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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박세당가

연혁
서계박세당사랑채 서계박세당사랑채

문화재자료(의정부시) 제93호

지정일 : 200년 4월 17일

소유자 : 박용우(서계문화재단이사장)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97

건축시기 : 조선시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반남박씨로 박응주(朴應珠)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고려말 향리가문에서 출발하여 조선후기에는 당대 최고의 문벌가문으로 발전한 가문으로 박세당의 10대조인 박상충(朴尙衷1332-1375)에 이르러 사대부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아들 박은(1370-1422) 대에 이르러 문호가 더욱 신장되었다.
서계가문이 반남박씨 대종(大宗)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계파를 형성한 것은 서계 선생의 조부인 박동선(朴東善1562-1641) 대(代) 이다. 박동선은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90년 문과에 합격하여 검열, 설서, 정언,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 을 거쳐 숭품(崇品)의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박동선의 외아들인 박정은 나라에 큰 공로를 세움으로 서계가문의 유족한 삶의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박정은 1615년 (광해군 7) 진사를 거쳐 1619년(광해군 11)에는 문과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난정, 대북정권의 전횡, 그리고 이와 관련 한 아버지의 수난을 겪는 과정에서 그의 나이 27세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마침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等)에 책훈되고 금주군(錦 洲君)에 봉해지게 된다. 정사공신교서에 따르면 박정에게 주어진 상전(賞典)은 도상(圖像), 구사(丘史), 노비(奴婢), 표리(表裏), 금(金), 내구마(內廐馬) 등과 60결(結)에 달하는 방대한 전답이었다. 이는 각종 공예품과 옷감, 노비, 금, 사패지(賜牌地) 등 실로 많은 것이었다.

서계는 1629년(인조 7) 8월 19일 남원부(南原府) 관아에서 박정과 양주윤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계 박세당의 출생은 이처럼 출중한 아버지와 조부에 따라 유복한 가정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평탄치 못했다.
그의 나이 4세 되던 1632년(인조 10) 반정의 공으로 출세를 보장받았던 아버지가 조부보다 먼저 세상을 여의면서 불운이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635년(인조 13)에는 장형마저 사망함으로서 집안에는 상화(喪禍)가 겹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소년시절의 박세당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라 전국 각지를 전전해야만 했다. 전쟁이 진정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중형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때에 조부 박동선의 상을 당하게 되자 집안에는 3대과부(할머니, 어머니, 큰형수)가 생겨 나게 되었으며 가세가 점차 기울게 되었다.
한편 서계 선생은 1645년(인조 23) 의령남씨와 혼인을 하고 약 10년의 세월동안 남씨 친정에 의탁하여 지낸다. 이는 당시 남귀여가혼 (男歸女家婚)이라는 유습도 있었지만 집안의 가난도 큰 요인이었다.
서계는 처가에서 공부하면서 향후 학자로 대성하는 밑거름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한창 과거 공부에 집중할 무렵인 21세에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22세에는 할머니와 3형 세후의 상을 당하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많은 슬픔과 아픔을 겪게 되지만 스스로를 정진하고 학문연구에 소홀하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마침내 서계는 여름에 열린 식년 사마시에서 7등으로 합격을 하고, 겨울에 현종대왕 즉위를 기념하는 증과 별시에서 당대의 수재들을 재치고 장원급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장원급제라는 과경(科慶)은 개인의 영광은 물론 집안의 경사였기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를 적는 방목에는 부모와 형제를 함께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를 기뻐해줄 부모와 조부모는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장원에 1등으로 합격한 서계는 관례에 따라 성균관전적(정6품)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예조ㆍ병조의 좌랑, 춘추관 기사관, 사간원 정언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3년(현종 4)겨울에는 강화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군비를 점검하는 중역을 수행하였으며, 옥당(홍문관)의 학사가 되어 왕명을 대찬하고 경연관으로 활동하였다. 경연(慶筵)은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신하들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궁중으로 불러 경적(警笛)과 사서(史書) 등(等)을 함께 논의하고 강연한 것으로 임금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직책이다.
서계 선생의 이와 같은 출세는 그의 강직한 성품과 어울려 더욱 진전하게 된다. 하지만 화려한 출사는 환해부침(宦海浮沈)이라 는 말처럼 요동이 일게 된다. 1664년(현종 5) 조정을 술렁이게 했던 공의(公義)ㆍ사의(私義) 논쟁은 관료사회에서 그가 삼간오사(三奸 五邪)라 불리는 수모를 겪게 했다. 이 일로 그는 관료사회의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현종의 잦은 온천여행으로 온행(溫行)을 자제할 것과 이에 따른 폐단을 직언하고 나아가 국왕과 대신의 직무 태만, 왕실의 재물낭 비 등을 거리낌없이 거론하고 국정의 쇄신을 요구하였다 서계는 점차 정치에 혐오를 느끼게 된다. 이에 더해 1667년(현종 8) 6월, 부인 의령 남씨의 때 아닌 사망을 접하게 되자 서계는 더욱 큰 충격을 안았다.
서계 인생의 후반부가 이렇게 질곡에 이르자 그는 일치감치 영욕을 떨치고, 현실세계에서 한발 떨어진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다. 박세당이 양주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되던 1668년(현종 9)이었다. 수락산은 삼각산, 도봉산과 더불어 서울 외곽의 3대 명산으로 예로부터 문인(文人)과 묵객(墨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산(遊山)의 명소이자 휴식의 공간이었다.
수락산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주인노릇을 한 곳으로 유명했다. 서계 역시 매월당을 기리는 추모사업과 더불어 수락산 곳곳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는 사업을 시작한다. 서계는 그곳에서 철학자적인 깊은 고뇌와 사색을 이루어 수많은 저술활동 펼치기도 하였다.
박세당은 41세부터 관직(官職)에 나아가는 것보다는 석천동에 은거하면서 강학(講學)과 고전(古典)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고 그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 중심의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더불어 주자학을 비판하는 등 성리학을 재해석한 독자적인 견해를 과감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조선의 성리학자와 성균관 유생들은 서계의 견해에 대해 지탄하는 상소를 올려 말년에 유배를 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서계는 이외에도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의 저술을 통해 당시의 주자학과 함께 도가(道家) 사상에도 상당한 식견을 보여준다. 또한 『색경(穡經)』은 농업서적으로써 그의 실학적(實學的)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는 저술이기도 하다. 이는 박세당 본인의 저술이기보다는 여러 글을 엮은 편술(編述)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의 실학자적인 실천적 성향을 볼 수 있다.
서계 박세당은 1703년 4월 이경석의 신도비명과 그의 저술 사변록으로 인해 성균관유생의 탄핵을 받고 노론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 賊)의 낙인이 찍혀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판윤 이인엽의 상소로 풀려나 5월에 석천동으로 귀향하지만 병이 점차 심해져 8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서거한다.
서계선생의 학문과 신념은 아들 박태유와 박태보로 이어져 큰 아들 박태유는 효자로써 필명을 날렸으며, 둘째아들 박태보는 장원급제로 조정에 나아가 충신으로서 명성을 올렸다. 셋째 아들 역시 한성부판관의 관직에 이르렀다.
이들 형제 이후에도 서계의 자손들은 대대로 문한(文翰)을 유지하며 근기 소론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말까지 무려 2,500여 책(400여종)의 전적을 보유한 선비집안이자 학자집한의 가성을 지켜왔다. 이처럼 누대로 지킬 수 있는 정점에는 항상 서계가 있었던 것이다.
2000년에 11대 종손 고 박찬호(朴贊鎬)씨에 이르러 서계가문 소장 전적과 고문서 둥 558점의 기록을 現 한국학 중앙연구원(舊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하여 보존 및 관리하고 있다. 2004년 1월에는 문화관광부 인가를 받아 서계문화재단을 설립하였고 현재 12대 종손이신 박용우씨가 재단이사를 맡고 있으며 종부 김인순씨가 내외로 돕고 있다. 슬하에는 2남을 두고 있다.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古文獻 寄贈ㆍ寄託目錄 1, 『西溪 朴世堂 宗宅 寄託典籍』참조 작성.

