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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연혁
선교장 측면 선교장 측면

중요민속자료 제5호 지정

지정일 : 1967년 4월 18일

소유자 : 이강륭, 관리자 : 이강백

소재지 :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건축시기 : 조선시대

강릉 선교장(江陵船橋莊은 1967년 우리나라 민가주택 가운데는 최초로 중요민속자료로 선정된 국가지정문화재로써 120칸 규모의 조선시대 옛 살림집의 형태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고택(古宅)이다.

솟을대문 솟을대문

지금의 선교장은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북평촌(北坪村)으로 불리었으며 이후 정동면과 경포면 등으로 불리었다. 경승지로 이름이 높은 주변일대는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하나인 경포대(鏡浦臺)와 율곡(栗谷) 이이의 출생지인 오죽헌(烏竹軒)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이름이 선교장으로 불린 것은 경포호수가 경작지로 매립되기 이전에는 호수가 선교장까지 펼쳐져 있어, 이 집을 다닐 때는 배를 타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주변의 광활한 장원과 어우러져 선교장(船橋莊)’이라 칭하였다. 마을이름 역시‘배다리 마을’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선교장에 터를 잡은 인물은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대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었다. 이내번이 경포호가 있는 이곳 저동(苧洞)일대에 터를 잡은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효령대군의 5대 손인 완풍 부원군 이경은 영의정 벼슬까지 지냈는데, 인조반정 이후 충북 음성에 터를 잡았다. 이후 점차 가세가 기울자 부원군의 5대손이었던 무경 이내번(茂卿 李乃蕃)이 모친인 안동 권씨와 함께 외가인 강릉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저동(苧洞. 경포대 주변)에 거처를 마련한 이내번은 점차 살림을 일구어 재산이 불어나자 보다 넓은 집터를 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엔 한 떼를 이루어 서서히 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 무경(茂卿)은 그 뒤를 쫓았고 서북쪽으로 약 2.5리(약 1km)가량 떨어진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송림 속으로 족제비 무리가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신기한 생각에 한동안 망연히 서있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명당(明堂)이라고 여기고 터(基)를 정하게 되었다.

선교장 본채 전경 선교장 본채 전경
선교장 북서측 전경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선교장 북서측 전경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안채주옥 안채주옥

선교장은 1748년 이내번이 터를 잡아 안채건립을 시작으로 누대에 걸쳐 증축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이내번의 손자인 오은(鰲隱) 이후(李?. 1773~1832)는 안채에 이어서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건물로써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을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다. 또 그 앞에 작은 사랑채를 지어 집안의 젊은이들과 손님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집안의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함께 문간채(대문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열화당 뒷산에는 팔각정을 짓고, 동구(洞口)에는 연지를 조성하고 순조16년(1816)에는 선교장 풍류의 명소라 할 수 있는 활래정(活來亭)을 신축하였다. 1820년대에는 이내번의 증손인 익옹(翼翁) 이용구(李龍九. 1798~1837)가 안채와 열화당 사이의 깊숙한 곳에 서별당을 건립하여 서재와 서고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최근인 1995년에 재건축되었다.
1860년대에는 오은의 손자로 공조좌랑(工曹左郞), 동부승지(同副承旨), 강릉부사(江陵府使) 겸 관동소모(關東召募使)를 역임한 해수(海受) 이회원(李會源. 1830~1885)이 동별당앞의 별채를 지었다. 이는 대가족제도에서 연유한 것으로 가족의 팽창으로 그 일부를 분가시켰던 별채였다. 이곳에서는 새로 선교장의 가족이 되는 며느리가 신혼생활과 함께 가문의 예의와 법도를 배우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사랑채 ‘열화당’ 사랑채 ‘열화당’

1906년에는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가 활래정을 중건하였으며 1920년에는 동별당(東別堂)을 건립하였다. 이는 안채에 기거하는 안사람들의 공간을 보다 확장하고 가족들간에 단란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경농(鏡農)은 1908년 지금의 곳간채가 있는 마당 부근에 강릉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東進學校)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자 여운형 선생을 모셔와 훈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10년 일본에 의해 한일합방이 된 이후 사립학교인 동진학교는 폐교되었다. 지금도 이 터를 교당마당(舊 東進學校 校庭)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교장의 본채 건물 여러 채와 부속건물들이 1900년대 들어 증축되고 중건되었지만 한국전쟁으로 본채 앞에 마련하였던 소실집과 동진학교 등 여러 채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교장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이후 문화재청의 지원과 고택 주인의 노력으로 지난날의 모습을 차츰 복원하여 제 모습을 거의 갖추고 있다.

동측에 길게 늘어선 행랑채 동측에 길게 늘어선 행랑채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고택입구 전경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고택입구 전경
활래정 뒤로 보이는 선교장 본채 활래정 뒤로 보이는 선교장 본채
활래정 활래정

이처럼 선교장은 이내번이 터를 잡은 이후 누대에 걸쳐 중수와 증축이 이루어져 평면의 형태가 오늘날과 같은 독특하면서도 장대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택을 들어서면 대문과 행랑채는 높직이 쌓은 석대(石臺)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높이 솟은 솟을대문이 선교장의 위용을 보여준다. 집 뒤편으로는 사랑채와 안채를 감싸고 수백 년 된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활래정은 방지원도의 형상 속에 살포시 다리를 담구고 있다. 연꽃 밭과 그 주변에 피고 있는 꽃들은 선교장의 풍류를 더한다.

