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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석탑의 의의

탑파(塔婆)

탑이란 성인들의 墳墓(분묘)기능을 하는 기념물로 불교가 번성하였던 곳은 어디든지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 분묘들은 半球(반구)나 圓錐(원추), 피라미드(方錐形)와 같은 큰 구조물이거나 간소한 입방체로 聖者(성자)나 왕 등의 유물을 매장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부처의 사체를 화장하고 그의 사리를 모신 불탑을 스투파(Stupa)라 하였는데 半球形(반구형)에 가까운 이 분묘의 형태가 자주 사용되었다. 이는 부처이전에도 고대 아리아인들의 전통에 따라 위대한 지도자들을 위해 건립된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 사후에 그의 사리를 모신 것을 불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구분하여 경배하는 것이다.

불탑이란 부처가 涅槃(열반)하고 茶毘(다비)한 후 그의 사리를 모아 봉안한 탑이다. 탑은 사리를 모신 무덤이다. 그래서 탑은 열반을 의미하며, 탑은 곧 부처이다. 불상을 만들 수 없었던 無佛像(무불상)시대에는 부처의 열반을 탑으로 상징하였고 신자들은 위대한 성자의 무덤에 경배를 드렸
다. 그러나 석가는 열반에 들어가면서 자기가 아니라 법을 지시하였으므로 사리가 아니라 경전으로 탑의 성격이 바뀐 경우도 많다. 즉 진리 자체에 경배의 의미를 둔 것이다.

그러나 스투파의 형식이 半球形(반구형)에서 架構的(가구적) 기단을 갖는 형식으로 변하자 감실이 생기고 이곳에 불상을 안치하게 되며 탑에는 사리, 경전, 불상이 봉안되거나 장식되었다. 이들은 형이하학적 물질이지만 강한 의미와 상징성을 갖으며 불변의 신앙심을 불러일으킨다.

부처는 그의 제자인 Ananda와의 대화에서 “그들은 교차로에 王中王(왕중왕)의 무덤을 세운다.”라고 하였다.(Digha Nikaya 14, 5.) 그곳에는 화환과 향료와 색칠로 꾸며져 있고 경배를 하게 하였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고 즐거움이 오래 지속된다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부처는 불탑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불탑은 더 이상 영혼의 거처나 선사시대의 신비스러운 실체를 모시는 단순한 저장소가 아니다. 성인들의 인간성을 다음 세대에 다시 생각나게 하며, 자신과의 내적 투쟁을 하거나, 그들의 심성을 안정되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성인들의 예를 따르게 하는 기념물인 것이다. 따라서 불탑은 죽음에 대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의미로 高揚(고양)된 것이다. 그 의미는 특별한 유적이나 인물에 집중되어 남아 있지 않고 성인에 의해 실현되는 보다 높은 실체인 것이다.

부처는 “탑은 나와 나의 제자들을 위해서 건립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들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건립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즉 부처 자기를 믿지 말고 佛法(불법)과 네 자신의 의지처로 삼으라는 뜻이다. 따라서 탑은 영웅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의 상징인 것이다. 깨달음은 광대함에 있어 바다처럼 깊고 계량할 수 없기 때문에 불탑의 우주적 상징성으로 표현된다. 불탑 안에 우주적 체계와 생명력이 불어 넣어져 있는 것이다.

불탑은 부처가 열반하고서 남긴 정신세계를 건조물로서 대신한 것이다. 인간적인 부처를 떠나 法身(법신)으로 향하는, 이상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로 향하는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은 불탑을 숭배함에 있어 부처에 대한 공양과 동시에 공덕을 쌓고자 한 것이다. 또한 탑을 세움으로서 正覺(정각)을 이루고 解脫(해탈)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생들은 부처라는 위대한 성인이 설법한 진리를 깨닫고자 하였으며 극락세계로 가버린 그를 영원히 기리고 진리의 상징으로 그의 분묘를 열심히 장엄하고 많은 탑을 만방에 세워 널리 진리를 편 것이다.

