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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단

연혁
사랑채 녹우당 사랑채 녹우당

사적 제167호 지정

지정일 : 1968년 12월 19일

소유자 : 윤형식, 관리자 : 고산유적관리사무소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건축시기 : 조선시대

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녹우단은 해남윤씨 일가의 종택과 사당 등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녹우당(錄雨堂)은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살았던 사랑채를 일컫는데,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른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漁樵隱) 효정(孝貞. 1476~1543)이 백련동(現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15세기 중엽에 지은 건물로, 녹우당이란 이름의 유래는‘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녹우단은 덕음산을 주산으로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자리 중 하나로 유명하다. 덕음산을 뒤로 그 줄기인 성매산/옥녀봉/호산을 잇고 있어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현무/청룡/백호/주작이 잘 짜여진 명당자리로 손꼽힌다.
해남윤씨는 세 곳의 중심영역이 있다. 첫 번째는 해남 윤씨가 처음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강진군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이다. 해남윤씨 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은 백련동 녹우당에 터를 닦은 어초은 윤효정이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 윤경(尹耕)을 비롯해 조부인 윤사보(尹思甫)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두 번째로는 해남윤씨의 윗대 선조들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시조 윤존부(尹存富)를 비롯하여 7세 윤록화(尹祿和), 중시조인 윤광전 (尹光琠)과 그의 아들인 윤단봉(尹丹鳳), 윤단학(尹丹鶴)의 산소가 있는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이다.
마지막으로 윤효정이 해남으로 장가들어 자리를 잡고 해남윤씨가를 번성시킨 곳이 백련동, 지금의 연동이다. 고산의 5대조인 윤경은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윤효정이 해남읍 백련동에서 크게 가업을 이루고 어초은공파를 형성하였으며 이후 해남윤씨가 번창하게 되었다.
어초은 선생이 해남윤씨를 이 지역의 명문집안을 성장시키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경위는 당시 해남에서 가장 큰 기반을 가지고 있던 대부호이자 향족(鄕族)인 초계정씨(당시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경제적 기반 확보를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자손이 영주할 새터를 잡고 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초은선생은 해남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는 금남 최부선생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윤구(尹衢), 윤행(尹行), 윤복(尹復) 세 아들을 문과에 급제 시키게 되며 해남윤씨가를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단가 문학의 최고봉인 고산 윤선도를 배출하였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1626~1694)는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三齋)중 한명으로 문인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국보인 ‘자화상’을 그렸으며, 아들 낙서 윤덕희와 손자 총고 윤용의 3대에까지 그 예술적 재능이 이어졌다.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학자와 문인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유교 문화와 문화 예술의 중심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참고 : 해남윤씨 5백년 요람지 녹우당 / 정미문화

녹우당 솟을대문 녹우당 솟을대문
녹우당 사랑마당 녹우당 사랑마당
녹우당 녹우당
추원당 추원당
문화와전통
파란의 일생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는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 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송강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 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대부분 한문 문학과 경직된 사회구조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를 지어냈다.
고산의 생애는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에 담긴 애환(哀歡)을 시문(時文)으로 풀어냈다. 고산의 본관은 해남으로 1587년(선조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현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윤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다. 해남 종가에 아들이 없자 8세 때 종손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잇게 되었다.
고산의 일생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한사람이었다.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냈다. 또한 고산은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을 지녀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탄한 일생과는 맞지 않았다.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 하였으나 당시는 광해군대로 이이첨 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남인이었던 고산은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힘을 펴지 못했다.
이 당시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규탄한 상소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의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 돼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지만 유배 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으로 돌아온다. 고산은 이곳에서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출사의 꿈을 펼친다. 별시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1636년(인조14) 고산의 나이 50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애국의 충정이 깊었던 고산은 향리 자제와 가졸 등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배편으로 강화도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왕자들은 붙잡히고 인조(仁祖)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세상을 개탄,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이 때 배를 타고 남하하다 도착한 곳이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다. 그는 이곳에서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자연경관이 참으로 아름다워서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고 감탄하며 머물게 된다.
고산은 보길도 격자봉 아래에 은거지를 정하고 이곳을 부용동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낙서재를 세우고 자연에 묻혀 어부사시사를 짓는 등 작품생활을 하는 생활의 터를 만들었으며 임종시에 그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곳이기도 했다.
고산의 시련은 말년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74세 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한다.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논쟁에 있어서 3년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하여 송시열 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된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말 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니 경솔히 죽일 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고산은 79세(1665년 현종6)에 광양으로 이배 되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보길도 낙서재에서 지내다가 1671년 6월 11일 85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보길도 출입구 '황원포' 보길도 출입구 '황원포'
고산선생 생기터 고산선생 생기터
부산기장 유배지의 시비 부산기장 유배지의 시비

