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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서백당

연혁
양동서백당 양동서백당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지정일 : 1970년 12월 29일

소유자 : 손성훈, 관리자 : 손성훈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23

건축시기 : 조선시대 전기

경주(월성) 손씨는 신라개국공신이며 문의왕(文義王)으로 추붕된 진한 六부촌장 무산대수부 구례마 선조의 후손으로서 제3대 유리왕 9년에 손씨로 사성(賜姓)된 것이 손씨 성의 시작이다. 그 후 신라 흥덕왕대에 이르러 효자공 손순(孫順)을 시조로하여 경주, 밀양, 평해 三파로 나누어졌다.
경주 손씨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하는 마을에 입향한 것은 양동민속마을의 입향조라 불리는 조선초기의 무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공 때이다. 오늘날의 ‘양동 서백당(良洞 書百堂)’은 입향조 손소선생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경주(월성) 손씨(月城 孫氏)의 종가집이다.
고택의 명칭은 사랑채의 당호를 따라서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詹)이라고 불리며 1970년 12월 중요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의 명칭은 ‘월성손동만가옥(月城孫東滿家屋)’이었으나, 사랑채 대청에 걸린 서백당(書百堂)의 편액을 따라 2007년 1월에 ‘양동 서백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서백당이 위치한 양동민속마을은 주산인(主山)안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文章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짝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 4골짜기의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 덕(渴求德)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마을 구성원 대부분이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모인 양반마을로 1984년 마을 전체가 문화재(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 되었다. 조선의 유교문화와 그 정신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 이곳 출신의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이나 되었다. 음직(蔭職)을 거친 인물들은 부지기수였고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민손촉으로 지정된 전통마을 이라 관광객의 내왕도 많아지고 있으며 1992년에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주영한국대사 이홍구씨와 주한 영국대사 등을 대동하여 대종 택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자리한 서백당은 행랑채와 연이은‘一’자형의 대문채를 따라 들어선다. 사랑채 마당에는 수령 5백년이 넘은 향 나무가 지금도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어 서백당의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형의 몸채로 구성되어 있고 안채 의 뒤편으로 장독대와 디딜방앗간이 정취를 살리며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동북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삼문(三門)이 세워져 있고 담장이 감싸는데 그 안에 사당(祠堂)이 자리하고 있다. 서백당의 몸채는 일종의 마루통로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랑채와 안채를 신을 신지 않고도 몸채 어느 곳이든 이동할 수 있는 것이 특징 이다.
양동마을 서백당은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써 건축연대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고택 중 가장 주택이다. 불천위인 양민공 손소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경주(월성) 손씨의 대종가로서 남아 있는 주택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으 오래되어 주거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건립 당시의 공간구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 백 년의 세월을 무사히 지켜온 것에 더욱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사랑채 마당의 향나무와 함께 가꿔진 정원은 서백당의 규모와 격식에 아름다운 경치까지 더하여 고택(古宅)의 이상적인 경관을 보여준 다. 아울러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 역시 독특하여 조선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인물은 양민공의 둘째 아들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선생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 1553)선생이다. 우재는 성종 20년(1489)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 등 40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로 경주 (慶州) 동강서원(東江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회재는 우재의 생질(甥姪)로 성리학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이황(李滉)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불리고 동방5현(東方五賢)중 한 명으로 추앙받아 종묘배향(宗廟配享)과 문묘에 종사(從祀)되었고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 두 인물은 모두 서백당(書百當)에서 태어난 인물로써 이후 양동마을의 학문과 교육의 전통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고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서백당에서 걸출한 인물이 이렇게 배출된 것은 그 만큼 서백당 집자리의 기운이 아주 길하여 세 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리라는 풍수가의 예견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한편 양동민속마을은 외손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조선시대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라 양동마을에 많은 외손들이 정착하고 살면서 붙여진 별칭이다. 양민공 또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安德)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다가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는 의미로 종손과 종부 역시 몸을 바로세우고 마음을 청렴히 하고자 하는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양돈민속마을 입구 양돈민속마을 입구
양민공 손소 영정 양민공 손소 영정
대문채 대문채
사랑채와 행랑채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안채
사랑채 마당의 향나무 사랑채 마당의 향나무
문화와전통
삼현이 태어날 ‘서백당’

경주(월성)손씨와 여강이씨에 의해 형성된 양동민속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곳이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나 고택들의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민속마을 보다 자부심이 넘친다.

