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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병국가옥

연혁
선병국가옥 전체 선병국가옥 전체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지정

지정일 : 1984년 1월 10일

소유자 : 선민혁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건축시기 : 조선시대

충북 보은군에 위치한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지정된 전통한옥으로 고려시대 예의판서(禮儀判書) 와 우문각대제학(右文閣大提學)을 지낸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하는 보성선씨 가문의 고택이다.
이곳에 터를 잡아 가옥을 건립한 것은 병조판서 약해(若海)의 후손으로 현 종손인 선민혁씨의 증조부인 선영홍공(宣永鴻公) 때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데에는 유래가 있다. 선영홍이 집터를 찾던 어느날 꿈을 꾸는데‘섬’에 집을 지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지관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선몽한 집터를 찾아다녔다. 당시 서울의 여의도와 보은의 현재 집자리가 후보지였는데 지관이었던 심노인이라는 분이 이곳으로 터를 정하였 다고 한다.

선병국가옥이 위치한 삼가천의 하개교

선병국가옥의 위치는 속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물줄기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데 이 물줄기가 고택이 위치한 평지를 감싸고 두 줄기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류하는‘육지 속 섬’의 형상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이와 같은 지형을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여 매우 좋은 명당이라 일컫는다. 집터의 토질이 모래와 자갈이라서 별다른 배수시설 없이 공사를 시작하였다.
선영홍은 고종 40년인 1903년에 전남 고흥에서 지금의 하개리로 입향하여 1919년에서 1924년 까지 아들인 선정훈(宣政薰)과 함께 이 집을 건축하였다. 선민혁씨에 따르면 증조부께서 이곳에 집을 짓기를 하명하고 당시 17세의 나이였던 조부 선정훈공이 주도하여 부친과 함께 신축하였다고 한다.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당시 궁궐목수로 유명했던 ‘방대문’이라는 사람이었다.

솟을대문

가옥의 모습을 살펴보면 안채는 서향으로 하고 사랑채는 남향으로 해야 한다고 하여 그대로 건축하였고 사랑채와 안채가 ‘工'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 상 평면구성에 있어서 공(工)자나 시(尸)자 모양의 집은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工은 ‘부수는 것’을 뜻하고 尸자는 ‘시신(尸身)’ 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풍수지리상 집터를 이루는 대지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을 채택하였다. 건축이후 초기 에는‘工'자형 평면을 통해 터의 흉함을 제거하고 70~80년 후부터는 길하게 된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구조를 이루게 한 것이다.
고택의 전반적인 구조는 3,900여 평의 넓은 일곽 내에 사랑채영역, 안채영역, 사당영역의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구획되었으며 사랑채 와 안채 앞으로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보성선씨가로 전남 고흥에서 충북 보은으로 입향한 현 종손의 증조부와 조부는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도 넉넉한 인심을 베푼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랑채

선영홍공은 전남 고흥에서 대흥사라는 서숙을 설치하여 각지의 인재를 모아 무료로 교육 및 시설을 제공하여 지역 유림(儒林)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인 선정훈은 한일합방(1910) 이후에 전남 고흥에서 외속리면 하개리에 이주하여 부친과 함께 99칸의 대저택을 신축하고 저택 동편 에 관선정(觀善亭)을 만들었고, 보은 향교 명륜당에도 서숙(書塾)을 설치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제반 비용을 사저로 전담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현재 이집에는 종손인 선민혁씨 내외분과 자제분들이 살고 있으며,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이용하여 고시생이 공부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선병국 가옥은 입지를 인위적으로 변경하여 수해를 입은 적도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선병국 가옥의 동/서로 갈라져 흐르는 하천 중 동쪽의 물길을 막는 직강공사를 하여 농토로 개간하였으나 1980년과 1998년 집중호우 때 물이 범람하여 가옥에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가옥 주변의 소나무 숲은 처음 조영할 때 안산의 역할을 하기 위해 조성한 것인데 두 차례의 큰 수해로 인해 함께 피해가 일었다. 이에 종손 선민혁씨가 지역 주민의 동의를 구해 삼가천을 현재의 상태로 복원하였고 이후로는 홍수 등의 수해를 입지 않고 있다. 그리고 훼손된 소나무 숲 역시 다시 복구를 이루었다.

안채 안채
사당 사당
관선정(복원모습) 관선정(복원모습)

※ 참조 : 문화재청 “보은선병국가옥” 전문설명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문화와전통
효자와 열녀의 집안인 보은 선씨가의 선민정신과 인재양성을 위한 노력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된 충북 보은의 ‘선병국 가옥(宣炳國家屋)’은 현 종손인 선민혁(宣民赫. 62)씨의 조부 선정훈(宣政薰)선생과 증조부이신 선영홍공(宣永鴻公)이 고종 40년인 1903년에 전남 고흥에서 지금의 하개리로 입향한 이후 함께 지은 대저택으로 1919년부터 1924년에 걸쳐 완공하였다.

