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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가옥

연혁
윤보선가옥 전체 윤보선가옥 전체

제438호

지정일 : 2002.01.29

소유자 : 영안주식회사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안국동 8-1외

건축시기 : 조선시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의 경계에 위치한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는 1870년대에 지어진 주택으로 해위(海葦) 윤보선 (尹潽善) 전대통령이 거주한 집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안국동윤보선가는 1978년 8월 18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명칭을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정하였으나, 2000년 4월 10일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로 문화재 지정명을 개칭하였다. 그리고 2002년 1월 29일 고택의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38호로 격상되어 지정되었다.
윤보선가는 고종(高宗)때인 1870년경에 민대감(閔大監)이 지은 집으로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산정채), 대문채, 별당, 광채, 부속채 등을 포함한 민가로써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대저택으로 건축되었다. 이후 고종이 민대감의 집을 매입하여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으며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한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 1861-1939)에게 하사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후 한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910년대에 윤보선 전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 1871~1944)선생이 매입하여, 이후 4대째 윤씨 일가가 살고 있으며 현재는 윤보선 전대통령의 장남이 일가를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가옥의 구조는 처음 지어진 모습과는 달리 윤치소공이 가옥을 매입한 이후 1960년대 초까지 개보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37~38년 사이 산정채와 안채의 가운데에 위치한 정원의 비정형 연못을 정형으로 개조하고 정원석을 제거하여 동양식 정원을 영국식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목조 한와지붕은 전통 건축으로 유지하고 세부장식과 생활가구 등은 중국이나 영국식을 겸비해 실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전통기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의장으로 개선하였다. 각 건물의 앞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유행했던 서양식 차양이 달려있었으나 산정채를 제외하고는 차양을 지지했던 기둥의 주초만 남아있다.
140년의 역사가 흐른 가운데 윤보선가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으로 전통과 현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한말 세도가의 건축적 위용을 보여주면서도 동ㆍ서양 가옥건축의 장점을 융합하여 건축양식 및 주거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윤보선가는 이러한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현대사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한민국의 전대통령이 살았던 곳으로 그 역사적 현장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해위선생은 영국유학생활을 거쳐 대한민국정부수립이후 서울시장, 상공부장관, 제3대 민의원,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4.19혁명이후 이승만정권이 물러나고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 (1960.08~1962.03)에 선출되었고 박정희 정권(1963~1979, 제5~9대 대통령)때에는 야당의 총수를 두루 거치면서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하였다.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는 이러한 윤보선 전대통령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창립을 함께한 장소로 1950~70년대에는 야당의 사무실 겸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윤보선대 통령 재임시절의 한 일화로 장면 국무총리가 공관이 없어 반도호텔을 쓰고 있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이러한 장면 총리에게 집을 개수 해서 사저로 옮겨 집무하겠으니 국무총리에게 청와대를 사용하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윤보선가는 김영삼, 김대중 두 명 의 전 대통령이 젊은 시절 자주 왕래하였던 곳으로 ‘한국 야당의 회의실’이라고 불렸다. 1980년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던 시기에는 윤보선 전대통령이 양 김씨를 불러 후보 단일화를 당부하였는데 그곳이 윤보선가의 산정채였다.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윤보선가의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안국동윤보선가는 서양의 영향을 받은 넓은 정원과 실생활에 맞게 개조된 안채와 서양식 채양 등 한말 양식들이 공존하는 특색을 지녔 다는 건축사적인 특색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주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산실 역할의 장소이자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 난처”로 평가받는 곳으로 한국정치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고택(古宅)이다.

솟을대문 솟을대문
중문뒤로 보이는 별당. 별당우측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중문뒤로 보이는 별당. 별당우측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안채 안채
산정채 산정채
안채뒤뜰 안채뒤뜰
문화와전통
‘북촌(北村)’에 자리한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

서울의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북촌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北村, 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곳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역이다.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북촌주변은 후면에 해발 463미터의 백악산과 삼청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사적 제117호)이 있고 동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사적 제122호)이 있다.