마을의 지형은 주산(主山)인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文章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勿자형의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지세를 타고 있다.
이 가운데 서백당(書百堂)은 가운데 부분인 안골의 깊숙한 곳 상단에 서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주(월성)손씨 대종가 종택으로써 그 역사가 벌써 550여년에 이르는 서백당은 처음 터를 잡을 때 지사(地師, 풍수가)가 이 터에는 문장봉(文章峰)의 정기를 받아 세 분의 현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백당을 ‘삼현출생지지(三賢出生之地)’라고 불렀는데 그 중 2명의 뛰어난 인물이 서백당에서 태어나게 된다.

첫 번째 인물은 양동마을의 입향조이자 서백당을 지은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선생과 풍덕류씨 사이에 5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경절공(景節公)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선생이다. 당시 류씨의 태몽이 태양이 품에 들어오는 꿈이었다고 한다.
점필재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깨우치고 27세 때 대과(大科)급제로 조정(朝廷)에 나아간 우재는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세자빈객(世子賓客)을 비롯하여 도승지(都承旨) 세 번,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네 번, 경상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 등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이후 좌·우 참찬(參贊)에 이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封)해졌다.
특히 43세 때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 상주목사로 재임했을 때는 큰 선정을 베풀어 그곳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선생을 추모하였는데 이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손중돈 선생의 선정비(善政碑)가 현재 상주시 교육연구원 정문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우재의 공을 기리고 그의 높은 학덕과 탁월한 경륜을 높이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우재의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과 사상은 임금에게 올린 오조소(五條疏)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공직사회의 지침이 될 뿐 아니라 일반 국민의 교훈 덕목으로 널리 회자(膾炙)되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조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군주(君主)는 오로지 배움에 힘써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다.
2. 군주와 그 신하(臣下)는 항상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야 나라가 부강해 진다.
3. 왕실(王室)과 고관대작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허례허식을 버리고 근검절약의 풍습을 진작시켜야 한다.
4. 국가가 사람을 쓸 때 어질고 충명한 사람을 가려야 국가의 기강이 바로선다.
5. 국가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는 선비들이 풍류나 즐기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지는 폐습을 경계해야 한다.

‘삼현출생지지(三賢出生之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두 번째 인물은 바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이다.
회재가 이곳 서백당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연유는 바로 당시의 남귀여가혼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민공 손소선생은 여강이씨(驪江李氏)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增損)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인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을 사위로 맞이하게 된다. 손소선생의 7남매 가운데 차녀와 결혼하게 된 이번은 영일(迎日)에서 양동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회재선생은 이렇게 손씨문중과 이씨문중의 혼인으로 태어난 첫 아이였다. 당시 딸이 결혼하여 임신을 했을 때는 친가에서 출산을 하도록 장려하였기에 이와 같은 풍습에 따라서 친가인 서백당에서 출산한 것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회재선생은 우재의 생질(甥姪)로 성리학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이황(李滉)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불리고 동방5현(東方五賢)중 한 명으로 추앙받아 종묘배향(宗廟配享)과 문묘에 종사(從祀)되었고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처럼 풍수가의 예언대로 서백당에서 삼현(三賢) 가운데 두 명의 큰 인물이 배출되었고 회재선생 이후 경주 손씨 종가인 서백당에서는 한 명의 현인을 더 배출할 기회가 남게 되었는데 그 기회가 지금도 남아있다.

우재선생과 회재선생이 태어난 곳은 서백당 내에서도 안채의 건넌방으로 ‘머릿방’내지 ‘산실청’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큰방 물림이 있을 때에 노모께서 옮겨 살기도 하였으며, 출가한 딸이 친정으로 해산하러 왔을 때 건넌방을 쓰게 하였다고 하니 바로 이곳에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다.