하개교 아래로 흐르는 삼가천

고택을 지은 후 약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랑채와 안채, 사당 등의 주요 건축물이 그 원형을 온전히 유지, 근대에 건축된 전통한옥으로써 그 건축기법을 연구하는 학술적가치가 매우 높은 고택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전통한옥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건축술을 자랑하는 선병국가옥은 그 내력에 있어서도 참으로 진한감동을 느낄 수 있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선영홍공의 아버지인 선처흠(宣處欽)선생과 경주김씨 부인은 고종(高宗) 29년(1892)에 나라에서 효자와 열녀로 명정(命旌)하여 정려각을 세웠다. 그리고 보은으로 입향한 보성 선씨가의 선영홍공과 선정훈공의 선민정신과 덕행에 관한 이야기들은 지금도 구전과 비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한일합방이라는 어두운 시기에도 한학(漢學)을 지키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두 분의 물심양면을 아끼지 않은 노력들이 고택의 역사와 함께 소중히 이어지고 있다.

선씨가의 섬의 가로놓인 하개교와 하개1교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報恩宣炳國家屋」기록화보고서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報恩宣炳國家屋」기록화보고서
선씨가의 섬을 양갈래로 나눈 삼가천의 합류처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충청북도 보은에 입향한 보성선씨 세보를 참조한 가계도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p. 44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p. 44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선처흠 효열각은 선처흠의 효행과 그의 처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 고종 29년(1892) 10월에 명정(命旌)하니 그에 따라 무진년(戊辰年)에 정려각을 세웠다’라고 그 내력을 밝히고 있다. 편액의 우측에는 ‘효자 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散大夫童蒙敎官宣處欽之門)’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좌측에는‘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宣處欽悽今人慶州金氏之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처흠공(宣處欽. ?~1921)은 선민혁씨의 고조부로 당시 공의 아버지가 안질이라는 질병으로 고생하시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한 효자였다. 당시 아버지께서 안질이 심하여 침과 약으로 계속 치료받았으나 차도가 없자 의원이 매고기가 명약이라 하여 매를 얻고자 영마산에 가서 기도를 하니 한 쌍의 매가 날아들어 이를 잡아 아버지께 드리니 차도가 있었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이레(칠일)동안 기도하니 또 다시 매를 얻어 오래된 안질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선처흠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선처흠의 부인 경주김씨 역시 효성이 지극했고 남편을 하늘같이 섬겼는데 남편이 병에 위급하자 넙적다리를 베어 시약하고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수일간을 더 연명케 했다고 한다. 이후 병이 완쾌되어 또한 열녀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선처흠공과 그의 부인 경주김씨에 대한 효행과 열녀로서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이들을 효자와 열녀로서 명정하였다. 이에 효열각을 세우고 두 사람의 감명 깊은 행실을 행장으로 소상히 기록한 것이다.

효열각은 단칸의 소규모 비각으로 선병국 가옥의 솟을대문 전면의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에 일각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러 안치하였다. 원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충북 보은으로 입향하여 세거함에 따라 192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효열각 입구의 일각문 효열각 입구의 일각문
효열각 단청 효열각 단청
효자와 열녀를 나타내는 홍판과 비석 효자와 열녀를 나타내는 홍판과 비석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는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의 아버지이며 비서경(秘書卿)을 지내신 선영홍공에 대한 시혜비로 전라남도 고흥군의 두원(豆原), 점암(点岩), 남양(南陽), 남면(南面) 등의 4개면 소작인들이 뜻을 세워 만든 철비(鐵碑)이다. 이 철비(鐵碑)는 이 집안이 전남 보성에서도 큰 부자였으며, 그의 부친인 영홍(永鴻) 公은 당시 그 지방의 생활고로 어려웠던 많은 사람들에게 허기지지 않도록 많은 선행을 베풀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선영홍공은 전남 고흥군에 거처할 때 그곳의 많은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인하하였으며, 논밭을 소작인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나라에 내야하는 고흥군 면민들의 세금을 대신 내주는 등 농사를 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선정을 베풀었음을 이야기하고, 이에 고흥군 4개 면의 소작인들 1922년 선영홍공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뜻을 모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철비는 원래 고흥에 있었으나 한일합방이후 일본이 대동아전생시 철을 모으기 위해 임의로 옮겨갔으나 다행히 여수에서 현 종손인 선민혁씨가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하고 철비를 함께 만든 4개 면민의 후손들과 협의를 거처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손인 선민혁씨의 얘기에 따르면 이러한 선민정신을 가지고 계셨던 선영홍공은 전남 고흥에 거처할 당시에는 대흥사라는 서숙을 설치하여 무료로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큰 정성을 쏟았다. 그리하여 당시 고흥의 유림에서는 선영홍공이 돌아가시자 춘추향사를 지내며 매년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전비서경을 지낸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전비서경을 지낸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

