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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문화와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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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풍속

고구려인의 머리모양

『북사』에 “그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용모가 단정한 것을 숭상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도 고구려인이 청결함과 단정함을 추구하는 것을 엿볼 수 있으며, 그 형태의 상세함은 대체적으로 고분벽화에 나타난 형태를 중심으로 문헌과 함께 연구되고 있다. 평양중심의 머리모양은 안악3호분, 덕흥리 고분, 약수리 고분 등의 인물들에서 나타난다. 남자들은 대부분 관모를 쓰고 있으며, 상투를 틀고 있다. 책과 건의 착용이 많았다.

여자의 머리모양은 다양한 얹은머리와 쪽진 머리, 묶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얹은머리는 가발을 사용해서 고리모양으로 높이 틀어 얹은머리와 자신의 머리를 틀어서 얹은 머리로 나눌 수 있다. 가발을 사용해서 크고 화려하게 빗은 머리는 높은 지위를 나타낸다. 묶은 머리는 미혼여자에게 많았고, 쪽진 머리는 쌍영총 벽화의 부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의 음악에 관한 문헌은 《삼국사기》(권32, 악지)와 《고려사》(원71, 악지2) 그리고 중국의 《북사》(권94, 고구려), 《수서》(권15, 음악 하, 권81, 고려)와 일본의 《일본서기》가 있다. 《삼국사기》(권32, 악지)에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인 현금(거문고)의 기원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처음에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그것이 악기인 줄만 알고 그 소리와 타는 법을 몰랐다. 이에 큰 상을 주고 음과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

이 때 왕산악이 본래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 그 법제를 고쳐서 현금을 만들었다...’ 《삼국사기》(권16, 악지)에 의하면 16종의 악기가 있고 여기 노래가 첨가되어 있다고 한다.

이밖에 《북사》(권94, 고구려)에 의하면, “갈대를 불어 곡조에 조화가 있게 한다”하였으니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음악에 관한 자료 중 안악제3호 무덤의 벽화의 행렬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행렬도 중, 북치는 사람과 부는 악기. 꽹과리를 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권22, 추고 천왕26년)에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북과 피리 같은 악기를 선사 하였다고 기록되어, 일본에 고구려의 음악이 영향을 준 사실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제

고구려에서 땅의 이용에 대해 주목을 끄는 것은<위지>동이전(권30, 고구려)의 고구려 총인구 3만호 가운데 좌식, 즉 경작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계급이 있었다는 구절이다. 이 책에는 또한 이 좌식이란 부족장이나 대가를 가리키며, 그 수효는 대략 만 명이었다고 나와 있다. 이들은 땅을 소유하고, 피정복인, 즉 하호는 곡식과 물고기, 소금을 바쳐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문헌을 통해, 백성들이 사전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권16, 고국천왕13년 ; 권45, 을파소)에는 을파소가 자기 땅에서 나는 식량으로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한 자료가 빈약하기는 해도 고구려의 사전(私田)이 중국의 균전, 구분전, 영업전 등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은 명백하다.

고구려의 결혼 풍속

고구려에서는 양가 부모의 승낙을 받아 약혼이 성립되면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신부집의 본채 뒤에 작은 별채인 ‘사위의 집’을 지어 두고 기다린다. 결혼한 부부는 이‘사위의 집’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 자란 후에야 함께 남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같이 혼전에 미리 가서 사는 습속은 매매혼 내지 교환혼의 흔적이다.

교환혼의 발달된 형태가 노역혼으로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 한 후 신부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 데릴사위제이다. 딸, 아들이 혼기에 임박했다는 것은 하나의 노동력으로서 경제적인 가치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혼은 곧 노동력을 주는 것이므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시기에 남의 집 딸을 며느리로 얻어 올 때 그 대가로써 대개 첫 아들을 낳을 때까지 처가에서 노력 봉사를 먼저 해야만 했던 것이 데릴사위제였다.

고구려 사회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하여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혼’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결혼 형식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 흉노 등 북방 민족 사이에 서도 널리 나타나고 있다. 형사취수혼은 씨족 사회에서 다른 씨족원이었던 여자가 자기 남편의 죽음과 함께 다른 씨족의 남자와 재혼하여 전 남편의 재산을 가지고 갈 경우, 씨족의 재산과 인적 손실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구 증가를 위해, 홀로 된 형수의 부양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계속되는 이동 생활 속에서 배우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의 결혼 풍속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고구려인의 건축

고구려는 건축방면에서 풍부한 유산을 남겨 놓았다. 통치계급은 여러 종족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하여 건국하자 바로 그 도성(都城)을 쌓았다. 그후에 고구려 사회경제의 발전과 민족 간의 교류가 강화되는 것에 맞추어 고구려 민족은 그들의 거주용 건축물과 여러 건축업의 방면에서 독특한 민족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건축양식을 창출하였고, 수준 높은 기술과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축은 주택, 궁전, 성곽, 사원 등이 있으며, 규모가 아주 큰 무덤건축이 있다.

