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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선생가옥

연혁
정온선생가옥 정면 정온선생가옥 정면

중요민속자료 제205호 지정

지정일 : 1984년 12월 24일

소유자 : 정완수, 관리자 : 정완수 (15대 종손)

소재지 :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

건축시기 : 조선시대

거창의 동계 정온 선생 고택은 초계 정씨 윗대에서 거창의 용산, 안음, 서마리 등지에서 살다가 동계의 조부인 승지공(諱淑, 1501~ 1563)때 강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고택은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년)선생의 후손들이 사당 을 모시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종택으로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과 행랑채, 곳간채, 안채, 사당 등이 토석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현재의 고택은 후손들이 정온선생의 생가(生家)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사랑채 상량대에 "(숭정기원후 사경진삼월)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이라 적혀있어 이는 순조(純祖) 20년(1820)에 건립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랑채 상량대. (중요민속자료(제205호)기록화보고서, 「鄭蘊先生家屋」, 문화재청) 사랑채 상량대. (중요민속자료(제205호)기록화보고서, 「鄭蘊先生家屋」, 문화재청)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하였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뜰아래 채가,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다. 안채의 뒷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3문을 설치한 후 사당을 세웠다.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집의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양반주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정온(鄭蘊, 1569∼1642)선생은 초계정씨(草溪鄭氏)로 호는 동계(桐溪)ㆍ고고자(鼓鼓子)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진사 유명(惟明)의 아들로 선조 2년(1569)에 태어나 선조 39년(1601)에 진사가 되고, 광해군 2년(161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동계선생이 46세 되던 해, 광해군은 어린나이의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강화도로 귀향 보냈다가 강화부 사 정항을 시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했다. 이에 동계는 임금에게 폐륜행위 에 대한 거침없는 상소문을 올리자 이에 진노한 광해군은 정온선생의 관직을 삭탈하고 1000리 밖,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보내고 10년 동안 1)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을 내렸다.
정온선생은 제주도에서의 10년이란 짧지 않은 유배 기간 동안 ‘덕변록(德辨錄)’, ‘망북두시(望北斗詩)’ 등을 지어 군주를 사랑하고 나라 를 염려하는 마음을 글로써 남겼다.
유배 10년만인 1623년 인조반정이 동계를 불러들여 사간원 원납의 벼슬을 내리고 이후 남원부사, 이조참의를 거쳐 1624년 10월 대사 간에 임명하였다.
인조 14년(1636)병자호란이 일어나 조선반도가 청나라에 굴복하게 되었다. 당시 이조참판이었던 정온선생은 조선과 명(明)나라의 의리를 내세워 끝까지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하게 되자 청과의 화의를 적극 반대했던 동계는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기도하였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동계는 벼슬을 물러나 덕유산의 모리(某里)라는 곳에 은거 하면서 일생을 보내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종되었고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橘林)서원, 함양(咸陽)의 남계(藍溪)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종가의 사당에는 2)불천위로 모셔져 있다. 나라에서는 정온선생의 이러한 충절을 기려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정려를 하사하였고 지금도 당시의 정려 가 고택의 솟을대문에 걸려있다.

1) 위리안치(圍籬安置)란 본인의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가시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중죄인의 안치이다. 후일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같은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며, 제주 귀양이 풀린 후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동계 후손인 정기필(鄭夔弼, 1800~1860)에게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편액을 써주고 갔다고 한다.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

하지만 영조 4년에 발생한 무신란의 주동자에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鄭希亮 ?~ 1728)이 있음으로 해서 일순간에 동계선생의 가문이 역적의 집안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건 속에서도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대부의 여론 때문이었다고 한다. 숨죽여 지내던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 기필(鄭夔弼, 1800~1860)선생으로 피폐한 강동마을을 거의 복구하였다.
정온선생가옥(鄭蘊先生家屋)은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동계고택의 15대 종손은 정완수(鄭完 秀)씨이고, 차종부가 되는 류성규(柳星奎)씨는 안동의 전주 류씨 유치명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14대종손 古정우순(鄭禹淳)선생의 부인이시고 현재고택의 종부이신 최희(崔熙)여사가 줄곧 종택을 지켜오셨다. 종부의 친정은 12대 만석꾼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이다.

