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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석탑의 형성배경

한국불탑(韓國佛塔)의 發生(발생)

한국의 시원형식탑은 언제부터,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졌을까. 즉 불교도입시기와 같은 시기인가, 그 재료는 무엇인가, 그 형태는 어떠하였는가, 또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실증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뚜렷이 규명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주변 상황으로 미루어 추정할 뿐이다.
한국의 불탑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고 伽藍造營(가람조영)이 개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당시의 堂塔伽藍(당탑가람)이 대부분 목조였던 관계로 오늘날 그 유구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불교가 한국에 전래된 4세기말, 중국의 六朝文化(육조문화)에 이어 隋(수). 唐(당)을 통한 문물교류가 밀접하였다는 사실과 당시의 중국탑 형식의 본류가 목조루각형탑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한국탑의 초기형식은 高層樓閣形式(고층누각형식)의 목조탑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대체로 중국에서의 초기 建塔時期(건탑시기)를 2-3세기로 보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불교전래시기인 4세기 후반은 곧 중국식 탑파양식이 그대로 전수되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시기에 속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삼국유사, 등에 그 당시의 塔像(탑상)을 설화형식으로 전할뿐이다. 이러한 전설적인 기록으로서는 遼東城育王塔(요동성육왕탑)에 대한 기록을 비롯하여 平壤(평양) 大寶山下(대보산하)의 고려 靈塔寺(영탑사)와 金官城(금관성) 婆娑石塔(파사석탑)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遼東城育王塔(요동성육왕탑)의 전래 사실은 곧 傍有土塔三重(방유토탑삼중), 上如覆釜(상여복부), 起木塔七重(기목탑칠중) 등에 의하여 3층의 土塔(토탑)과 7층의 木造塔(목조탑)이 존재하였고, 이 가운데 토탑은 위에 솥, 즉 鉢(발)을 덮은 것 같다 하여 바로 인도탑의 형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高麗(고려) 靈塔寺(영탑사)의 緣起(연기) 가운데 高僧(고승) 普德(보덕)이 太寶山(태보산) 岩穴(암혈) 밑에서 禪觀(선관)을 하니 神人(신인)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거주하라 하고 錫杖(석장)을 앞에 놓고 그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속에 八面七級(팔면칠급)의 석탑이 있다, 하므로 파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로 인하여 精舍(정사)를 세워 靈塔寺(영탑사)라 하고 그 곳에 살았다고 한 내용은 이 때의 탑이 바로 8각의 평면에 7층을 유지한 석탑으로 생각된다. 즉 이 탑은 현재 확인 할 수는 없으나 영탑사에 8각7층석탑이 건립되었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영역에서 다각다층석탑이 건립되는데 영탑사 8각7층석탑이 이들 석탑의 조형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와 같은 북쪽 고구려 계통의 기록과 함께 남쪽의 경상도 지방에서는 金官城婆娑石塔(금관성파사석탑)에 관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즉 金海(김해) 虎溪寺(호계사)의 婆娑石塔(파사석탑)은 首露王妃(수로왕비) 許皇后(허황후)가 西域(서역) 阿踰陀國(아유타국)에서 神(신)을 달래기 위하여 싣고 온 것으로서 塔方四面五層 其彫 甚奇石微赤斑色 其質良 , 非此方類也(탑방사면오층 기조 심기석미적반색 기질양 , 비차방류야)라 하였다. 이를 의지한다면 이 탑 역시 적갈색의 반문을 지닌 인도탑으로서 조각이 복잡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駕洛國(가락국)에 海路(해로)를 통한 인도의 탑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고유섭 선생은 建武24年(건무24년)이라는 연호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 자체를 황당무계하다고 하였지만 가락국기에 의하면 “나는 阿踰陀國(아유타국)의 공주이고, 姓(성)은 許(허), 이름은 黃玉(황옥), 나이는 16세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좀더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유타국은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 있던 나라이고, 金海(김해)에 수로왕릉이라고 전하는 陵(릉) 正門(정문)의 조각에 있는 魚文(어문)이 인도의 문양과 같다는 주장을 참고한다면 단순히 연대가 맞지 않다고 허술히 넘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海東高僧傳 卷一 順道傳(해동고승전 권일 순도전)에 의하면 高麗第十七解味留王(或 云小獸林王)二年壬申夏六月. 送佛像經文 .....中略....奉迎于省門.....中略...始創肖門寺(고려제십칠해미유왕(혹 운소수림왕)이년임신하육월. 송불상경문 .....중략....봉영우성문.....중략...시창초문사)라 하였으니 즉 불교전래 당초에 이미 불상의 전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곳에는 마땅히 불전의 조영을 짐작할 수 있으며, 372년의 肖門寺(초문사). 伊佛蘭寺(이불란사) 등을 비롯한 고구려의 사원들이 속속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초기사원들 중에서 사료적 가치를 지닌 탑파형식을 가진 것들은 삼국을 통하여 몇기에 불과하고 근년에 발굴조사 된 현존 유지에서도 개략적인 규모나 배치만을 추정할 수 있을 뿐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는 형편이다. 고구려의 木塔址(목탑지)로서는 해방전 1937년부터 1938년에 조사된 平壤郊外(평양교외)의 淸岩里寺址(청암리사지)와 上五里寺址(상오리사지)를 비롯하여 元五里寺址(원오리사지), 이북에서 근래에 조사되어 알려진 定陵寺址(정릉사지)의 八角基壇址(팔각기단지)를 들 수 있다.