서계선생영정 서계선생영정
서계 박세당 사랑채 서계 박세당 사랑채
서계의 문과 장원급제 홍패 서계의 문과 장원급제 홍패
사변록표지 사변록표지
서계묘역 서계묘역
문화와전통
석천경영의 삶

서계 박세당이 양주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되던 1668년(현종9년)이었다. 박세당의 석천동 생활은 단순한 삶이기보다는 경영이라 할 정도로 수락산 자락 일대에 그의 몸과 마음을 새겼다.
한 시대를 풍미한 통유(通儒)였던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는 사업을 그의 말년과 후대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생활로 수많은 시가 석천에서 지어졌다. 당시 지어진 수백편의 시는 「석천록(石泉錄)-상?중?하」로 묶여져 『서계집(西溪集)』에 수록되었다.
박세당 은거 이후 수락산은 내방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남구만, 윤증, 박세채, 최석정, 최석항, 최창대, 조태억 등 소론계열의 인사들이 찾았다. 많은 친구,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자제와 함께 수락산과 석천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서계(西溪)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는 일대는 서계의 석천경영을 위한 드넓은 무대로 가득했다. 산천과 수석에 대해 각기 이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집 주변의 샘을 석천(石泉)이라 하고 아예 동네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일컫고 바위에 ‘石泉洞’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외에도 서계가 즐겨 찾았다는 ‘취승대(聚勝臺)’와 처남 매부지간이었던 남구만이 쓴 ‘수락동천(水落洞天)’, 넓은 바위에 새긴 ‘서계유거(西溪幽居)’ 와 같은 암각서들이 서계의 석천동 발자취를 말해준다. 또한 학문과 토론을 위해 지었던 궤산정이 근래에 보수되어 남아있고,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청절사(現 노강서원 基)와 정자인 청풍정, 석림사 등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서계의 수락산과 석천동 일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그의 학술연구와 저서에서도 나타난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유학자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자학 일변도의 경전해석에 머물지 않고, 노장학을 넘나드는 폭넓은 학문세계를 지향하였다. 그의 글을 모은 “서계집”, 별도의 단행본으로 묶여진 “사변록”, “신주도덕경” 등은 서계의 학문세계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의 정밀하고 분석적인 사고는 유학분야에만 머물지 않았다. 농사에 관한 경서로 지방의 농경법을 연구하여 꾸민 농법기술서인 “색경(穡經)”은 백과전적 농서의 선구격으로 농학체계화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서계의 실천적인 실학자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계선생이 연로할 때 남긴 “계자손문(戒子孫文)”을 통해서는 일생의 역경을 딛고 가다듬은 가치관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서계가 타계(他界)하기 6년 전인 1697년, 한질이 심해지자 자손들과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다.
“3년 상식(上食)을 폐지할 것, 일상 만사에 조심하여 명을 단축하는 일이 없도록 근신할 것, 형편에 맞는 제사음식과 사치하지 말 것, ‘논어’의 말씀을 따라 충(忠)과 신(信)을 주장으로 매사에 정성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다운 행실을 할 것, 경서와 역사책을 독파하여 고금을 통하는 착한 선비가 될 것, 글을 소리 내어 읽되 그 뜻과 이치를 함께 익힐 것, ‘중용’에 있듯이 배우고 물으며 분별함과 행동함에 독실 할 것, 끝으로 형제간은 동기간이니 우의를 돈독히 하여 집안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늘 어진 형제관계를 유지할 것” 등을 유서로 남겼다.

