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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선생고택

연혁
고택 안마당 고택 안마당

중요민속자료 제190호 지정

지정일 : 1984년 12월 24일

소유자 : 윤완식, 관리자 : 윤완식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건축시기 : 조선시대

논산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선생 대에 지어진 건물로써 파평 윤씨 세거지(世居之)인 이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고택 서쪽에는 노성향교와 인접하여 나란히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동쪽 능선 너머에는 공자의 영당인 노성 궐리사5)가 있고, 노성산 정상부에는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노성산성 유적이 남아 있다. 고택 남쪽 진입부에는 작은 안산이 있고 그 아래 윤증 모친의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이 외에 주변에는 많은 유적들이 17세기부터 윤증 고택이 세워진 18세기 및 19세기에 건립되거나 이전된 것으로써 논산명재고택이 위치할 당시 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택의 전반적인 구성은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후원에는 완만 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전통한옥의 자연스러움과 멋스러움을 함께 보여준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조선시대 상류주택으로써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선생 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파평윤씨의 노성(논산) 입향은 중종대의 문신인 윤탁(尹倬)의 손자, 윤돈(尹暾, 1519~1577)이 처가가 있는 니산현(尼山縣)에 들어와 살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윤창세(尹昌世)가 처가의 전장(田庄)이 있는 병사리 유봉 (酉峯)에 옮겨 정착하고 부친인 윤돈의 묘소를 이곳에 정함으로써 윤씨가문의 터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윤씨가는 예법과 교육, 문중 결속 등을 통한 차별화로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6세기 말 이래 무엇보다 교육에 힘을 써 다수의 사마시 및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고, 17세기에는 병사리를 근거지로 종회(宗會)를 정례적으로 열고, 종약 (宗約)을 마련하는 한편, 종학당을 건립하고 종회 운영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의전(義田)을 설치·운영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노종오방파(노종오방파)’의 형성과 ‘8거(八擧)’의 성장을 거쳐 조선 말기까지 단일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를 46명이나 배출하는 성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윤황 - 윤선거 - 윤증으로 이어지는 3대라 할 수 있다.
윤황(尹煌, 1571~163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이다. 충청병마절도사 선지(先智)의 증손으로, 할아 버지는 돈(暾)이고, 아버지는 창세(昌世)이며, 어머니는 부제학(副提學) 경혼(慶渾)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급제, 1601년 전적(典籍)에 이어 감찰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1623년의 인조반정 뒤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 등을 지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사간으로서 극력 척화를 주장하였다. 환도 후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아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나와 생을 마감하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
윤선거(尹宣擧, 1610-1669)는 대사간 윤황의 아들로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 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이었다. 1633년(인조11)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고 1636년 후금(後金)의 사신 이 입국했을 때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자고 상소했으며, 이 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江華)에 피난, 성문을 지키다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성을 탈출하였다. 자의(諮議), 형조좌랑(刑曹佐郞), 지평(持平), 장령(掌 令), 집의(執義) 등의 벼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하고 니산에 머물렀다. 60세에 생을 마감하였고,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교하(交河)의 신곡서원(新谷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에는 노서유고(魯西遺稿). 계갑록(癸甲錄)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 등이 있다.
윤증(尹拯, 1629~1714)은 미촌 윤선거(尹宣擧) 아들이자, 윤황(尹煌)의 손자로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유봉(酉峯)이다. 할아버지가 귀양이후 돌아와 이후 자손들에게 환로(宦路,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었으며, 어머니인 공주 이씨가 윤증의 7살 되던 해 병자호란 와중에 순결을 하게 된다. 윤증은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게 된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 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 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1660년 효종이 윤증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더욱더 학문과 훈육에 뜻을 두었다. 그의 학문이 세상에 회자되면서 많은 선비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모여들었다. 숙종대에 이르러 김수향(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윤증 집안의 학문을 맑고 깨끗하며 실천함이 매우 돈독하여 선비들이 많이 따르며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천거하자 숙종은 이에 윤증선생에게 호조참의 벼슬을 내린다. 하지만 사양하고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에는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며 출사하기 종용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 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면서도 정승이 되었다고 해서 당시의 사람들은 백의정승이라고 불렀다. 사후 홍주의 용계서원과 노성의 노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주요저서로 시문집「명재유고(明齋遺稿)」가 있다.
※ 참조
중요민속자료 기록화보고서 - 한국의 전통가옥 17 「尹拯先生古宅」, 문화재청
「논산 병사마을 - 호서 3대명족(名族) 노성윤씨가의 옛 터전」, 대원사