‘어부사시사’의 고향 보길도

보길도는 해남반도 남단으로부터 12km 거리에 있다. 보길도 최고봉인 격자봉(435m)을 중심으로 북동방향으로 흐르는 계류주변을 ‘부용동’이라고 명명하고, 주변 일대에 정자를 세우고 지당(池塘)을 축조하는 등 자연을 경영하며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보길도의 윤선도관련 유적지를 사적 제368호로 지정, ‘보길도 윤선도 유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고산의 5대손인 윤위(1725~1756)가 고산의 보길도 경영과 생활상을 낱낱이 기록한 「보길도지」에서 “고산은 이곳 부용동을 지형이 마치 연꽃 봉우리가 터져 피는 듯해 부용(芙蓉)이라 이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산은 부용동에서 1637년 51세부터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섯 차례 출입 하며 13년 가량 머물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어부사시사’ 40수와 32편의 한시를 남겼으며, 빼어난 조원 안목으로 부용동을 최고의 원림지로 가꾸었다.

이중 '세연정‘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나 있는 부용동의 중심 원림지로 ’어부사시사‘는 주로 이곳에서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은 세연정 지역을 ’번화하고 청정하여 낭묘(廊廟)의 그릇이 될 만한 곳‘이라 했다. 또한 세연은 모든 욕심을 자연에 씻어 버리고 깨끗한 삶을 살고자 하는 뜻도 담겨있다.

세연정은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 편액을 걸었다. 중앙에는 세연정(洗然亭), 남쪽에는 낙기란(樂飢欄), 서쪽에는 동하각(同何閣), 동쪽에는 호광루(呼光樓)란 편액을 걸었다. 세연정은 계간(鷄澗)하류에 판석으로 보를 막아 600여 평의 계담(溪潭)을 만들고 계담의 물을 옆으로 돌려 또 하나의 인공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 연못은 방형에 가깝고 넓이는 250여 평 정도다. 계담과 인공 연못을 합하여 세연지라 한다.

세연지 계원의 전체 넓이는 3,000여 평이며 계류 바닥은 깨끗한 암반으로 되어있고 칠암의 크고 작은 바위가 자연스럽게 배치되고 있는데 평평한 판석으로 물위에 드러난 것이 있기도 하고 물속에 깊이 잠겨 있거나 호안과 계담에 걸쳐 있는 것도 있다.

이외에도 독서의 즐거움을 얻고 은둔하고자 했던 낙서재와 무민당 일대, 고산의 아들 학관이 기거하며 공부하고 휴식을 취했던 곡수당 일대, 부용동 제일의 절경을 자랑하는 동천석실 일대 등 ‘보길도’ 곳곳에 고산의 향기와 정신이 남아있다.

어부사시사는 1651년(효종2) 고산이 65세 때 보길도 부용동을 배경으로 어부의 생활을 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에 따라 각 10수씩 노래한 시조로 총 40수다.

춘사1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뛰워라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은 밀려 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에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하사1

궂은 비 멈춰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고 깊은 흥이 절로난다
찌거덩 찌거덩
산수의 경개를 그 누가 그려낸고

추사1

물외(物外)의 맑은 일이 어부 생애 아니던가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漁翁)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사철 흥취 한가지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동사1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텁도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끝없는 물결이 비단을 편 듯 고요하다.

