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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고구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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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

1. 국가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 국가는 압록강 중류의 독로강(禿魯江)및 혼강(渾江)유역을 중심으로 성장 하였다. 이 지역의 지리적 환경은 깊은 계곡과 산이 많고, 하천을 따라서 좁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기부터 농경이 주요 산업이었으며 가축 사육도 발달하였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도 중요한 생산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교통로의 중심지로서 동쪽으로는 동해안으로 나아갈 수 있고, 서쪽으로는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며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으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한반도의 서북부 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 지리적 환경 아래서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이 지역에 철기(鐵器)문화가 보급되면서 곳곳에서 소규모 정치집단이 등장하였다. B. C128년 경에는 주변의 강력한 국가인 고조선(古朝鮮)에 불만을 품고 예군(濊君) 남녀(南閭)라는 인물이 28만여 인(人)을 거느리고 한(漢)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28만 인의 집단은 하나의 강력한 결집력을 갖는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 정치집단들이 완만한 형태로 결합한 연맹체 수준이었다.
그런데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 기원전 107년에 고구려 지역에도 현도군(玄도郡)이 설치되었다. 현도군에 소속된 3개의 현(縣)중에 우두머리 현으로 고구려 현이 설치되었음을 보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고구려’란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건국기년에 대해서는 고구려 멸망기 이래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700여 년 존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외에 800년 설이나 900여년 설도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주몽 이전에 ‘고구려’라고 불리우며 주변 세력과 구분되는 정치적·문화적 기반이 압록강 중류지역에 형성되어 있었으니 그 역사적 연원은 충분히 올라갈 수 있겠다.
물론 이때에 고구려라는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은 각 지역에서 정치집단이 성립하고, 이들이 점차 소국(小國)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 토착 세력인 고구려인은 현도군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그 결과 현도군은 점차 요동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75년 무렵 현도군을 몰아낸 뒤 여러 소국(小國)들은 고구려왕을 대표로는 연맹체 국가를 형성하였다. 중국 기록인 「삼국지(三國志)」고구려 전에 의하면 초기 고구려 연맹장의 지위는 소노부(消奴部)가 장악하였으나, 그 뒤에 계루부(桂婁部)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는 고구려의 건국설화에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압록강 유역의 토착세력인 송양왕(松壤王)집단을 누르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즉 부여계 유목민인 주몽으로 대표되는 세력집단이 바로 계루부로서, 이들 주몽집단이 한 군현과 투쟁하는데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고구려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1세기 태조왕(太租王)대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통솔하는 보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 때 고구려왕은 고구려족을 5부(部)로 나누어 통솔하였다. 초기 고구려를 구성한 5부의 이름은 「삼국지」에 의하면 계루부(桂蔞部) ·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 · 환나부(桓那部)등 4부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왕실을 구성한 계루부를 제외하면 소노부=관나부, 순노부=환나부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들 명칭속의 ‘노(奴)’나 ‘나(那)’는 강이나 냇가의 평야 또는 그러한 지역의 세력집단을 뜻하는 말로서, 처음에 압록강 유역의 각 지역에서 여러 나부(那部)로 편제된 것이다.
이들 5부 중에서도 왕실을 구성하는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 그리고 이전에 연맹장의 지위에 있었던 소노부의 3부가 세력이 강대하였으며, 관노부와 순노부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하였다. 5부(部)는 각자 부(部)내부의 일에서는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대외적인 무역권 · 외교권은 고구려왕이 직접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왕은 현도군과의 경계에 책구루(?溝蔞)라는 교역 지점을 설치하여 이곳을 통하여 현도군과의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중국 군현이 고구려의 여러 정치집단에 대해 분열과 회유를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들 5나부를 다스리는 고구려의 지배 세력가를 가(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가(加)’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서 ‘간(干)’·‘한(汗)’과 서로 뜻이 통한다. 세력의 크기에 따라 대가(大加)·소가(小加)로 나뉘는데. 이들은 수천에서 수백에 이르는 가호(家戶)를 지배하였다. 가(加)의 지배 아래에는 호민(豪民)과 하호(下戶)가 있었다. 호민은 읍락의 지배층이었다. 「삼국지」고구려 전에는 “나라 안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고,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인이다. 하호가 식량과 고기와 소금을 날아와 공급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대가와 좌식자가 곧 고구려 지배층이었다. 하호는 피지배층으로 이들에게 예속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왕의 권력은 점차 커져서 각 부의 독립성은 그만큼 축소되었고, 고구려왕의 통솔력이 상당한 정도로 강화되어 갔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 정세는 왕권의 집권력과 가(加)세력의 자치력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연맹체 때의 중앙정부는 계루부왕을 중심으로 각 부의 대가들이 연합하여 구성하였다. 왕은 중앙의 관리로 상가(相加) · 대로(對盧) · 패자(沛者) · 고추가(古鄒加) · 주부(主簿) · 우대(優대)등을 거느리고, 그 아래에 하급관리로서 사자(使者) · 조의(早衣) · 선인(先人)등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치권(自治權)을 갖고 있는 각부(部)의 대가(大加)들도 각자 사자 · 조의 · 선인 등의 관리를 별도로 거느리며 자신들의 부를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각 부(部)의 관리들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여야 하였는데, 그만큼 왕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국내외의 중요한 국가의 일은 각 나부의 대가들로 구성된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회의를 통하여 결정하였다. 여기서는 왕위 계승자의 선출, 외교 및 대외 군사 활동, 국사범에 대한 재판 등 행정과 사법에 걸쳐 국정 전반을 관여하였다. 따라서 제가회의는 제가귀족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제가회의의 의장은 상가(相加)또는 국상(國相)이며, 당시 5부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하였던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의 유력자가 차지하였다.