현재 12대 종손에 이르기까지 계자손문의 말씀을 지켜오고 있으며 이를 담은 소책자를 만들어 문중 친인척들에게도 나누어 공유하고 있다.

서계는 수락산 자락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연 속에서 정쟁의 시름을 덜며 강학과 학문연구를 드넓게 펼쳤다.

가문의 업적을 지켜나가는 서계 박세당 종가

서계 11대 종손 박찬호(朴贊鎬·서계문화재단 설립자)씨는 공직생활을 마치고 이곳을 관리하여 오다가 서계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현창하는 것이 자손의 도리임을 깨닫고 문화재단의 설립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박찬호씨는 이에 앞서 2000년도에 조상대대로 간직하여 온 유물과 고문서, 고서 등 558점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現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위탁 관리를 맡기기도 하였다. 서계문화재단은 문화관광부의 설립인가를 득하여 2004년 1월 20일 설립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12대종손 박용우(朴龍雨 ·58·서계문화재단이사장)씨와 종부 김인순(金仁順·55·서계문화재단 운영위원)씨 내외가 맡고 있다. 재단의 위치는 종가댁인 서계 박세당 가옥 바로 옆에 신축되었다.

재단 설립의 목적은 서계 박세당 선생에 대한 학술연구 활동 및 유물, 유적의 보존과 복원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서계에 대한 연구논문, 저술활동을 지원하고 서계저술의 주해, 번역, 발간을 담당한다. 학술대회와 학술강연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

고택에서의 삶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제사 9회, 불천위제사, 절기별 제사 등 대부분의 종가처럼 제사가 많다. 더욱이 고택을 보존하고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옛 조상들의 고택생활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른다.

요즘 같이 물질적 가치를 앞세우는 세상에 부부가 한 뜻이 되어 조상의 정신문화를 가꾸고 전승시키려는 노력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서계선생의 뜻을 잇고 가문의 업적을 지켜나가 종손의 소임을 다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명맥을 이을 수 있다.

※ 서계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seogye.com)

노강서원 교육원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정재(定齋) 박태보(1654~1689)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정재공은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지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유배를 떠나는 도중 장독으로 노량진에서 순절하게 된다. 이에 1695년(숙종 21)에 서울 노량진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그 후 숙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697년에 노강서원(鷺江書院)을 사액서원으로 지정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후 196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노강서원 교육원”은 정재공의 충효와 절의 정신을 담아 한국사회에 가속화되고 있는 다문화가정의 적응과 발전을 위해 2009년 5월 13일 개강하였다.

교육은 “다문화 가정 수업”과 “경서반” 교육으로 나뉘어 노강서원과 서계 종택에서 진행된다.
“다문화 가정 수업”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음식을 통해 한국을 알리고, 교육에 참가하는 가정들 간에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한국사회 적응을 높이기 위함이다.

수업내용
1) 5월의 수업 - 전통음식을 통한 한국적 정서 이해를 위한 수업.
2) 9월의 수업 - 대명절 추석을 대비하여 추석상 차리기, 전통복장입기, 제례교육 수업.
3) 11월의 수업 - 겨울을 대비한 김장 담그기를 방법을 통해 한국의 음식문화와 정서를 알린다.

“경서반”은 동양의 고전인 사서삼경을 동양인들의 정신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한 수업이다. 사서삼경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유교 문화가 현대 사회에 마음의 양식과 인격을 수양시키고 삶을 풍성하게 할 수 있음을 배운다.
수업은 명심보감을 주교재로 하며, 실천적인 예절교육을 통해 유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진행된다. 2009년 6월 1일부터 7월 24일까지 매주 1회 교육을 실시한다.

노강서원 교육원은 서계 박세당 종가뿐만 아니라 경기문화재단, 서계문화재단, 의정부?양주 유림, 의정부문화원, 반남박씨 대종중, 반남학당 등의 여러 기관과 인사들의 노력으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서계 박세당 가옥 서계 박세당 가옥
노강서원 개강식 노강서원 개강식
다문화가정 행사 다문화가정 행사
종가음식, 화전 종가음식, 화전
가옥구조

서계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의 삶과 숨결이 느껴지는 이곳은 현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에 위치한다. 서계 선생의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전통가옥으로 2000년 3월 24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되었다.

서계 박세당이 장자동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68년이었다. 이때는 지금의 종택 모는 아니었으며 초당(草堂)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서계의 「자찬묘표(自撰墓表)」에 따르면, 당초 가옥은 울타리는 없었지만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밤나무 등으로 울타리를 만든 집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서계종택은 5세손인 박종길(朴宗吉)대에 건립된 것이다. 당시의 행적구역상으로는 양주목 둔야면(芚夜面) 장수원리(長壽院里)였다. 서계는 자신의 집에 대한 애정으로 주변의 언덕을 ‘악구(樂丘)로 부르기도 하였다.

본래의 종택(宗宅)은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사랑채와 사당인 영당만이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동측의 수락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서측 멀리 도봉산을 안산(案山)으로 하여 자리잡은 서향집의 좌향(坐向)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평면규모로서 남측으로 날개집 형식의 누마루가 덧붙여져 있는 '乙'자형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방은 두 칸 규모에 뒤쪽으로 반칸씩을 덧붙여 후원으로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였고, 또한 좌측으로는 반칸규모의 다락으로 오르는 문을 내었고 다락 밑으로는 아궁이를 두었다. 두 칸 규모의 사랑방 남동 측으로 한 칸 규모의 온돌방이 있고 반칸 돌출하여 누마루를 마주하고 있는 마루방이 있다. 누마루에 앉아 문을 열면 수락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조망할 수 있다.