2) 불천위(不遷位):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 큰 공훈으로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하락(下落)함.

사랑마당 사랑마당
안채마당 안채마당

※ 참조 : 중요민속자료(제205호)기록화보고서, 「鄭蘊先生家屋」, 문화재청

문화와전통
萬古忠臣 동계 정온, 滅門之禍를 피하게 하다
동계 정온의 지조와 절개를 기리다

정온선생가옥은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년)선생을 가문의 중시조로 모시고 불천위제사를 받들고 있는 고택으로 초계 정씨 가문의 후손들이 15대째 살고 있다.

선조, 광해, 인조의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한 정온선생은 만고충신(萬古忠臣)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해군이 어린나이의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강화도로 귀향 보냈다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한 폐륜적인 행위에 대해 좌우 대신들이 나서지 못할 때, 동계는 직접적인 상소문을 올려 광해군을 규탄하였다. 광해군은 이에 크게 진노하였지만 이덕형 등 원로대신들이 동계의 충절을 아껴 그를 위해 변호하였고 주위의 여론을 인식하여 동계를 10년간 제주도 유배형을 명한다. 인조반정이후 다시 벼슬길에 오른 정온선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37)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척화론을 주장하며 인조에게 오랑캐는 청과 화의를 맺지 않아야 함을 4번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상소한다. 산성차자(山城箚子)라 불리는 이 상소문에서 4번째의 상소에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자 이를 볼 수 없어 자결을 시도하였으며 신하된 도리로 끝까지 임금을 보필하지 못한 것을 죄스럽게 여기며 마지막까지 청과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전의(典醫)와 광주목사의 손에 의해 겨울 살아나게 되었고 더 이상 벼슬에 여한이 없음을 밝히고 이후 덕유산의 모리(某里)라는 곳에 은거하다 인조19년(1641)에 동생의 집에서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
모리재 화엽루(花葉樓) 모리재 화엽루(花葉樓)
모리재 문간공 동계정온선생 비석 모리재 문간공 동계정온선생 비석

정온선생은 사후 효종3년(1652)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효종8년(1657)에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온선생의 충절을 기린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정려 역시 이 당시에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고택의 솟을대문에 걸려있다. 숙종 때에는 다시 한 번 동계의 절개를 높이 사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또한 동계가 낙향한 후 죽을 때까지 은거했던 모리라는 곳을 기념하여 유림들이 모리재(某里齋)라는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충절을 기리며 추모하였다. 지금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사당?모리재?서무?화엽루(花葉樓)?내삼문?협문 등과 유허비 1기가 남아있어 정온선생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멸문지화를 모면한 동계 가문

지조와 절개를 지킨 만고충신(萬古忠臣)의 집안으로 명성을 떨치던 동계가문은 일순간에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대위기를 맡게 된다.
그것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또는 이인좌의 난(李麟佐 亂)이라 불리는 반란이 계기가 되었다. 무신란(戊申亂)은 소론이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한 사건이었다. 이 무신란의 주동자에 동계 정온의 고손(高孫)인 정희량(鄭希亮 ?~ 1728)이 포함되어 있음으로 해서 일순간에 역적의 집안이 되어 버린다. 정희량은 당시 경상도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여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당시 조정(朝廷)에서는 무신거사의 10역적을 김일경, 목호룡, 이인좌, 이웅보, 박필현, 이사성, 정희량, 박필몽, 남태징, 민관효로 결정하여 이들의 집안과 일족이 참수형을 당하거나 해당 지역을 떠나서 피신, 유배 등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정희량에 관한 사실은 초계 정씨 족보에서부터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영조 40년(1764)에 이르러 나라에서 불천위로써 정온의 봉사를 허락하기에 이른다. 대역죄라는 가문의 멍에를 지는 사건 속에서도 집안이 멸문지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대부의 여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는 정희량에 대한 반역으로 선대의 충절과 기개의 상징이었던 동계 정온선생의 정신이 묻히는 것이 나라의더욱 큰 손해라고 여겼기에 그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구헌(反求軒) 반구헌(反求軒)

숨죽여 지내던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鄭夔弼, 1800~1860)선생으로 피폐한 강동마을을 거의 복구하였다. 야옹 선생은 헌종에서 철종년간에 영양현감을 지낸 동계의 후손이다. 야옹선생은 목민관 재임시 청렴한 인품과 덕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안의현감의 도움으로 ‘반구헌(反求軒)’을 건립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구헌의 의미는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을 지닌 “반구어제심(反求於諸心)”에서 유래한다.
이후 점차 과거에 합격하는 인물이 배출되며 옛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오늘날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동계고택의 15대 종손은 정완수(鄭完秀)씨이고, 차종부는 안동의 전주 류씨 유치명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종부는 12대 만석꾼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의 딸로 14대 종손 古정우순(鄭禹淳)선생의 부인이다.