어부사시사시비 어부사시사시비
세연정과 세연지 세연정과 세연지
세연정 세연정
관석보 관석보
무민당 터 무민당 터
곡수당 곡수당
동천석실 동천석실
백련지와 소나무 숲

녹우당 연동마을은 본래 ‘흰 연꽃이 피는 마을’이라고 하여 ‘백련동’이라 불렸다. 『동국여지지』에도 “해남 백련동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흰 연꽃이 많이 피여 백련동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연지에서 백련동의 이름도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지는 어초은 윤효정 때부터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연못을 파고 연을 심은 것은 어초은이 덕음산의 장중한 덕을 통해 선비의 지조와 절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연꽃을 심어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풍수 지리학적으로 연동마을의 터는 불(火)의 기운이 강한 녹우당 종가(宗家)의 집터에 불과 바람을 거두고 부족한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비보(裨補:도와서 모자람을 채움)적 기능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연지와 함께 소나무 숲 또한 마을의 허한 곳을 막아주는 전통적 비보의 기능을 갖추고 있어 연지와 소나무 숲의 조성이 녹우당을 더욱 완벽한 형국으로 만들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환경적 영향에 있어서도 연지와 송림은 마을 아래에서 불어오는 여름철의 습한 기운을 걸러서 녹우당 일대가 맑고 청정한 기운을 갖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연지는 연못을 파고 나온 흙으로 동산을 마음심(心) 형태로 조성하였다고 하며 이는 성리학적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했던 어초은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연지 가운데 섬에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

녹우단 뒷산인 덕음산 중간쯤에 밀집하여 있는 비자나무는 직경 1m 정도의 거목으로 수령도 300여년 가량의 큰 나무들이다. 현재 약 9천 평의 면적에 4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연동 비자나무 숲은 어초은이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나무를 심고 숲의 보호에 힘써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연동 비자나무숲은 인공 숲으로 문화적ㆍ생태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1972년 7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비자나무는 난대성 상록 침엽수인 ‘주목과’에 속하는 유실수로 열매는 촌백충의 구충약으로 특효가 있을 뿐 아니라 비자강정 등 고유의 다식(茶食)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덕음산 비자나무에서 수확한 비자를 이용하여 오래전부터 녹우당에서 만든 것이 비자강정이다. 녹우당의 전통음식으로 내려오는 비자강정은 명절 때를 비롯하여 제사 때 사용되어 왔는데 녹우당 종부(宗婦)들이 만드는 법을 전수하여 오고 있다.

비자나무숲 가는 길 비자나무숲 가는 길
비자나무숲 비자나무숲
비자나무 비자나무
가옥구조

녹우당은 고산의 4대 조부인 윤효정이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6세기 초의 건물이다.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져 있다.

전체적인 가옥의 구조는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를 지나 사랑마당이 나오고 앞면에 사랑채가 있으며 서남쪽 담 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효종(孝宗)이 고산에게 지어준 집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던 것을 82세(1668, 현종 9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사랑채 뒤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ㄷ’자 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가묘(家廟)가 있고 담장 밖에 어초은 사당과 고산 사당이 있다.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에는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부지방의 양반가와 같은 구조인 ‘ㅁ’자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한때 아흔 아홉 칸에 달했으나 현재 55칸 정도가 남아 있다.
현재 녹우당 영역 속에 있는 주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과 그 좌측으로 어초은 추원당(追遠堂)이 있다. 이외에도 백련서원과 후원에 별당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랑채는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집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크게 하는데 고산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다. 녹우당 사랑채는 고산이 82세 되던 1668년 뱃길로 옮겨와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자형 평면 구조이나 좌측의 평면 2칸이 한단 낮게 아래로 내려와 전체적으로 2칸으로 분리되어 있다. 사랑본채는 우측면에 퇴를 둔 4칸 집으로 좌우측에 각각 2칸씩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고 있다. 사랑채의 앞쪽은 겹처마 양식의 차양(遮陽)구조를 하고 있다.

안채는 현재 종손이 거처하고 있는 곳이다. 건물은 서쪽으로 중앙에 3칸 대청을 두고 좌우 아래로 방과 부엌, 창고 등을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안채에서 특징적인 것은 안방의 아래쪽 부엌과 건넌방 부엌 상부에 설치한 솟을지붕 형태의 환기용 구조물이다. 우리나라 전통가옥에서는 흔치 않은 구조물이다. 안마당 가운데에는 작은 굴뚝과 함께 여러 가지 화초가 심어져 있는 화단이 있어 넓지 않은 공간속에서도 조경미를 보여준다. 안대청에는 ‘충헌 세가(忠憲世家)’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고산의 가업을 이어받은 녹우당 해남윤씨가 집안임을 말해주고 있다.