곳간채 곳간채

이러한 선교장 조영활동의 변화는 전주이씨가 강릉에서 그 세를 확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족제비무리가 터를 잡아준 명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내번의 아들 이시춘과 손자 이후가 선교장의 주인이 되면서 가세(家勢)는 더욱 크게 되었다.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가정은 나날이 번창해갔다. 경포호를 개간하면서 더욱 경작지를 늘리게 된 전주이씨가는 강릉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척박한 지역에 이르기까지 농토를 확대하여 ‘만석꾼’의 칭호를 들을 정도였다. 경포대 일대의 생산되는 수확만으로 곳간채를 가득채우고 남았다. 경작지 일대가 강릉 남쪽 일대에서 강원도 주문진에 이르기까지 실로 대단하였다. 하지만 선교장의 주인들은 수확물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경작지를 경포대주변을 제외하고 남과 북으로 나누어 북쪽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북촌에 저장하였으며, 강릉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수확은 남촌에 저장하여 소작인들이 기근이 와도 굶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소작인들이 나라에 내야하는 세금역시도 저장고에서 내주는 등 덕을 쌓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또한 선교장은 고택을 찾아오는 다양한 손님들의 훌륭한 숙박장소로도 유명하였다. ‘강릉 인심이 좋더라’라는 말 역시 선교장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선교장에서 무전취식을 하였다. 대관령을 넘어 관동지역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선경이었다. 금강산과 설악산, 경포대, 영랑호 등 많은 유람객들이 몰려왔으며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관동의 제일가는 부잣집인 선교장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당시 선교장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명부를 기록한 방명록인 활래간첩이 24권이나 된다고 하니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었다. 선교장주들은 예부터 찾아오는 손님들과 담론을 중시하여 ‘열화당’에서 인생을 사는 의미와 보람을 찾았다. 또한 전국 유수의 학자와 서예가, 화가, 음악가들이 찾아와 관동일대를 관광하며 선교장에서 많은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들은 선교장에서 편히 지내는 답례로 글과 그림, 음악 등을 선물하였다. 지금도 사랑채 내부와 안채 동별당의 주련, 활래정의 현판과 편액 등은 당시 선교장을 왕래하였던 지인들의 흔적이다.

활래정 현판과 편액, 주련 활래정 현판과 편액, 주련

사람이 살지 않고 찾지 않으면 고택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한옥은 바로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로써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곳이 우리의 전통한옥이다. 강릉 선교장 역시 이와 같은 순리를 따르고 있다. 선대의 유산을 지키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외부로부터 차단이 아닌 개방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약 270년 역사의 전통한옥을 공유하고 있다.

와가(瓦家) 와가(瓦家)
활래정 활래정
문화와전통
열화의 정신을 이어가는 강릉 선교장

선교장의 전주 이씨가가 현재 강릉시 운정동에 터를 잡고 지내온 생활은 사대부(士大夫)로서의 은둔과 풍류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后, 1773~1832)까지의 생활이 시문과 서화에 묻혀 지냈던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이씨가의 중흥기는 무경(무경)의아들 자영(子榮) 이시춘(李時春, 1736~1785)과 손자 오은 이후 때였다. 농사는 해마다 대풍이었고 가정은 나날이 번창해갔다. 주위에서는 좋은 터를 잡은 덕분이라고들 했다. 영동은 물론 강원도 일대 땅 상당 부분이 이씨가의 소유이어서‘만석군’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이는 농사지을 만한 평야가 좁고 땅이 척박한 강원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역을 남북으로 나누어 주문진(주문진)북쪽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북촌(北村:이씨가에서 주문진 일대를 부른 명칭)에서 저장했고, 강릉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수확은 남촌(南村: 이씨가에서는 묵호(동해시)일대를 부른 명칭)에서 저장토록 했다. 다만 정동(강릉시로 편입되기 전 경포면 일대)을 중심으로 한 강릉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확만을 본가에서 수납하고 저장했다. 그런 형편이니,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 일대의 상당수가 이씨가의 소작인이었던 것이다.

배다리에 터를 잡은 무경 이내번의 손자 오은거사는 이 집안에서 은둔처사의 표본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손들에 의하여 ‘처사공(處士公)’ 할아버지로 불리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사상을 지켰던 처사공은 화기(和氣)에 찬 형제, 가족, 친척간 우애의 생활을 중시하였고 시문(時文)을 즐기는 선비로서 풍류의 생활을 이상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만석군으로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거부가 된 전주이씨가의 오은 이후(李后)선생은 선대부터 있던 ‘안채’에 이이서 여러채의 건물을 증축한다. 형제간의 우애를 표방한 상징적인 건물로써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을 세웠고, ‘작은사랑채’를 지어 집안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열화당 뒷산에는 ‘팔각정’을 지어 송림 속에서 주변 지형지세와 마을형국을 굽어볼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동구(洞口)에는 연못을 파 연꽃을 심고 또 하나의 열화를 꽃피우는 공간인 활래정(活來亭)을 지었다.

노송(老松)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선교장에서도 이곳을 대표하는 건물이라면 바로 사랑채인 열화당과 동구의 활래정이라 할 것이다.

선교장 배치전경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선교장 배치전경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선교장 선교장
사랑채 열화당 이야기

순조(純祖) 15년(1815)에 오은거사에 의해 건립된 열화당은 선교장의 여러 건물가운데서도 대표격인 건물이다. 건물이름인 열화당의 당호는 중국 진(晉)나라 때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라(歸去來辭)’의 한 구절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世與我而相遺 後駕言兮焉求 (세여아이상유 후가언혜언구)
悅親戚之情談 樂琴書以消憂 (열친척지정담 락금서이소우)…”