하지만 이후 서백당에서는 딸들이 친정으로 출산을 위해 오는 것을 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는 종가로써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인물이 종손 중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우재선생께서 1514년(중종 9년) 관가정(觀稼亭)으로 분가하여 가통을 이어 양민공의 신위와 영정을 모신 후 약 400년이 지난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불천위의 신위를 모셔온 서백당은 다음의 세 번째 현인이 이곳에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勿자형을 이루는 양동마을 모습(「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勿자형을 이루는 양동마을 모습(「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서백당의 입지전경(「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서백당의 입지전경(「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손중돈 영정(국립중앙박물관소장) 손중돈 영정(국립중앙박물관소장)
서백당 안채 서백당 안채
건넌방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건넌방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양동마을의 민속놀이, ‘줄다리기’

양동마을의 줄다리기는 특히 마을에 우환이 많을 때는 반드시 행하는 것인데 줄을 한번 당기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날짜를 택하는 것은 그 해마다 정하며 줄당기기는 마을의 중간지점을 기준으로 아랫말과 웃말로 편을 가르고 전 가구가 모이면 3~4가구가 1조를 이루어 '종줄'을 1주일 전이나 10일 전부터 꼬기 시작하게 된다. 이 종줄들이 모여 '큰줄'을 만드는데 대략 전날까지는 마치게 되며 그동안 양편은 상대방줄에 대해 염탐을 계속한다.

행사 당일 오전에는 줄을 마지막으로 보수하고 주민들을 동원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아랫말(관가정 밑의 은행나무)과 웃말(손씨 대종가 옆쪽 은행나무)에서는 각기 고사를 지낸다.
오후 2~3시가 되면 양편에서 남녀노소, 양반 상민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모여 줄을 당기는데 우선 '고'를 끼우는 데만 서너시간 걸린다.
줄의 굵기는 60여 년 전에는 9.10세 되는 아동의 키를 넘을 정도로 굵었으나 요즈음은 짚을 구하기 어려워 점점 가늘어지는 형편이다. 줄을 당기는 도중에 힘이 모자랄 때 웃말은 안계리(지금은 댐으로 수몰되었지만 옛날에는 양동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이었음) 동민들에게, 아랫말은 인근 인동, 오금리 등지에 가서 지원을 요청 한다.

이렇게 밤이 지새도록 당긴 줄은 밤 12시경이면 결판이 났었지만 지금은 현실에 맞게 3판 양승으로 승부를 가름한다. 암줄과 숫줄은 줄을 당길 때마다 교대로 바꾸어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동안 양편 주민들은 줄만 당기는 것이 아니라 잠깐 집안에 볼일이 있으면 다녀오기도 한다. 부인들은 한창 어두워질 때는 집에 돌아가게 되며 줄당기기의 결과 ‘웃말’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말’이 이기면 ‘마을이 편안’해지게 되는 것이라 한다.

웃말의 승리가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아랫말의 승리는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줄당기기가 끝난 뒤, 이긴 편의 줄은 승자와 패자모두 토막토막 끊어 각자의 지붕에 얹는데 이렇게 하면 집안이 모두 평안하다는 속설에 의한 것이다.

양동(良洞)의 향나무(香木)

서백당(書百堂)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와 사랑대청이 보이고 왼쪽으로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으로 길이 나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위풍 있는 거목이 눈에 띈다.
사랑대청 아래에는 마당에서 오르는 섬돌과 넓은 석단(石壇)이 마련되어 있는 곳의 우측에 자리한 이 나무는 ‘양동(良洞)의 향나무(香木)’라 불린다.

나이는 대략 600년 정도가 되었고 높이는 9m, 둘레는 2.92m, 가지의 사방길이가 6m 내외이다. 일반 향나무처럼 곱게 자라지 않고 마치 분재를 보는 것처럼 보는 것처럼 주간(主幹)과 가지가 꾸불꾸불 꼬이고 서쪽 방향으로 널리 퍼져서 수세(樹勢)가 왕성하다. 주간은 지상 90cm 높이에서 동.남.북 방향으로 가지를 낸뒤에 다시 꾸불꾸불 위로 자라서 세 가지를 내고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이곳 향나무는 그 뿌리가 고택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양민공 손소선생이 세조2년(1456) 고택을 새로 지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한 식수로 심은 향나무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서백당의 오래된 역사를 묵묵히 고증하는 장중한 향나무가 있어 고택의 멋과 기풍을 한 층 더 높여주고 있다.