고택에 남겨진 영조의 시와 의친왕의 친필 편액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의 사당을 모시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종택, 정온선생가옥(鄭蘊先生家屋)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과 곳간채, 안채, 아래채, 사당, 토석 담장 등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솟을대문에는 효종 임금이 동계 정온에게 내린 시호인 문간(文簡)공을 지칭하여 내려진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가 걸려 있다. 대문을 지나면 인공으로 만들어진 사랑마당 정원과 함께 고택의 사랑채와 마주한다.

높은 누마루와 누마루의 눈썹지붕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특색이 있다. 하지만 가옥구조 보다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두 분 임금의 친필이다. 정조임금의 친필과 조선왕조 26대 왕이었던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의 친필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채 마루벽에 옮겨진 현판에는 정조임금이 정온 선생의 충절을 기려서 내린 시가 걸려 있다. 원래 안채 후원에 위치한 사당의 문 위에 걸려 있는 것이었으나 지금의 위치로 옮기었다.

日長山色碧嵯峨 種得乾坤正氣多 (일장산색벽차아 종득건곤정기다)
北去南來同一義 精金堅石不曾磨 (북거남래동일의 정금견석부증마)

(崇禎四庚午 居昌府使臣金麟淳謹書) (숭정사경오 거창부사신금린순근서)

세월은 흘러도 산은 푸르고 높으며,
정의로운 기운은 온 천지에 가득하네.

북으로 가거나(金尙憲이 심양에 간 것)
남으로 오거나(정온을 모시로 온 것) 의리는 매 한지,
금석같이 정결하고 굳은 절개는 아직도 삭아 없어지질 않았네.

숭정사경오(崇禎四庚午)는 고종(高宗)7년(1870)에 해당하니 시가 지어진 뒤 70여년 후에 새겨진 것이다.

시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라는 인물은 병자호란 때 판서로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는데 화의를 극력반대하고 끝내 청과의 화의를 반대했던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을 했던 척화론자였다. 그로 말미암아 중국 선양(瀋陽)에 잡혀가 3년간이나 있었는데 심문에도 끝내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귀국 후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위의 시조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북쪽으로는 김상헌, 남쪽으로는 경상도의 동계 정온의 나라를 향한 충절과 지조를 읊은 것으로 두 인물의 의로움을 이르는 말로 정온의 의리를 칭송한 정조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온선생가옥 사랑채의 큰사랑을 들어가는 입구, 처마 아래에는 의친왕의 친필로 쓰여진 모와(某窩)라는 편액이 있었다. 지금은 안타깝게 도난을 당해 그 흔적을 대신한 현판을 마련하여 같은 장소에 걸어 놓았다.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은 의왕(義王)·의화군(義和君)이라고도 하며,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장씨(貴人張氏)이다. 1909년 의친왕 이강(李堈)공이 거창의 정온선생가옥 사랑채에서 약 두 달 간 머문 적이 있었다. 이는 구한말 승지를 지낸 이 집 종손 정태균(鄭泰均)과 한양에서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왔으며, 그때 남긴 친필이 ‘모와某窩’라는 글씨였다. 이는 ‘모리의 집’이라는 뜻과 ‘매화나무 집’이라는 의미로 전해진다.

모와라는 글씨의 모(某)는 본래 매화내무 매(梅)를 지칭하는 것으로 매화나무가 본디 뜻이다. 모와의 와(窩)는 집을 뜻하는 것이니 매화나무 집이라는 뜻인데, 매화란 원래 한해의 가장 빨리 피는 꽃으로 가장 추운 입춘을 전후로 열린다. 이러한 뜻에서 매화는 선비의 굳은 의지와 신하의 충의?절의의 표상으로써 비유되어 왔다.