이 가운데 ‘悅親戚之情談 樂琴書以消憂’ 구절은 “일가친척이 늘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즐겨 근심을 없애리라”라는 의미로 여기서 “열화(悅話)”의 정신을 담아 열화당이라는 당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후에게는 승조(昇朝), 항조(恒朝) 두 아우가 있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열화당이라는 당호에 담겨있다고 한다. 이후로 열화당은 고택의 주인이셨던 바깥어른들이 거주하는 사랑채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열화당의 주인들은 관동팔경을 오가는 나라의 모든 풍류가들과 벗하고 집안의 대소가들을 자주 드나들게 하여 베푸는 생활을 하였는데 여름철 사방으로 열리는 문짝을 젖히면 전후좌우로 통풍이 되어 자연의 흥취를 만끽하면서 열화를 나누었다. 더욱이 뒷산의 노송과 함께 대청 뒤뜰에 있는 수백 년이 된 늙은 백일홍나무는 열화당의 지나온 역사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선교장에도 아픔과 시련을 겪었다. 선대 어른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여러채가 전쟁의 여파로 소실되거나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하지만 1967년 민가로써는 최초로 선교장이 국가지정의 중요민속자료 제5호가 되면서 지난날 선교장의 모습이 상당부분 복원되었다. 그리고 열화의 정신을 꽃피우기 위해 열화당의 모습 역시 선대의 뜻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열화당 대청과 방에 ‘열화당 작은도서관’을 개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쁜(悅) 마음으로 여러 사람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다시 발걸음 내딛고 사람들의 책 읽는 소리와 이야기로 열화당을 풍부하게 채워갈 예정이다.
효령대군 19대손으로 현재 강릉 선교장 관장을 맡고있는 이강백(62)선생은 선교장 열화당과 같은 이름으로 1971년에 설립된 출판사인 ‘열화당’(대표: 이기웅)과 함께 집안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이처럼 작은 도서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석판 인쇄기를 제작하여 당시 문걸들의 시문을 제작하여 나누어 주고, 족보와 각종 문헌들, 그리고 조상들의 행장을 기록하여 집안의 모든 대소가들에게 배포하여 강릉 선교장 전주이씨가의 긍지로 자리매김한 열화당은 ‘작은 도서관’을 개관하여 선대어른의 열화의 정신을 이으며 강릉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서양식 차양이 보이는 열화당 서양식 차양이 보이는 열화당
열화당 남서측 전경 열화당 남서측 전경
열화당 남동측 전경 열화당 남동측 전경
열화당 내부 열화당 내부
열화당 현판 열화당 현판
열화당 대청현판 열화당 대청현판
사랑마당에 심어진 능소화

옛 열화당의 모습에서 지금과 변한 것이 있다면 전면 처마에 이어 설치된 서양식 차양시설일 것이다.
열화당 사랑마당에는 능소화가 한 그루 있다. 보통 5~8월경에 꽃잎이 피고지는 능소화는 금등화(金藤花)라고도 하는데 옛날에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양반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교장 사랑마당에도‘능소화’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의미로 선교장에도 양반꽃인 능소화가 심어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 사랑마당에 심어진 능소화에는 오랜 유래가 있다고 한다. 능소화가 이 곳에 심어진 사연은 약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충청도 서해안에 사는 선비 한분이 금강산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던 중에 선교장에 머물러 지내었다. 그 분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충청도 고향에 능소화 자랑을 하면서 나중에 또 강릉에 다시 오는 일이 있으면 능소화 나무를 가져와서 마당에 심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단다. 그 당시에는 강릉 지방에 능소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한참 지나 충청도 그 선비는 사람을 구하여 능소화를 선교장으로 보냈는데 먼 길을 오는 동안 능소화가 말라죽지 않도록 그늘을 지나오고 물을 주어가며 애지중지 가져왔다. 그 고마움과 지혜에 감탄한 현 종손의 증조부인 경농 이근우 선생은 능소화를 대문밖에 심지 않고 큰사랑 마당에 심어 그 우정과 성의에 감탄 하며 꽃을 아끼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몇 차례 폭설로 큰 가지가 부러져도 새로 가지가 올라오며 멀리서 어렵사리 가져온 만큼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지금도 그 자리에서 매년 귤색과 주황색이 어우러진 예쁜 꽃잎을 피우고 있다.

능소화
8월 꽃잎이 떨어진 능소화 8월 꽃잎이 떨어진 능소화
조선시대 차문화 명소 ‘活來亭’

봄과 여름을 맞이하는 사이 선교장을 들어서면 무궁화와 연꽃, 백일홍이 아름다운 꽃길을 만들며 활래정으로 이끈다. 활래정은 열화당과 함께 선교장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우리나라 정원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정자이다. 열화당과 같이 벽면에 흙을 바르지 않고 문으로만 벽을 연결해 만든 독특한 형태의 정자로 창밖으로는 연꽃이 만연한 연지와 소나무를 심은 인공 섬인 당주(當洲)를 조성하였다. 본래 당주를 잇는 다리가 연결되어 연지의 한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없어진 모습이다.

활래정은 열화당을 지은 다음 해인 순조 16년(1816)에 이후(李?. 1773~1832)가 건립하였는데 현재 건물은 이후의 증손인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가 고종(高宗) 43년 (1906)에 중건한 것이다. 활래정이라는 정자이름은 주자(朱子)의 詩 ‘관서유감(觀西有感)’의 시구인 '爲有頭源活水來(위유두원활수래) 가운데 ‘活來’를 본하여 지었다고 한다. 어구의 뜻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라는 뜻으로 활래정 역시 한밭(大田)의 태장봉(胎臟峰)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 연못의 활수(活水)로 하고 있다.

서울 비원(?苑)의 부용정(芙蓉亭)과 흡사한 모습으로 축조된 활래정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돌출하여 이를 돌기둥으로 받쳐놓은 누(樓)형식의 정자로 건물의 일부가 물 가운데 떠 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장지문을 닫으면 두 개가 되는 온돌방이 누마루와 합쳐져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룬다. 특히 활래정의 특징은 방과 마루를 연결시키는 복도 옆에는 차를 끓일 수 있는 다실(茶室)이 있어 멀리서 뜨거운 물을 가져오지 않고 찻물을 끓여 곧바로 차를 우려낼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한 것이라 하겠다. 부용정과 같은 독특한 운치를 자랑하는 활래정 내에 차를 끓일 수 있는 ’부속 차실‘을 둔 정자의 형태는 조선시대 건축양식에서도 아주 독특한 모습이다.