고구려의 건축방면은 그들 민족 건축의 품격과 기술수준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구려 문화의 발전수준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주택은 거주지이며, 고구려 민족의 생활과 직접 관계 가 있는 장소이다. 거주의 풍속과 품격은 그 민족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의 하나이다.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인의 거주는 산과 계곡(山谷)에 의지하고 모두 띠풀로 지붕을 하며, 오로지 사원, 신묘 및 왕궁, 관청에만 기와를 사용한다.

그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겨울이 되면 모두 긴 구들을 놓고 아래에 불을 지펴 따스한 기운을 얻는다" 문헌상에서 볼 때 고구려의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집은 산의 계곡에 의지하여 지은 작은 초가집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현실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고구려 통치계급과 백성들의 주택은 엄격한 등급에 의해 크기나 형태가 규정되었다. 이 점은 고고학상의 발굴로 증명이 되었다. 현재 고구려 일반 백성의 집은 보존상의 어려움 때문인지 발견된 예가 많지 않다.

고구려의 회화예술

고구려의 회화예술은 수많은 무덤벽화에 나타나 있다. 고구려의 벽화는 고구려 민족이 남긴 진귀한 예술작품이다. 그 회화의 품격과 색채에는 고구려 민족의 고유한 특성이 짙게 깔려 있다. 동시에 중국 한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보인다. 더욱이 6-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후기의 벽화에는 그 격식과 내용, 기법 상에서 현저하게 중국의 영향을 보여준다.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한대, 위진 시대의 회화예술에서 그 영양소를 흡수하고, 그것에 바탕으로 하여 그들 민족 고유의 회화예술의 기교를 결합하여 고구려 민족의 특색이 한껏 들어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회화예술을 창조하였다. 현재 이들 벽화는 주로 중국의 집안, 북한의 평양지역과 황해도 안악지역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어떤 벽화는 백회(白灰)로 바른 벽에 그린 것이고, 어떤 벽화는 평평하고 반들거리는 석벽 위에 그렸다. 백회의 위에 그린 그림은 그 소재가 대부분 사회풍속화이고, 석벽에 바른 것은 대부분이 사신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앞의 것은 시대가 초기이고 수량도 대부분을 차지하며 시기는 북위에서 수나라 시대이다. 뒤의 것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인 당(唐)대에 해당되며 수량도 적은 편이다.

고구려의 음식

<위지>동이전(권30, 고구려)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산이 많고 골짜기가 깊으며, 평야와 못이 없다.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해 집을 짓고 살며 산에서 흐르는 물을 마신다. 질이 좋은 밭이 없어 아무리 밭일을 열심히 해도 넉넉히 먹고 살기에 부족해 음식을 아껴 먹는다.” 그러나 고구려가 영토를 늘려감에 따라 후기에는 매해 400만석을 생산하여 국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주식은 조였으며 기장, 수수가 있어 이것으로 밥을 지어먹었다.

고기종류로는 안악3호분무덤 벽화에 나와 있듯이 꿩. 돼지. 노루. 개와 같은 것이 육고에 저장되어 있었다. 집에서는 소. 돼지. 양. 닭. 집오리가 사육되고 그 고기를 먹었다. 해산물은 옥저 같은 곳에서 실어와 먹었다. 음식을 만들 때에는 도마를 썼으며 먹을 때는 긴 다리를 가진 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먹었다. 그릇은 긴 다리가 달린 공기모양의 그릇, 뚜껑이 있는 독, 호리병 같이 생긴 큰 항아리, 술통 등이 있었다. 그릇은 질그릇을 많이 썼다.