그러니 ‘매화나무 집’ 모와(某窩)란 충의와 절의가 있는 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리의 집’을 뜻하는 ‘모와’는 바로 문간공 동계 정온이 낙향한 후 머물렀던 곳인 덕유산의 ‘모리’이다.

즉, 모와란 영조의 시조에서와 같이 충의와 지조로써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동계 정온의 집을 일컫는다.

14대 종손 古정우순(鄭禹淳)씨와 종부 최희(崔熙) 여사가 의친왕 ‘某窩’친필과 함께 찍은 사진 14대 종손 古정우순(鄭禹淳)씨와 종부 최희(崔熙) 여사가 의친왕 ‘某窩’친필과 함께 찍은 사진
정온가의 맏며느리 종부 최희(崔熙, 84세) 할머니 정온가의 맏며느리 종부 최희(崔熙, 84세) 할머니

경주 최부자댁의 장녀로 초계정씨와 혼인을 맺으신 정온선생가옥을 지키고 있는 종부 최희 할머니는 올해 84세이다. 이분은 그 음식맛이 일품이라는 평이다. 수란, 전복찜, 육포, 법주 등 사대부가의 음식에 있어서 그 전통을 유지하고 계신다.
16세에 시집을 오셨다. 당시 이곳 거창부근까지 2틀에 걸쳐 오셨다. 대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또 다시 택시를 타고 거창까지 오셨다한다. 그리고 당시 시아버님께서 동래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보내주셨다. 흐뭇해하신다.
당시 혼례행차 때 가져온 각종 혼수물품의 목록인 혼수물목, 신랑의 사주(四柱)를 적은 사성, 신부집에서 혼례 날짜를 택일해 신랑집으로 보낸 연길(涓吉), 혼인의 문서라 할 수 있는 혼서(婚書) 등이 있었는데, 최근에 그 중 일부가 도난당했다고 한다. 많은 종가의 대부분 종부들은 시집을 온지 오래되기도 하였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혼례 때의 물품들이 남아 있지 않아 개화기의 혼례풍속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흔치 않다.

종부의 남편이자 종가의 14대 종손이신 古정우순(鄭禹淳)선생께서는 거창교육장, 함양교육장을 지내신 지역 교육계의 원로셨다. 약 13년 전에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종부는 남편이 돌아가시고 1년 상을 치러내는데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살아계실 때와 같이 상을 차리고 봄/여름/가을/겨울에 맞는 옷을 항상 준비하여 방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선친께서 끽연을 하시는데 이용했던 곰방대와 커피를 상을 내어온 후에 올려야 했다.

남편이 돌아가신 이듬해 꽃이 피는 시기에 최희 할머니가 지은 ‘가사’가 있어 눈에 띤다. '회심곡'이라는 가사로 먼저 떠나보낸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표현한 차분하면서도 품격 있는 어조로 노래한 가사이다. 가느다란 붓을 이용한 세필로 전통시대의 규방가사라 할 수 있다.

정온선생가옥 종부 최희(崔熙) 여사 정온선생가옥 종부 최희(崔熙) 여사
회심곡 회심곡
가옥구조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위치한 ‘정온선생가옥(鄭蘊先生家屋)’은 조선 중기의 문신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년)이 살았던 집을 후손들이 순조 20년인 1820년에 중창하여 일부 개보수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초계 정씨 가문이다.

정온선생 가옥은 수승대의 계류가 회류하는 지점에 입지하여 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조두산을 거쳐 시루봉에서 멎었고 평원이 시원하게 전개되는 지점으로 주택의 대지는 산 밑에 평야가 시작되는 지점에 마련되었다.

나즈막한 뒷산을 배산으로 한 강촌마을에 동남향하여 자리한 고택은 ‘ㅡ’자형 대문간채를 시작으로 ‘ㄱ’자형 사랑채와 ‘ㅡ’자형 안채, 그리고 사당이 조금씩 엇갈린 모습의 남향으로 동일한 축선상에 위치하며, 사랑채와 안채를 전후로 좌우에는 곳간채와 아래채를 마주보도록 배치하여 가운데 영역이 ‘ㅁ’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동계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인조 임금이 내린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가 걸린 솟을대문을 지나면 넓은 사랑마당 전면에 남향을 하고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구조를 띤 사랑채는 전면 6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를 갖춘다. 사랑채 전면에는 1칸 폭의 툇마루와 반 칸 폭의 툇마루가 연이어 있으며 전면의 오른쪽 꺾인 부분에 2칸 크기의 누마루를 배치하였다. 높은 용마루와 함께 돌출된 누마루의 눈썹지붕이 매우 인상적이다.