이는 선교장 주인들이 차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선교장을 찾은 많은 묵객들은 이곳에서 차한잔과 함께 시를 읆고 거문고를 켜고 노래를 즐기며 풍류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경포호수의 크기가 상당히 줄어들어 활래정에서 감상할 수 없지만 예전에 정자를 지었을 무렵에는 경포호수의 풍광까지 한눈에 들어와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선비와 풍류가들의 안식처로서 사랑을 받았다.

특히 오은 이후의 증손으로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쳐 선교장의 주인이었던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 선생은 활래정의 품격을 한층 높여 놓았다. 경농은 시, 서, 화를 꿰고 있었고 음악을 벗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특히 거문고를 좋아하여 전국의 명인들을 초청하여 교우하였으며 몇 달씩 열화당과 활래정에서 친분을 쌓았다. 또한 선교장의 주인으로 찾아오는 과객과 선비들에게 무전취식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학자와 예술가들을 초청하였으며 뜻이 있는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선교장에서 그들의 기량을 키울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지금도 선교장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서화가 남아있어 이들과의 왕래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경북 성주 출신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은 경농 선생과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그는 12세 때 이미 서예의 자질이 뛰어나 진주 향교의 집필사로 발탁된 인물로 우연한 기회에 선교장에 놀러 갔다가 마침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과객들 사이에서 장난삼아 일필휘지한 것이 경농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차강 보다 세살 아래인 경농 이근우는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차강은 그날 이후 줄곧 선교장에 머물면서 관동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선교장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은 활래정의 아름다움과 선교장 주인과의 교우를 족적으로 남겨놓았다. 이는 활래정에 걸려있는 현판과 다양한 편액, 주련들에서 알 수 있다.
활래정 누마루인 대청에는 순조 때 영의정인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의 ‘活來亭記(활래정기)’가 있어 활래정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活來亭’이라는 현판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규원(葵園) 정병조(鄭丙朝) 등이 썼으며, 이진화(李鎭華), 임준상(任俊常), 심동윤(沈東潤) 등 수많은 사람들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농천(農泉) 이병희(李丙熙)의 주련이 건물의 각 면에서 휘장처럼 둘러있다. 이 글씨들은 조선시대 말엽, 당대 명필가들의 것으로 활래정의 면모와 품격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는 숨결을 불어넣았다.

태장봉으로부터 끓임없이 내려오는 활수(活水)는 근 200년의 시간 속에서도 활래정 연못의 연꽃을 활짝 필 수 있는 생명을 불어넣고 있으며 선교장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활래정의 누마루에 앉아 차 한 잔과 함께 풍류를 즐기며 한 때의 시름을 덜어낸다.

활래정의 입구인 월하문(月下門) 문설주에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읊은 시, ‘퇴고(推敲)’의 구절이 한 수 새겨져 있는데, 이 또한 배다리마을에 정착한 전주이씨가의 넉넉한 인심과 풍취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은 달 아래의 문을 두드리도다”

선교장에서 이 시구의 의미는 “늦은 저녁 선교장을 찾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월하문을 두드리시오. 그러면 반갑게 맞이하겠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동구(洞口)와 활래정(活來亭)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동구(洞口)와 활래정(活來亭)
선교장 입구에서 바라본 활래정 선교장 입구에서 바라본 활래정
활래정 활래정
활래정 현판과 주련 활래정 현판과 주련
활래정 입구 현판과 주련 활래정 입구 현판과 주련
활래정 대청마루 활래정 대청마루
활래정 현판과 주련 활래정 현판과 주련
가을의 활래정 가을의 활래정
겨울의 활래정 겨울의 활래정
월하문 월하문
월하문에 새겨진 시가 월하문에 새겨진 시가
가옥구조

선교장은 이내번이 1748년 어머니 안동권씨와 함께 충주에서 강릉 저동(苧洞. 경포대주변)일대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세(家勢)가 확장되면서 전주이씨가의 터전을 새로 마련한 곳이다.
당시 북평촌(北坪村)이라 불리었던 선교장은 ‘배다리마을’로도 불리었는데 이는 당시 경포호가 가옥일대에 걸쳐 있어 왕래를 위해서는 배로 다리를 만들어 이동했기 때문이다.

선교장배치전경(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선교장배치전경(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선교장배치전경(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선교장배치전경(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오죽헌과 경포대 등 경승지가 즐비한 곳에 함께 자리한 선교장은 북서쪽으로는 시루봉의 산줄기가 가옥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측면에는 경포호로 향해 넓게 트인 형상을 하고 있다. 이를 '노서하전형국(老鼠下田形局)‘이라 하는데 풍수지리상으로도 길지의 하나로 꼽힌다.

선교장전경 선교장전경
선교장 설경 선교장 설경

선교장의 영역은 가옥 주변의 산으로 둘러싸여 능선과 평지가 면하는 지점에 조화롭게 형성되었다. 이곳에 터를 닦은 이내번과 그 후손들이 누대를 거듭하면서 살림채를 증축하고 보수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체 주거건축물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안채를 둘러싸고 동별당과 서별당 및 연지당이 안채영역을 이룬다. 그리고 좌측으로 큰사랑채인 열화당과 중사랑채가 사랑채영역을 구성한다. 안채영역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안대문은 문간채를 이루고 있으며 동편으로 별채인 외별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전면에는 행랑채와 문간채가 길게 연이어 있으며 사랑채 출입구인 솟을대문을 높다랗게 세웠다.