논산명재고택 논산명재고택
명재선생유상(明齋先生遺像) 명재선생유상(明齋先生遺像)
명재고택배치전경 명재고택배치전경
명재고택 주변전경 명재고택 주변전경
윤창세선생 묘소일원(향토유적 제9호) 윤창세선생 묘소일원(향토유적 제9호)
공주이씨 정려각(사진교체예정) 공주이씨 정려각(사진교체예정)
문화와전통
검소함과 실용의 정신이 깃든 고택

중요민속자료 190호로 지정된 ‘논산명재고택’은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선생 대에 지어진 파평윤씨 종가이다. 하지만 이 고택이 지어질 당시에 명재 선생은 이곳에 기거하지 않았다. 명재선생을 위해 지었지만 본인은 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일생을 벼슬하지 않고도 ‘우의정’이라는 관직을 하사받아 ‘백의정승’이라는 명예를 얻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명재는 인조대에 출생하여 효종·현종·숙종을 포함해 4대 임금을 모시는 동안 임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정승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명재선생이 머물던 곳은 현재 명재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유봉영당(酉峯影堂) 근처인 산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산자락 아래의 작은 공간에서 초가삼간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셨다.


명재선생이 머물던 곳은 현재 명재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유봉영당(酉峯影堂) 근처인 산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산자락 아래의 작은 공간에서 초가삼간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셨다.

유봉영당 유봉영당

현재 터 자리는 작은 비석이 그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많은 문인들과 지방의 유지들이 선생을 찾을 때에는 그곳으로 찾아가 선생과 식사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낭비와 허례허식을 사치라고 생각하며 일생을 살아간 명재선생이 머무른 자리만큼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음을 집터에서도 가늠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명재선생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선생이 계시는 방의 문틈 사이로 모습을 보며 그려야 했다고 한다. 이유는 명재선생은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여겨 그리지 못하게 해서였다. 할 수 없이 여러 날에 걸쳐 명재선생의 모습을 문틈사이로 보고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명재선생 초가집 터 명재선생 초가집 터

명재선생의 검소함을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종가의 제사음식이다.
명재 윤증집안의 제사상은 매우 소박하다. 그것은 윤증선생이 “제사상에 낭비가 심한 떡을 올리지 말며 일거리가 지나친 유밀과와 기름이 들어간 전도 올리지 말고……, 제사는 엄정하되 간소하게 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명재 윤증종중의 진찬도

신위(神位)

제4행
시접
제3행
육탕
어탕
소탕
제2행
숙채
생채
초장
간장
김치
새우젖/조기
제1행
대추
식혜

먼저 제사상의 진찬도는 대종계의 진찬도를 축약?간소화시킨 것으로 진설 방법과 제수음식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과일로는 대추, 밤, 감 등 3색 실과 외에 다른 과일은 올리지 않으며, 나물도 삼색 나물을 한 접시에 담고, 무생채를 한 그릇 올릴 뿐이다. 한편 식혜를 대신하여 소금에 절인 생조기 한 토막을 새우젓과 함께 놓는다. 전은 없으며 삼탕과 삼적을 쓴다. 적은 쇠고기, 명태, 닭 등을 쓰나 모두 생것을 사용하며, 닭의 경우 반 마리만 올린다. 탕은 육탕, 어탕, 무와 두부를 넣은 소탕(蔬湯)을 하며 작은 그릇에 건더기만 담는다. 포는 삼포로 육포, 어포, 문어포를 올린다. 한편 이 집안의 설 차례상은 더욱 검소하다. 과일, 김치, 식혜, 북어포 그리고 떡국만 한 그릇 올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음식들은 작은 상에 진설되는데, 워나 가짓수와 양이 적으므로 작은 상이 넓게 느껴질 정도이다.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논산 병사마을, 2008.)