사랑채 사랑채

사랑마당을 뒤로하고 안채를 들어가는 3칸 크기의 중문(中門)이 사랑채 좌측에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공간분할적 특징으로 사랑채와 안채 구분을 이루는 공간이 중문채가 위치한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사랑채와 이어진 중문채 사랑채와 이어진 중문채

사랑채와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는 안채는 ‘ㅡ’자형 평면에 전면8칸, 측면3칸으로 사랑채보다 넓은 규모로 살림집으로 작지 않다. 안채의 전후로 퇴를 달았으며 내부 구성을 살펴보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각기 부엌 2칸, 방 2칸, 대청 2칸, 방 1칸, 내루 1칸으로 이루어졌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대청의 정면 기둥 열에도 세살 4분합 들어열개 문을 달아 대청과 툇마루 공간을 구분 짓고 있다. 분합문 상부에는 광창을 두어 대청 내부로의 채광을 돕게 하였다
안채 우측방 옆에는 다시 마루를 설치하였다. 안채에 대청이외의 일종의 누마루 형식으로 여가공간을 확보하여 안살림을 하는 식구들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의 마루는 대청마루보다 약 30cm 높게 만들었고 주변에 난간을 둘렀다.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된 사랑채와 안채사이에서 ‘ㅁ'자형 구조를 완성시키는 건물이 곳간채와와 아래채이다. 안채의 전면 동측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아래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북측에 1칸의 함실아궁이, 남측으로 온돌방1칸, 마루 1칸, 온돌방 1칸을 두었다. 또 안채의 전면 서측에 자리 잡은 곳간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북측 전면 1칸에서 간벽을 쳐 두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있다.

안채우측의 내마루 안채우측의 내마루
곳간채 곳간채
안채마당과 아래채 안채마당과 아래채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사당만을 별도로 담장을 둘러 제향공간의 위계성을 부여하고 있다. 사당의 위치는 솟을대문과 사랑채, 안채가 차례로 자리하는 축선으로 가장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의 위치가 일반적인 고택 구조에 있어서 안채를 중심으로 동쪽 또는 동북편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정온선생의 신위가 모셔진 사당의 위치는 안채 바로 뒤편에 있어서 평면구조상의 특이함이 있다. 현 종부 최희(崔熙, 84)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택의 지형상 동북쪽에 위치하는 것이 평면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안채 바로 뒤쪽으로 지었다고 한다. 대나무밭이 사당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온선생가옥의 주요한 특징은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하였다는 것과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온선생가옥의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양반주택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료이다.

사당으로 향하는 길, 사당으로 향하는 길,
정온선생가옥 배치구조 정온선생가옥 배치구조
문화유산
정온선생제복일습(鄭先生祭服一襲) 중요민속자료 제218호

거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조선 선조 2년(1569) 역동에서 태어나 인조 20년(1641)에 타계한 문간공(文簡公) 동계 정온(桐溪 鄭蘊)의 복식으로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裳), 중단(中單), 금량관(金梁 冠) 등 5점이다.

조복(朝服)

적초의와 상(裳)으로 이루어짐. 경축일 등 정온 선생이 임금을 알현할 때 입었던 관복이다.

제복(祭服)

푸른 비단의 예복으로 청초의라고도 불리며 나라의 큰 제사 때 입는 제례복(祭禮服). 청색 향라(亢羅)로 만든 제복(祭服)

중단(中單)

제례복 안에 받쳐 입는 옷으로 옥색이다. 남자(男子)의 상복(喪服) 속에 받쳐 입는 소매가 넓은 베 두루마기.