498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 청암리사지 즉 금강사지는 八角堂址(팔각당지)를 중심으로 동.서.북에 각각 大殿址(대전지).金堂址(금당지)가 배치되었는데 이 八角堂址(팔각당지)가 바로 八角木造塔婆址(팔각목조탑파지)로 추정되고 있다. 上五里寺址(상오리사지)와 定陵寺址(정릉사지) 역시 중앙에 八角木造塔婆址(팔각목조탑파지)가 있음이 밝혀졌고 원오리사지는 교란이 심하여 확실한 배치형식을 알 수 없다.

이들 목조탑과 이전의 寺址(사지)에 있어서의 탑파의 유무에 대해서는 실증적 고찰이 불가능하나, 고구려에서 舍利傳受(사리전수)의 기사가 보이지 않고 신라 진흥왕 10년(549)에 처음으로 보이는 것을 미루어 청암리사지 이전의 탑파의 존재는 회의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울러 중국의 초기사원과 같이 불전을 중심으로 사원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짙다고 하겠다.


특히 청암리사지에 있어서 堂塔(당탑)의 비는 0.7로서 탑파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米田美代治(미전미대치)에 의하면 中國(중국)의 五星座(오성좌)를 모방하여 배치되었고 여기서 중앙의 黃道(황도)에 해당하는 곳에 탑파가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탑파가 가람의 배치에 있어 구심점과 같다고 하겠다.

백제에 있어서 초기탑파 역시 목조탑파로서 백제의 목탑지로서는 扶餘(부여) 軍守里寺址(군수리사지), 金剛寺址(금강사지), 益山(익산) 帝釋寺址(제석사지), 彌勒寺址(미륵사지) 中院(중원)의 木塔址(목탑지)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들 목조탑의 평면은 모두 방형으로 금당의 앞에 탑이 위치한 일탑식배치이다.

또한 古新羅(고신라)의 목탑지로서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興輪寺址(흥윤사지) (진흥왕5년, 544)를 비롯하여 황룡사9층탑(선덕왕 12-14년, 643-645), 天柱寺(천주사), 靈廟寺(영묘사)와 통일후에는 사천왕사지(문무왕19년, 679), 망덕사지(신문왕 4년, 684), 祇林寺址木塔址(기림사지목탑지), 普門寺(보문사) 東西木塔址(동서목탑지)등이 그 예이다. 탑의 평면과 배치기법은 고신라에 있어서는 백제와 같은 형식이고 통일신라에 들어서면 쌍탑식으로 바뀐다.

