현 출도는 작가(산서 조경남)가 계서 성이성을 모델로 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료는 성이성 선생이 쓴 일기를 후손이 편집해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 섭(成涉.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등을 통해서 밝히고 있으며 이를 통해 「춘향전」의 두 인물인 ‘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 인물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 「호남암행록」의 한 대목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 길에 길을 나서서 십 리가 채 안 되어 남원 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 부내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필원산어』에 실려 있는 성이성의 암행어사 행적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하였다.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주었다.

‘금동이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또한 높더라.’

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 들어갔다. 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계서 성이성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 아버지 부용당 성안의와 함께 청백리에 녹선이 된 청렴한 인물이었다. 합천현감, 담양부사, 창원부사, 진주목사, 강계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백성의 궁핍한 생활을 돕고 부정부패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켜 민심을 살렸다. 이로 인해 ‘청백인정비’를 합천을 제외한 4곳에 세웠고 지금도 진주의 ‘진주성 비석군’에는 ‘진주 목사 성후이성청덕유애비(晋州牧使成侯以性淸德遺愛碑)’가 전하고 있다.

계서 선생에 관한 행장들의 내용을 보면 “일생을 강직개결(剛直介潔), 불편부당(不偏不黨)하며, 권세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直言)으로 일관하여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평생 공사(公私)구별 없이 청렴, 결백, 검소하게 살았으며, 관아에서 이속들이 사또 자제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며, 음식 하나도 아문 밖으로 사사로이 내어가지 못했다 한다”, “퇴관 후 향리(봉화 가평)에 있을 때, 신관(新官)이 인사차 왔다 가면 자제를 대신 보내 회사하고 관아에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함”, "평생 술을 과음하지 않았으며, 기녀(妓女)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함“ 등으로 계서 선생의 강직하고 깨끗한 선비로서의 삶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제 「춘향전」의 실존인물로 평가받는 계서 성이성 선생의 행적을 통해 여러모로 춘향전의 스토리가 풍성해질 것으로 보인다.
더하여 이몽룡의 주인공 계서 성이성 선생과 종가인 봉화군 가평리 계서당을 연계하는 다양한 관련 축제와 행사가 조직적으로 잘 준비된다면 또 하나의 문화원형 관광산업의 요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가옥구조

가평리 계서당 가옥은 뒤편으로 낮은 야산을 낀 남향한 언덕바지에 터를 잡고 있다. 아래쪽 마당 끝에는 대문간채를 두고 있고 북쪽 높은 터에 사랑채와 안채가 한 채로 연결되어있다. 안채부분은 약간 변형은 되었지만 경북 북부지방 ㅁ자 민가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주택발달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대문간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서쪽 끝부터 광 1칸씩 늘어놓고 다섯째 칸을 솟을대문으로 하고 그 옆 동쪽 끝에 다시 광 1칸을 마련하였다. 솟을대문이 달린 행랑채는 논의 가장자리 평지에 세웠으나 몸채는 뒷동산의 경사진 산록에 올려놓아 우뚝하게 솟아 보이고 앞쪽의 논들을 부감(俯瞰)할 수 있으며, 우측으로 약 10m 떨어져서 일곽의 토담을 두르고 사당을 배치하였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마주한다. 마당 동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사랑채 서쪽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안채는 정면 5칸으로, 측면 3칸은 대청이며 좌우 2칸은 안방과 상방이 대칭으로 놓여졌다. 이곳의 안채와 사랑채는 다른 곳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도장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사랑방은 대부분 홑집으로 구성하는데, 이 집은 겹집으로 만들어 안채의 날개집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반으로 구성된다. 서측 중문 옆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 되는 사랑방을 두고, 정면에 반칸 폭의 개방된 퇴를 두었는데 사랑방에는 사잇장지를 두어 아래, 윗방으로 나누어 쓰고 있다. 사랑채의 툇마루 끝에 주인이 바깥에 나가지 않고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판자로 3면을 막고 바닥을 뚫었는데, 지금 항아리는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바닥 아래에 항아리를 놓아 간이화장실로 썼다. 사랑채의 구조는 막돌 허튼층쌓기로 높직한 축대를 쌓고 다시 막돌 허튼층쌓기의 기단을 형성하여 막돌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툇마루의 기둥 4개는 축대 위에 놓은 막돌초석 위에 서 있어 다락처럼 높은 누마루 모양을 이루고 있음이 특징이다.

現 13대 종손 성기호씨는 안채 대청마루의 천정은 매우 높은 편이라 햇빛이 많이 들고 답답하지 않고 후련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의 동편에 ‘사당을 향해 굽은 소나무’가 있어 예부터 ‘성이성 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의 형국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을 띠고 있으며 계서당의 위치는 소의 젖통이 있는 자리라 하여 매우 좋은 입지라고 여기고 있다.