녹우당에는 3곳의 사당이 있다. 집안의 동쪽에 4대조를 받드는 안사당(家廟)이 순종 21년(1821)에 세워졌으며, 고택영역 외부에 어초은 사당과 고산사당이 있다. 안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맛배집이다.

녹우당입구 녹우당입구
대문채와 행랑채 대문채와 행랑채
사랑채 사랑채
규방대문 규방대문
안채 안채
안채지붕 환기용구조물 안채지붕 환기용구조물
안채 건너방 안채 건너방
어초은사당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고산사당
추원당 대문채 추원당 대문채
비자나무숲길 비자나무숲길
문화유산
녹우당 사랑채 현판 녹우당 사랑채 현판

공재 윤두서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의 글씨이다. 녹우당의 당호가 유래된 것은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 그리고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는 유래 등이 있다.

정관(靜觀) 정관(靜觀)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정관(靜觀)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운업(芸業) 운업(芸業)

‘운(芸)’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業)’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한시(無題) 한시(無題)

졸재 윤행(拙齋 尹行)의 11대 손인 나산(懶山) 윤성호의 글로 알려지고 있으며 어초은 윤효정의 은덕을 담고 있다.

윤고산 수적 관계문서(尹孤山手蹟 關係文書) : 보물 제482호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는 고산의 수적과 고산에 관계되는 문헌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수적에는 『금쇄동집고』, 『금쇄동기』, 『산중신곡』 등이 있다. 관계문서로는 은사첩, 윤고산 출계례조입안이 있다. 고산이 직접 손으로 쓰거나, 엮어 펴낸 수적들과 고산과 관계된 여러 문헌들이다.

동집고(金鎖洞集古) 동집고(金鎖洞集古)

고산이 금쇄동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도연명, 이백, 백거이 등 중국시인들의 시구를 모아 엮어 손수 쓴 것과, 자기가 지은 한시(漢詩)와 우리말로 쓴 단가(短歌)를 합하여 첩으로 꾸민 것이다. 고산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문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다.

금쇄동기(金鎖洞記) 금쇄동기(金鎖洞記)

1640년(인조18) 고산이 54세 때 은거생활을 하던 현산면 금쇄동에서 지은 작품으로 금쇄동의 지형과 산세, 승경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한문 수필집이다. 금쇄동기에는 금쇄동의 비경과 22개의 지명 등 금쇄동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은사첩(恩賜帖) 은사첩(恩賜帖)

고산이 42세 때부터 46세 때까지 봉림대군(효종) 등으로부터 하사 받은 물품 목록을 제책해 놓은 서첩이다. 책은 2권으로 되어 있으며, 인조와 봉림대군(효종)이 여러 곡식과 잡물을 내린 것에 대한 송장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으로 고산은 봉림대군의 스승을 지냈다.

고산양자 예조입안(禮曹立案)문서 고산양자 예조입안(禮曹立案)문서

고산이 8세 때 해남윤씨의 대종을 잇기 위해 큰집으로 양자입계(養子入系)한 사실을 8년 후인 1602년(선조35)에 예조에서 입안해준 문서이다. 오늘날 공증서(公證書)와 같다.

지정 14년 노비문서(지정십사년노비문서) : 보물 제483호
<표제와 내용일부> 지정 14년 노비문서(지정십사년노비문서) : 보물 제483호
<표제와 내용일부>

이 노비문권은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 소지(所志) 6장, 입안(입안) 2장, 모두 8장으로 된 문서로 많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좀이 먹어 훼손된 것을 1755년(영조20)에 다시 6장을 한 제첩으로 다시 꾸며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고 표제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고산유고 목판일괄(고산유고목판일괄) : 유형문화재 제219호 고산유고 목판일괄(고산유고목판일괄) : 유형문화재 제219호

고산 윤선도의 시문집을 새긴 목판으로 『고산유고』의 목판 268매 『고산유사』의 목판 7매, 『고산선생연보』30매 등이다.
고산의 공적을 기리고 원본의 유실에 대비하여 정조가 전라감사 서유린에게 명하여 제작한 목판으로 305본이다. 정조20년(1796)과 19세기 말에 각각 새겨진 것으로, 빠진 목판이 없고 유고집 안에 한글가사가 실려 있다. 현재 고산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모첩(永募帖) 영모첩(永募帖)

고산이 어버이를 사모하는 글을 담은 책으로 총4권이다.