아버지 선영홍공과 함께 전남 고흥에서 이곳 보은의 하개리로 입향한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은 99칸의 대저택을 건립하고 집 동편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좋은 본을 받는다’라는 뜻을 지닌 관선정이라는 서당을 세웠다. 아울러 보은 향교 명륜당에도 서숙(書塾)을 설치하여 저명한 학자인 홍치유(洪致裕)선생을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는 등 후학을 양성하는데 아낌이 없었다. 선씨는 이곳에서 1926년부터 44년까지 일제에 의해 폐쇄되기까지 전국각지 수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학생을 모으고 가르치는데 따르는 제반 비용을 모두 사재로 전담하였던 것이다. 관선정은 당시 한일합방으로 조선인들의 역사와 민족교육이 서서히 말살되는 가운데서도, 일제의 식민지 학교교육을 거부하고 전통 유학을 교육시켜 은연중에 민족정신을 북돋우는 등 우리의 전통문화계승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곳 관선정에서 수학한 이들은 1960~70년대 이후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1914∼1999. 4. 12) 선생이다. 관선정에서 학문을 익힌 대표적인 학자인 그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대가로서 문화재위원장, 성균관 교수로서 한국 한문학의 최고 학자로 평가받는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한학자를 꼽을 때 자타가 공인하는 태두(泰斗)가 청명 임창순선생이다. 2007년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선생은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한자를 배워 수학하였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가난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14살 되던 해에 보은의 서당 관선정(觀善亭)에서 한문 공부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과 시험을 거쳐 입학하여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선생으로부터 6년간 한학을 수학하였다. 15세에 이미 가정을 이루었던 선생은 관선정을 나온 이후 가난한 생활고로 광부일 등 막노동을 하며 독학으로 학문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25세에 교사시험에 응시하여 국사와 국어 두 과목에 교사자격증을 획득하고 중등학교 교편을 잡았다. 이후 대구사범 동양의약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1954년에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점차 한문학과 금석학에 두각을 나타낸 청명선생은 한문학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어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하게 되었으니 관선정에서의 공부가 없었더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재직 중에 4·19가 일어나자 ‘4·25 교수데모’를 주도해 성명서에 “대통령은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문구를 넣을 것을 주장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 글씨를 직접 썼다. 4·19 이후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에 통일방안 심의위원으로 참가해 활동하였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이 단체에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1964년에는 ‘인민혁명단’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한차례 옥고를 치렀다.교수 퇴임이후 1963년 서울 종로구에 태동고전연구소를 창립하여 한문강좌에 주력했는데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청명선생은 한학자는 물론 역사학, 국문학 등 한국 인문학계에 그가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 후 1976년 경기도 남양주군에 ‘지곡서당’을 세웠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청명문화재단을 만들었고 기꺼이 사회에 내놓았다. 마치 지난 날 그의 은인 선정훈공이 가난한 자신을 거두어 공부시켰던 대로 자신도 사숙을 열어 대한민국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빼어난 제자를 길러냈던 것이다.
1971년 문화부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97년 사임하기까지 두 차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한국금석집성(韓國金石集成)’을 비롯해 금석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한국의 서예’ 등 서예 및 서예사에 관한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다.

이와 같이 당시 고택 동편에 사재로 관선정을 세워 조선의 전통문화를 답습하고, 한학을 가르치기 위한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의 노력은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한문학의 기초를 공고히 다지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관선정에서 수학한 이들은 관선정과 선정훈 선생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는데, 이러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 관선정기적비이다.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는 1951년 관선정에서 수학한 학생들이 관선정학우회를 창립하고 매년 남헌 선정훈 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하는 가운데 1973년 세운 비석이다. 선정훈공이 세운 관선정에서 수학한 학생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왕희지의 필체를 집자하여 세운 것이다.

현재 전면 솟을대문을 서측담장 쪽에 옛 관선정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옛 강당의 모습으로 활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관선정 복원을 통해 선병국 가옥의 옛 모습을 하나씩 회복함으로써 지난날 보성 선씨가의 역사를 다시금 새겨나갈 것이다.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 전면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 전면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 좌측면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 좌측면
관선정 복원 모습 관선정 복원 모습
선정훈송덕비(宣政薰頌德碑)

이 외에도 당시 대표적인 만석꾼이었던 선정훈 선생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이라는 ‘위선최락(爲善最樂)’을 실천하여 많은 지역 주민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해마다 보릿고개가 되면 만주지역에서 좁쌀을 사들여 빈민을 구제하여 크게 자선을 베풀었다. 또한 지역주민들이 어렵거나 억울한 일에 처하면 대신 나서서 생활고를 해결해주고 억울함을 해소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와 관련한 일화로 종손이신 선민혁씨의 증언에 따르면 조부이신 선정훈공께서는 광복이후 격변기 시절 남로당에 가입한 많은 주민들이 국군에 의해 총살형에 처하게 되는 불의에 직면하자, 직접 나서서 마을 주민들들 변호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고 돈이 필요하여 명의를 빌려주고 서명을 한 것 뿐이니 불쌍한 양민들을 살려달라고 대신 간청하였으며, 이를 위해 당시 이장 및 보은 군을 대표하는 인사들을 모이게 하여 마을 주민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보은군 하개리 마을의 주민을 조사했던 군인들을 설득시켰다. 이로 인해 마을 주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보은군의 주민들은 선정훈공에게 대한 감사함을 표하였다고 한다.