태조 왕대에는 이렇게 5부의 조직이 잘 갖추어져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고 국력이 강화되었다. 태조왕이 일명 ‘국조왕(國祖王)’으로 불리거나 시조 왕을 뜻하는 ‘태조(太祖)’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왕 이후 고구려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부의 갈등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중앙 집권력인 지배층들을 다시 5부로 나누어 통솔하였다. 그리고 왕위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벗어나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었다.
왕권을 정점으로 한 고구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초기의 지배이념의 모습은 건국신화와 제천(祭天)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제천행사를 동맹(東盟)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시조왕인 동명(東明)과 서로 통한다. 즉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와 시조에 대한 제사가 동격으로 이루어진 결과로서, 시조인 동명은 천제의 아들, 즉 천손으로서 그 지배력을 행사하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천손의식은 초기 고대국가 지배자가 갖는 공통된 현상으로, 제천 행사 때에 국왕이 제의를 주관함으로써 그 권위를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이렇게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는 국가의 공식적 의례로서, 제천의례에 참여한 귀족들을 비롯한 전사회구성원이 결속되고 통합되는 지배이념의 실천적 공간이었다.
이와 같이 지배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 내부의 군사적 동원력이 확대되면서, 대외적인 정복활동과 영역의 평창도 크게 이루어졌다. 먼저 농산물· 해산물 등 물자가 풍부한 동옥저(東沃沮)·동예(東濊) 지역은 물론 두만강유역의 북옥저 등을 복속시켜서 고구려 지역의 취약한 경제적 기반을 보강하였다. 물론 이 때의 대외적 진출은 영역으로 만들어 직접 지배하기 보다는 주로 여러 종족 집단을 복속시켜 그 우두머리를 통해 공납(貢納)을 징수하는 등 간접적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이러한 정복활동으로 경제적 부(富)가 축적되면서 3세기 전반에는 1만여 명에 이르는 지배층 전사(戰士)집단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한편 고구려는 중국 군현에 대한 공격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사실상 초기 고구려의 성장은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기록상 고구려와 중국 세력의 첫 충돌은 12년(고구려 유리왕 31년)이지만, 본격적인 충돌은 고구려가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추구하였던 태조왕 대이다. 이 무렵 주변 국가에 대한 복속을 마무리지운 고구려가 2세기 초부터 중국 군현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주된 공격 대상은 현도군과 요동군이었는데, 이때의 고구려의 공격은 기습적으로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이것이 영토의 개척과 군현의 축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중국 군현의 역공도 만만치 않았으며, 북만주에 위치한 부여가 중국 군현을 지원하였으므로 고구려의 대중국 투쟁은 그리 용이치 않았다.
태조왕 이후 한동안 수세적인 입장에서 중국 군현세력과 틈틈이 충돌하던 고구려는 중국이 위(魏)· 오(吳)·촉(蜀)등 삼국으로 나뉘어 상쟁하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남쪽의 오(吳)나라와도 통교하는 등 다시금 국내 팽창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위(魏)나라의 공격으로 요동의 공손씨(公孫氏)세력이 무너지자(238년), 기회를 틈 탄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은 242년에 서안평(西安平)을 기습 공격하였다. 서안평은 요동과 한반도의 낙랑군을 연결하는 압록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교통로의 요충지로서, 고구려의 공격에 놀란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관구검(?丘檢)은 고구려에 역공을 시도하였다(246). 이 때 고구려는 위나라군에 대패하여 수도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동옥저로 피신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고구려의 대외활동은 한동안 위축되었다.