가평리 계서당 전경 가평리 계서당 전경
13대 종손 성기호님 13대 종손 성기호님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사당을 향해 굽은 소나무 사당을 향해 굽은 소나무
사랑채 전경 사랑채 전경
대문채 배면 대문채 배면
사랑채 간이화장실 사랑채 간이화장실
중문간과 사랑채 중문간과 사랑채
문화유산
계서정 현판 계서정 현판
계서초당(溪西草堂) 계서초당(溪西草堂)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소재하며 계서공이 만년에 은거하던 초당으로 방 2칸, 툇마루로 이루어진 초당이다. 현판 계서정(溪西亭)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쓴 글이다. 정조 때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번와(飜瓦)하였다.

계서초당을 다른 이름으로 어와정(御臥亭)이라 불렀다한다. 그 유래는 숙종이 즉위전 세자(世子)로서 축지법으로 전국을 미행(微行)하던 중 계서초당 뒤산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참으로 그 경관이 수려하였다. 내려오는 도중 어디선가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여 따라 내려가보니 계서초당이었다. 다리도 쉴 겸 툇마루에 걸터 앉아 몸을 초당 벽에 기대고 잠깐 누워 쉬웠다. 자연경관과 글 읽는 소리에 매혹되어 한참을 자다가 문득 깨어 목이 말라 석천 물을 떠서 마시고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이곳을 떠난다고 한다.

그 후 왕이 쉬어 갔다는 소문이 퍼져 계서초당을 ‘임금이 누워 쉬어간 정자’라는 뜻으로 어와정(御臥亭) 정이라 부르고, 어와정 뒷산을 왕산(王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진주 목사 성후이성청덕유애비 진주 목사 성후이성청덕유애비
진주성 비석군 진주성 비석군

계서공은 다섯 고을인 합천현감, 담양부사, 창원부사, 진주목사,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청백인정비(淸白仁政碑)가 합천을 제외한 4곳에 있었다. 비명(碑銘)이 문집에 전하고 지금도 진주비는 진주성내에서 볼 수 있다.
진주성 비석군은 조선조 선조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을 비롯, 효종10년(1656) 목사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 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이다.

가마채 가마채

가마 밑 양편에 앞뒤로 나오게 세로로 지르는 기다란 나무. 가마를 멜 때 이 나무 끝에 멜빵을 걸고 손으로 잡는다.

계서공 묘(墓)와 묘비(墓碑) 계서공 묘(墓)와 묘비(墓碑)

계서공이 살던 곳에 멀지 않은 봉화군과 연접한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뒷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석물과 청백리를 기록한 내용이 음각으로 새겨진 묘비가 세워져 있다.

부용당(芙蓉堂) 성안의 영정(成安義影幀) 부용당(芙蓉堂) 성안의 영정(成安義影幀)

조선시대 문신 부용당 성안의의 영정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 창녕성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1602년에 제작된 것으로 1997년 12월 31일 ‘경남문화재자료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선조 35년 부용당이 영해부사로 재임시 제작된 것으로추정되며, 길이 160㎝, 명주바탕으로 되어 있다. 부용당 성안의는 인조 때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 남원부사, 광주목사를 역임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상의원 봉사시정을 지냈다. 그 후 제주목사로 있다가 한 때 면직된 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사(死)후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부용당 사당(芙蓉堂 祠堂) 부용당 사당(芙蓉堂 祠堂)

우부승지, 영해부사, 남원부사, 광주목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한 계서 성이성 선생의 부친 부용당 성안의(成安義. 1561~1629)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계서당에서 우측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관리 재각 춘우재(春雨齋)와 사당이 있다.

고택여행

경북 봉화국 물야면 가평리에 위치한 계서당은 1984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청백리로 녹선된 계서(溪西) 성이성(1595~1664)선생의 13대 후손들이 살아가며 계서당의 역사화 문화를 지켜가고 있다.

계서 성이성 선생은 최근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어사의 실존 인물로 조명됨에 따라 고택 또한 세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봉화군과 계서당의 현 종손내외는 이와 같은 최근의 상황을 통해 계서당 및 주변유적지 일대를 묶어 고택 문화원형 관광자원화를 기획하고 있다.

봉화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자원 활성화를 위해 춘향전의 주인공인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계서 성이성’ 선생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계서당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을 ‘체험학습관광’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문화재청과 지자체의 지원으로 사랑채와 대문채 등을 정비하여 일반인들의 고택체험 공간을 마련하고 주변유적지와 연계를 통해 이른바 “성어사 축제”를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성어사 축제’를 통해 계서당 주인 성이성선생의 암행어사 활동 및 청백리 정신을 되살려 차별화된 지역 문화자산으로 활용하고 유가정신을 고양시키는 전통사상교육 또한 마련된다. 그리고 춘향전 출현의 배경을 부각시켜 창작문화에 대한 교육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어 향후 다양한 관광자원으로 기대할 수 있다.

종손 성기호님 종손 성기호님
종부 강순자님 종부 강순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