1920년대 삼청동길 1920년대 삼청동길

북촌은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리로 자리매김 해왔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들과 민대식(민영휘의 아들) 등 여흥민씨 세력들이 북촌에 많이 거주하였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북촌에 많은 수의 한옥가구가 밀집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도시로의 인구집중 현상과 더불어 1930년대에 서울의 행정경계가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됨으로써 주택경영회사들이 중소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전반기에 걸쳐서 시행된 영동지구 개발사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강남개발이 이루어짐에 따라 강북지역의 인구가 강남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강북지역의 학교들도 강남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북촌지역의 학교들은 현대식 사옥과 공공기관 등의 대형 건물로 변화해 갔고 1990년대 들어서는 다세대가구 주택 보급에 따라 많은 수의 한옥이 줄어들었다.

1927년 경성시가도 1927년 경성시가도

이후 북촌일대 전통한옥마을에 대한 보존과 주변경관훼손에 대한 사회적인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2002년에 ‘북촌문화센터’를 개설하여 북촌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고 북촌 곳곳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와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북촌 투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여 북촌의 역사화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에 보존되고 있는 한옥들의 특성은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조직에 적응하여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또한 북촌의 한옥은 한옥을 대량으로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목재소에서 공급되는 표준화된 목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였으며, 낮은 지붕물매, 굴도리, 겹처마, 좁은 주간에 많은 칸수 등 응축된 한옥구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많은 수의 한옥이 사라졌지만, 가회동 31번지와, 33번지 일대 그리고 가회동 11번지 일대는 양호한 한옥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옛 물길과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 전통한옥은 북촌의 고풍 살려주며 빠르고 복잡한 서울시의 문화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북촌은 조선시대의 상류주거지에서 1930년대 한옥주거지, 그리고 1980년대까지의 한옥보존지구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 북촌한옥마을(http://bukchon.seoul.go.kr) 참조. ※ 북촌한옥마을(http://bukchon.seoul.go.kr) 참조.
북촌에 자리한 서울 最古 고택

북촌에는 지금도 계동에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고택,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직계 후손인 이종찬씨 집안 등 여러 名文家가 있다. 또한 전통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와 서울시 무형문화재이신 장인들이 함께 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 왕조 궁중 음식’ 제3대 기능 보유자, 여러 색깔의 실을 바늘에 꿰어 바탕천에 무늬를 수놓아 나타내는 조형 활동인 자수(刺繡)의 장인, 칠기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옻칠장인,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 수석연주원으로 무형문화재 제16호 대금 전수자, 천연염색 및 전통매듭 연구가, 전통인형연구가 등 한국 문화예술의 전통을 지키고 이어가는 다양한 장인들이 북촌과 함께 하고 있다.

이처럼 전통에서 현대에 이어지는 600여년 역사의 도시풍경을 담고 있는 북촌의 골목길에는 언뜻 보기에 찾기 쉽지 않은 대저택이 있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빼곡히 들어찬 전통한옥 가운데에 북촌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건축이 있다.
그곳은 140년의 역사를 지닌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이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의 경계에 위치한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는 1870년대에 지어진 주택으로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전대통령이 거주한 집이다.

안국동윤보선가는 1978년 8월 18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지정되었고 2000년 4월 10일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로 문화재 지정명을 개칭하였다. 그리고 2002년 1월 29일 고택의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38호로 격상되어 지정되었다.

윤보선가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으로 전통과 현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한말 세도가의 건축적 위용을 보여주면서도 동?서양 가옥건축의 장점을 융합하여 건축양식 및 주거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윤보선가는 이러한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현대사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한민국의 전대통령이 살았던 곳으로 그 역사적 현장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옥의 주요 특징으로 산정채 북쪽에는 원래 전통적인 동양식 정원으로 작은 동산과 비정형의 연지가 있었으나 이후 방형의 연못을 만들고 서양식 잔디마당으로 조성하였다. 목조 한와지붕은 전통 건축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세부장식과 생활가구 등은 중국이나 영국식을 겸비해 실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전통기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의장으로 개선하였다.
또한 각 건물 앞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유행했던 서양식 차양을 두었는데 현재 산정채가 그 본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해가 질 무렵 햇빛을 막아주고 휴식과 편의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능을 한다. 지금도 손님들이 방문할 때면 이곳을 활용하고 있다.


북촌의 골목길 어느 곳에 위치한 ‘윤보선대통령’이 살았던 곳. 그 곳은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여전히 후손들이 삶을 사는 공간이라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고택을 개방하고 있지는 못하다. 국가지정 문화재로써 ‘안국동윤보선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건축문화의 전통성을 알릴 수 있는 창구가 될 수 있지만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공간이기에 그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구한말과 개화기,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를 잇는 140년 역사와 전통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북촌한옥마을의 ‘안국동윤보선가’에는 보이진 않지만 묵묵히 그 후손들이 함께하고 있다.