2.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대외 팽창

4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는 그동안의 사회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사회 분화가 확대되면서 초기의 지배 체제는 해체되어 갔고, 새로이 집권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3세기 무렵부터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더욱 강화되어감에 따라 각 나부의 자치력이 약회되어 갔고, 지방에서 5부를 다스리던 지배자들인 제가세력도 출신지를 떠나 수도로 거주지를 옮겨 중앙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5부에 속하여 지배를 받았던 주민들은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공민(公民)으로 편제되었다. 이에 4세기 중엽에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 율령(律令)이 반포되면서 제도적인 정비를 이루게 되었다.
이과정에서 국력을 기른 고구려는 중국이 ‘5호16국시대’라는 혼란기로 접어들자 이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대외 정복활동을 펼쳐 나갔다. 먼저 미천왕(美川王)은 313년에 현도군을 공격하고, 이어서 낙랑군과 대방군(帶方軍)을 정복하여 한반도 내에 있던 중국 군현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비옥한 농경 지대인 낙랑군, 대방군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어 고구려는 요동(遼東)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선비족(鮮卑族)인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전연의 침입을 받아, 342년(고국원왕12년)에는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고, 주민 5만여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커다란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처럼 요동진출이 용이하지 않자 고구려는 남쪽으로 정복 활동의 방향을 돌렸으며, 새롭게 성장하는 백제(百濟)와 대결하게 되었다. 서로 공방전이 이어지다가 371년에는 백제가 평양성(平壤城)까지 침공해왔으며, 이 전토에서 국왕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하였다. 이는 고구려에게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
고국원왕대에 서쪽과 남쪽 방향에서 이루어진 대외 팽창이 거듭 실패하고 오히려 전연이나 백제의 침입으로 커다란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중국의 전진(前秦)과 통교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불교의 수용, 율령의 반포, 태학(太學)의 설립이 그러한 개혁정책의 일환이었다.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다는 것은 곧 보편적인 정신 세계의 통일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보급으로 고구려 영역 내에 다양한 집단과 종족들이 갖고 있던 관념 들을 포용하면서, 보다 차원이 높은 종교와 사상인 불교를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묶어나갈수 있게 되었다. 특히 불교는 본래 고대국가의 왕실의 권위와 지배체제의 확립에 중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왕실 역시 적극적으로 많은 사찰을 짓고 승려를 육성하면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한편 율령의 반포는 일원적 기준으로 국가적 지배질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었다. 토 태학은 관료를 양성하여 통치기구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 되었으며, 귀족층의 자제들에게 유교의 경전과 문학·무예 등을 교육하여 관료 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율령과 태학의 운영은 곧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이념으로서 유학이 기능하였음을 뜻한다. 이로써 고구려는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집권적 지배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관료체제는 소수림왕 이후에 여러 차례의 개편을 통해 더욱 완성되어 갔다. 그중요한 점을 살펴보면, 먼저 중앙의 관등조직은 ‘형(兄)’계통의 관등과 ‘사자(使者)’계통의 관등이 중심이 되어 일원적으로 구성되었다. ‘형(兄)’은 연장자(年長者)를 뜻하는 고구려말로서 바로 친족집단의 장로(長老)를 가르킨다. 이 형(兄)으로 불리우는 계통의 관등은 과거의 가(加)세력들을 중앙 귀족으로 편제하면서 부여한 관등이었다. ‘사자’계통의 관등은 본래 조세 수취 등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료로 성장한 세력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개편한 관등이었다. 즉 ‘형’계통의 관등은 귀족적 성격을 갖는 관등이고, ‘사자’계통의 관등은 왕권을 지지하는 성격을 갖는 관등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 관등 조직은 시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계속 변천하다가 말기에는 다음과 같이 12등급 혹은 13등급으로 구성되었다. ①대대로(大對盧), ②태대형(太大兄), ③주부(主簿), ④태대사지(太大使者), ⑤위두대형(位頭大兄), ⑥대사자(大使者), ⑦대형(大兄),⑧발위사자(拔位使者),⑨상위사자(上位使者)⑩소형(小兄), ⑪제형(諸兄), ⑫선인(先人)등이다. 중기의 전제적 왕권은 이러한 일원적 관등제도에 기초한 관료체제의 운영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편 지방지배와 대민지배도 중앙집권화의 방향에서 새로운 체제로 갖추어졌다.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과거 하호는 국가의 양인층으로 편제되어 경제적, 군사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후기에 양인농민은 국가에 대해 인세(人稅)로 포5필과 곡식 5섬을 바쳤으며, 빈부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뉘어 가호 단위로 조(租)를 바쳤다. 또 15세 이상의 일반 농민은 역(役)의 부담을 져서, 군대에 차출되기도 하고 각종 노역에 동원 되었다. 또 거란이나 말갈 등 이종족 집단은 말기까지도 집단예민이 되어 공납을 바치거나 군사로 동원되었다. 그리고 정복전쟁이 활발해지면서 일반민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동원체계가 마련되었다. 중아군의 무관직으로는 군사령관에 해당하는 대모달(大模達)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1천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말객(末客)이 있었다. 그리고 지방군사조직은 지뱅행정 조직과 하나로 짜여져, 지방관이 지방군의 지휘도 함께 맡았다. 군대의 편성 단위는 당(幢)이라고 하였으며, 수렵행사와 열병을 통하여 군사훈련을 하였다. 육군은 기병과 보병을 결합시켜 강력한 전투력을 구사하였으며, 수군도 상당히 강력하여 황해의 새항권을 장악하였다.
