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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고구려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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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인물

동명왕(東明王, BC 58~ BC 19)

고구려의 始祖 동명성왕의 성은 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원주] ‘鄒牟’ 혹은 ‘象 解’라고도 한다. ‘상해’는 衆牟‘라고 써야 될 듯하다.
이보다 앞서 부여왕 새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로다!”
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기르고 금와라 이름 지었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했다.
“며칠 전 하느님이 저에게 내려와 이르시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도읍을 정할만한 곳이니라’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끝내 왕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서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
해루부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어보았더니, 그녀가 대답하였다.
“저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나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저를 웅심산(熊心山)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통하고, 그 길로 떠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라간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가 기이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둬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다시 그녀를 따라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 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갖다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는데 새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쪼개보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겨우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는데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재주가 모두 주몽만 못하였다. 금와의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바가 아닙니다. 사람됨이 용맹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를 없애버리소서.”
왕이 이말을 들어주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굼뜬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는 이유로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또 주몽을 죽이려고 도모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모략을 몰래 알아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면 어디 간들 괜찮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머뭇거리고 있다가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주몽은 조이(鳥夷), 마리(摩離), 협보(陜父)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떠나 엄체수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군사들이 들이닥칠까 걱정이 되었는데,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다가왔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세사람을 만났다. 한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마름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디 사는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은 무엇인가?”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이름은 재사입니다”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이 “이름은 무골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마름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못했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克氏),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주몽은 곧 무리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다.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의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험준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에 따라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이 때는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韓)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인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의 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하여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드디어 물리쳐 버리니, 말갈은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 이파리가 물을 따라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沸琉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궁벽하게 바닷가 구석에 있어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었소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소! 그런데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소.”
주몽은 대답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소.”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소.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 할 수 없소.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떻겠소?”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말싸움을 하다가 또 다시 활쏙로 재주를 겨루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다. (「삼국사기」권13)

부분노(扶芬奴,?~?)

동명성왕때 비류국(沸流國)과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고, 특히 유리명왕 때는 변방을 괴롭히는 선비족(鮮卑族)을 정벌하였다. 그는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과 제2대 유리명왕을 보좌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함께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는데 공을 세운다.


유리명왕 11년 여름 4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했다.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 '우리 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명림답부(明臨答夫, 67~179)

165년(신대왕 1) 연나조의(椽那衣)로 있다가, 포악한 차대왕(次大王)을 죽이고 왕제(王弟) 백고(伯固)를 신대왕(新大王)으로 옹립하였다. 이듬해 패자(沛者)로 승진되고, 고구려 최초의 국상(國相)이 되어 정치 ·병권(兵權)을 도맡았다. 172년 한(漢)의 현도군 태수(太守) 경림(耿臨)의 침입을 받자, 지구전 끝에 책략으로 좌원(坐原:遼寧省)에서 격파(좌원대첩)하여, 왕으로부터 좌원 ·질산(質山)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113세의 고령으로 죽자 질산에 장사지내고, 묘지기로 20가구가 배치되었다.

을파소(乙巴素,?~203)

고국천왕(故國川王, 179∼197)은 즉위 당시 기득권을 가진 혈연 중심의 연나부(椽那部)와 환나부(桓那部)의 외척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권세를 휘두르는 형국이었다. 그는 이러한 조정을 능력 중심으로 개편하는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역부족임을 통감하며 연나부 출신의 아내 우씨를 왕후로 책봉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입하자 고국천왕은 좌원(坐原)에서 대승하였다. 이로써 왕권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본격적으로 외척제거에 나서게 되었다. 191년에는 외척세력의 대표격인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於卑留)가 주도한 7개월간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였다.


이어 대대적인 정계개편의 일환으로 대신들이 동부의 안류(晏留)를 국상 적임자로 천거한다. 국상에 임명된 안류는 자신보다는 압록곡(鴨綠谷) 좌물촌(左勿村)에 사는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을파소는 유리명왕(琉璃明王)때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이며 강직하고 현명하였으나 시대를 만나지 못해 농사로 연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晏留)를 대사자(大使者)로 삼고 을파소를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지만 을파소는 중외대부의 직책으로는 뜻을 펼칠 수 없다하여 과감히 사양한다. 을파소의 사람됨과 진의를 제대로 파악한 고국천왕은 그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였다. 대신들의 시기와 음모가 있었지만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앞세워 과감한 개혁정책을 단행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등 현정(賢政)을 베풀었고, 194년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농민들에 대한 구휼책을 마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그러한 진대법의 실시는 왕권에 대 하는 세력들과 농민들과의 결탁을 저지함은 물론,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는 정책적인 배려였다. 고국천왕 때를 계기로 왕위계승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다.


을파소는 고구려인이다. 국천왕 때의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이 모두 왕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부리고 그릇된 행동을 많이 하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자 좌가려 등이 모반하므로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귀양을 보냈다. 이에 4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자 왕이 그를 불러서 국정을 맡기려 하였다.
안류는 왕에게 을소의 후손 을파소를 천거함에 따라 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그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았다.