가옥구조

‘양동 서백당(書百堂)’은 배산인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文章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짝기가 물(勿)자형을 이루는 지세에 위치하고 있다. 대다수의 고택(古宅)이 평지나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양동마을 대부분의 전통가옥처럼 산세와 함께 살림공간을 마련하였다.

비탈진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면 오래된 회화나무와 함께 입구인 대문채가 보인다. 아래에서 올라다 보기 때문에 고택의 전체적인 조형공간을 한 눈에 파악할 수는 없다.
대문채에 들어서면 연이은 행랑채가 길게 늘어서 있다. 행랑채는 정면 8칸에 측면 1칸으로 오른쪽 끝단에 광을 두고 그 옆에 대문을 마련하였다. 대문옆으로 마루방과 온돌방, 3칸의 광이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와 전후로 마주보며 ‘ㅁ’자형으로 사랑채와 안채의 공간이 한 몸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집을 ‘통말집’이라고 부른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하는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 평면인데 아래채의 중심칸이 안대문이고 안대문의 왼쪽 2칸은 마루고방이, 오른쪽은 큰사랑방과 사랑대청이 위치한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배치하여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이 집의 남서쪽에 있기 때문에 이를 향해 남서쪽 모퉁이에 대청을 두었고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비대칭으로 구성된 것이라 한다. 사랑과 마루는 높은 석단위에 있고 마루 둘레에는 아자난간(亞字欄干)을 돌려 뜰아래에서 보면 누마루처럼 높다.
사랑대청에는 당호(堂號)인 서백당(書百堂)과 송첨(松詹)이라는 편액이 있는데 ‘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는 의미이며 ‘松詹’은 ‘소나무 처마’라는 뜻으로 사랑채 앞마당의 오래된 향나무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지만 양민공의 호가 ‘송재(松齋)였으므로 그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 구분을 위해 안채의 건넌방쪽으로 내외담을 쌓았고 중문과의 경계부분에는 내외판벽을 설치하여 남성과 여성의 공간분할을 시각적으로도 의도하고 있다.

안채는 대청이 6칸, 안방이 3칸, 부엌이 2칸이며 2칸의 건넌방 및 그 밑에 작은방과 1칸의 마루방이 있어 사랑채의 작은 사랑과 접하게 된다. 안방 천정은 다락으로 꾸미고 대청으로 광창(光窓)을 내고 있다. 건넌방 앞 안대청 끝에서 사랑채의 작은사랑방에 이르는 3칸에는 一자로 쪽마루를 부설하여 큰 사랑 - 대청 - 작은사랑 - 마루방 - 건넌방 - 안대청 - 안방에 이르는 일종의 마루통로가 이루어져 있는 점이 특색이다.

마루통로로 이어진 곳 중 건넌방이라 부르는 곳은 보통 며느리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큰방 물림이 있은 후에는 노모께서 옮겨 살기도 하였으며, 출가한 딸이 친정으로 해산하러 왔을 때 건넌방을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서백당에서는 이 곳 건넌방을 산실청 혹은 머릿방이라 부른다. 이곳 머릿방에서 우재 손중돈(孫仲暾)선생과 회재 이언적(李彦迪)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사랑채 앞마당과 사당을 이르는 공간에는 오래된 역사를 지닌 향나무가 자리하고 그 상단으로 내삼문과 일곽의 담장이 사당을 감싸고 있다.
몸채의 동북쪽에 담장으로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 사당은 양민공 손소선생이 성종 15년(1484) 52세의 나이로 별세한 뒤 불천위로 모시고 있으며 고조부까지 4대봉사를 이행하기 위한 신위가 함께 모셔져있다.