명재선생의 이러한 유언은 제사를 지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상에 대한 참된 마음과 자세였다. 허례허식과 사치스러운 음식을 통해 보이는 것을 위주로 하기 보다는 검소한 가운데에도 음식을 장만하는 때에는 정성을 들여 깨끗한 자세로 성의를 표하라는 것이다.
종가에서는 지금도 제사가 있는 날로 3일 이전부터는 웃음을 삼가고 고기를 금하고 있으며 제사 물품과 음식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침을 튀길 것을 염려하여 창호지를 입게 물고 제수(祭需)를 장만한다고 한다.

밤이 없을 때는 감자를 대신 올리기도 한다. 즉 밤도 종자고 감자도 종자이므로 집에서 농사지은 것이면 된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시간 역시 여느 종가와는 다르다. 보통 저녁 7~8시경에 이루어지며 제삿날과 명절, 생일도 모두 양력을 사용한다. 매년 날이 바뀌는 불편을 덜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는 현 종손의 증조부 윤하중선생이 천문학을 연구한 것에 기인하며, 이는 이 집안의 가풍인 실용성과 검소함을 반영하고 있다.

명재의 9대손인 이은시사(離隱時舍) 윤하중(尹昰重)선생은 개화기 때 인물로 천문학에 밝았다. 그는 1910년 24시간제 해시계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천문학관련 저서인 「성력정수(星曆正數)」를 한문으로 편찬하였다. 연구도중 연행의 시각 기준이 잘못되어 있음을 밝혔는데 당시 ‘동아일보’ 1938년 12월에 3차례나 관련 기사가 소개되었다. 내용은 서기 원년 1월 1일부터 병자년(1936) 말일까지 시간의 오차가 1일 8시간 16분의 차이가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1년이 365일 5시간 50분이 정상이나,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에서는 365일 5시간 49분으로 계산하여 발생한 매년 1분의 시간 오차가 누적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 때 왕래한 편지들이 지금도 이 집에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당시 해시계의 영점을 놓고 천체를 살필 수 있는 위치를 정하고 이곳에 ‘일영표준(日影標準)’이라는 글을 댓돌에 새기었다. 지금도 고택 사랑채를 오르는 돌계단 윗부분에 네모난 댓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9대 종손 대부터 종가에서는 음력설 대신 양력설을 지내고 모든 행사를 음력이 아닌 양력을 기준으로 하였다. 현재 13대 종손 윤완식씨도 이러한 전통을 가법으로 하고 있다.

일영표준(日影標準) 일영표준(日影標準)
해시계 해시계
명재선생 초상 초본(중요민속자료 22-12호) 명재선생 초상 초본(중요민속자료 22-12호)
가옥구조
명재고택 배치전경 명재고택 배치전경

조선시대 충청도 양반의 본거지는 서인들의 집결지였던 회덕지역과 노성지방이라고 한다. 그 중 노성지방은 노성산을 제외하고는 남북으로 흐르는 자성천과 조그만 언덕이 있는 평활한 충청도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명재선생고택은 노성산 남측 기슭에 자리 잡아 산 능선에 감싸 안긴 모습이다.

고택 전면 진입로 우측에 ‘정려각’이 있고, 외곽담장 없이 연못 옆을 통해 가옥으로 진입한다. 고택의 전반적인 구성은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안채 우측 높은 지대에 담장을 둘러 배치되었고, 진입은 안채 담장 밖 길을 따라 올라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사랑채 우측은 넓은 공터가 있는데 현재 장독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대문채 앞은 구절초 밭이 있고, 그 좌측에 고직사가 있다. 사랑채 앞마당 우측 구릉지에 찻집인 ‘초연당’이 2003년부터 부속건물로 배치되어 있다.
고택 좌측은 담장하나 사이로‘노성향교’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우측 구릉지를 넘어가면 노성 ‘궐리사’가 있다.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명재고택은 큰 규모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고택을 축조한 구조역시 과학적 원리와 균형의 조화로움이 배어 있다.
안채 좌측 배면과 곳간채 사이의 공간적 특징과 사랑채의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안채 구성에 있어서 남쪽은 안채와 곳간채가 널찍이 떨어져 있지만 북쪽은 처마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있다. 이는 의도적인 공간 배치로써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먼저 두건물의 인동간격이 가까워 곳간채 처마 낙수가 안채기단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안채 툇마루와 안방의 일조량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건물의 좌향상 겨울철 북서풍은 좁은 건물사이를 통과해 넓은 건물사이로 퍼지게 되어 추위를 덜고, 여름철 남서풍은 넓은 건물사이를 통과해 좁은 건물사이를 빠져나가는 동안 안채 툇마루에 시원함을 가져온다. 이를 통해 곳간채의 통풍을 돕는다. 명재고택에서 사랑채의 배치와 구성만큼이나 곳간채의 배치는 바람(통풍), 빛(일조), 낙수를 생각한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준다.