파소는 곧 국상으로 제수되고 조정의 신하들과 외척들은 파소가 새로 등용되어 이전의 대신들을 이간한다 하여 그를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국상 을파소에게 복종토록 명령하였다. 을파소는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외가 무사하였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5~413)

고구려 제19대왕. 재위 391∼413. 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는데, 386년(고국양왕 3)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전하는 바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예성강을 경계로 그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해온 백제에 대해서는 즉위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석현성(石峴城:開豊郡 北面 靑石洞)을 비롯한 10개성을 빼앗는가 하면 이어서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자랑하는 관미성(關彌城:江華 喬桐島)을 20여일 만에 함락시킨다.


또,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 온 백제군을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新溪)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 지금의 禮成江)에서 각각 격퇴하고 백제와의 접경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파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많은 전리품과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는 대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백제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세력만회를 위해 왜(倭)를 내세워 399년에는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는 신라를 공격했고 404년에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침공해왔지만, 이 또한 5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에서 몰아냄은 물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고, 나아가서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한다.


또,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으며,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남방으로의 세력확장과 함께 서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기도 했는데,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다.

후연과는, 396년 모용보(慕容寶)가 후연왕으로 즉위하여 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에 책봉하는가 하면 400년에는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400년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옴으로써 양국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이에 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여 402년에는 요하를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를 도망치게 했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비롯한 요하(遼河)이동지역을 차지한다.

그리고 후연왕 모용희(慕容熙)에 의한 405년의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木抵城 : 지금의 木奇)침입을 물리침으로써 요하 이동지역에 대한 장악을 더욱 확고히 한다. 대왕이 산둥성에 중심을 둔 남연(南燕)의 왕 모용초(慕容超)에 대하여 천리마 등을 보내면서 접근을 꾀한 것도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인 것 같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北燕)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된다. 이밖에도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백인을 사로잡고 거란에게 빼앗긴 고구려인 1만인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로 추측되는 비려(碑麗)를 친정하여 염수(鹽水)방면의 부락 6백∼7백 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여 개선했다.


그리고 398년에는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식신(息愼), 즉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고,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 : 豆滿江 하류 방면의 琿春說과 함남 남부와 강원 북부에 걸치는 永興灣 방면설이 있음.)를 친정하여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이렇듯 정력적인 정복사업의 결과, 재위기간중 64성과 1, 400촌락을 공파하였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혼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유역에 이르게 했다. 대왕은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다음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한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정비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412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414년 능(陵)에 옮겨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輯安縣)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으며, 능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수왕(長壽王,394~491)

고구려 제20대 왕 (394∼491) 재위 413∼491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소환요청을 거절한다든지,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장수왕은 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세력들과 다각적인 외교를 통하여 서방의 안정을 이룩하였고, 이를 토대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였고, 427년에는 국내성(國內城:지금의 輯安縣 通溝)에서부터 평양성(平壤城:지금의 평양시가지 동북방 6∼7㎞ 지점에 위치한 大城山城일대)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국내성 일대에 뿌리 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의 약화 및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또 평양천도를 계기로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55년에는 백제에서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고, 475년에는 승려 도림(道琳)을 이용하여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한 다음, 왕 자신이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그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로 하여금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 및 백제와 연결된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적극 차단하였다. 한편,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하여 눌지마립간을 옹립하는 등, 처음에는 우월적인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의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자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481년에는 호명성(狐鳴城:지금의 경상북도 靑松郡 虎鳴山)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지금의 흥해)까지 진격하였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고구려와 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입하기 직전, 고구려가 아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남쪽으로는 아산만·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고,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하여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룩하게 되었다. 491년에 98세로 죽자, 북위는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신 고구려왕 (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功臣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서 북위의 장수왕에 대한 평가를 짐작하게 한다.

담징(曇徵, 579~631)

담징(曇徵, 579 - 631<평원왕 21∼영류왕 14>)은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로 학문과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의 초청으로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승려 호조(法定)와 함께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사(法隆寺)에 기거하면서, 오경(五經)과 불법(佛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호류사의 금당(金堂, 대웅전(大雄殿)에 석가(釋迦), 아미타(阿彌陀), 미륵(彌勒), 약사 (藥師)등으로 구성된 '사불 정토도(社佛淨土圖)'를 그렸다.