영당에는 서계 선생의 초상화와 그의 아버지 하석(霞石) 박정 선생의 초상화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부자간의 초상화가 나란히 모셔진 것은 다른 문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서계선생이 너무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 박정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을 후대 종손들이 잘 보살피기 위한 정성이다.

박세당 가옥 전경 박세당 가옥 전경
사랑채 대청과 누마루방 사랑채 대청과 누마루방
하석 박정(左), 서계 박세당(右) 초상화 하석 박정(左), 서계 박세당(右) 초상화
영진각 영진각
은행나무(의정부시 보호수 8호, 수령은 약 450년) 은행나무(의정부시 보호수 8호, 수령은 약 450년)
문화유산
석촌동 주변 서계관련 문화 유적지 석촌동 주변 서계관련 문화 유적지
서계묘역 서계묘역

서계 박세당과 두 부인이 모셔져 있는 산소이다.


문헌에 따르면, 서계종택에서 동쪽으로 수백 보를 가면 유궁(幽宮:산소)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가 바로 부인 의령남씨의 산소로서 후일 서계 자신도 여기에 묻혔다. 호석(護石)을 이용한 대형의 사각형 봉토분이다. 묘표 및 신도비는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산소 아래에는 수 칸의 가옥을 지어 ‘정사(精舍)’라고 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서계 선생은 1668년 부인 의령남씨를 석천동에 모시고는 이주를 결심하였는데, 35년 뒤에는 서계 자신도 부인과 함께 여기에 묻혔다. 비석에는 자찬묘표가 새겨져 있다.
2002년 9월 16일에 도 문화재자료 제113호로 지정됐다.

취승대 취승대

서계 박세당 선생이 은거 당시에 가장 즐겨 찾던 장소였다.

집 주변에 있던 취승대는 동계(서계, 西溪라고도 함) 좌우에 위치한 4개의 자연석(東臺, 南臺, 西臺, , 北臺)으로 천하의 승경을 취합해 놓은 듯한 아름다운 장소라는 뜻이다.

서계 선생은 틈만 나면 지팡이를 짚고 취승대로 나들이를 떠났다.
봄이면 동대에서 꽃을 감상하고, 여름이면 남대에서 바람을 쐬고, 가을이면 서대에서 달을 감상하였으며, 겨울이면 북대에서 눈을 가지고 놀았다.

서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고 동대에 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서대에 꽃이 없는 것도 아니며, 남대에 눈이 없는 것이 아니고, 북대에 바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할 정도였다.
취승대는 4대 어디에서건 풍(風), 화(花), 설(雪), 월(月)의 4경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조망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취승대는 서계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의 공간이었으며, 자연과 교감하며 심신을 달래는 휴식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서계종택 옆에 4대(臺)가 남아 있고 북대(北臺)에는 서계가 직접 쓴 ‘취승대(聚勝臺)’ 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어 서계 선생이 한가로이 사색에 잠겼던 예전의 향취를 고
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궤산정 궤산정

취승대 옆에 있으며, 학문토론을 위해 지어진 정자이다.
지금의 정자는 근래에 수리한 것이다.


석천동은 서계 박세당의 대표적인 저술인 『사변록(思辨錄)』등 수많은 옥고들이 탈고된 저술의 산실이자 서계 문하의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강학의 도량이었다.

당초 서계의 석천 입거는 세사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학문적 온축을 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계의 학행이 중외에 알려지면서 석천동은 박세당에게 가르침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만동(滿洞)의 복을 누리게 된다. 이에 제자들의 협력 속에 강학의 공간이 하나 둘씩 마련되었는데, 궤산정과 관란정(觀瀾亭)이 바로 그것이다.
궤산정은 계곡 사이의 깨끗한 바윗돌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진 정자이다.


‘궤산’이란 이름은 『서경(書經)』의 “아홉길 산을 만드는데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면 안 된다(爲山九 , 功虧一)’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서계 박세당이 제자들에게 학문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기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름 지었다. 정자 밑 바위에는 ‘서계유거(西溪幽居)’ ‘취승대(聚勝臺)’, ‘석천동(石泉洞)’이라는 서계 유필(遺筆)의 암각이 뚜렷하다.

계당 계당

궤산정의 뒤편에 있는 집터.
궤산정 뒤에는 건물터 하나가 완연하게 남아 있는데,
이 또한 서계 박세당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으로, 명칭은 ‘계당(溪堂)’이었다고 한다.

후손의 전언에 따르면, 현재 재단에서 이곳을 실측하여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수락동천 수락동천

수락산에 있는 작은 신선세계라는 의미의 상징적인 지명.
박세당의 수락산 은거 이후 이곳 석천동에는 내방객들의 발길이 그칠 새가 없었다.
남구만, 윤증, 박세채, 최석정, 최석항, 최창대, 조태억 등 대부분 소론계열의 인사들이 내방 인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특히 박세당의 손아래 처남인 남구만은 이곳을 매우 자주 방문하여 박세당과 시사를 토론하기도 하고,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지금도 서계의 상류에는 이들 처남, 매부가 대담하던 반석이 남아 있고, 반석 아래의 바위에는 남구만이 쓴 ‘수락동천(水落洞天)’이라는 글씨가 300년의 풍우 속에서도 웅건한 필치를 간직하고 있다.

청절사

박세당이 이곳에 머문 바 있는 김시습을 흠모하여 그의 영정을 봉안하여 건립한 사당.