후수(後綬)

예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뒤에서 띠 아래로 늘어뜨리던 수놓은 천

패옥(佩玉)

금관조복의 좌우에 늘이어 차던 옥

갑사홑동다리 갑사홑동다리
은문사겹단령 은문사겹단령
화조문갑사겹원삼 화조문갑사겹원삼
풍차(風遮)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방한용 두건의 하나. 앞은 이마까지 오고 옆은 귀를 덮게 되어 있으며 뒤에서 보면 삼각형이다.

목화(木靴)

예전에, 사모관대를 할 때 신던 신. 바닥은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고 검은빛의 사슴 가죽으로 목을 길게 만드는데 모양은 장화와 비슷하다.

용잠(龍簪)

용의 머리 형상을 새기어 만든 비녀

호패(號牌)

조선 시대에, 신분을 증명하기 위하여 16세 이상의 남자가 가지고 다녔던 패. 직사각형으로 앞면에는 성명, 나이, 태어난 해의 간지를 새기고 뒷면에는 해당 관아의 낙인을 찍었다.

어사화(御賜花)

조선 시대에,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종이꽃으로 진찬(進饌) 때에 신하들이 사모(紗帽)에 꽂았다.

모리재(某里齋) (유형문화재 제 307호)

모리재(某里齋)는 1637년 인조(仁祖)가 중국 청 태종 앞에 나가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척화파인 정온(鄭蘊)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전의(典醫)와 광주목사의 손에 구명되었다. 그 후 정온선생은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은거하며 살았는데, 그 곳을 기념하여 유림들이 건립한 재사(齋舍)로 사당·모리재·서무·화엽루(花葉樓)·내삼문·협문 등과 유허비 1기가 남아있다.

정온선생 문집책판(鄭蘊先生 文集冊版) (유형문화재 제 321호) 정온선생 문집책판(鄭蘊先生 文集冊版) (유형문화재 제 321호)

조선 중기 때 명신인 동계 정온(1569∼1641)의 문집을 새긴 목판이다.

정온은 광해군 2년(1610)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경설서, 사간원정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자 격렬한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뒤 10년 동안 유배지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 후 다시 벼슬길에 올라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 중요한 벼슬을 했으며, 병자호란 때 끝내 항복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살다가 죽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절개를 높이 사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에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이것은 현종 1년(1660) 손자(孫子)인 정기수(鄭岐壽)에 의해에 처음 간행하였고, 이후 철종 2년(1851)에 다시 간행하였다. 이곳에 보관 중인 책판은 모두 299매로, 처음 문집을 간행할 때 제작된 것이다. 문집에는 선생이 쓴 시 374수(首)를 비롯해, 선생이 친지들과 학문적 내용을 바탕으로 주고받은 편지와 국가 정책에 관한 상소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또 허목(許穆)과 조경(趙勁)이 선생의 행적에 관해 쓴 글을 비롯해, 임금이 내린 교서 등 선생의 행적과 관련된 글들도 실려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을 반대한 「갑인봉사」(甲寅封事)와 청(淸)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소」(斥和疏)와 같은 문장은 왕권 계승을 둘러싸고 당시에 전개되고 있던 권력 투쟁과 청(淸)나라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인식 및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의 정치 및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그 밖에도 선생의 문집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대북(大北)·소북(小北)간의 당쟁 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동계문집(동계집, 속동계집, 부록, 동계연보)전 9책의 전질이다. 크기는 가로 54㎝, 세로 29㎝, 폭 2.5㎝이다.

거창초계정씨종가소장고문서(居昌草溪鄭氏宗家所藏古文書) (유형문화재 제 320호) 거창초계정씨종가소장고문서(居昌草溪鄭氏宗家所藏古文書) (유형문화재 제 320호)
정온을 가선대부사헌부 사헌에 임명하는 고신 정온을 가선대부사헌부 사헌에 임명하는 고신
동계속집(桐溪續集) 동계속집(桐溪續集)

이곳 초계 정씨의 종가에는 고려 말 정준(생몰년 미상)이 만든 『우왕 3년 정사 감시방목』(禑王三年丁巳監試榜目) 등의 서첩류(書帖類) 4책과 나라에서 정온(鄭蘊, 1569~1641)에게 내린 교지 등 총 26점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정준 선생이 만든 『감시방목』은 고려시대 국자감(國子監)에서 진사(進士)를 뽑던 시험[國子監試]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수록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이러한 종류의 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로 27.5㎝, 세로 41.5㎝의 크기에 모두 24매로 구성되어 있는 『감시방목』은 고려 말 시험 제도와 그 시대 인물 연구에 아주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된다. 인조(仁祖)가 중국 청태종 앞에 나가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자결을 시도했던 척화파 정온(鄭蘊)이 남한산성에서 낙향하여 말년을 보냈던 모리재(某里齋:경남유형문화재 제307호)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704년 화재로 일부가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다.