또 지방지배에서도 3세기말부터 점차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어 다스렸다. 고구려 지방제도는 성(城)을 단위로 행정구역을 편제한 것이 특징이다. 후기 자료에 의하면 지방통치조직을 대성(大城)·성(城)·소성(小城)의 3단계로 나누어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큰 성에는 욕살(褥薩)이란 지방관이 있었고, 그 아래 성에는 도사(道使)혹은 처려근지(處閭近支)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보다 작은 성에는 가라달(可邏達)·누초(婁肖)등의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5세기까지는 아직 상급 지방관인 욕살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중요한 거점성에는 수사(守事)라고 불리우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성 아래에는 촌(村)이 있었으나, 비장관은 두지 않았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3경(京)제도를 실시하여 수도 평양성 이외에 국내성 · 한성(漢城)을 3경으로 삼아 각각 5부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 삼경은 고구려의 수도와 부수도로서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고구려 귀족은 주로 삼경에 모여 살았다. 그중 한성의 위치는 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근래에는 이 일대에서 고구려시대에 만들어진 장수산성과 도시 유적이 발견되어 그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체제 정비는 대외적인 정복활동과 짝하여 고구려사회를 더욱 팽창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왕때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선비족 묘용씩(慕容氏)가 세운 후연(後燕)을 제압하며 요동(遼東)을 장악하였고, 동북으로는 숙신(肅愼)과 동부여(東夫餘)를 정복하고 북으로 부여(夫餘)를 병합하여 남만주 일대를 차지하였다. 또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신라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어 장수왕때에는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인 남진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중부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으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를 건너 요서(遼西)를 사이에 두고 북위(北魏)와 힘을 겨루었다. 그리고 유연(柔然)이 세력을 떨치며, 여기에 고구려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는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고구려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위(北魏)는 물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南朝)와 북방의 유연과도 다각도의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국제 무대에서의 이러한 세력관계를 배경으로 한반도 내에서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면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 노태돈, 1984,「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44. 아울러 이러한 대외관계에 힘입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교류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제반 문물의 수용속에서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융성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당당한 위치는 고구려인의 국가 의식에 반영되어 있다. 즉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구려의 비문인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내용을 보면,고구려는 스스로 천하(天下)의 중국 국가임을 자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시기 평양 천도가 갖는 의미와 그 이후 고구려 문화의 성격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데는 수도로서 평양이 갖는 지리적 개방성과 국제성이 한 몫을 했다고 본다. 당대 고구려는 북위, 남조, 유연과 더불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유지해가는 중심축의 하나이며, 또한 고구려적 ‘천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평양은 새로운 문화 변동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평양 천도이후 고구려의 문화적 성격은 이전에 비해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평양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분벽화가 그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본래의 전통적 문화 기반위에 외래의 다양한 문화 요소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주위의 신라 등에 큰 영향을 주어 중국 문화권과 구별되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3. 하대의 변동과 멸망

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쳐 귀족세력 사이에 치열한 정쟁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 왕이 피살되고 많은 귀족들이 숙청되었으며, 일부 귀족이 외국으로 이탈해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어느 한 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일정한 타협 아래 귀족연립(貴族聯立)정권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역사책에 ‘최고 관직인 대다로(大對盧)가 3년마다 선임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귀족들이 각기 병사를 동원하여 싸우며, 왕이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라는 기록에서 잘 엿볼수 있다. 대대로는 처음에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6세기 후반경 왕권이 약화되면서부터 대대로가 귀족회의의 의장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상쟁이 벌어진 것이다. 귀족연립정권이 성립되면서부터 5위인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에 오른 귀족들이 국정을 장악하였으며, 최고위직인 대대로는 3년마다 귀족들이 선임하였다. 또 막리지(莫離支)라는 집권적 관직이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도 후기 정치체제의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귀족연립 정권은 말기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최후의 집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군사를 일으켜 반대파 귀족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와같은 대내적인 정국의 변화 속에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도 여러 차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먼저 551년(陽原王 7년)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고구려의 혼란한 내분을 기회로 기습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때마침 고구려의 혼란한 내분을 기회로 기습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때마침 고구려의 서부 국경선에서도 북제(北齊)가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오고, 이어 신흥세력인 돌궐(突厥)이 유연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밀려오면서 고구려에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미처 남쪽을 돌볼 여력이 없어 신라와 일약을 맺고 한강유역을 넘겨 주고 말았다. 이에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고, 이어 백제군을 대패시킴으로써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와같은 젱세 변동으로 고구려는 더 이상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6세기 종반에 들어 대륙의 국제 정세는 더욱 급격히 변동되었다.