현재 선정훈송덕비는 고택 솟을대문 전면에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와 남헌선정훈선생송덕비(南軒宣政薰先生頌德碑)와 함께 세워져 있다.
선정훈송덕비(宣政薰頌德碑)는 보은 동헌에 모아 놓았던 것을 다시 선병국 가옥 입구로 옮겨 세운 것으로 전체 높이 190cm, 비면 138×50×21cm 크기의 비로 앞면에 ‘전승지성공정흥공덕비(前承旨惺公政興公德碑)’라고 쓰여 있다. 비석아래에는 비문에 대한 해석을 추가적으로 부연하는 글을 새겨놓았다. 비문에 관한 설명은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의 덕행에 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내대로 내려온 덕행일세.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

이처럼 충청북도 보은으로 입향한 보성선씨 일가는 효자와 열녀를 배출한 선대의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부가 생길수록 함께 나누었으며, 나아가 한나라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물심양면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인 명문가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선병국 가옥에서는 선대의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10여 년 전부터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이용하여 고시생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종부 김정옥씨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보람되는 것이라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많은 고시생들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수고도 있지만 앞으로도 고시원을 꾸준히 유지하여 고시공부를 돕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다.

전승지성공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政薰公德碑) 전승지성공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政薰公德碑)
비문해석(碑文解釋) 비문해석(碑文解釋)
선정훈송덕비 선정훈송덕비
고시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간채의 모습 고시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간채의 모습

※ 참조 : 신영훈ㆍ김대벽, 『한옥의 향기』, 대원사
문화재청 “보은선병국가옥” 전문설명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가옥구조

선병국 가옥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물줄기에 둘러싸여 속리산을 조산(祖山)으로하고 고택 뒤편의 옥녀봉(玉女峰)이 주산(主山)으로 뒤를 감싸고 있다. 앞으로는 트인 들판과 함께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매봉산을 바라보고 있다. 가옥은 시냇물이 모이는 외딴섬 소나무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먼 바깥에서는 집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더욱이 이곳은 풍수지리로 보아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뒤로 보이는 옥녀봉과 선병국 가옥

선병국가옥은 약 3,900평의 넓은 일곽 내에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 건축 연면적이 약 146평에 달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재력을 자랑했음을 알 수 있는 부농주택이다.
이 집은 크게 사랑채와 안채, 사당의 세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각 공간이 하나하나 안담으로 둘렀으며 또한 그 전체가 바깥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옥의 배치는 집의 위상을 보여주는 1)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전개된다. 남쪽을 향해 길게 뻗은 바깥담 가운데에 자리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채와 마주하고 동편에 안채가 안정감 있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 공간을 나누는 널찍한 바깥마당 건너로 곧장 사랑채를 싼 담과 중문이 보인다. 본래는 대문 좌우로 길게 달린 바깥행랑채가 여러 굽 꺾여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채에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지금은 담과 문, 마당만이 본래 모습을 지키고 있다. 사당은 사랑채와 안채가 구획된 곳의 후방 사이에 위치한다. 사랑채와 안채는 ‘공(工)’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대지가 풍수지리상으로 길하지 않아서 흉택(凶宅)의 평면인 공(工)자형을 채택함으로써 70~80년 후부터는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결과라고 전해진다.2)

1) 3칸 이상의 대문간에서 정칸의 지붕이 좌ㆍ우칸의 지붕보다 높게 구성한 형식을 솟을대문이라고 하며, 그 솟을문은 한 집의 주출입구일 때"솟을대문"또는"소슬대문"이라 한다. 원래 솟을대문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신분제도의 품계에 따라 타고 다니던 수레 때문이었다. 종2품 이상 당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의 당상관들은 초헌이라 부르는 수레를 타고 다녔는데, 수레를 타고 대문을 드나들려면 내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수레를 탄 채로 손쉽게 드나들 수있도록 가운데 정칸을 높인 문의 형식이 솟을대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 솟을대문은 양반집의 상징이 되었으나,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나고 점차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도 솟을대문을 세웠다.