내사본중용(內賜本中庸) 중요민속자료 제218-8호 내사본중용(內賜本中庸) 중요민속자료 제218-8호

인조가 예조참판 정온에게 하사한 내사본으로 1635년(인조13년) 8월의 내사기가 있다. 당시 우승지 한모(韓某)의 수결이 있고 '선사지인(宣賜之印)'이 찍혀 있다.

화엽시(花葉詩)를 새긴 석침(石枕) (중요민속자료 218-9호) 화엽시(花葉詩)를 새긴 석침(石枕) (중요민속자료 218-9호)

정온의 화엽시(花葉詩)를 새긴 오석의 석침이다. 유려한 필치로 새긴 화엽시는 정온이 만년에 지은 시로 유명하다.

고택여행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위치한 정온선생가옥은 동계 정온의 조부인 승지공(諱淑, 1501~1563)때 강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고택은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년)선생의 후손들이 사당을 모시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종택으로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과 행랑채, 곳간채, 안채, 사당 등이 토석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다. 현재의 고택은 후손들이 정온선생의 생가(生家)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민속자료(제205호)기록화보고서, 「鄭蘊先生家屋」, 문화재청 중요민속자료(제205호)기록화보고서, 「鄭蘊先生家屋」, 문화재청

정온선생가옥의 중요유물 및 유품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거창박물관에 나뉘어 기탁보존하고 있다. 정온가의 유품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광해군 2년(1610)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된 정온선생과 그의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관련된 복식 및 전적류와 생활자료 등이다.

이 유물들은 조선중기 이후의 복식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써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또한 동계 정온과 직접 관련된 전적류는 그의 역사적 위치나 활동현황에 비해 현재 남아있는 고문서 자료가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해 볼 때 보존가치가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5대 종손이신 정완수씨는 추후에 힘이 닿는다면 가옥 부근에 유물관을 건립하여 기탁보존하고 있는 자료들을 모아서 종손에서 관리하고자 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05호 지정된 정온선생가옥은 전국 각 지역에서 개인 및 단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경남의 대표적인 고택(古宅)중 하나이다. 14대 종부이신 최희여사는 경주 최부자댁의 자녀로 수란, 전복찜, 육포, 법주 등 사대부가의 음식에 있어서 요리법과 맛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종부의 장맛은 가히 국내최고라고 자부할 만큼 깊은 맛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변 유적지로는 금원산에서 원시인이 살았던 암굴이 발견되었고 문화재로는 강천리의 산역천향사와 대정리의 구연서원, 학촌향사, 화천향사, 모동리의 청충향사, 강원리의 금계향사, 상천리의 덕천향사 등 7개소의 서원이 있다. 명승지로는 암벽에 이황의 명시와 임훈 등 명인의 시가 판각되어 있는 수승대와 확계선생 정옥견이 은거하여 소요하던 능허정 등이 있다.

종손의 한 말씀

제사에 관하여
현재 종손은 천주교 신자이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것과 종교를 갖는 것은 다른 의미이다. 천주교 성당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미사를 드린다. 이는 일종의 종교의식이자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특히 종가집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에 조상을 모시는 것은 기타 종교를 믿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켜야할 풍속이다. 이는 똑 같이 감사함을 드리는 시간이다.

종손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예의와 범절을 지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삶의 기본 정신 동양적인 유교사상이 가장 크다. 이 가운데 삼강오륜의 가르침을 널리 배워 인생의 잣대로 삼았으면 한다. 부모와 자식간 부부와 군신간의 지켜야할 도리는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중요한 중심을 잃지 않는 정신이 될 수 있다.


위치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

주요 연락처

거창군청 : 055-940-3000
거창박물관 : 055-944-8218
수승대 관광지 : 055-943-5383
시외버스터미널 : 055-942-3601

<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