580년 북주(北周)를 뒤이어 건국된 수(隋)나라가 589년에는 남조 진(陳)나라를 정복하여 3백여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에서의 통일 정권의 수립에 따라 그동안 안정적이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붕괴되었다. 수나라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 질서로의 재편을 기도하였다. 먼저 유연을 대신하여 북방을 차지하고 있던 돌궐을 격퇴하고 그 힘을 약화시켰다. 이어서 요동지역으로 힘을 뻗치게 되니 고구려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이 동요하여 그 일부가 수나라에 귀속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부터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고구려는 수나라의 세력이 현실적으로 미쳐오게 됨에 따라 적극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598년(영양왕 9)에 고구려군은 요서 지방을 선제 공격하였고, 이에 분노한 수의 문제(文帝)는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요하도 건너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돌궐과 손을 잡고 수를 견제하려고 시도하자,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도 612년에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그 뒤에도 두 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내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수나라 멸망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唐)이 건국되자, 삼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다시금 급격하게 변동하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결되어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당(唐)이 중국을 통일한 뒤 대외적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양국이 일시적으로 평화 관계를 지속하기도 하였으나, 당나라가 돌궐을 복속시키자 상황이 달라졌다. 당나라도 수와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켜 보장왕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대외정책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즉 이전 영류왕대의 온건한 외교 정책과는 달리 당과 신라에 대해 모두 강경한 외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고구려와 당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것이다. 물론 보장왕 초년에는 당과 화친을 맺고 당으로부터 도교(道敎)를 수용하였기도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데에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었다. 이 때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화친을 모색하였으나, 한강유역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는 연개소문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 후 신라는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당과의 외교 관계에 주력하였고, 당 역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과 신라의 동맹세력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시도하게 되었다. 645년(보장왕 4년) 당나라 태종(太宗)은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때 당군은 요동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10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安市城)전투에서 대패하여 당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당은 전략을 바꾸어 여러 차례 소규모 부대를 출동시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래 계속된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도 서서히 피폐해졌다. 이에 당은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협공하였다. 고구려군은 계속되는 당군의 공격에 완강히 저항하여 물리쳤으며, 보장왕 21년(662)에는 사수전토에서 연개소문이 당의 장군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을 군사활동이 용이해진 신라군과 당군의 양면공격이 거듭되자 고구려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갔다. 보장왕 25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뒤를 이어 태막리지가 되었는데, 두 동생인 남건(男建)과 남산(南産)과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동생들에게 쫓겨 국내성으로 물러났다. 남생은 결국 당에 투항하였고, 당군의 고구려 침공에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이러한 지배층의 분열과 함께 민심도 동요되어 보장왕 후기에는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하는 비기(秘記)가 유포되고 있었으며, 지방세력들도 이탈해 갔다. 보장왕 27년(668)에 부여지역의 40여 성이 당군에 항복하고, 마침내 그 해 9월에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강압적인 지배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촉발하였다. 669년부터 곳곳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4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후 다수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로 들어가 흡수되었다. 한편 당나라 영주(營州)부근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유민집단은 696년에 일부말갈(靺蝎)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해 동부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이 규합되었다. 발해(渤海)가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 유민은 발해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수백 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했던 고구려의 역사는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4. 맺음말

고구려는 넓은 영토와 그 안에 다수의 종족을 거느리고 아울러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교류하여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렇게 제국으로서의 발전과 다종족(多種族)국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또한 삼국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문화 기반을 이루어 이를 백제와 신라에 전하여 민족문화의 원류를 이루었다는 점도 주목되며 나아가 정치적으로는 중국세력과 유목세력의 진출을 막고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여, 민족사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는 점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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