탑(塔)

탑이란 말은 원래 탑파(塔婆)인데 이를 약하여 보통 탑이라고 부른다. 또한 부처님과 관련시켜 불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탑파의 어원은 고대 印度語(인도어)인 梵語(범어)(Sanskrit)의 Stupa와 巴梨語(파리어)(Pali)의 thupa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인도 말을 한자로 옮기면서 여러 가지로 썼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익숙하고 대표적인 단어가 塔婆(탑파)인 것이다. 결국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자 스투파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뜻보다는 음을 빌려 탑파라 한 것이다.즉 Stupa는 卒都婆(졸도파), 堵婆(도파), 素覩波(소도파) 등이라 쓰였고 thupa는 鍮婆(유파), 兜婆(두파), 塔婆(탑파), 塔(탑)이라 쓰였던 것이다. 스투파의 의미로 보아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方墳(방분), 圓塚(원총), 高顯處(고현처)라고 부른다.

이 Stupa라는 말은 철학서인 베다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베다는 네 종류로 되어 있는데, 이들 책 중 가장 오래된 리그베다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스투파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 한 것은 적어도 서기전 15세기경으로 석가모니 이전부터 이미 쓰여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Stupa라는 말은 ‘혼의 퇴적', '응고(凝固)‘, '응집(凝集)‘, '건립(建立)‘, '적중(積重)'과 같은 의미이고, thupa는 묘(墓)의 뜻을 갖는 영어의 tomb과 관계가 있는 말로 Asoka왕의 비문에도 'tube'(thubo)라고 되어 있다. 또한 불교대사전에서는 Buddha의 한자식 표현인 浮屠(부도), 浮圖(부도), 蒲圖(포도), 佛圖(불도) 역시 탑이라는 말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스리랑카에서는 사리봉안의 장소로서 탑을 Dagaba 또는 Dagoba라고 부르며, 미얀마에서는 영어와 같이 Pagoda라고 부른다. 이 말은 포르투갈인들이 만든 말로 알려져 있는데 포르투갈어 빠고데 Pagod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5세기 이후 신대륙 발견을 위하여 동양으로 그 세력을 화장하던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독특한 건축물인 탑을 보고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지금도 서양인들은 동양의 탑을 지칭할 때 파고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흔히 가늘고 긴 고층건물을 탑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해서 이는 Tower이지 Pagoda는 아닌 것이다.

근본8탑(根本八塔)

석가모니가 활동한 연대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B.C.565 - 486설을 시작으로 B.C. 463 - 383 등 여러 가지의 설이 있는데 100년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석가모니가 80세의 고령에 Kusinagara의 沙羅雙樹(사라쌍수) 밑에서 입멸하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화장, 즉 茶毘(다비)에 부쳐 수습된 사리를 인도의 8개국이 나누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分舍利(분사리) 혹은 舍利八分(사리팔분)이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화장소식은 이웃 부족들에게 전해져 마가다국의 왕을 비롯한 여덟 부족들이 각기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부족에게도 석가모니의 유골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를 근본으로 여덟 기의 탑을 세우니 이를 “근본팔탑” 이라고 부른다.

이들 근본8탑 이외에 3종의 탑이 다시 추가되었는데 본래 사리를 담았던 병을 가지고 香姓婆羅門(향성파라문)이 탑을 세운 것이 그 하나이고, 또 사리배분이 끝난 다음에 온 華鉢村人(화발촌인)이 다비한 장소의 火葬炭灰(화장탄회)를 모아 탑을 세운 것이 두 번째이고, 석존의 생존 시에 須達長者(수달장자)의 원을 만족시켰던 瓜髮塔(과발탑)이 세 번째이다. 따라서 초기의 불탑은 8기라 하기보다는 사리탑이 8기, 甁塔(병탑)이 1기, 灰炭塔(회탄탑)이 1기, 生存時瓜髮塔(생존시과발탑) 이 1기로, 근본8탑 이외에도 3종의 탑이 추가되었다고 하겠다.