'금당벽화(金堂地壁畵)'로 더 잘 알려진 이 그림은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유명했으나, 1949년 1월 내부수리 중에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고, 현재는 모사화(模寫畵)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담징은 승려로서 일본에 가서 그림 뿐 만 아니라 유교의 5경, 채색과 공예, 연자방아 등의 제작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종이 만드는 법, 먹을 만들어 쓰는 법, 맷돌을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쳐주어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종이와 먹의 시조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

을지문덕은 가문의 내력이 자세하지는 않다. 그는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아울러 글도 지을 줄 알았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于文述)은 부여 길로 나오고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은 낙랑 길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을지문덕이 왕의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였으니, 이는 사실 그들의 허실을 엿보려는 것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이보다 앞서 황제의 비밀교지를 받았는데,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거든 억류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우중문 등은 을지문덕을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있던 상서 우승 유사룡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을지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이를 깊이 후회여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재차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올 수 있겠는가?”
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다. 우문술고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놏친 뒤에 마음속으로 스스로 편하지가 못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돌아가려 하는데, 우중문은 정예부대로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우문술이 이를 말리니, 우중문이 화를 내며 말했다.
“장군이 10만 병력에 의지하면서도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뵐 것입니까?”
우무술 등은 마지못해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으 s수나라 군병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때마다 번번이 달아났다. 이렇게 하여 우문술은 하루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를 믿고, 또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따라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보냈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기묘한 계략은 땅으 이치를 다했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설득하니, 을지문덕은 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체하며 우문술에게 청했다.
“만일 군대를 돌린다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뵙겠습니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뿐만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 속이느 s말을 따라 돌아가며 네모진 진을 만들어 떠나갔다. 을지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우문술 등은 싸우면서 떠나갔다. 그들이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건너갔을 때, 을지문덕은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그들의 후군을 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중였다.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아나 돌아갔는데,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4백 50리를 간 것이었다. 처음 요수를 건너 올때 9군 30만 5천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때는 2천 7백명뿐이었다(「삼국사기」권44)

연개소문(淵蓋蘇文,?~666)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장군.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 개금(蓋金 또는 金)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기록되어 있다.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0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거만한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응징한다는 구실로 645년(보장왕 4)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당태종은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에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후방에서 양만춘 장군을 도와 안시성 혈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시켰다. 해상에서 당 수군을 격파시켜 보급로를 끊고 당군을 요택으로 밖에 후퇴할 수 밖 에 없도록 만들어 거의 전멸시켰으며 당태종은 군사를 모두 잃고 간신히 장안으로 도망갔다고 전하여 진다. 사서에는 언급이 안되었지만 연개소문은 북경인근을 점령하여 고려방을 만들었으며 산동성(山東省)까지 영토를 넓혔다는 증거가 구전 혹은 중국 민요를 통해서 전하여 지고 있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내치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견고한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淑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내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 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 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탁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정벌하여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체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정책은 자연스럽게 동북지역으로 그 압력을 가증 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를 잇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 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욱 격화되어 갔다.


이러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도 상관되는 것이었다. 대외적인 위기의식과 전쟁은 강력한 집권화를 도모하는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자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찾아와서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당의 사신 장엄(蔣儼)을 가두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당에 대하여 단호한 대결 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확고히 하고 말갈족과 같은 예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며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러한 면은 644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와의 사이에서와 같이 전쟁이 불가피 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세력균형 상태가 중국 대륙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됨에 따라 깨어져갔다. 중국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서 수, 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 하였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의 중국 내부의 사정과 그리고 이어 돌궐과의 관계로 인하여 고구려와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전단을 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듯이 그는 당태종이 침공해오자 당시 몽골고원에서 돌궐에 이어 흥성하였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현재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있었던 아프라시압 왕조와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는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 격화되어갔다.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男建)·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양만춘(梁萬春, ?~?)

고구려 보장왕 때의 명장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安市城)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현재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구,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위치하여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더불어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安寸忽)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신성(新城:지금의 요녕성 무순(撫順) 부근)과 건안성(建安城:지금의 요녕성 가이핑[蓋平])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烏骨城)·국내성(國內城)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호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혁명에 의해 영류왕과 간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지만 양만춘 안시성주 만이 유일하게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그에게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두 사람은 당태종의 침입 때 힘을 합쳐 당태종에게 치욕을 주기도 했다. 보장왕 4년, 당은 15만의 병력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항전 끝에 함락되었다. 645년(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고구려에 쳐들어와 요하 일대의 개모성(蓋牟城)·비사성(卑沙城)·요동성(遼東城: 遼陽)·백암성(白巖城, 연주성<燕州城> 성주 손대음장군 항복)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후 당태종은 휘하 장수 도종(道宗)을 책임자로 하여 16일 동안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 높이와 같게 하여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고구려 병사들도 성 위에 흙을 쌓아 성의 높이를 높였는데 결국은 당나라의 토산이 안시성을 아래로 내려 보게 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태종은 도종을 토성수비대장으로 삼고, 도종은 다시 부하인 부복애(傅伏愛)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키게 했다. 그런데 태종이 이렇게 공을 들여쌓은 토산 한 모퉁이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흙더미가 안시성 성벽을 덮치자 성벽 또한 무너져 내렸다. 이때 마침 부복애가 자리를 뜨고 없었는데 그 때를 틈타 안시성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토산을 탈취해 버렸다. 당태종은 부복애를 처형하고 토산의 탈환전을 위해 3일 동안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끝내 토산을 탈환하지 못한다. 날마다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태종은 포기하고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