‘서울의 봄‘시기, 윤보선 전대통령과 김영삼과 김대중씨가 후보단일화 얘기를 나눈 산정채 ‘서울의 봄‘시기, 윤보선 전대통령과 김영삼과 김대중씨가 후보단일화 얘기를 나눈 산정채
안채 동편 정원 안채 동편 정원
가옥구조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하는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는 1870년대 민대감(閔大監)이 지은 후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효가 머물렀으며, 이후 한 차례 더 주인을 거쳐 1910년대 윤보선 전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공이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는 전통가옥이다. 조선말기 세도가의 위용과 동서양 주거건축 양식의 혼합 등으로 주거건축발달사 연구에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는 곳이다.

대지 1,411평, 건평 250평 규모의 위용을 갖추고 있는 윤보선가의 구조는 대문채, 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아래채(뒤채)로 구성된다.
윤보선가의 솟을대문 앞에는 옛날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에 발돋움하기 위하여 놓은 노둣돌이 있다. 서울의 전통가옥 대문 앞에 지금까지 이렇게 노둣돌이 남아있는 것은 특이한 사례이다.
대문간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었고, 중앙에 대문을 두었으며 옆으로 출입할 수 있는 협문을 내었다. 서향한 솟을대문간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인데 동남측에 사랑채가, 서북측으로 안채와 안사랑채(별당)가 자리잡고 있다. 행랑마당은 사랑채와 안사랑채, 안채로 향하는 길목역할을 한다. 사랑채ㆍ안채ㆍ안사랑채는 각각 따로 담장을 둘러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로 향하는 길은 나무로 담장을 두른 가운데 높이 180cm 크기의 철재로 된 소문(小門)이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방형의 연못과 해위선생의 조각상이 자리한 정원을 맞이한다. 그리고 우측에 사랑채가 있다.
산정(山庭)채라고도 불리는 사랑채는 현재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산정채라 칭한 것은 과거 정원을 서양식으로 바꾸기 전에 붙였던 이름으로 현재 방형의 연못 자리에서 대문쪽까지 작은 산맥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다른 비정형의 연못이 있었고, 연못을 건너가는 다리와 작은 동산으로 꾸며진 전통적 정원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동산을 산으로 여기고 산 옆에 마련된 별채라는 뜻에서 산정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사랑채의 서쪽으로는 서양식 차양을 달아 햇빛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고 사랑마당에는 높다랗게 잘 다듬은 석주가 놓여있으며 북측 담장 아래에는 전돌을 쌓아 화계(花階)를 꾸며놓았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작은대청, 사랑방, 큰사랑대청, 침방,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침방의 동쪽으로 화장실을 새로 증축하였다. 사랑채 전면을 중심으로 서측과 뒷면 툇마루에는 '아(亞)'자살 난간을 둘렀으며 사랑방과 침방 사이를 운치 있는 월문(月門)으로 만들었다. 산정채에는 ‘유천희해(遊天戱海)’라는 글씨의 큼지막한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하늘과 바다 위에서 노닐고 춤춘다’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동양에서는 복을 의미하는 박쥐의 모양으로 ‘태평만세(泰平萬歲)’라고 새긴 편액이 걸려 있으며, 순조가 쓴 것으로 전하는 ‘남청헌(攬靑軒)’ 등 사랑채를 둘러 다양한 현판이 있다.
'ㄱ'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는 내부구조가 많이 변해서 확실한 원형을 짐작하기 어렵다. 안채는 건넌방과 대청ㆍ큰방ㆍ누마루를 두었다. 부엌 뒤에는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을 두어 창고류의 용도로 쓰고 있다. 대청의 동쪽으로 작은 대청이 있고, 그 북쪽으로 화장실과 침방이 있는데, 본래 화장실과 침방은 커다란 하나의 윗방으로 사용하던 것을 개수한 것이라 한다. 안방은 작은 대청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안채의 기단은 화강석으로 세벌대 장대석으로 쌓았고, 주춧돌은 네모뿔형이며,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되었다. 안채의 외벽은 본래 회반죽 마감이었으나, 1960년 개수하면서 붉은 벽돌로 바꾸었다. 안채의 창호는 본래의 모습인 덫창, 사창(망사창), 쌍창, 갑창의 네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안채마당에는 백사(白沙)를 깔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마당에 깔려진 흰색 모래가 주간(晝間)에 들어오는 햇빛의 양을 더하여 4개의 창으로 보호막이 처진 안채로 투과되는 빛의 양을 늘리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누마루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 현판과,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전대통령이 쓴 것으로 보이는 경천효친(敬天孝親)’ 현판이 차례로 걸려 있다.