그 후 인도전역을 최초로 통일한 Maurya왕조의 Asoka왕(阿育王, 無憂王. 기원전 250년경)의 시대가 되자 석존이나 제자들의 遺骨(유골), 유품에 대한 숭배가 크게 성행하였으며 유골이 매장된 곳에 탑이 세워졌다. 아쇼카왕 자신도 인도전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불교포교사를 각지에 보냈으며, 그와 동시에 8개소의 근본탑에 매장되어 있는 佛舍利(불사리)를 分骨(분골)하여 인도 전역에 8만 4천기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설화와 같은 것이나 중국 기록인 5세기의 <法顯傳>(법현전), 8세기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 등의 인도기행에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라고 전하는 탑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三國遺事>(삼국유사)에도 그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물론 8만 4천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信心(신심)이 깊은 아쇼카왕이 인도라는 광활한 지역에 일시에 많은 탑을 건립한 것은 결과적으로 불교전파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아소카왕은 석가모니의 유골을 전국에 분산시켜 석가모니의 위대한 생애와 그가 깨우친 진리를 탑이라는 구조물로 백성에게 보여줌으로써 불교적 통치이념을 굳건하게 세우고자 하였다. 결국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단순한 인도의 전통적인 무덤이 아니라 성스러운 구조물로, 더 나아가 석가모니의 실재로 인식되며 경외와 참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시대에는 자이나교에서도 敎祖(교조) 마하비라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사리숭배도 행하여져 많은 탑이 건립되었다. 또한 사리의 숫자가 큰 의미는 없지만 인도학자 측에서는 7기의 근본탑에서 8만 4천의 사리분할이 이루어졌다고 한 반면 중국어로 번역된 불전에는 8기의 근본탑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사리안치(舍利安置)의 장소(場所)

사리는 사람을 화장한 후 남은 유골이다. 그런 까닭에 불사리는 석가의 사리요, 승사리는 승려의 사리다. 탑은 그러한 사리를 모신 무덤이니 불사리를 모신 탑은 불탑이요, 승사리를 모신 탑은 부도라 부른다. 재가신도의 경우는 화장한 후 뼈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바다에 뿌리기도 하고 토기에 담아 산에 묻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석가가 열반에 들자 석가의 죽음을 탑으로 상징하였다. 감히 위대한 스승의 모습을 본 딴 불상을 만들 수 없었던 시기에 사람들은 스승의 상징인 묘, 즉 탑을 만들고 그 앞에서 경배하였다. 그러나 석가는 열반에 들면서 자기가 아니라 법이라 하였으므로 경전을 넣은 탑의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다면 불교국가에 그렇게 많은 탑이 건립되었는데 그 안에 모두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 있는가? 그렇게 많은 사리가 있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佛舍利(불사리), 眞身舍利(진신사리)라는 佛身(불신)이 봉안되고 결국 불사리를 대신하여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라는 法身舍利(법신사리)가 봉안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의 사리를 대신하여 석가모니를 화장한 터의 흙이나 광물질, 혹은 사리의 대체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작은 구슬 등을 가지고 탑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이를 變身舍利(변신사리)라 한다.

또한 후대에는 소형 탑이 봉안되는 경우도 있었고, 흥미롭게도 우리나라의 경우 소형 불상이 탑 안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석가모니 자체를 그대로 무덤인 탑 안에 봉안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불교가 융성해지고 많은 나라에 탑을 조성하게 되자 석가모니의 사리와 경전, 불상을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탑은 수많은 불교국가에 널리 건립된 것이다.

사리 안치의 장소는 불교가 전래된 각국의 탑에 있어서 서로 다르나 인도에서는 탑 내부까지 이어진 찰주 아래에 사리가 모셔지며, 중국에서는 목탑의 경우는 심주아래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또한 전탑의 경우는 지하에 실을 만들어 봉안한다. 이는 탑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격이 인도와 중국의 묘제와 관련되어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목탑과 석탑, 전탑의 사리봉안 위치가 다르다. 백제나 신라의 목탑지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법식을 따라 탑 밑에 사리를 안치한 예는 아직 없다. 다만 군수리사지와 금강사지의 목탑지 경우 지표면에서 이삼 미터 깊이에 심초를 둔 예가 있을 뿐이다. 그 심초 앞 면이나 앞 부분에 지진구라고 생각되는 유물이 놓여 있다.