고산 급제답안지 고산 급제답안지

1633년(인조 11) 고산이 47세 때 나라의 경사 때 있었던 과거시험인 ‘증광향해별시(增廣鄕解別試)’에서 장원 급제한 답안지로 16장이다.

방성도(方星圖) 방성도(方星圖)

공재윤두서가 사용한 천문에 관한 자료집이다.

고산 유금(孤山遺琴) 고산 유금(孤山遺琴)

고산이 직접 제작하여 사용했던 거문고로 고산의 현손 낙서 윤덕희가 ‘고산유금(孤山遺琴)’이라고 낙인(烙印)을 찍어놓았다.

서죽(筮竹) 서죽(筮竹)

공재가 사용했던 것으로 주역의 64괘를 풀이하여 점을 치던 점술구이다

백동경(白銅鏡) 백동경(白銅鏡)

종가에서 대대로 사용되었던 거울로 공재가 자화상을 그리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규한록(閨恨錄) 규한록(閨恨錄)

해남윤씨가에는 부녀자들의 생활이 담겨 있는 규방가사가 많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중 대표적인 작품이 ‘규한록’이다. 규한록은 17세에 결혼하여 미망인이 된 광주이씨 종부가 1834년 3월 보성 한실(대곡)의 친정에 있을 때 시어머니에게 올린 편지형식의 글로 쓴 규방가사다. 두루마리 길이가 13m에 이른다.

옥동유필 옥동유필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의 작품집이다. 옥동 이서는 서예의 대가이며 공재와 친분이 두터워 서로 작품을 주고받았으며, 해남윤씨 종가 고택인 녹우당의 당호를 직접 지어주기도 하였다.

윤두서상(尹斗緖像) : 국보 제240호 윤두서상(尹斗緖像) : 국보 제240호

공재 윤두서(1668~1715)가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이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자화상은 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윤두서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입체감 있게 표현된 얼굴과 자연스럽게 늘어진 풍성한 수염, 살아있는 듯 꿰뚫어 보는 눈동자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이다.

해남윤씨 가전고화첩(해남윤씨가전고화첩) : 보물 제481호
해남윤씨 가전고화첩은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인 공재 윤두서의 서화첩으로 지본수묵(紙本水墨)혹은 담채(淡彩)한 소품들을 체계 없이 조성한 것이다. 크기나 소재, 기법이 다양하여 공재 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서화첩은 ‘자화상’과 ‘송하처사도’, 『윤씨가보』라 쓰여진 화첩 2권과 『가전유묵』이라고 꾸며진 서첩 3권 등이다. 화첩 1권은 선면(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부채의 겉면) 그림을 모아 놓은 것으로 숙종 30년(1704)에서 숙종 34년(1708)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다른 1권은 크기가 다양하며 내용도 산수화·인물화·풍속화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윤두서가 즐겨 그렸다는 말 그림인 ‘백마도’와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공재 윤두서는 겸재 정선·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재 중 한명으로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말 그림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윤두서의 화풍은 가법(家法)으로 전해져 그의 아들 윤덕희(尹德熙. 1685~1766), 손자 윤용(尹容. 1708~1770)의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윤씨가보(보물 481-1호)와 가전보회(보물 481-2호) 윤씨가보(보물 481-1호)와 가전보회(보물 481-2호)

공재의 화첩을 한권으로 낙서 윤덕희가 1719년 첩자로 꾸민 것이다.