안사랑채는 안채의 서쪽에 담장을 둘러 따로 만들었고, 역(逆)'ㄴ'자형의 평면을 이루는데, 2칸 크기의 큰방을 동쪽에 두고 가운데에 대청을 두었으며 그 옆으로 건넌방을 배치했고, 이 방들 앞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안채와 안사랑채가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그 사이 마당에 샛담을 지었다. 특이한 것은 샛담에 나무교창을 들여 안채와 안사랑채의 동선을 확인할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안채와 사랑채의 영역은 구분하였지만 내외간의 소통을 위한 작은 빗살 공간이 더욱 멋스러움을 나타낸다. 각 건물의 앞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유행했던 긴 차양(遮陽)이 달려 있었으나 안사랑채에는 현재 차양을 지지하는 기둥의 주초만 남아있다. 안사랑채에는 ‘사무사(思無邪. 간사한 생각이 없음)‘라고 쓴 현판과 김옥균이 쓴 것으로 전하는 ’진충보국(盡忠報國)‘ 현판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 앞의 노둣돌 솟을대문 앞의 노둣돌
대문채 내부 대문채 내부
사랑채(산정채) 사랑채(산정채)
사랑(산정)채 후원으로 조성된 정원 사랑(산정)채 후원으로 조성된 정원
안사랑채(별당) 안사랑채(별당)
안채 안채
아래채 아래채
사랑채 월문(月門) 사랑채 월문(月門)
안채와 안사랑채 사이 샛담의 빗살 교창 안채와 안사랑채 사이 샛담의 빗살 교창
안채와 사랑채(산정채)를 잇는 협문 안채와 사랑채(산정채)를 잇는 협문
문화유산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전대통령 영정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전대통령 영정
유천희해(遊天戱海) 편액 유천희해(遊天戱海) 편액

추사 김정희 쓴 글씨체로 알려져 있다. 유천희해(遊天戱海)는‘하늘과 바다 위에서 노닐고 춤춘다’라는 의미이다.

남청헌(攬靑軒) 현판 남청헌(攬靑軒) 현판

순조가 쓴 것으로 추정.

’진충보국(盡忠報國)‘ 현판 ’진충보국(盡忠報國)‘ 현판

김옥균이 쓴 것으로 전한다.

고택여행
<안국동윤보선가>
ㆍ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1978. 8. 18)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지정.
ㆍ2000년 4월 10일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로 명칭변경.
ㆍ사적 제 제438호(2002. 1. 29) 국가지정문화재 전환. ㆍ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1978. 8. 18)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지정.
ㆍ2000년 4월 10일 '안국동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로 명칭변경.
ㆍ사적 제 제438호(2002. 1. 29) 국가지정문화재 전환.

안국동 윤보선가는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하였다. 제2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의 저택으로도 유명한 이 집은 1870년대에 민대감(閔大監)이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고종이 이 집을 사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주인이 바뀌었다가 윤보선 전 대통령 선친인 윤치소(尹致昭)가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 참조(http://sca.visitseoul.net)
※ 고택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지 않음.

<북촌한옥마을>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북촌지역의 역사적 자료는 사적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유형문화재 3곳, 문화재자료 1곳 이외에 계동길, 석정보름우물과 광해원터 등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인 중앙탕 등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옛길과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1900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형성된 한옥군 등 많은 자원들이 분포되어 있다.
1750년 도성도, 1892년 수전전도, 1927년 경성시가도, 그리고 2000년 이후인 현재 지도까지를 살펴보면 계동길, 가회로,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길과 더불어 각종 먹거리와 특색 있는 명소들이 있으며,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 속에 함께 하고자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북촌의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높이고자 함이다.

※ 북촌한옥마을(http://bukchon.seoul.go.kr)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