2) 주남철, 한국의 전통민가, 아르케, 2000

소나무숲 소나무숲
각종 비석과 소나무숲 각종 비석과 소나무숲
선병국 가옥 평면(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선병국 가옥 평면(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사랑채와 안채, 사당 등의 개별 건물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먼저 사랑채는 대문과 같은 축선 위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로의 출입은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채 남측의 작은 협문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협문을 지나면 사랑마당이 나오고 사랑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협문은 내대문(內大門)의 역할을 한다. 이 협문의 좌우로 내부안담을 둘러 사랑마당과 사랑채를 감싸는 사랑채영역을 구성한다. 사랑채영역을 구성하는 담장에는 3개의 협문과 한 개의 샛문이 있다. 협문은 각각 남?동?북쪽에 위치하며 이중 동쪽의 협문은 사랑채영역을 안채영역과 사당채영으로 연결하는 통로이다. 샛문은 사랑채영역의 안담 동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이는 담장 밖에 있는 뒷간으로 가기 위한 개구부이다. 사랑마당에는 고택을 지을 당시를 기념하는 노송이 있어 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마당을 둘러 예쁜 꽃과 나무들로 정원을 꾸미었다. 사랑채의 서쪽에는 우물이 자리한다.

사랑채 평면의 모습은 ‘공(工)’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겹집의 형태로 그 폭을 넓혔다. 가운데
커다란 대청이 있고 양쪽에 방이 붙었으며 앞뒤로 퇴가 딸려 특색 있는 가옥구조를 보여준다. 양옆 날개에는 각기 방과 마루방들이 있으며 정면 퇴에 난간을 둘렀다. 대청은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이며 좌우 날개부분은 정면2칸 측면 5칸 반으로 몸채보다 2칸을 더 내밀도록 만들었다. 사랑채 전면에는 추사체 모각의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도난을 당하였다.

반듯한 모양의 3단으로 쌓은 석축 기단 위에 집채가 놓였고 팔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기둥을 받치고 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지만 서까래가 길어서 매우 깊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합각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을 붉은 벽돌로 쌓아 보수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랑채 중문

여름철에는 3면의 문을 활짝 열수 있도록 하였으며, 겨울에는 방에서 바깥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현재 사랑채는 다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사랑채 대청에 앉아 내부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전통문화유산의 현대적 활용방안을 보여준다.

사랑채 전경 사랑채 전경
사랑마당 사랑마당
사랑채 동측면 사랑채 동측면
사랑채 북협문 사랑채 북협문
사랑채 배면 사랑채 배면
사랑대청 사랑대청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외곽 담장의 솟을대문을 들어서 오른편을 바라보면 긴 골목길 끝에 높다란 솟을대문이 안채대문이다. 안채의 출입처 역할을 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이 곳 담장에 난 샛문 바깥에 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서향을 한 안채는 본채와 곳간채, 그리고 중행랑채로 구성되어 안채영역을 이룬다. 안채를 둘러싼 대문채와 중행랑채, 곳간채가 ‘ㄷ'모양으로 본채를 감싸며 안채마당의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대문에서 안채로 곧바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어 안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1차적으로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또 다른 내외담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랑채지붕에서 바라본 안채, 사랑채 동협문을 통해 동선을 이룸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출처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안채는 사랑채 보다 한단이 낮은 2벌대 높이의 기단을 쌓아 집채를 올렸으며 본채 건물은 사랑채와 매우 유사한 형태인 ‘공(工)’자형 평면을 이룬다. 가운데 몸채를 두고 양쪽에 날개채를 붙였으며 앞뒤로 돌출된 모습이다. 전면에는 원기둥을 세웠으며 나머지 부분은 각기둥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몸채의 중심은 중안의 넓은 2칸에 위치한 대청으로 사랑채의 대청보다는 넓지 않지만 다른 집들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 않다. 몸채는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퇴칸을 포함하여 10칸, 양날개채는 정면 2칸에 측면 6칸으로 12칸씩이므로, 본채는 총 34칸 규모가 된다. 안채 배면에는 장독대가 있는데 따로 문을 달고 담장을 지어 구획하고 있으며 빗장을 걸어 선병국 가옥의 특별한 장가꾸기 내력을 보여준다.

안채대문 안채대문
내부에서 바라본 내외담, 안대문, 곳간채 내부에서 바라본 내외담, 안대문, 곳간채
안채대문에서 들어서면 보이는 안채마당 안채대문에서 들어서면 보이는 안채마당
안채전경 안채전경
안채 좌우날개의 툇마루와 난간 안채 좌우날개의 툇마루와 난간
안채 툇마루와 기단

중행랑과 곳간채는 32칸의 크기로 본채의 건물을 감싸는 형태를 보인다. 안채영역에서 가장 북쪽의 일렬로 위치한 실(室) 공간은 헛간과 안채의 안살림을 거들던 안노비들의 거주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식량 및 각종 부식과 생활용구 등을 저장했던 광 또는 곳간들은 현재 모두 1칸, 1칸 반, 2칸 간격으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 모두 실(室) 공간으로 내부용도를 변용(變容)하여 고시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건물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고시원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한옥의 특성상 사람이 지속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활용하는 점에서 더욱 그 생명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채에는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닌‘위선최락(爲善最樂)’이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위선최락(爲善最樂) 현판 위선최락(爲善最樂) 현판
안채북측협문 안채북측협문