솟을대문 솟을대문

동구(洞口)에는 방형의 연지를 두고 별당인 활래정을 배치하고 선교장을 마주하고 남서측면의 백호등성이 아래 솔거노비의 집들이 배치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홍례헌, 수예품 판매점, 자미재 등의 건물들이 설치되어있다. 중사랑채 촤측으로는 곳간채와 옛 동진학교의 터인 교당마당이 자리하고 전통문화체험관 건물들과 야외공연장이 함께 마련되어 있다. 선교장은 이처럼 주건물인 본채와 별당, 그 외 건물군으로 영역이 구획된다.

남동과 북서를 축으로 긴 대지에 자리하고 있는 선교장은 주로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북서쪽에 사랑채인 열화당과 중사랑채, 서별당과 연지당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협문을 두고 담을 막았다. 남동측면에는 안채와 동별당이 자리하며 주 건물의 전면에는 긴 행랑채가 있어 솟을대문 앞의 바깥마당과 본채사이를 구분하고 건물 내부로는 사랑채마당을 구획하는 역할을 한다. 전체 가옥구조 가운사당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서별당은 ‘ㄴ’자형의 연지당과 안채 건넌방 배면이 작은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 작은 협문과 담장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있으며 서별당을 출입구 협문의 전면으로 선교장의 주출입문인 솟을대문이 있으며 대문상부에는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을 지닌 ’선교유거(仙嶠幽居)’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사랑채로 통하는 문인 솟을대문은 대문기단 상부까지 경사로를 만들어 수레가 이동하는데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행랑채 우측으로 병렬하여 안대문채가 있어 또한 특이하다. 사랑채와 안채를 출입하는 문이 평면적으로는 동일한 축선상에 위치하는 것이 선교장 가옥구조의 특성인 것이다.

선교장 바깥마당과 활래정 원경 선교장 바깥마당과 활래정 원경
활래정 활래정

이곳 안대문 아래 외별당으로 향하는 곳에 오래된 우물이 있으며 그 아래 넓은 터에 선교장의 가장 대표적인 풍류와 문화소통의 공간이었던 활래정이 위치한다. 동구(洞口)에 자리잡은 활래정은 연지(蓮池)를 파고 인공 섬인 당주(當洲)를 조성하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을 건립하였다.

본채 주요 건물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선교장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안채 주옥(主屋)은 약 1748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안채는 전주이씨가의 큰살림을 맡은 주인의 부인(正室)이 사용하던 곳으로 맏며느리가 머물던 건넌방과 함께 마련되었다. 개기 당시의 안채 형태에 대해 기술된 사료가 전하지 않아 최초 건립 당시의 모습은 정확치 않으며 이내번의 4세손인 이회숙(李會淑. 1823~1876)대인 1853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도리 장혀상부에 묵서로 적혀 있는 상량문에 적힌 「용 함풍삼년계축사월초사일묘시립주동일오시상량 구(龍 咸豊三年癸丑四月初四日卯時立柱同日午時上樑 龜)」(조선 철종3년, 1853)의 기록으로 살필 수 있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다.

평대문을 지나 안채주옥으로 향하는 협문 평대문을 지나 안채주옥으로 향하는 협문

안채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양측은 온돌방과 고방을 이루고 있다. 정실의 거처인 안방 뒤쪽에는 ’고방‘을 설치하여 안주인의 은밀한 생활공간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안방 앞에서부터 건넌방과 찬방에 이르기까지 툇마루를 연결하였다. 선교장은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고 대가족을 꾸리기 위해서는 음식을 차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이는 안채에 이어진 큰 부엌과 건넌방의 작은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건넌방 아래로 찬방을 따로 두어 식사를 마련하였다.
안채주옥의 동편으로 높은 축대를 쌓고 ‘ㄱ'자형의 동별당이 마련되어있다. 동별당은 1920년 경농 이근우가 건립한 건물로 주로 안주인 거처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안채와 이어진 특징이 있는데이곳은 외부내객들에게 시달리는 안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외부손님이 아닌 친척이나, 외척 등의 내빈 등을 접하기도 하였다. 북서쪽에서 온돌방, 대청, 온돌방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으며 대청 앞과 뒤에는 툇마루를 연결하여 방과 대청의 연결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대청은 전면에 사분합문을 달았다.

안채주옥 안채주옥
안채고방 안채고방
안채주옥의 툇마루와 건넌방, 찬방 안채주옥의 툇마루와 건넌방, 찬방
안채부엌 안채부엌
동별당 동별당
동별당에서 외별당으로 향하는 협문 동별당에서 외별당으로 향하는 협문
동별당과 인접건물 근경(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동별당과 인접건물 근경(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작은 협문이 있는데 이를 통하면 서별당과 연지당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1칸의 ‘一’자형 평면을 이루는 서별당은 본래 무경(茂卿) 이내번의 증손인 인의공(引儀公) 익옹(瀷翁) 이용구(李龍九, 1798~1837)때 건립되었으며 안채와 열화당 사이, 가장 깊숙한 쪽에 위치하며 서재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1996년에 복원되었다. 서고겸 공부방으로 사용된 서별당은 맏며느리에게 살림을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서별당과 연지당을 구획하는 협문 서별당과 연지당을 구획하는 협문
서별당 서별당
연지당과 받재마당 연지당과 받재마당
안채 건넌방 배면과 받재마당 아래 보이는 협문 안채 건넌방 배면과 받재마당 아래 보이는 협문

서별당 아래 ‘ㄴ’자형 건물인 연지당은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로 사용한 곳으로 가운데는 마루이며 양쪽으로 온돌방을 마련하였다. 앞마당은 ‘받재마당’이라 불렀으며 안채로 들이는 곡식이나 금전을 들일 때 사용하였다. 연지당의 마루는 세간이나 여러 물건을 넣어 두는 창고로 활용되었다. 마당의 북서쪽에는 열화당으로 통하는 협문이 설치되어 있어 안채와 사랑채를 구획하였다.