김시습을 기념하는 사찰인 석림사를 낙성(落成)한 박세당은 김시습을 위한 영당(影堂:영정을 모신 사당)의 건립도 서둘렀다. 1680년(숙종 6) 수락산의 동봉 아래에 영당이 완성되었다.
1686년(숙종 12)에는 무량사에서 옮겨와 모사한 영정을 봉안하고 봄, 가을로 제사를 행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당초 영당의 공식적인 명칭은 동봉사우(東峯祠宇)였으며, 박세당을 중심으로 약 15년 동안 제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박세당은 자신이 먼저 영정에 찬을 붙인 다음 아들 태보에게도 찬을 붙이게 할 만큼 김시습의 영정에 대해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

이런 배경 하에서 1700년(숙종 26)에는 양주 사림들에 의해 사액을 청원하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듬해인 1701년(숙종 28)에는 조정으로부터 ‘청절사(淸節祠)’라는 편액이 내려지게 되었다. 박세당이 사망하기 2년 전의 일로서 추모사업의 일단락을 의미했다.
현재 청절사 자리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이건되어 있어 남아있지 않다.
옆에 세워진 청풍정도 마찬가지로 남아있지 않다.

청풍정 청풍정

청절사(淸節祠) 옆에 있는 정자.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청절사, 淸節祠)의 완성은 이어 부속 건물의 건립을 수반하였다. 비록 서계선생이 사망한 이후였지만, 영당 옆에 정자가 없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서계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정자 건립의 논의가 일어났다. 논의가 합일되어 1729년(영조 5) 청절사 전방의 개울가에 작은 정자가 완성되었고, 이어 서계의 문인들은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덕수는 백이, 숙제에 비견될 만한 동봉 김시습의 청풍대절(淸風大節)을 기려 정자 이름을 청풍정이라 명명하고, 당대의 명필 윤순(호 백하, 白下)으로 하여금 편액의 글씨를 쓰게 했다고 한다.
현재 청풍정도 남아있지 않아 그 자취를 느낄 수 없지만, 주위산천의 호위속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주춧돌이 옛 모습을 추상시키고 있다.

석림사 석림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소재의 수락산에 있는 절이다. 덕절(德寺)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599년(진평왕 21) 원광(圓光)이 창건하여 수락사(水落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1568년(선조 1)에 왕이 이 절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을 짓고 편액을 하사하여 흥덕사(興德寺)하고 개칭하였고, 1626년(인조 4) 다시 흥국사로 개명하였다.

서계 박세당 선생이 수락산에 들어 왔을 때만 해도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었던 당시 그토록 융성했던 흥국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성전(聖殿)’이라 불리는 불전에 승려 몇 사람이 있었고, 후대에 중건된 은선암(隱仙菴)에 16-17인의 승려가 기거하던 것이 전부였다. 이에 서계는 자신이 살던 수락산 서쪽에 매월당을 기념할만한 절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기고 은선암의 승려들에게 절의 건립을 권유하였다.

결국 서계 선생이 공역에 드는 대부분의 비용을 충당한 가운데, 1년이 지나 암자가 낙성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석림암(石林菴)’으로 명명하였다. 오늘날 석림사의 시초이다

석림사는 경기도 전통사찰 제202호(2001.11. 2)로 지정되어 있다.

노강서원 노강서원

노강서원은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 문열공 박태보를 모신 사당이다. 박태보는 1654년에 서계 박세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1680년 홍문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을 지냈다. 1689년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전라도 진도로 귀양살이를 가던 도중 노량진에서 매에 맞은 장독으로 죽게 된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박태보는 학문과 문장에 능통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그가 죽은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노강서원은 원래 노량진에 있었고, 1695년에 건립되었다가 1925년 큰 홍수로 한강물이 넘쳐흐르는 탓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갔다. 196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이곳에 새로 노강서원을 건립하고 1977년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박세당초상화 ( 朴世堂肖像畵 ) 박세당초상화 ( 朴世堂肖像畵 )

숙종연간(1690년경), 축, 견본채색, 85×58.6㎝, 족자 140×78㎝

1690년 경 曺世傑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박세당의 초상화.
현재 서계종택에는 박세당의 초상화 2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서계가문의 가전에 따르면, 박세당의 초상화는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모두 4점이었고, 2점은 분실했다고 한다.

박세당홍패 ( 朴世堂紅牌 )
1660(현종 1), 지본묵서(紙本墨書), 110.5×88㎝, 과거지보(科擧之寶) 1660(현종 1), 지본묵서(紙本墨書), 110.5×88㎝, 과거지보(科擧之寶)

1660년 박세당이 別試 文科에서 甲科 第一人, 즉 壯元으로 합격하고 받은 홍패.
홍패는 문무과 합격자에게 내리는 교지로 붉은 장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박세당은 어려서 고모부 정사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청년기에는 처숙 남이성, 처남 남구만과의 학문 교유를 통해 석학으로서의 자질을 배양하였다. 하지만 20대 초반에 어머니, 할머니, 중형의 상을 당하여 응시의 기회를 놓쳤다가 32세 되던 1660년 현종의 즉위를 기념하여 시행된 별시 문과에서 당대의 수재들을 제치고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박세당이 전시에서 작성했던 시권도 현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중 장원은 5품, 2등은 6품, 3등은 7품 그 이하는 9품직에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그만큼 장원을 우대했음을 의미하는데, 박세당 역시 관례에 따라 정5품직인 성균관전적에 초임 발령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의 관직체계에서 9품에서 5품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이상이 소요되었으니 같은 합격자라도 석차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박세당의 두 아들 태유, 태보도 문과에 합격하여 3부자 모두 과경을 누렸다. 특히 태보는 1677년(숙종 3) 문과에서 장원하여 서계에 이어 부자 장원의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박세당백패 ( 朴世堂白牌 )
660(현종 1), 지본묵서(紙本墨書), 102.2×44.5㎝, 과거지보(科擧之寶) 660(현종 1), 지본묵서(紙本墨書), 102.2×44.5㎝, 과거지보(科擧之寶)

1660년 박세당이 생원시에서 2등 제7인으로 입격하고 받은 백패.
당시 박세당의 나이는 32세였고, 2등 7인은 100명 중 12등에 해당하는 석차이다.
박세당은 이로부터 약 2개월 뒤에 설행된 별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했다.