안채 구성의 또 다른 특징은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마주하는 내외벽이다. 조선시대 주거건축은 유교적인 전통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분리를 통해 남녀의 거주 공간을 달리하였다. 이는 남녀간 생활 공간 분리를 통해 바깥일과 집안일을 도모하는데 있어 상호간의 영역분리 및 보호와 안전감을 더한다. 내외벽은 사람이 안채로 진입하는 중문을 들어선 이후 쉽사리 안채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안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출입자의 성별과 위치를 잘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는 내외벽 하단에 약 30cm 가량의 공간을 두어 다리와 신발을 통해 상대방을 알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안채가 과학적 원리와 배려가 깃든 곳이라면 사랑채 역시 공간 구조의 치밀함과 선경(仙境)을 느낄 수 있는 개성을 갖춘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은 고택의 가장 웃어른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사랑채 중앙에 위치하며 대청으로 통하는 4분합맹장지문을 설치하였고 정면 각 칸에는 툇마루로 통하는 2짝 세살문이 설치되어있다. 큰사랑방의 문(門) 중에서 특징적인 것이 ‘안고지기문’이라는 것인데, 고방 위치에 설치되기도 하고 큰사랑방의 공간분할 시에 이동하여 장지문이되는 가변문이다. 미닫이여닫이 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작은 공간이지만 효율적인 공간창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으로 국내고택 중에서도 명재고택만의 특징이다. 큰사랑방은 대청, 툇마루, 누마루방, 고방(작은사랑방 연결)까지 4방이 연결되는 특징이 있고 벽체는 대청쪽으로 반칸 폭으로 형성되어 있다.
사랑채의 누마루방은 종계(宗契), 학계(學契), 시계(詩契) 등의 행사는 물론 차를 마시고 손님을 접대하고 사색을 즐기는 공간이다. 대청보다 약 50cm를 높여 만든 누마루에는 "이은시사(離隱時舍)"라는 편액이 있고 그 아래 네 개의 문에는 경첩이 달려있어 중앙의 두 문을 좌우로 열면 두 짝씩 겹쳐지고, 겹친 두 짝을 밀어 올려 걸 수 있도록 되어있다. 밀어올린 문을 통해 고택의 연지와 각종 수석 등의 여러 조경물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멀리 입구와 마을까지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명재고택 사랑채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또하나의 편액이 있다. 이는 누마루 이름을 ‘도원인가(桃園人家)’라 칭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도원인가의 ‘도(桃)’자는 나무 목(木)과 조짐 조(兆)자를 합하여 ‘복숭아나무’를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편액을 보면 木자가 兆자 위로 올라간 모습으로 적혀있다. 이는 누마루가 상대적으로 높아 ‘복숭아나무 桃’자를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 사랑채 주인의 기지를 느낄 수 있는 점이다.

사랑채 전경 사랑채 전경
연지에서 바라본 명재고택 연지에서 바라본 명재고택
대문간에서 본 안채 대문간에서 본 안채
곳간채와 안채 서쪽 배면 곳간채와 안채 서쪽 배면
내외문 안쪽으로 보이는 내외벽 내외문 안쪽으로 보이는 내외벽
방연판 (안채 처마 밑에 달아 연기가 방이나 대청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치) 방연판 (안채 처마 밑에 달아 연기가 방이나 대청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치)
안채에서 사당에 이르는 길 안채에서 사당에 이르는 길
누마루방 누마루방
누마루전경 누마루전경
도원인가 편액 도원인가 편액
문화유산
종학원(충남유형문화재 제152호)
정수루 남측 전경 정수루 남측 전경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으며, 윤순거(1596-1668)가 문중의 자녀 교육을 위해 건립한 것으로, 종약을 만들고 자녀와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 합숙 교육을 받던 곳이다.
종학원은 4개동인 종학당, 정수루, 백록당, 보인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수루는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로 이용하였고, 보인당은 지금도 문중의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윤순거(尹舜擧)의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동토(童土)이며, 대사간 윤황(尹煌)과 당대의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성혼(成渾)의 딸 창녕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귀양을 가고, 작은 아버지 윤전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 내려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가 되어 벼슬길에 오르고 이어 상의원주부, 형조좌랑, 안음현감, 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는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1655년(효종 6)에 종부시주부, 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효종 1)에는 영월군수로 재직하면서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하여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질서인 군신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였으며,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기도 하였다.
1665년에는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사직서령, 세자익위사익위, 군자감정, 예빈시정, 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정수루와 백록당 정수루와 백록당
미하일 고르바초프 기념식수 미하일 고르바초프 기념식수
종학원 일주문 종학원 일주문
상투관 (중요민속자료22-1호) 상투관 (중요민속자료22-1호)