백마도(白馬圖) 백마도(白馬圖)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하게 묘사되고 정지한 상태에서 뒷다리를 살짝 들어 올린 모습이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수룡도(水龍圖) 수룡도(水龍圖)

오른쪽에 깎아 내린 듯 절벽을 배치하고 언덕위에는 칼을 든 인물이 물위로 떠오르는 수중룡(水中龍)을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며 용의 움직임에 생겨 난 소용돌이가 격렬한 싸움의 장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경답목우도(耕沓牧牛圖) 경답목우도(耕沓牧牛圖)

왼쪽에 두 그루 나무가 솟아 있고 반대편에 작은 나무 그늘 밑에서 동자가 낮잠을 즐기고 있으며 바로 앞에 소 두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중경의 넓은 공간에는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 농부모습이 보이는데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인도(美人圖) 미인도(美人圖)

공재공의 손자인 청고 윤용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미인도는 큰 틀에 머리관을 양손으로 매만지는 모습으로 훗날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화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 : 보물 481-3호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 : 보물 481-3호

문인화가였던 공재 윤두서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로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대동여지도」(1860)보다 151년이나 앞선 지도이다.
이 그림은 종이 위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72.5cm, 세로 112cm이다. 윤두서는 ‘중국여지도’, ‘일본여도’도 그렸다고 전하나 현재는 ‘동국여지도’와 ‘일본여도’만이 남아있다. 강줄기와 산맥의 표시를 대부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주변도서를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였다.

일본여도(日本與圖) : 보물 481-4호 일본여도(日本與圖) : 보물 481-4호

「일본여도」는 임진왜란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숙종이 공재에게 일본지도를 제작할 것을 명하게 되자 48명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그 정보를 토대로 그렸다는 지도로 일본의 지형과 거리는 물론 각 지방 부호들의 집까지도 상세히 파악해 표시하고 있다.

고택여행

녹우당은 조선조 문신이자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1587~1671)선생의 고택이다. 아울러 가문의 유물 및 유적이 보존되고 있는 남도문화유산의 집결지이다.
이곳에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고산유물관을 건립하였으며, 고택 에는 종손과 종부가 거주하고 있어 녹우당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외에도 4대조를 모시는 가묘와 고산선생, 어초은 선생을 기리는 사당, 재각인 추원당 등의 고건축이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장원을 떠올리는 백련지와 소나무 숲, 비자나무 숲 등의 자연조경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품격을 더한다.

사랑채

효종 임금이 세자시절 사부였던 고산을 흠모하여 수원에 사랑채를 지어 하사한 것을 1668년 지금의 장소로 이건하여 건축하였다.

고산유물관

1990년 12월에 준공 1991년 3월에 개관하여 공재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보물 제482호), 지정14년노비문권(보물 제483호) 등 유물 4,600여점을 전시·관리하고 있다.

고산사당

고산 사당은 영조 3년(1727)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불천지위는 4대조를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사당에서 모실 수 있게 하고 있는데 보통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 때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이다. 매년 음력 6월 11일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어초은사당

어초은 사당은 묘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 11월 15일 이 사당에서 시제사를 지낸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 반칸 폭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백련지와 소나무 숲

‘흰 연꽃이 피는 마을’이라고 하여 백련동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지는 연못을 파고 나온 흙으로 동산을 마음심(心) 형태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연지 가운데 섬에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녹우당 원림에서도 핵심적인 공간을 차지한다.

비자나무 숲

녹우당 뒷산인 덕음산 중턱에 500여년 된 400여그루의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 숲은 어초은이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나무를 심고 보호한 인공 숲이다. 문화적·생태학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아 1972년 7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어부사시사 시비

한국문인협회가 건립한 고산의 어부사시사 시비

<고산윤선도유적지> <고산윤선도유적지>

※ 고산유적 관리사무소 ☏ 061-530-5548

◆ 찾아가는 길 ◆
※ 서해안 고속도로 이용
서서울IC ▶ 목포 ▶ 영암 ▶ 해남읍(5시간 소요)

※ 경부 호남고속도로 이용
양재IC ▶ 광산IC(4시간) ▶ 나주 ▶ 영암 ▶ 해남 (시간소요)

※ KTX
서울 ▶ 목포 (1일 5회 왕복 - 2시간58분 소요)

※ 고속버스 이용
서울 ▶ 해남 (1일 7회 왕복 - 5시간 30분)
서울 ▶ 목포 (1일 24회 왕복 - 4시간 30분)
부산 ▶ 해남 (1일 4회 왕복 - 5시간 20분)
광주 ▶ 해남 직통 (06:00~20:30 - 1시간 20분)
목포 ▶ 해남 첫차 (05:30~21:00 - 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