안채영역의 본채와 사랑채영역의 사랑채는 평면상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랑채의 기단이 안채보다 1단이 높게 지어졌으며 안채는 총34칸, 사랑채는 32칸의 크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구성은 유사하지만 쓰임새와 간살(칸살, 일정한 간격으로어떠한 건물이나 물건에 사이를 갈라서 나누는 살) 규모는 각각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안채 영역은 살림집과 고시원으로 활용하고 사랑채는 전통차를 파는 다원(茶園)으로 활용하는 특색을 보여준다.

사당권역은 사랑채영역과 안채영역 사이를 구분하는 바깥마당을 따라 가장 후방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외부인이 바깥마당의 동선을 따라 이동할 때 쉽게 심리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사당이 사랑채와 안채보다 후방에 위치하고 보다 높은 지형에 위치하도록 하여 위엄과 신성함을 주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선병국 가옥은 입지와 지형상 높낮이의 구분을 줄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이 평면적으로 입구에서 가장 후면에 배치하여 시선과 동선을 외부로부터 일부 차단하는 효과를 보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당(솟을삼문)

사당권역은 위패를 모신 사당을 솟을삼문3)과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특징적인 것은 솟을삼문 앞에 놓여있는 헛담이다. 이 헛담과 사당권역 솟을삼문 사이의 공간은 사랑채와 안채, 사랑채와 사당, 안채와 사당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서로 조심스럽게 연결하는 구실을 한다. 담장이 이어지다가 끊어지는 곳에 자연스럽게 개구부를 형성하여 이 틈새를 이용하여 사랑채와 안채, 사당 각각의 동선을 연결하는 모습이다.

3) 삼문은 일반적으로 사대부집의 사당이나 관아, 향교, 서원 등에 설치한 문이다. 솟을삼문은 바깥담에 설치된 선병국가옥대문채의솟을대문과구별된다. 솟을삼문은 사당을 둘러싼 담장의 정면에 삼문 형식으로 설치한 문이다. 선병국가옥의솟을삼문도다른일반적인솟을삼문과같이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을 올렸다. 중앙 정칸에 솟을문을 세우고, 좌ㆍ우 각칸에 평대문을 설치하였다. 때문에 중앙의 지붕이 좌ㆍ우 평대문의 지붕보다 높게 솟아있다.

사당과 안채 사이의 헛담 사당과 안채 사이의 헛담
사당권역 동측 담장 사당권역 동측 담장
사당과 당도(堂塗)

사당을 두르고 있는 담장은 전면 폭보다 측면 폭이 약간 더 긴 장방형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있다. 솟을삼문에서 사당을 바라보았을 때 왼편으로 제사음식을 마련하기 위한 공간으로 제수채를 두고 있는데 이는 다른 곳에서 흔치 않는 선병국 가옥만의 독특한 특색이다. 사당채 담장안에 제수채를 곁달아 두는 것은 일반적인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제수채와 사당을 연결하는 동선에 ‘ㄱ'자 형태의 복도채를 두었는데 각가의 건물 벽과 지붕을 맞추어 비가 올 때도 제례를 행하는데 일체의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복도의 폭은 약 1.1m로 1인이 이동할 수 있는 넓이며, 사당 안으로는 여닫이문을 이용하여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복도를 두어 제수채와 사당이 연결됨

사당은 총 6칸 크기며. 3칸의 재실이 ‘ㄱ’자의 통로로 연결된다. 또한 집례자의 진입 편의를 위해 솟을삼문에서 사당으로 이어지는 짧은 길은 전돌로 바닥을 포장하여 당도(堂塗:사당으로 이어지는 길)를 두었다.

제수채와 사당을 잇도 복도 제수채와 사당을 잇도 복도
사당

사당의 전면에는 분합문을 달았고, 기단은 화강석을 다듬은 돌로 쌓았다. 사단 전면 4개의 기둥과 후면 모서리의 두 기둥은 원기둥이고, 나머지 기둥은 각기둥이다. 정면 각각의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의 디딤돌이 있는데, 시멘트몰탈의 사용은 건립당시 신재료 사용을 통해 사당을 가장 튼튼하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선대 건립자의 의지와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 참조 : 문화재청 “보은선병국가옥” 전문설명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주남철, 한국의 전통민가, 아르케, 2000