안채 뒤편으로는 장독대와 디딜방앗간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인 ‘양동 서백당’은 지리적인 위치와 경관의 어우러짐이 뛰어나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아울러 가옥의 구조와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전기 옛 살림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양동 서백당 입구의 비탈진 언덕 양동 서백당 입구의 비탈진 언덕
대문 대문
대문채에 연이은 행랑채, 멀리 보이는 성주봉 대문채에 연이은 행랑채, 멀리 보이는 성주봉
서백당 사랑 대청 서백당 사랑 대청
중문입구, 사랑채 내외담과 문 중문입구, 사랑채 내외담과 문
안채 안채
사랑채와 안채가 이어진 마루통로 사랑채와 안채가 이어진 마루통로
디딜방아갓과 장독대 디딜방아갓과 장독대
서백당의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서백당의 향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사당입구 내삼문 사당입구 내삼문
사당과 양민공 신위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사당과 양민공 신위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서백당 배치전경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서백당 배치전경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문화유산
손소적개공신도상(孫昭敵愾功臣圖像). 양민공 영정(孫昭 影幀) (보물 제1216호)
ㆍ세조 13년(1467), 1축(軸), 견본채색(絹本彩色), 170×100㎝ ㆍ세조 13년(1467), 1축(軸), 견본채색(絹本彩色), 170×100㎝

양동민속마을의 입향조라 불리고 이시애의 난(1467년)때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된 양민공(襄敏公) 손소의 초상화이다. 이 영정은 몇 점뿐인 조선초기의 공신상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5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공신도상(功臣圖上)과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초상화의 크기는 가로 105㎝, 세로 160㎝이며 비단 위에 채색하였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있다

손소적개공신교서(孫昭敵愾功臣敎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
ㆍ세조 13년(1467), 1축(軸), 지본묵서(紙本墨書), 30.6×167㎝ 
ㆍ손소(1433~1484)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공신에 책훈되어 받은 교서 ㆍ세조 13년(1467), 1축(軸), 지본묵서(紙本墨書), 30.6×167㎝ 
ㆍ손소(1433~1484)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공신에 책훈되어 받은 교서

세조 13년(1467) 8월, 3개월에 걸쳤던 이시애의 난이 평정되자 세조는 이에 공을 세운 44명을 뽑아 3등으로 나누어 공신에 책록하고 전지(田地)를 하사하였다. 1등은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이라 하여 이준(李浚) 등 10명, 2등은 정충포의적개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이라 하여 김국광(金國光) 등 23명, 3등은 정충적개공신이라 하여 영순군(永順君) 부(溥) 등 11명을 정하였다.
조선전기의 문신인 손소는 1467년 5월 이시애의 난 당시 평로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의 종사관으로 군무를 관장하여, 이 때 세운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훈되고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되었다. 또, 반당(伴?) 8인, 노비 10구, 구사(丘史) 5구, 전지(田地) 1백결(結), 은 25냥, 의복 1습(襲),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받았다. 이러한 손소의 공적과 상훈이 교서의 주된 내용이다. 공신으로 봉해진 손소는 사후 영세토록 신위를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지게 되었다. 손소를 공신으로 책록하는 이 교서를 통해 영남지방의 대표적 명문가인 양동 경주손씨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조선 전기에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송첨삼보(松詹三寶)
ㆍ가보로 전하는 세 가지 보물, 즉 옥연적(玉硯滴), 상아도(象牙刀), 산호령(珊瑚纓)을 말한다. ㆍ가보로 전하는 세 가지 보물, 즉 옥연적(玉硯滴), 상아도(象牙刀), 산호령(珊瑚纓)을 말한다.

성종 7년 위의 공신도상과 함께 내사한 것으로 전한다.

경주손씨 집안에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세 가지 보물, 계천군 손소(孫昭)의 유품들이다. 옥연적(玉硯滴), 상아도(象牙刀), 산호영(珊瑚纓)을 말한다. 송첨(松詹)은 서백당(書百堂)과 함께 사랑채 대청에 걸린 편액으로 경주(월성)손씨 종가의 당호를 말한다.
참조 :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4. 손소자녀칠남매화회문기(孫昭子女七妹和會文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ㆍ중종(中宗) 5년(1510), 1장(張), 지본묵서(紙本墨書), 63×186㎝ 
ㆍ1510년 손소의 자녀 7남매가 부모의 사후에 재산을 화회분집(和會分執)하는 문서. 4. 손소자녀칠남매화회문기(孫昭子女七妹和會文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ㆍ중종(中宗) 5년(1510), 1장(張), 지본묵서(紙本墨書), 63×186㎝ 
ㆍ1510년 손소의 자녀 7남매가 부모의 사후에 재산을 화회분집(和會分執)하는 문서.