안채영역인 서별당과 연지당을 동쪽으로 두고 바깥주인의 생활공간이자 접객실로 이용된 열화당이 자리한다. 순조15년(1815) 이내번의 손자, 오은(鰲隱) 이후(李?. 1773~1832)에 의해 건립된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온 집안의 식구들이 이곳에서 정다운 이야기(情話)를 나누고자는 뜻을 담은 건축물로 선교장 열화정신의 근본이 되는 곳이다.

열화당 열화당
열화당 기단 열화당 기단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사랑마당을 두고 뒤편 산 아래에 자리한 열화당은 건물의 벽이 모두 문으로 지어진 것이 특색이다. 또한 동판(銅板)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遮陽)시설을 두어 햇빛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러시아식의 건축물로 개화기때 러시아영사가 머무른 답례로 지어준 것이라 한다.

열화당은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있어서 층층다리를 올라서야 들어서게 된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一’자형구조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겹집구조를 이룬다. 4칸 크기의 누마루대청, 사랑방2칸, 침방1칸, 2칸 크기의 누(樓)마루로 구성된다. 작은대청인 누마루는 전면으로 약간 돌출된 형태로 열화당의 운치를 더한다. 건물의 전면에서 우측부는 툇마루와 난간으로 둘렀으며 배면은 툇마루로 연결하였다.

열화당의 뒤쪽은 후원(後園)으로 배롱나무 등의 식수와 함께 노야원이라는 초정이 있다. 아침 일찍 손님들이 일어나면 후원으로 산책을 하고 노야원을 오르는 돌계단을 ‘ㄹ'자형으로 만들어 마주치는 손님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없지만 팔각정이라는 정자를 뒷산에 마련하였다고 한다.

노야원 노야원
노야원 오르는 길 노야원 오르는 길

사랑채인 열화당과 직교하여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좌측인 북서쪽에 중사랑채가 위치한다. 중사랑은 주로 손님맞이를 위한 곳으로 전국의 학자와 풍류객들이 교분을 나누었던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구성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1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로 2칸씩 온돌방이 배치되었다. 특히 온돌방은 하나의 트인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고, 때에 따라 한 개의 방을 장지문으로 사이를 막아 4개의 작은방으로 나눌 수 있도록 하였다.

열화당 차양시설과 중사랑채 열화당 차양시설과 중사랑채

마을진입로를 향해 길게 펼쳐진 행랑채는 전면의 돌출되어 만들어진 굴뚝과 조화를 이루어 자칫 외부와의 단절감을 느낄 수 있는 단순함을 극복하였다. 사랑채로의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안채로 직접 출입하는 평대문이 나 있으며 행랑방에는 사랑마당을 향해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동별당 앞에서 사랑채영역의 앞까지 ‘一’자형으로 되어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열화당까지 ‘ㄴ’자형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주이씨가 젊은이들의 작은사랑방 역할까지도 맡고 있었다.

안채영역의 출입부인 선교장의 우측은 문간채로(대문채)로 표기하고, 반대측인 좌측 행랑이 있는 곳을 행랑채로 구분한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와 문간채를 구분하는 영역은 솟을대문에서 우측으로 2칸이 되는 지점이다. 과거 집주위를 둘러 있던 행랑채가 바깥 행랑채였으며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행랑채를 중행랑채라 하였다.
선교장은 많은 식구들과 접객들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머물렀으며 의식주생활 외에도 필요한 시설들이 있었다. 약재(藥材)를 통해 일반적인 치료와 건강관리를 담당했던 한의사, 손님들의 옷감을 수선하고 신발을 수리할 수 있는 공동작업 공간도 마련되었던 것이다.

행랑채 전면 행랑채 전면
행랑채 내부 행랑채 내부
안채 주출입구 평대문과 차막 안채 주출입구 평대문과 차막
평대문 내부(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평대문 내부(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안채영역과 사랑채 영역을 잇는 통로와 중문 안채영역과 사랑채 영역을 잇는 통로와 중문

사당은 선교장 집안 선조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안채 배면부에 위치한다. 단층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정면3칸 측면 2칸 크기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다.

사당 사당
사당 배면 사당 배면

선교장 본채와 별당채를 제외한 부속건물로는 선교장 영역 전체 부지의 북서측과 서측에 위치한 건물들로 곳간채, 동진학교, 방앗간, 초가 1?2관, 전통문화체험관, 자미재, 민속자료전시관, 홍예헌 1?2관 등이 있다.

곳간채는 선교장의 경작지 중 경포호 일대와 주변의 농작물을 수확하여 보관하던 곳이었다. 중사랑채에서 행랑을 따라 서측으로 향하는 협문을 지나면 보이는데, 당시 곳간채의 일부를 강릉시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로 변경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복원된 동진학교는 현재 선교장 일원의 관리실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곳간채 곳간채
동진학교 터 동진학교 터

방앗간은 선교장의 가장 뒤편에 배치되어있다. 기와집 옆의 초가지붕을 한 지붕으로 마당쪽으로 개방된 곳이며 내부에는 디딜방아 1기와 옹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전통문화체험관은 국가의 지원으로 신축한 건물로 현대식 욕실과 주방, 식당, 세탁실 등을 겸비하고 있는 한옥양식에 현대식 가옥의 내부구조를 복합한 건물이다. 외부에는 야외 공연장이 함께 있으며 선교장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숙박시설 및 편리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통문화체험관

초가 1ㆍ2관, 홍예헌 1ㆍ2관은 집안의 친척들이 거처하던 공간을 수리하여 체험객 가족이나 개인의 숙소로 사용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초가 초가
홍예헌 1관 홍예헌 1관
홍예헌 2관 홍예헌 2관

자미재(滋味齋)는 선교장 14대 종부이신 성기희여사가 관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강릉지역의 여성들에게 전통음식을 강의하고 실습을 했던 공간이었다. 1966년 종부가 직접 지은 것으로 본래는 창고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전통요리와 음식을 전수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자미재 자미재