문화유산
효열각 일주문 효열각 일주문
효열각

선처흠(宣處欽) 효열각은 선처흠의 효행과 그의 처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고종 29년(1892)에 세운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일)이다. 원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192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낮은 장대석기단 위에 팔각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형식은 내외 3출목의 다포식으로 쇠서에는 연봉과 연화가 초각되어 있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공포의 최상부에는 봉두를 조각하여 끼웠으며, 정면의 주간포작 하부에는 용두를 조각하였다. 벽체 사면의 하인방 밑으로는 붉은 벽돌을 쌓고 위로는 홍살이 설치되어 있다. 전면에는 일각문을 두고 건물 주위로는 막돌담장을 쌓았다.
편액의 우측에는"효자 증조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散大夫童蒙敎官宣處欽之門)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좌측에는"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宣處欽悽今人慶州金氏之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참조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는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의 아버지이며 비서경(秘書卿)을 지내신 선영홍공에 대한 시혜비로 전라남도 고흥군의 두원(豆原), 점암(点岩), 남양(南陽), 남면(南面) 등의 4개면 소작인들이 뜻을 세워 만든 철비(鐵碑)이다. 선영홍공은 전남 고흥군에 거처할 때 그곳의 많은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인하하였으며, 나라에 내야하는 고흥군 면민들의 세금을 대신 내주는 등 농경지를 소작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고흥군 4개 면의 소작인들이 1922년 선영홍공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뜻을 모아 만든 철비이다. 이 철비는 원래 고흥에 있었으나 한일합방이후 일본이 대동아전생시 철을 모으기 위해 임의로 가져갔으나 다행히 여수에서 현 종손인 선민혁씨가 발견하여 철비를 지은 면민 후손들의 협의를 거처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전승지성공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政薰公德碑)

선정훈송덕비(宣政薰頌德碑)는 보은 동헌에 모아 놓았던 것을 다시 선병국 가옥 입구로 옮겨 세웠으며, 전체 높이 190cm, 비면 138×50×21cm 크기의 비로 앞면에 ‘전승지성공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政薰公德碑)’라고 쓰여 있다. 비석아래에는 비문에 대한 해석을 추가적으로 부연하는 글을 새겨놓았다. 비문에 관한 설명은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의 덕행에 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내대로 내려온 덕행일세.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

※ 참조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

관선정기적비(觀善停紀蹟碑)는 전체높이 230cm, 비면 156×56×25cm 크기로 관선정에서 수학한 학생들이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창립하고 매년 남헌 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하는 가운데 1973년 세운 비석이다.
관선정(觀善停)은 남헌(南軒) 선정훈(宣政薰)선생이 99칸의 대저택인 “선병국 가옥”을 지을 때, 집 동편에 세운 서당을 말한다. 또한 보은 향교 명륜당에도 서숙(書塾)을 설치하여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후학을 양성하되 이에 따르는 제반 비용을 사재로 전담하여 인재양성에 많은 공을 쏟았다. 선씨는 이곳에서 1926년부터 44년까지 일제에 의해 폐쇄되기까지 전국각지 수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사재로 음식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하고, 영남에서 홍치유(洪致裕)선생을 모셔다 가르쳤다. 이곳에서 수학한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청명 (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이 있다.

남헌 선정훈선생송덕비(南軒宣政薰先生頌德碑)

남헌 선정훈선생송덕비(南軒宣政薰先生頌德碑)는 전체높이 370cm, 비면 220×73×44cm의 크기로 2001년 남헌선생송덕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세웠다. 선정훈 선생의 공덕과 치적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 참조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선병묵고가(宣炳?古家), 선병우고가(宣炳禹古家)

하개리에는 선병국 가옥 외에 13번지의 선병묵가옥과 153번지의 선병우가옥이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선병묵 가옥은 1940년대에 지은 건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전통적인 가옥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옆면 2칸, 전?후퇴, 사랑채는 정면 4칸반, 옆면 2칸 전?후퇴를 두었다. 전체적으로 간살을 넓게 잡았고 특히 옆면에는 몸채 2칸에 전?후퇴를 두어 방을 크게 꾸밀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꺾인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의 방향으로 규모가 커지고 툇마루의 기능이 확대되는 등 당시의 전통적인 기법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충청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선병우 가옥은 153번지에 있다.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 행랑채 등 전통적인 가옥형태를 고루 갖춘, 1940년대에 건축된 건물이다. 안채, 사랑채 등 각 동이 소로 독립해 있어 남부지방의 가옥배치와 유사하며 간살을 넓게 잡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 퇴칸을 두었으며, 시멘트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네모나게 가공한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을 한 네모기둥을 세웠다. 1고주 7량으로 일반주택으로는 큰 규모이나 고주와 평주사이에 굽어진 우미량을 설치하였다. 당시의 충북지방에서 전통건축기법이 계승되고 있던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충청북도 지방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 참조 :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報恩宣炳國家屋」 기록화보고서

옻나무 부채

이 가옥을 지으셨던 선영홍공 때부터 내려오는 부채라 하며 옻나무로 만든 부채이다. 부채의 세련된 양식이 눈에 뛴다.