이 문서(文書)는 손소선생분재기(孫昭先生分財記)라고 일컬어지며 조선(朝鮮) 중종(中宗) 5년(1510) 11월 18일에 손소의 아들 중돈(仲燉)을 비롯한 7남매(7男妹)가 모여 재산(財産)을 분재(分財)한 화회문기(和會文記)이다.
분재기는 분재 대상자 수만큼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본 분재기 역시 동일한 문서를 7매 작성하여 각기 나누어 가진다고 명기하고 있다. 손소의 자녀는 모두 8남매였으나 금원형(琴元亨)과 혼인한 딸은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 분재 대상에서 제외되어 7남매가 재산을 화회분집하게 되었다.
분재의 서문에는 부모의 노비와 전답을 그 고척(膏瘠)과 장약(壯弱)을 고려하여 남매간에 균등하게 분재하는 것을 밝혀 분재의 방향을 밝힌 후 노비의 이름과 전답의 위치를 후록하였다. 17세기 이전의 조선사회에서는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이 관행이었는데 본 문서는 이러한 양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참조 :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통감속편(通鑑續編) (국보 제283호)
ㆍ1420년(세종 2) 명나라 진경의 《통감속편》을 경자자(庚子字)로 인쇄한 책. ㆍ1420년(세종 2) 명나라 진경의 《통감속편》을 경자자(庚子字)로 인쇄한 책.

중국 고대 반고씨(盤古氏)에서 고신씨(高辛氏)까지, 그리고 당(唐) 천복(天復) 1년(901)에서 송(宋) 상흥(祥興) 2년(1279)까지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판본은 1420년 11월 세종이 공조참판 이천(李?)에게 명하여 주조한 경자자(更子字)로 인쇄한 책임을 이 책 끝에 붙어 있는 변계량(卞季良)의 주자발(鑄字跋)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서(序)?목록(目錄)?서례(書例)는 1403년(태종 3)에 주조한 계미자(癸未字)이다. 이때 주조한 경자자로는 우선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인쇄하였다. 이어서 바로 이 ≪통감속편≫을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1423년(세종 5년)으로, 2월에 경상도에서 책지(冊紙) 1,500권(卷), 전라도에서 2,500권을 준비하게 하였고, 8월에는 주자소에서 바친 ≪통감속편≫을 문신(文臣)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주자소의 스님?서원(書員)?재랑(齋郞) 등에게 상을 내렸다. 24권 6책의 완질본으로, 서와 권수(卷首) 등에는 ≪시경≫에서 따온 '집희경지(緝熙敬之)'라는 사구인(詞句印)이 찍혀 있는데, 이는 단종 때 왕세자가 공부하던 곳으로 세자의 서연(書筵) 교육에 이용되었던 책이 아닌가 한다. 한편 서문 중단에 '눌재(訥齋)'?'국노(國老)'의 인기(引記)가 있고, 발문 하단에는 '효중(孝中)'이라는 소장인이 찍혀 있다. 또 표지 이면에는 '송첨(松?)'이라고 씌여 있는데, 송첨은 양동(良洞)의 별칭이다. 현재 중국에 원나라 1361년(지정 21)에 발간한 ≪통감속편≫ 완본이 남아 있는데, 우리의 경자자 ≪통감속편≫도 그에 못지 않게 오래된 완본으로, 태종. 세종 연간의 주자술의 발달 등 서지학 및 인쇄기술을 이해하는 데는 물론, 당시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참조설명 : 한국학 중앙연구원