박세당홍문관교리고신 ( 朴世堂弘文館校理告身 )
1669(현종 10), 지본묵서(紙本墨書), 53.5×77㎝, 시명지보 1669(현종 10), 지본묵서(紙本墨書), 53.5×77㎝, 시명지보

1669년 박세당을 홍문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에 임명한 고신.
홍문관은 국왕의 학술자문부서로 문신(문과출신) 중 홍문록에 錄選되어야만 홍문관원이 될 수 있었다. 홍문관의 중견 관료인 교리(정 5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한직으로 모든 문신들이 선망한 직책이었다. 지제교는 왕명을 대찬하는 직임인데, 주로 홍문관, 예문관의 관료들이 의례 겸직하였다. 경연시독관 역시 홍문관의 관원들은 의례 겸직하였는데, 왕과 신하들이 학술을 토론하고 정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한다는 점에서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박세당은 문과에 장원한 엘리트 문신으로서 과거에 급제한지 10년 만에 통훈대부 홍문관교리에 오르는 쾌속 승진을 하고 있었다.

박세당처의령남씨추증고신 (朴世堂妻宜寧南氏追增告身)
1700(숙종 26), 1장, 지본묵서(紙本墨書), 73.6×91cm 1700(숙종 26), 1장, 지본묵서(紙本墨書), 73.6×91cm

1700년 박세당의 전처 의령남씨를 정부인(貞夫人)에서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하는 고신. 정경부인은 실직 2품 이상관의 부인에게 내린 외명부(外命府)의 최고 품계였다. 당시 박세당이 종1품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면서 의령남씨도 정경부인에 추증된 것이다.

남씨부인은 현령 남일성(南一星)의 따님으로 숙종조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南九萬)(약천藥泉)은 그녀의 동생이다. 박세당은 1645년(인조 23) 부인과 혼인하면서 남씨의 친정인 정릉동에 살았다. 물론 박세당의 처가살이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유습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점에 대해 박세당은 조실부모에 따른 가난 때문이라 자술하였다.

결국 박세당은 혼인 이후 처가의 경제적 원조 속에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고, 처숙 남이성, 처남 남구만과의 활발한 학문 토론은 후일 그가 학자로 대성하는데 큰 발판이 되었다. 이후 박세당은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면서 서울 외곽의 양덕방에 신거를 마련하였으나 사실상의 신접살림을 시작한지 5개월 만에 남씨부인과 사별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자신이 과거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각종 여건을 조성해 주었던 부인이었기에 남씨부인의 사망은 박세당에 있어 엄청난 시련이었다. 박세당은 부인을 지금의 서계종택이 있는 수락산 장자동에 안장하고는 아예 서울살이를 철거하여 이주를 단행하였다. 그 때가 그의 나이 40세 되던 1668년이었다. 이처럼 박세당이 수락산에 은거한 데에는 남씨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크게 작용했다. 박세당은 손수「망실숙인의녕남씨묘지명(亡室淑人宜寧南氏墓誌銘)」을 지어 부인의 행적을 기리는 한편 광주정씨 鄭時武의 딸을 재취로 맞았다. 서계의 두 아들 태유?태보는 남씨의 소생이고, 막내아들 태한은 정씨 소생이다.

박세당처정씨숙부인추증고신 (朴世堂妻鄭氏淑夫人追贈告身 )
1680(숙종 6), 지본묵서(紙本墨書), 67.6×91.5cm 1680(숙종 6), 지본묵서(紙本墨書), 67.6×91.5cm

박세당의 처 광주정씨를 숙부인에서 정부인으로 추증하는 고신.
당시 박세당은 통정대부 수공청도관찰사 겸병마절도사 순찰사에 임명됨으로써 법전에 따라 정씨에게도 정부인의 직첩이 내린 것이다. 정씨 부인은 박세당의 후취로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슬하에 아들 태한(泰翰)을 두었다.

박세당시권 ( 朴世堂試券 )
1660(현종 1), 지본묵서(紙本墨書), 72.6×281㎝, 과거지보(科擧之寶) 1660(현종 1), 지본묵서(紙本墨書), 72.6×281㎝, 과거지보(科擧之寶)

1660년 박세당이 별시 문과의 전시에서 작성한 시권.
과거 답안지는 돌려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합격자에 한해 본인에게 반환하였다.
문과 장원 합격자의 원본 시권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시권의 우측에는 수험번호 및 신원사항, 그리고 시험문제(試題)가 쓰여져 있고, 내용은 중국의 고사, “당동평장사양염청천하재부진귀좌장(唐同平章事楊炎請天下財賦盡歸左藏)”에 대한 표문(表文)이다. 유려한 필체(筆體)에다 오탈자의 수정, 수험관의 검열(檢閱) 표시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과거사, 교육사 연구에 더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서계유계 (西溪遺戒 )
1696(숙종 22), 첩, 지본묵서(紙本墨書), 18.4×31.6cm 1696(숙종 22), 첩, 지본묵서(紙本墨書), 18.4×31.6cm

1696년(肅宗 22) 서계가 병석에서 자손들에게 내린 유계.
본 문서는 박세당의 친필본은 아니고 후대에 자손들에 의해 전사되어 성책된 것이다.
박세당은 본 유계를 남긴지 7년만인 1703년에 사망하였다. 당시 박세당은 병으로 인해 유언을 자손들에게 구술하였고, 그의 아들 또는 손자 중 누군가가 이를 받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세당은 이로부터 7년이 지난 1703년에 세상을 떠나지만 이 유계에는 자신의 상례(喪禮) 때 사용할 관곽(棺槨)과 제수(祭需)의 규모, 조상제례에 따른 제반 의절, 자손들의 학업과 처신, 형제간의 우애 등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곡진한 어조로 당부하고 있어 다른 유언에 비해 내용이 매우 자세하다.