머리 정돈과 장식을 위해 상투위에 쓰던 상투관으로 나무 재질로 만들었다. 높이는 6.6cm이며 위쪽이 둥근 원형을 이루고 앞, 머리, 뒤가 이어져 있는 4줄의 골이 나있다. 양 옆으로는 상투비녀를 꽂을 수 있는 트임이 있다.

상투머리용 빗 (중요민속자료22-2호) 상투머리용 빗 (중요민속자료22-2호)

상투머리를 빗는데 사용하던 빗이다. 향나무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길이 16cm, 폭 6cm이다. 등부분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양 끝부분은 각이 진 형태이다. 31개의 빗살이 들어있다.

빗치개 (중요민속자료22-3호) 빗치개 (중요민속자료22-3호)
살쩍밀이 (중요민속자료22-4호) 살쩍밀이 (중요민속자료22-4호)

뿔로 얇게 만들어 망건을 쓸 때 귀 옆머리를 망건 밑으로 살짝 밀어 넣는데 사용했던 도구로 지금은 그 원형이 많이 파손되어 형태만 남아있다. 망건은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머리에 두른 운두 10cm 가량의 그물처럼 생긴 물건을 뜻한다.

신 (중요민속자료 22-5호) 신 (중요민속자료 22-5호)

윤증선생이 사용하던 신으로 재질은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길이 32cm, 높이 5cm이다. 갖신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합죽선 (중요민속자료 22-7호) 합죽선 (중요민속자료 22-7호)

합죽선은 접을 수 있는 부채를 뜻한다. 길이가 40cm이며 문양이 없고 대나무와 한지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부챗살에 마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대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목화 (중요민속자료 22-8호) 백목화 (중요민속자료 22-8호)

길이 31cm, 높이 34cm로 흰 무명천과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국상(國喪)때 예복에 갖추어 신었다.

월자 (중요민속자료 22-9호) 월자 (중요민속자료 22-9호)

월자란 일종의 가발로 여자들이 대례복 등을 입을 때 머리숱이 많아 보이도록 덧들이는 땋은 머리를 말한다. 길이가 105cm로 머리 세 가닥을 땋아서 한 개의 굵은 다래를 만들었다. 위에는 약간 둥글게 묶어서 검은 천을 씌운 다음 조그만 천고리를 달았으며 끝에는 두 가닥의 붉은 댕기를 드리웠다.

비녀 (중요민속자료 22-11호) 비녀 (중요민속자료 22-11호)

은으로 만들어진 비녀로, 직경 0.9cm의 원통형이다. 弓(궁)자 모양의 머리 옆면에는 꽃잎을 새기고, 그 위와 아래의 꽃술 부분에는 붉은색의 둥글고 납작한 모양의 옥(玉)을 박았다. 위쪽의 꽃잎 중앙에도 옆면과 같은 모양의 옥을 박았으며 비녀의 몸통과 머리는 따로 만들어 연결시켰다.

영당기적 (중요민속자료 22-12호) 영당기적 (중요민속자료 22-12호)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윤증가의 유품 중 초상화관련 유물을 지정해제하고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다. 영당기적(影堂紀蹟)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 卞良(변량)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 장경주, 1788년 이명기, 1885년 이한철이 모사할 때까지 4번의 제작사례를 기록하였다. 제작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명재선생 유상 (중요민속자료 22-12호) 명재선생 유상 (중요민속자료 22-12호)

평상복차림의 명재선생 정면을 그린 초상화이다. 왼쪽 윗부분에는 '숭정기원후5기미8월모(崇禎紀元後五己未八月摹)'라는 묵서가 있어 1919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증 초상 (중요민속자료 22-12호) 윤증 초상 (중요민속자료 22-12호)

중요민속자료 22-12호로 윤증가의 유물 중 초상화관련 유물을 지정해제하고 보물로 지정됨.