지정조격(至正條格)
ㆍ국내유일의 원(元)나라 법전 ㆍ국내유일의 원(元)나라 법전

2002년 경북 경주 경주손씨 종가에서 발견된 세계 유일본인 원나라 마지막 법전 ‘지정조격’(至正條格). 『지정조격』은 원나라 법전으로, 고려후기이래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 영향을 끼친 법전이다. 1377년(우왕 3)년 이후에는 형사법(獄訟)에 관한 한 고려의 기본 법으로서 고려말기까지 적용되었다. 특히 조선조 세종연간에는 집현전의 중국제도를 연구하는 중요 대상 자료였고, 또한 대 중국 외교에 있어서 역과(譯科) 취재 시험의 주요 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손중돈(孫仲暾) 문과홍패(文科紅牌)
ㆍ성종 20년(1489), 1장(張), 지본묵서(紙本墨書), 74.5×69.0㎝ 
ㆍ손중돈(1463~1529)이 1489년 문과 병과에서 제18인으로 급제하여 받은 홍패. ㆍ성종 20년(1489), 1장(張), 지본묵서(紙本墨書), 74.5×69.0㎝ 
ㆍ손중돈(1463~1529)이 1489년 문과 병과에서 제18인으로 급제하여 받은 홍패.

조선전기 대표적 관료 중의 한 사람인 손중돈은 적개공신(敵愾功臣) 손소의 아들이며, 회재(晦齋) 이언적(149~1553)의 외숙이다. 이 홍패를 받음으로서 손중돈은 벼슬길에 들어서게 되어, 이후 공조판서, 이조판서, 세자시강원빈객, 도승지, 대사간, 관찰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7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조선시대에 홍패를 받았다는 것, 즉 문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가격(家格)과 혼반婚班)의 격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경주 손씨가문이 양동에서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닦고 영남지방의명문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손중돈의 문과급제, 그리고 그의 관료로서의 삶이 자리 잡고 있다.

참조 : 「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고택여행
양동마을 항공사진(「良洞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기록화보고서, 문화재청)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한 ‘양동 서백당’은 경주(월성) 손씨의 대종가로 550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고택이다. 또한 고택이 위치한 곳은 1984년 12월 20일 마을전체가 중요민속자료(제189호)로 지정된 민속촌으로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종가가 500여 년 동안 전통을 잇은 유서 깊은 반촌마을이다.

이곳 민속마을은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우재 손중돈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양동마을 전경(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편) 양동마을 전경(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편)

가운데가 물봉골이고 오른쪽이 안골이며, 서백당은 오른쪽 안골의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양동민속마을은 행정안전부에서 시행하는 제2차 정보화시범마을로 선정되어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기계천 1급수로 넓은 평야에서 생산하는 청정쌀, 이쌀로 빚은 전통청주, 엿, 유과, 사질양토에서 생산되는 감자, 무, 배추 등의 맛좋고 신선한 농산물을 보다 싼값에 인터넷을 이용한 직거래로 소비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역사와 전통, 그리고 향촌의 아름다운 경관을 모두 보존하고 있는 양동민속마을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등록이 되어 관광객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또한 매년 관광객들을 위한 한지공예체험, 양동마을전통체험, 양좌서당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관광지로써의 가치와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양동민속마을 찾아가는 길>

▷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포항으로 가는 길과 안강으로가는 갈림길(제1강동대교 끝)에서 안강으로 회전해 들어가면 약1Km 정도 진행하면 우측으로 양동마을이라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습니다.

▷ 포항에서 영천방향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면 강동면을 지나 우측 갈림길로 접어들어 8km 정도 가면 우측으로 양동마을 이정표를 만날 수 있습니다.(제2강동교 끝 부분에서 좌회전)

▷ 영천에서 포항방향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면 옥산서원을 지나 8KM 정도 가면 좌측으로 양동마을 이정표를 만날 수 있습니다.(제2강동교 끝부분에서 좌회전)

◎ 교통안내 버스
승 하 차 : 경주역에서 승차->양동마을 입구 하차->마을입구에서 마을까지 1.2km도보
버스번호 : 200,201~208,212,217버스 시내버스 이용 (7분간격, 40분소요)
운행회사 : 천마교통(054)776-8905, 한일교통(054)772-4885
승용차 : 경주역에서 22.2km 소요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