선독 (先牘 )
숙종연간, 첩, 지본묵서(紙本墨書), 35×22.5㎝ 숙종연간, 첩, 지본묵서(紙本墨書), 35×22.5㎝

박세당의 간찰첩.
박세당의 간찰 중 주로 아들에게 보낸 것을 성첩한 것으로 보이는데, 첩의 후반부가 탈락되어 현재는 장자 태유(泰維)에게 보낸 간찰 3점만 남아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초 전반부는 장자 태유, 후반부는 차자 태보에게 보낸 간찰을 수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첩의 형태와 양식이 서계유묵, 선적 등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이 역시 손자 박필기가 조부의 간독을 모아 성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조유필 (先祖遺筆 )
숙종연간, 첩, 지본묵서(紙本墨書), 38×33㎝ 숙종연간, 첩, 지본묵서(紙本墨書), 38×33㎝

성첩자와 성첩 시기는 미상이다.
박세당의 필첩으로 시고(詩稿), 만사(輓詞 )등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서계유묵은 작품성을 고려한 글씨라기보다는 대부분 시고의 초본들이다. 따라서 필첩으로서의 정연한 맛은 적지만 필치에 꾸밈이 없어 자연스러움은 오히려 배가되어 있다. 수록된 시고는 오랜 지인, 문인에게 보낸 증시(贈詩)와 사우(士友)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輓詞)가 중심을 이룬다.

정재집(定齋集)

1892년(고종 29). 20권 7책, 목판본, 규장각도서

서계 박세당의 아들이자 조선 중기 문신인 박태보의 시문집으로 후손 제억(齊億)이 그의 사촌 제륜(齊崙)과 함께 간행하였다.
본집 9권, 별집 5권, 후집 6권으로 되어 있다. 본집에는 시ㆍ부ㆍ전(箋)ㆍ장(狀)ㆍ잠ㆍ명(銘)ㆍ찬ㆍ제문ㆍ잡저ㆍ발(跋)ㆍ전(傳)ㆍ묘표ㆍ행장ㆍ서(序)ㆍ기ㆍ논ㆍ차ㆍ소ㆍ계ㆍ의(議)ㆍ주서(奏書)ㆍ간독(簡牘) 등, 별집에는 장첩(狀牒)ㆍ단송안(斷訟案)ㆍ증손투호의절(增損投壺儀節)추우록(追尤錄)ㆍ감류편(坎流編) 등, 후집에는 시ㆍ의(疑)ㆍ책(策)ㆍ잠ㆍ전ㆍ표ㆍ주(奏)ㆍ제문ㆍ기ㆍ소ㆍ계ㆍ상언(上言)ㆍ행장ㆍ묘표ㆍ기사민절록(己巳愍節錄) 등이 실려 있다. 시는 오언시ㆍ칠언시ㆍ고시ㆍ율시ㆍ절구의 차례로 되어 있는데 대체로 우수(憂愁)와 비감을 많이 담고 있으며, 소 가운데는 인현왕후의 폐출(廢黜)을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 <대유생성규현(大儒生成揆憲)>이 있다. 공은 이 상소문으로 말미암아 고문을 당하고 귀양가던 길에 순절하였다.

박세당호구단자 (朴世堂戶口單子 )
1702(숙종 28), 지본묵서(紙本墨書), 116.6×70.5㎝ 1702(숙종 28), 지본묵서(紙本墨書), 116.6×70.5㎝

1702년 박세당이 74세 때 작성한 호구단자의 초본.
당시의 법제에 따르면, 매식년(3년)마다 호주가 자신의 호구상황을 기록한 호구단자 2통을 작성하여 관에 올리면 관에서는 내용상의 오류를 점검한 뒤 1통은 호적대장 작성용으로 관에 비치하고, 1통은 다시 호주에게 반환하였다. 다만 이 호구단자는 원본이 아닌 초본이며, 서계종택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호적자료이다.

호구단자에 나타난 박세당의 가족구성은 다음과 같다.
당시 박세당의 집에는 자신을 비롯하여 이소사(첩), 며느리(정씨), 아들(태한), 손자(필기), 손자며느리(임씨), 손자(필손), 손녀 등 8명이 살고 있었다. 일견 여느 집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가족 구성은 박세당 말년의 시련이 생생하게 반영된 형태였다.
우선 두 번째 부인 광주정씨마저 사망하여 첩실인 30세연하의 이소사가 부인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일찍이 과부가 된 맏며느리를 부양하고 있었다. 정씨 부인은 장자 태유의 두번째 부인으로 1686년 남편을 사별한지 20년 가까이 수절하고 있었다. 태한은 박세당의 3자로 광주정씨 소생이다. 필기와 임씨는 장손부부이며, 필손은 태한의 아들이다. 7세의 손녀 역시 태한의 딸로 추정된다. 박세당은 1686년 장자 태유를, 1689년에는 차자 태보를 잃으면서도 곡자(哭子)의 애통함을 참고 학문에 주력하는 한편, 70이 넘은 나이에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했다. " 생계가 어려운 태보의 아버지(서계)에게 음식물을 내리라" 는 숙종실록의 기사에서도 그가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박세당묘표 (朴世堂墓表 )
1731(영조 7), 첩, 탁본, 34×21.2㎝ 1731(영조 7), 첩, 탁본, 34×21.2㎝

박세당의 묘비 탁본첩.
전면 대자(大字)는 “조선숭정대부행이조판서서계박선생세당지묘(朝鮮崇政大夫行吏曹判書西溪朴先生世堂之墓)”이고, 비문의 내용은 박세당의 자찬묘표와 이덕수가 찬한 음기(陰記)이다. 전면 대자와 본문의 글씨는 박세당의 손자 박필기가 썼다. 1731년은 비를 세운 연도로 박세당의 28주기에 해당한다.