고구려 복식

짧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는 복식이 특징이다. 짧은 저고리의 길이는 일반적으로 궁둥이 선(臀線)에 이른다. 오늘날의 중국식 중산복(中山服)이나 양복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고구려 벽화의 관찰에 의하면 더욱 뚜렷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짧은 저고리의 앞 섶(襟)은 완전한 개방식과 교차식섶인 큰 섶이고, 곧은 깃(直領)은 목 아래에서 삼각형을 이루며, 대부분이 왼쪽 여밈이며, 소매의 입, 옷깃, 도련에 모두 선이 있고, 허리에는 묶음띠를 둘렀다. 짧은 저고리의 소매통은 폭이 넓고 좁은 것, 길고 짧은 것의 구분이 있으며, 소박하고 화려한 색채의 구분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신분의 귀천과 상하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이 입는 짧은 저고리는 소매가 좁고 소매의 길이도 비교적 짧은 편이며, 저고리의 양식과 색깔도 비교적 단조롭다. 신분이 비교적 높거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짧은 저고리는 소매의 폭이 비교적 넓고 길이도 상대적으로 길며, 색채가 아주 화려하고 선명한 선이 둘러있다. 또한 저고리의 옷감과 무늬도 풍부하고 다채롭다. 바지는 지금의 한국인들이 입는 전통옷과 차이가 없으며 통이 넓고 좁은 차이가 있으며 앞 뒤의 구별이 없는 편당고이고 허리를 졸라매서 고정시킨다.

저고리와 바지의 색에는 흰색, 검정색, 노란색, 보라색, 붉은색, 난초색, 녹색 등이 있다. 저고리와 바지의 장식무늬로는 점무늬, 구름무늬, 기하무늬, 십자무늬가 있으며 또한 유색의 바탕무늬 등도 있다. 신분이 낮은 평민들의 옷은 색깔이 단조롭고 옷감도 조악하여 대부분이 베(布)나 짐승가죽이다. 그러나 왕실의 귀족과 관리들의 옷은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의복이 모두 비단으로 짰으며 금은으로 장식한다" 고 하여 그 화려함의 일면을 알 수 있다.

신분이 높은 고구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무늬를 도안하여 장식한 화려하고도 질좋은 의복을 착용하였다. 신분이 있는 사람과 왕실귀족들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는 것 이외에 ‘포(袍)’나 ‘오’로 불리는 외투를 걸쳤다. 장삼(長衫)이라고도 불리우는 포는 비교적 길이가 긴 외투로 땅에 끌릴 정도이며, 단삼이라고 하는 오는 비교적 짧은 외투로 아래 섶이 무릎 정도에 이른다. 외투 계통의 포나 오는 섶이 고정된 합금(合襟)과 교차하여 고정시키는 교금(交襟)으로 구분하고 모두 허리에서 띠로 묶는다. 포나 오도 짧은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옷의 윗쪽이나 허리띠에 장식을 한다.

옛날 중국의 남자들은 모두 옥(玉)을 허리띠에 찼는데 고구려의 남자들도 귀족계급들은 반드시 옥을 장식으로 허리춤에 찼다.

고구려인들의 실내생활풍습

고구려인들이 실내에서 생활하는 풍습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생활을 묘사한 벽화에 드러나 있다. 고구려 무덤벽화에서 인물풍속과 사신(四神)을 그린 그림에는 묘주인의 실내생활에 대한 장면이 있다. 그들은 호화로운 집의 실내에서 살았다. 어떤 묘주인은 구들의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평상이나 좌상에 앉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걸상에 앉아있다. 묘주인의 주위에는 시종, 시녀 등이 시중을 들고 있다. 평상과 좌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자세는 대부분이 책상다리를 하였다. 평상과 좌상의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 다.

다만 크고 작은 것과 넓고 좁은 것의 차이만이 있다. 좌상은 다만 한 사람이나 둘 정도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너비이고, 평상에는 두 사람 이상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평상은 앉는 용도 이외에도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좌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죽신이나 코없는 가죽신을 벗고서 앉아 있다. 이것은 맨발로 좌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나 가죽신을 벗어 밖에 두는 그림, 또는 상 앞에 두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고구려 민족은 실내에서 활동하거나 생활할 때 주로 신발을 벗었다. 묘주인의 실내생활도가 그려져 있는 벽화는 비록 평상이나 좌상에서 생활하는 게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어떤 그림에서는 걸상에 앉아 있는 생활도도 있다. 걸상에 앉아있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고 앉아 있다. 이것은 실내에서 생활할 때 어떤 시기나 장소에 따라서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게 적합하다는 의미이며, 신발을 신고 다니기에 적합한 장소일 경우이다.

고구려의 상속제도

고구려의 상류계층에서 혈통계승을 보장하고 이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후계자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혈통계승은 부여와 마찬가지로 부계의 남자로만 행해졌으며, 예외로 부계가 아닌 계승자가 나타날 경우에는 계승자는 반드시 남자이고 그 윗대보다 나이가 적어야만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명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래 27명의 왕이 뒤를 이었는데, 그 중 손자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 한 번, 동생이 계승한 것이 일곱 번, 조카가 네 번, 둘째 혹은 셋째 아들이 계승한 것이 세 번, 그리고 장자가 계승한 것이 열두 번이다. 따라서 고구려에서의 상속은 같은 혈통의 남자에게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