그러나 백제 말기에 오면 제석사지(帝釋寺址)에서처럼 심초가 탑 아래에서 지표면으로 올라와서 그 가운데를 파내어 석함을 만들었다. 즉 심초로서의 기능과 사리를 납입하기 위한 석함의 두 기능을 함께 지니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는 백제에서 창안되어 신라의 황룡사 구층목탑의 심초로 이어졌다고 생각되며 고대 일본의 목탑 심초로 이어진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에도 목탑에서는 계속하여 사리 안치 장소가 심초에 마련된다.

전탑의 경우에는 찰주가 깊이 묻혀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분황사모전석탑에는 석함이 2층과 3층의 탑신 사이에 안치되었다. 또 고려시대 전탑인 송림사오층전탑은 2층 지붕돌에서 거북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전탑은 벽돌로 탑을 쌓으면서 마련된 사각의 공간 안에 그대로 사리와 공양물을 넣어도 되는데 굳이 석함을 만들어 그 내부에 사리를 넣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전탑에서는 사리가 탑신 내부에 안치된다.

석탑의 경우 백제의 석탑에서의 안치법은 아직 확인된 바 없어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들, 즉 감은사나 황복사 석탑에서는 각각 3층 탑신과 2층 옥개석 등 탑신부 안에 사리를 안치했다. 석탑의 경우엔 초층탑신에 문비(門扉)나 사천왕상, 혹은 인왕상이 조각되므로 초층에 사리가 안치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감은사 같은 통일신라의 가장 이른 석탑에서는 삼층탑신에 석탑 그 자체에 석함(혹은 사리공)이 마련되었으므로 일정한 규칙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리는 초층, 이층, 삼층 어느 곳에나 안치될 수 있으며 심지어 옥개석에 석함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던 것이 신라 하대부터 초층탑신에 사리를 안치하는 경향이 많아져서 조선시대에까지 계속되는 현상을 보인다. 또한 신라 하대부터 기단부에 불상이나 불경 등을 안치하기도 했는데, 그 예가 많지는 않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탑에서의 사리 안치 장소는 일반적으로 목탑은 심초에, 전탑과 석탑은 탑신부 안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예외가 두 가지 있다. 경상북도의 임하사(臨河寺) 것은 전탑임에도 불구하고 심초에 석함을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또 황룡사탑은 경문왕대에 다라니와 사리를 넣은 아흔아홉 개의 작은 탑을 상륜부에 넣은 예도 있다.

석탑에서 나타난 예외적인 경우는 기단부에 사리를 안치하거나 기단부와 탑신부의 2개소에 사리를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김천 갈항사지3층석탑과 울산 청송사지3층석탑의 경우에는 기단에 사리를 안치하였고 익산 왕궁리5층석탑과 부여 장하리3층석탑은 기단과 탑신부에 사리를 나누어 안치하였다. 또 월정사8각9층석탑은 5층 지붕돌과 1층 탑신에 사리를 나누어 안치하였고 중원 탑평리석탑은 6층 탑신과 기단부의 하단에 사리와 공양물들을 안치하였다.

불탑(佛塔)의 공덕경(功德經)