백동 화로

백동(白銅)으로 만든 화로(火爐)로 만들어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선병국 가옥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라 한다. 무(無)자 등 여러 글자와 꽃무늬가 함께 새겨있다. 화로와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불덩이를 헤치거나 끄집어내는 부젓가락도 함께 보존하고 있다. 화로는 불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재료에 따라 질화로, 돌화로, 무쇠화로, 놋쇠화로 등이 있었다. 이러한 백동화로를 통해 선병국 가옥의 당시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백동 세숫대야

세숫대야는 세숫물을 담는 둥글넓적한 그릇을 뜻하는 것으로 전통시대 대표적인 洗面, 洗手에 이용된 도구라 할 수 있다. 선병국 가옥의 종손은 이 세숫대야가 약 100여 년 전에 집안의 어른이 사용한 것이라고 하며 백동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대추나무 절구통

충청북도 보은(報恩)지방은 예부터 대추가 유명한 곳으로 현재 특산품인 대추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선병국 가옥의 종부는 시어머니 이전부터 사용했던 절구라고 하며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절구는 매우 특이한 것이라고 한다.

고택여행

충청북도 보은(報恩)지방은 예부터 대추가 유명한 곳으로 현재 특산품인 대추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선병국 가옥의 종부는 시어머니 이전부터 사용하여온 절구라고 하며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절구는 매우 특이한 것이라고 한다.
충청북도 보은군에 위치한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34호 지정된 전통한옥이다. 이곳에 입향은 것은 선민혁씨의 증조부가 되는 선영홍공(宣永鴻公)이 전남 고흥에서 보은 하개리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에 1924년까지 지어진 선병국 가옥은 당대 최고의 재력을 자랑한 가문이었지만 ‘위선최락(爲善最樂)’을 실천한 집안으로 더욱 유명하다. 선영홍공과 그의 아들인 선정훈선생은 덕을 베풀어 지역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저택 동편에 관선정(觀善亭)이라는 서당을 만들어 전국의 인재를 모아 한학을 가르치는데, 이 때 제반 비용을 사재로 전담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기존의 곳간채를 정비하여 20칸 규모의 ‘관선정고시원’을 운영하여 고시생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이다.

선병국가옥 전경

최근 선병국가옥은 충북 보은의 관광지로 더욱 각광 받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한국의 전통한옥 가운데 단일 건축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안채와 사랑채 등의 가옥구조를 살펴보고자 하는 관광객이 늘고 있으며, 또한 보성 선씨 영흥공파 21대 종부 김정옥씨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자 찾는 발걸음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2007년 김정옥 종부의 350년 된 덧간장이 호평을 받은 것이 전국으로 알려졌다. 이후 ‘아당골 선씨종가(www.adanggol.com)’라는 전통 장을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을 통해 선병국가옥의 덧간장 및 보은의 특산품 ‘보은대추’를 이용한 기능성 장(醬)인 된장, 고추장 등을 판매하기에 이르자 선병국 가옥은 한국의 전통가옥으로써 그 전통문화를 함께 계승하고 전하는 데에 큰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상품화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의 문화가 가치를 인정받는 것으로 매우 뜻 깊은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하개교 아래 위치한 선병국 가옥 하개교 아래 위치한 선병국 가옥
안채마당 ‘관선정고시원’으로 운영중인 곳간채

김정옥 종부의 이러한 노력은 선병국 가옥의 전통 장맛을 느끼고 배우기 위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으로 확대되었다. 2008년 보은군의 주관으로 시작된 행사가 2009년 5월에는 문화재청이 주관한 ‘전통한옥 관광자원 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이어졌다. 도시민들에게 전통한옥에서의 전통 장 만들기 체험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으로 확대 발전된 것이다. 참여인원과 프로그램도 확대되어 2008년 3명의 참가자에서 2009년에는 80여명 가량의 지원자들이 모여 ‘된장’, 고추장’, ‘짱아치’ 등의 전통 장류 및 음식을 직접 만들어 숙성시키는 체험을 가졌다. 물론 체험자들이 숙성시킨 장들은 선병국가옥의 장독에서 5~6개월의 숙성시간을 거쳐 참가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지역의 문화자원을 이용하여 ‘참여와 체험의 관광’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선병국 가옥의 이러한 행사는 지역기관의 지원과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 보은 선병국 가옥에는 무려 700여개 장독이 3곳으로 나누어 보관되고 있다. 안채 뒷마당에는 350년의 역사를 가진 씨간장을 따로 보관하고 있으며, 안채 협문담장에서 사당으로 이어지는 마당, 고택일곽 정문의 서측면 담장 부근 등 총 3곳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다.

안채 뒷마당 장독대 안채 뒷마당 장독대
안채 협문담장에서 사당으로 이어지는 마당의 장독대 안채 협문담장에서 사당으로 이어지는 마당의 장독대
고택일곽 정문의 서측면 담장 부근 장독대 고택일곽 정문의 서측면 담장 부근 장독대
안채 중문 안채 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