고금서법(古今書法)
숙종연간(탑본), 1첩(33장), 탑본 숙종연간(탑본), 1첩(33장), 탑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탁본이다.
이 비는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정림사 오층석탑에 자신의 공적을 새긴 것으로 흔히 소정방공적비로 알려져 있다.
민족수난사의 한 장면인 동시에 고대 서예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탁본이 서계종택에 소장된 시기는 박세당 당대인 17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물론 탁본첩 어디에도 탁본하여 첩을 만든 사람이 누구이고, 그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하지만 지질이나 글자의 상태 등을 고려할 때 17세기 중후반의 탁본으로 파악된다.

세강계첩(世講契帖)
숙종연간, 1첩(10장), 지본묵서(紙本墨書) 숙종연간, 1첩(10장), 지본묵서(紙本墨書)

17세기 중후반 근기지역 소론들이 우호를 다지기 위해 결성한 친목계의 계첩.
계첩은 계원의 명단인 좌목(座目)과 계의 규칙을 적은 계헌(契憲)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목에는 박세당, 서문중(徐文重), 이만상(李萬相) 등 모두 58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17세기 중엽 이후 소론의 핵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이다.

좌목의 형식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맨 앞에 나이 또는 관직에 따라 열서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비중 또는 연령에 따라 장을 달리하여 명단을 기재한 점이다. 특히 맨 모두에 해당하는 박세당, 서문중, 이만상의 경우는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생년(또는 생년월일)과 본관만 명기하였는데, 이는 존장에 대한 예우적인 표현인 동시에 이 계가 박세당, 서문중, 이만상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영당첨배록

1852년부터 1864년까지 12년간 서계선생의 영당을 배알한 인사들의 명단.
서계영당은 가묘와는 별도로 서계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로서 현재 종택에 전하는 서계영정이 바로 여기에 봉안되었다. 일찍이 서계는 청절사[동봉사우]를 건립하여 김시습의 영정을 모시고 그에 대한 추념을 드러낸 바 있었는데, 서계영당의 건립도 청절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에는 이유원 이하 모두 101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관직자가 대부분이고 중간 중간에 후손의 이름도 보인다.
사림 인사들은 서계문인의 후손이거나, 외손계열 또는 소론계열의 자제들로서 맨 앞에 기록된 이유원은 후일 영의정에 오른 현달한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 소론에서 차지하는 서계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명단의 기재방식은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본관과 관직, 그 아래에 첨배한 연월을 기록하였다. 이름 위에 기록된 <선(仙)> 자는 고인이 되었음을 뜻하는 전통적인 표기 방식이다

종중예목절목
1733(영조 14) 1733(영조 14)

반남박씨 서계문중의 예목 규정.
선대의 시향(時享), 절사(節祀) 등에 소용되는 祭需 비용을 자손들에게 예목조로 수납하였고, 특히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자손들에게는 반드시 예목을 납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는 후자에 대한 의무규정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감사(監司)는 30양, 유수(留守)는 20양, 목사(牧使), 부사(府使)는 10양, 군수(郡守), 판관(判官), 현령(縣令), 현감(縣監)은 7양, 찰방(察訪)은 5양을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관어정편액
연대미상 (39.3cm × 95cm) 연대미상 (39.3cm × 95cm)

서계종택의 사랑채 누상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서자(書者)는 미상이다.

현재 종택의 누상에 걸려 있으나 원래는 박세당이 석천동의 계상(溪上)에 정자를 짓고 편액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으로 관란정(觀瀾亭)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관어정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관란정과 관어정이 동일한 정자일 가능성도 있다.

4.3.4 누산편액
조선후기 (38.2cm × 90.3cm) 조선후기 (38.2cm × 90.3cm)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로 현재는 서계종택에 보관되어 있으나 이 역시 원래는 궤산정, 관란정 등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자(書者) 섭지선의 자는 동경, 중국 한양 출신이다.
예서체로 쓴 이 글씨는 단중근엄한 기풍이 돋보이는 명품이다. 두 개의 인장 중 위의 것은 '섭지선인', 아래의 것은「중인씨」라 새겨져 있다. 서계가문에서 섭지선의 글씨를 소장하게 된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추정컨대 1668년 서계가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부연하여 섭지선과 교유하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 글씨를 입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매당편액
연대미상, 38×80.5cm 연대미상, 38×80.5cm

서계종택의 정침(正寢:안방)에 걸려 있는 편액으로 서자(書者)는 서계의 8세 종손 박제경(朴齊敬)이다. 현재의 서계종택은 박종길(朴宗吉) 대에 건립되었다.
박종길 당대에는 당호(堂號)를 걸지 않았다가 손자인 박제경 대에 와서야 현판하게 된 것이다. 두 개의 인장 중 위의 것은 음각으로 ‘석초(石樵)’, 아래의 것은 양각으로 ‘박제경인(朴齊敬印)’이라고 새겨져 있다. ‘석초’는 석천동의 초수라는 의미로 박제경의 아호이다.

고택여행

조선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폭넓게 이해한 서계가문은 그 명문만큼 방대한 양의 고서, 고문서 등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일제시기와 6.25전쟁을 거치는 가운데서도 기록물을 잘 보존하여 오늘날 선대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서계 12대 종손인 박용우씨와 종부 김인순씨는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실학자인 서계 박세당 선생의 유적지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원형을 규명하고 관련 문화유적 복원을 하는 것이다.

서계 박세당 고택은 원래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배치로서 집 앞 어귀에 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학당터 및 그 뒤의 영당과 묘택 등의 일곽이 조선후기 사대부 건축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교육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하지만 6.25전란으로 바깥사랑채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말았다.

고택의 종손들은 소실된 고택의 원형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서계선생의 사상과 문화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