불가에서는 여러 가지 덕행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불상을 만드는 것이요, 다음이 불탑을 조성하는 것이다.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는 공덕과 더불어 큰 공덕으로 등을 밝히는 공덕을 들 수 있다. 흔히 불교에서는 인간의 지혜를 가리는 모든 어리석음을 캄캄한 어둠에 비유한다. 佛說施燈功德經(불설시등공덕경)에서 나타나는 등불을 밝히는 공덕은 바로 그런 상징적인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민족에게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연등, 관등의 습속이 중요한 민속의 행사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와 함께 불상을 깨끗이 하는 浴佛(욕불)의 공덕을 설한 浴佛功德經(욕불공덕경)과 함께 右佛塔功德經(우불탑공덕경)에서는 역시 큰 신앙형태로 자리 잡은 ‘관욕'과 ‘탑돌이 신앙'의 교리적인 배경을 살펴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많은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탑돌이의식은 지금까지도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과 같은 간절한 믿음의 발로이다. 우요불탑공덕경에서는 이런 믿음의 실행인 탑돌이가 사람에게 어떤 공덕을 받게 하는가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탑 주위를 바른 믿음으로 돌기만 해도 그 공덕으로 인해 더없는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대승경전인 법화경에는 불탑건립의 공덕이 큼을 말하면서 아울러 여러 형상을 건립하고 불상을 만들거나 장엄하게 꾸미고 그리면 그 공덕으로 불도를 이룬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조각이나 그림의 부처 형상에 공양 예배하면 스스로 불도를 이루고 무수한 중생을 널리 제도하리라 하였다. 이와 같을 공덕신앙은 불교 형상물의 조성에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그렇다면 불상을 조성하면 어떤 덕행이 나타날까? 이는 佛說造塔功德經(불설조탑공덕경)에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 백옥좌(白玉座) 위에 계실 때였다. 큰 비구와 큰 보살들과 천왕의 한량없는 무리들이 함께 모시고 있었다. 그 때에 대범천왕, 나라연천(那羅延天), 대자재천(大自在天) 그리고 다섯 건달바왕이 각기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께 와서 부처님에게 탑을 조성하는 법과 탑에서 생기는 공덕이 얼마나 큰가 물으려 하였다. 모인 보살 가운데 관세음보살이 그들의 뜻을 알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벗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어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이렇게 여쭈었다.

“부처님, 지금 이 하늘무리와 건달바들이 일부러 여기에 와서 부처님께 탑을 조성하는 법과 탑을 조성하므로써 생기는 공덕의 크기를 묻고자 하나이다. 바라옵건대 부처님이시여, 그들을 위하여 말씀하시어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시옵소서.”

그 때에 부처님께서 관세음보살에게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만일 현재의 이 하늘무리들이나 다가오는 세상의 일체중생들이 자기가 있는 곳에 탑이 없어서 탑을 세우려는 이는 그 형상이 높고 묘하여 삼계를 지나게 하거나 또는 지극히 적어서 암라과(菴羅果)와 같게 할 것이다. 이른 바 표찰은 위로 범천에까지 이르게 하거나, 또는 작아서 바늘 따위와 같게 할 것이며, 이른 바 윤개(輪盖)는 대천세계를 덮게 하거나 또는 지극히 작아서 대추나뭇잎과 같게 할 것이다. 그 탑 안에는 부처님의 사리나 머리털이나 치아나 수염이나 손톱이나 발톱을 간직할 것이며, 최하로는 한 부분이라도 간직할 것이다. 또 부처님의 법장(法藏)인 십이부경을 두되 가장 적게는 하나의 사구게(句揭)만을 두더라도 그 사람의 공덕은 범천과 같아서, 목숨이 마친 후에 범세에 태어나고, 거기에서 수명이 다하면 5정거천에 태어나서 저 모든 하늘과 더불어 평등하기가 다름이 없다. 선남자여, 내가 말한 이러한 일은 탑의 분량과 공덕되는 인연이니, 너희들 모든 하늘무리들은 마땅히 배워야 한다.”

그 때에 관세음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앞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리와 법장을 안치하는 것은 제가 이미 받들어 지녔지만 사구게란 뜻을 알지 못하겠사오니, 바라옵건대 저를 위하여 분별하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 때에 부처님이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
“모든 법은 인연에서 일어나니 내가 이를 말하여 인연이라 한다. 인연이 다한 고로 없어지나니 부처님은 이것을 말하노라.”

“선남자야, 이 게송의 뜻은 부처님의 법신이라 하나니, 너는 반드시 그 탑 안에 두어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인연과 생기는 법의 성품이 원래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법신이라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러한 인연의 뜻을 깨달으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그 때에 관세음보살과 저 모든 하늘의 일체대중과 건달바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여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