초상 초본(중요민속자료 22-12호) 초상 초본(중요민속자료 22-12호)

초상 제작의 과정을 알려주는 측면 초상본이다.

인장 (중요민속자료 22-13호) 인장 (중요민속자료 22-13호)

인장은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로부터 11대에 이르는 것으로 1개의 타원형 인장을 제외하고 모두 방형 석제(石製)인장이며, 상태는 양호하나 일부는 인면(印面)이 마모되어 있다.

벼루 (중요민속자료 22-13호) 벼루 (중요민속자료 22-13호)

사각벼루로 앞면은 장생문연(長生文硯)이며 뒷면은 일월연(日月硯)이다. 장생문연은 의미 그대로 오래도록 살기를 기원함을 뜻하는 것으로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사슴 등을 표현하고 있다. 일월연은 먹을 가는 부분으로 둥근 해 같은 모양이며, 물을 담을 수 있도록 한 오목한 앞부분은 둥근 달의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태양이 달을 살포시 덮고 있는 모습이다.

치미추(중요민속자료 22-13호) 치미추(중요민속자료 22-13호)

꿩 깃털을 모아 만든 빗자루로 깃털의 뿌리 부분을 모아 엮고, 지승망으로 감싼 뒤에 자루에 연결하였다. 자루에 깃털을 연결한 부분은 원추형이며, 손잡이 부분의 양끝에는 14면체형 장식을 조각하였다. 지승망은 종이로 꼰 노끈으로 엮어 만들어진 망이다.

혼천의 (중요민속자료 22-13호) 혼천의 (중요민속자료 22-13호)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는 장치이다. 삼중으로 되어 있으며, 육합의(六合儀)-삼진의(三辰儀)-사유의(四遊儀)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십자형 받침과 4개의 원기둥, 남북극의 축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각각의 환은 대나무로 만들었다. 혼천의를 구성하는 각각의 환이 철사와 실로 임시 고정되어 있어 여러 차례 수선된 것으로 보이고 환의 표면 눈금 일부가 결실되어 있다.

해시계 (중요민속자료 22-13호) 해시계 (중요민속자료 22-13호)

장방형의 석제 평면 해시계로 전체적으로 양호하나 가운데 꽂았던 영침(影針)이 결실되었다.

아얌 (중요민속자료 22-14호) 아얌 (중요민속자료 22-14호)

바느질로 된 아얌은 머리에 쓰는 모부(帽部)와 뒤에 늘어지는 댕기 모양의 드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부의 윗부분은 정수리부분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얌 모부의 윗부분은 검은색 주(紬, 명주)를 대고 누볐으며, 아래쪽에는 담비털가죽을 대고 평직으로 제작하여 양면을 기모한 홍색의 양면 기모 융직물을 위에서 아래까지 전체적으로 댔다.

명재유고(明齋遺稿) 명재유고(明齋遺稿)

조선 후기 학자 윤증(尹拯, 1629~1714)의 시문집으로 1732년(영조 8) 종손 동수(東洙)가 편집·간행하였다. 당시 정치사상, 인물과 사회동향 및 당쟁·예송(禮訟)을 위한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 51권 2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택여행
한옥은 사람이 함께 해야

중요민속자료 190호로 지정된 ‘논산 명재 고택(論山明齋古宅)’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오는 고택중 하나이다.
전국의 고택은 최근 전통문화에 관한 실질적 체험학습과 함께 한국의 전통문화 원형인 ‘고택(古宅)’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며 개인 및 단체 관람객이 급증하고 있다. 이 가운데 명재고택은 ‘한국 고택의 교과서’라고 불리며 역사·건축 연구자, 풍수지리 연구가, 문화유산 애호가 등 여러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되고 있으며 각종 미디어 매체의 관심 대상으로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종가의 안주인들은 많은 내방객들로 인해 접빈(接賓)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말씀하지만 ‘고택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종가에는 종손을 비롯한 식구들이 함께 머물러야 고택의 역사와 전통이 더욱 오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고택은 목재와 기와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사람이 살지 않으면 20년도 채 되지 않아 방치되고 낡아서 부식된다. 명재고택은 근 300년이라는 역사가 흘렀지만 여러 대의 종손을 거치는 가운데에 그 원형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또한 사람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종가의 이러한 뜻은 고택을 개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를 모색함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1년에 약 1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내방하는 곳으로 알려졌는데 예약을 하지 않으면 고택체험과 숙박의 기회가 어려울 정도이다.
다례(茶禮)를 통한 전통예절교육과 함께 고택의 유래와 역사에 대한 가이드역시 준비되어 있다. 숙박은 ‘사랑채’ 전체를 예약할 수 있으며 큰사랑, 안사랑, 작은사랑을 나누어 이용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초연당과 별채에도 숙식공간을 마련하고 있어 충청남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명재고택은 매우 매력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명성만큼이나 깊고 진한 장맛