민속자료전시관은 약 270년의 역사를 지닌 선교장의 역대 유품을 일부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중인 전시관이다. 전통의상전시를 통해 전통복식을 관람할 수 있으며 선교장에서 사용된 일부 생활도구 및 장식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민속자료전시관 민속자료전시관
민속자료전시관 내부 민속자료전시관 내부
민속자료전시관 내부 민속자료전시관 내부
디딜방앗간 디딜방앗간
문화유산
민속자료전시관

약 2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선교장의 역대 유품 가운데 일부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중이다. 전통복식을 관람할 수 있으며 선교장에서 사용된 일부 생활도구 및 장식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실은 가구자료실로서 담배함·문갑·탁자 등 옛 사랑방과 안방 세간살이를, 제2전시실은 식생활자료실로서 다기(茶器)·제사용기 등 식생활 용구를, 제3전시실인 전적(典籍)자료실은 저명학자들의 서한문과 고서 등 전적자료를, 제4전시실인 민속자료전시관은 각종 복식류와 장신구를 진열하고 있다. 또, 전시된 유물 외에도 3000여 점의 고서와 서화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장도 장도
화관(花冠)

예장(禮裝)을 할때 쓰는 것으로 보통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칠보로 장식을 한 관이다.

설피와 짚신

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을 말한다.
설피는 겨울철 산간 지방에서 눈이 많이 왔을 때 신발 위에 신는 덧신으로, 주로 여러 해 묵은 다래나무를 둥글게 타원형으로 굽혀서 자기 발에 크기를 맞추고 바닥은 질긴 밧줄이나 삼끈으로 얽어맨 다음 그 위에 신발을 신은 채 발을 묶어서 맨다. 대체로 설피는 바닥이 넓고 투박한 편이어서, 눈길을 걷는데 용이하였다.

나막신

비가 올 때 신던 나무로 만든 신이다. 물이 고인 진 땅에서 신도록 앞뒤에 높은 굽이 있는 나무를 파서 만든 신이다. 꺽두기, 나막신은 나무신이라는 뜻의 고유한 우리말로서 나무를 깎아 만든 신발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투리

삼, 모시, 노(실 · 삼껍질 · 헝겊 · 종이 등으로 가늘게 꼰 줄) 등으로 삼은 신으로 삼신이라고도 일컫는다.

비녀

한자로는 잠(簪)이라고 한다. 쪽을 고정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면서 장식의 구실도 겸하였고, 재료와 형태에 따라 명칭·용도 등이 달랐다.

한국에서 비녀(簪)의 사용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으리라고 추측되나,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 것은 조선 후기 영조(英祖)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에 사치를 금하기 위하여 모든 부녀의 머리 모양을 쪽으로 하도록 하여 쪽머리가 일반화되면서 비녀의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비녀의 모양이 이 때부터 다채로워졌다.

비녀의 종류는 재료에 따라서 금(金)·은(銀)·백동(白銅)·놋(鍮)·진주(眞珠)·영락(瓔珞)·비취(翡翠)·산호(珊瑚)·목(木)·죽(竹)·각(角)·골(骨) 비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비녀 머리형태의 장식에 따라서 용잠(龍簪)·봉잠(鳳簪)·원앙잠(鴛鴦簪)·오두잠(烏頭簪)·어두잠(魚頭簪)·매죽잠(梅竹簪)·죽잠(竹簪)·매조잠(梅鳥簪)·죽절잠(竹節簪)·연봉잠·목련잠(木蓮簪)·목단잠(木丹簪)·석류잠(石榴簪)·가란잠(加蘭簪)·국화잠(菊花簪)·화엽잠(花葉簪)·초롱잠(草籠簪)·호도잠(胡桃簪)·심잠(簪)·두잠(豆簪)·완두잠(腕豆簪)·민잠(珉簪)·말뚝잠·조리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존비귀천(尊卑貴賤)의 차별이 심하여 금은·주옥으로 만든 비녀는 상류계급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서민층 부녀들은 나무·각(角)·골(骨) 등으로 된 비녀만을 사용하였다. 비녀의 형태도 용잠·봉잠 등은 예장(禮裝)할 때 다리를 드린 큰 낭자 쪽에 꽂았고, 다른 것도 형태·재료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사용하였다.

쌈지류

담배, 돈, 부시 따위를 싸서 가지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를 뜻한다. 가죽, 종이, 헝겊을 소재로 한다.

토시

취음(取音)으로 투수(套袖)와 토수(吐手)에서 나온 말이다. 저고리 소매 비슷하게 생겼는데 한끝은 좁고 다른 한끝은 넓다. 토시는 겨울용과 여름용이 있다. 겨울용은 추위를 막기 위해서 털·비단·무명·교직 등을 겹으로 만들어 끼었으며, 여름용은 저고리 소매 안쪽에 땀이 묻지 않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도록 한 것으로 등나무 또는 말총 등으로 만들었다.

또한 모양과 재료에 따라 털토시, 누비토시, 등토시, 마제굽토시 등으로 나뉜다.
① 털토시 : 외출할 때 남녀가 다 끼며 색으로 남녀를 구별한다. 귀족층에서는 비단에 고급 털을 대서 만들어 썼다.
② 누비토시 : 겨울용으로 솜토시·누비토시 등을 사용하고 봄과 가을에는 겹토시, 여름에는 모시·항라 등으로 만든 홑토시를 꼈다.
③ 등토시 : 조선 후기에는 여름철에 적삼 속에 땀이 배지 않고 시원하게 하기 위하여 등나무로 만들어 끼었다.
④ 마제굽토시 : 말발굽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은다기 세트

약 190년 전의 야외용 은다기 세트이다. 뱃놀이시 선상에서 쓰이던 것으로 이동식 차함 속에 다양한 차 도구를 담을 수 있었다. 사각 차병, 은 찻잔, 차주전자, 이동식 화로, 다식함 등 조선시대 상류계층의 차문화 귀풍을 엿볼 수 있다.