명재고택 또 하나의 자랑은 전독간장과 된장에 있다. 270여 년 동안 이어오는 간장과 된장은 전년도의 장과 새로 담근 장을 함께 섞어서 그 씨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오랜 세월 속에서도 끊임없이 장맛을 유지해오는 비결이다. 그리고 간장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한 우물만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고택 사랑채 앞 ‘우물’이 그것인데, 물맛이 한결같아 깊고 진한 장맛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장맛을 통해 이어온 대표적인 가승음식으로는 떡전골과 떡볶이가 있다. 식재료와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차이가 없으나 그 장맛을 통해 남다른 음식으로 호평을 받게 된 것이다. 장맛을 통해 유명한 또 하나의 음식으로 ‘참게장’이 있다. 참게장은 과거 임금의 진상품으로도 선정되었는데 알이 꽉 들어차기로 유명한 노성 참게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채워 간장을 부어 게장을 만들었다. 노성의 자랑이었던 노성 게장의 맛을 현 명재고택의 종가에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택에서 숙식을 원하는 접빈객들도 이러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고택은 문화재이자 종손들의 거주공간

고택을 이용하는 체험객과 관람객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 유익하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고택 원형을 보존하고 가꾸는 데에도 많은 일손과 노력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고택은 건축문화재로써 많은 시민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수백 년간 후손들이 살고 있는 생활공간이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야 마침내 전기시설을 마련한 명재고택은 그 만큼 고택원형 보존을 위해 남다른 애를 쓰고 있다. 어린아이를 동반하는 가족단위 체험객들에게 고택에서의 하루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고택에 머무는 동안은 고택의 소중함을 먼저 알아야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의미는 앞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고택을 관광하고 체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준비되어야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라는 진지한 고민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종가사람들의 바램이다.
더욱이 사랑채는 여전히 종손이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며 선대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또한 안채는 여전히 종가사람들의 거주공간이자 사생활이 존중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에 고택의 종손들은 더욱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어렵다.

‘효(孝) 문화재’를 통한 지역문화 소통의 장

명재윤증고택의 마당에서는 매년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전통국악 공연 및 풍물패 공연 을 10월 초순에 개최하고 있다. ‘효 문화재‘는 올해로 6회째 개최될 예정이다. 2008년(제5회)에 는 판소리 명인 오정해씨의 공연이 함께 이루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명재선생의 실용과 검소함의 정신을 후손들이 이어가고 나아가 지역문화와 소통하기 위한 명재고택종손과 종부, 후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연락처 :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 ☏ 041) 735 - 1215

<찾아가는 길>
⊙ 서울 및 수도권(자가용)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톨게이트 - 23번국도에서 논산방면으로 약40km - 노성면 - 노성중학교앞 우회전 - 고택 (서울양재 - 고택 약150km)
⊙ 호남권(자가용)
호남고속도로 - 논산천안고속도로 - 탄천 - 노성(탄천에서 노성 약6km) - 노성중학교앞 좌회전 - 고택
⊙ 영남 및 대전권(자가용)
대전 - 논산국도 - 논산 - 노성(공주방향23번국도) - 노성중학교앞 좌회전 - 고택
⊙ 철도편
논산역하차 - 노성 시내버스 - 노성 - 노성중학교 - 고택
⊙ 대중교통(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논산행 )- 노성하차. 공주행은 공주하차 - 노성환승 - 노성 - 고택
*고속버스터미널 - 공주,논산 - 노성 - 고택
*강변터미널 - 공주 - 노성 -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