고택여행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무경 이내번이 강릉 저동(現 운정동)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약 270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고택(古宅)이다. 옛날에는 경포호수가 선교장 입구까지 걸쳐있었는데, 이 때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넜기 때문에 배다리 집이라고 불리었다.

배다리마을에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건물의 원형을 유지하고 가승 문화와 전통을 지키고 있는 선교장은 1967년 4월 18일 한국 전통가옥으로써는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5호에 선정되면서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았다.

이후 문화관광부, 문화재청 등의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고택 중 일부에 대한 복원 및 보수 공사를 거치며 선교장 옛 모습을 시민들에게 개방,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오죽헌과 경포대 등의 명승지가 자리한 일대에 함께 위치하고 있는 선교장은 조선시대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기까지 누대에 걸쳐 가옥을 신축하고 중건하였으며 가옥이 위치한 운정동 일대에 대규모 장원을 운영하였다. 소나무 숲이 병풍과 같이 선교장을 감싸고 있어 더욱 그 운치와 멋을 더하고 있으며 활래정은 한국 민가정원 정자의 극치를 이루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누고 공유하며, 전파하고 자원화기 위해 경주하는 선교장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에 따라 그 색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행사와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눈으로만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도약하고 있는 곳이다.

안채 주옥

안방 마님과 여인들의 거처로 선교장 270년 역사의 여러 건물 중 최초로 지어졌다. 선교장의 강승 음식과 한과 등을 만들며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동별당

안채 동쪽에 자리한 별채로 외부 손님이 아닌 가족과 친척들의 휴식공간과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규방문화의 이야기방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서별당

안채 서쪽에 위치한 별채로 서재 및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다. 서책을 준비하여 누구나 책을 보며 읽고 쉬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체험객의 숙박시설로도 활용예정이다.

서별당 전면 서별당 전면
연지당

서별당 전면의 건물로 집안 일을 도와주던 여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앞마당은 안채로 들어가는 재물을 확인하던 곳으로 ‘받재 마당’이라고 불린다. 의상, 자수 등의 체험장으로 활용할 예정이 체험객의 숙박이 가능하다.

연지당과 받재 마당 연지당과 받재 마당
열화당(큰사랑채)과 중사랑

열화당은 선교장의 주인 장주의 거처공간이다. 1815년에 지어진 건물로 외벽이 모두 문으로 지어진 것이 특색이다. 온 집안의 식구들이 이곳에서 정다운 이야기(열화)를 나누며 지내자는 것이 선교장 열화정신의 근본이다. 예절, 서예, 충효사상의 이야기방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중사랑은 집안의 맏아들과 중요한 손님들의 거처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중사랑 역시 체험객의 숙소로 활용한다.

열화당 전면 열화당 전면
중사랑 전면 중사랑 전면
후원(노야원)과 초정 후원(노야원)과 초정
행랑채

문간채로써 선교장 모든 건물의 전면에서 그 웅장함을 나타낸다. 지나던 선비와 풍류객들이 중사랑과 더불어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체험객의 숙박이 가능하다.

행랑채 행랑채
활래정(活來亭)

한국 민가정원 정자의 극치미를 보여주는 곳이다. 물이 끊임없이 흘러온다(活來)는 뜻으로 지어졌으며 관동팔경을 지나는 많은 풍류객들이 이곳에서 시문을 남긴 곳이다. 체험객들의 다도 체험장으로 사용한다.

전통문화체험관

문광부의 지원으로 지어진 건물로 지상은 전통 한옥, 지하에는 현대식 욕실, 주방, 식당, 세탁실 등 40~60명이 단체로 숙박할 수 있는 규모이다. 300석의 야외 공연장이 있으며 내부의 방 사이를 열면 확 트인 온돌 구조로 되어 있어서 단체의 모든 체험 활동을 이곳에서 할 수 있다.

전통문화체험관(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5호 「江陵 船橋莊」, 기록화보고서)
초가 1ㆍ2관

선교장의 부속 건물로 집안의 친척들이 살던 초가 2동이 있다. 체험객 가족이나 개인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내부는 욕실과 취사실이 준비되어 있다.

홍예헌 1ㆍ2관

선교장 주건물 밖에 위치하며 집안의 친척들이 살던 집으로서 기와 2동이 있다. 가족 단위의 체험객이 사용하며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온돌방, 욕실, 거실 등이 있으며 취사는 금하고 있다.

홍예헌
자미재

창고를 개조하여 전통 음식 만들기 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통문화 교육관 및 실습관

수용인원 150명 규모의 강연, 공연, 실습, 혼례장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민속자료전시관

선교장 유품 가운데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선교장 전통 음식점

선교장 손님맞이 반상 및 가승음식을 관람객 및 체험객,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는 곳이다.

(참조 : 강릉선교장 http://www.knsgj.net/)

선교장 체험프로그램
전통 음식문화 체험
민속놀이 체험
공연체험
다도,한과,떡 만들기
제기차기
강릉 관노가면극 공연
전통요리
그네뛰기
강릉 농악 공연
토속 음식 만들기
널뛰기
사물놀이
김장 담그기
투호 놀이
국악 연주
송이버섯 채취 및 요리
윷놀이
민요
각종 산나물 채취 및 요리
쥐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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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물 채취 및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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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체험
신부학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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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 상제례 바로알기
정기적으로 모집하여 미혼
여성들에 대한 신부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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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는 법 / 한복 입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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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 차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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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수와 호칭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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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 진행에 있어서 체험객의 요구에 따라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소모되는 경비는 체험객 부담으로 상호 협의 후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