이들은 현존하는 사찰의 터 중에서 上代(상대)에 속하는 것들로 모두다 목탑지였으나 탑의 주체부분은 손괴되어 없어지고 석재인 기단부분만 남아있을 뿐이다. 물론 초기탑형식에 있어서는 목탑과 석탑이 혼재하였지 않았나 하는 추정도 가능하나 현재까지 上代(상대)의 石塔遺址(석탑유지)로 볼 수 있는 것이 발견되지 않음은 석탑의 존재를 부정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을 통하여 초기사찰에 세워진 탑들은 목조였으며 그 기존평면은 8각이나 方形(방형)이었다는 두 가지 사실은 명백하다. 특히 고구려의 목탑지로 추정된 청암리의 8각기단은 중국에서 이보다 앞선 형식을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興王寺(흥왕사)의 8각목탑과 주로 북한을 중심으로 유행한 석탑 또한 역시 6각 내지 8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삼국시대에 있어서 한반도 남쪽을 차지하고 동서로 대립하였던 백제와 신라에서의 초기목탑은 방형의 다층탑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희소한 사료만으로 한국탑파의 시원형식을 설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일 것이나 당시 중국과의 관계로 보아 한국에서도 중국과 유사한 누각식 목조탑파가 시원형식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石塔(석탑)의 出現(출현)

한국의 불탑은 결국 시원적인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모되었는데 석탑의 발생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2백년간은 목탑이 건립되었던 시기로 목탑이 갖는 불리함에 비하여 석탑이 갖는 여러 가지 장점 때문에 장기간 동안 木塔建造(목탑건조)에서 쌓여진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석탑을 발생케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석탑의 발생초기에는 목탑과 공존하는 시기가 얼마간 지속되다가 석탑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전래초기의 목탑은 三國(삼국) 모두 中國式(중국식) 高樓形(고루형) 목탑형식을 따라 누각 형식의 다층으로 4각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현재 남아 있는 당시의 유구들에 의한 것인데 고구려의 유적으로는 淸岩里寺址(청암리사지)의 八角(팔각)기단과 上五里寺址(상오리사지)의 팔각기단부가 발굴되어 목탑지로 추정되고 있으며 백제의 유구로는 부여의 軍守里寺址(군수리사지)와 익산의 帝釋寺址(제석사지)에서 四角(사각)의 목탑기단지가 발견되었다. 신라의 유구로서는 경주시 皇龍寺址(황룡사지)의 9층목탑지 등이 우리나라 초기 목탑의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한국 석탑의 시원형식을 논하는데 있어서 日政時代(일정시대)에는 彌勒寺址(미륵사지)석탑과 定林寺址(정림사지)석탑의 건립년대에 대한 견해들이 다양했으나 高裕燮(고유섭) 이후로 다소 정리되어 미륵사지석탑이 앞선 형식이라 하여 그 先後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근래 정림사지 발굴결과 이 석탑의 건립연대를 寺刹草創(사찰초창)에 준하는 6세기 전반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고 또 이 같은 내용을 추종한 논문들이 있어 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彌勒寺址石塔(미륵사지석탑)은 百濟武王代(백제무왕대)(600-64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韓國最古最大(한국최고최대)의 석탑으로서 목조가구의 세부까지도 석재로 충실하게 모방하여 백제에서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轉移(전이)와 발생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유구라 할 것이다.

정림사지석탑도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라 할 것이다.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轉移的(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한편 고신라의 석탑은 善德女王(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芬皇寺模塼石塔(분황사모전석탑)으로 그 祖形(조형)을 삼을 수 있겠으나 이 탑은 전탑이 아니라 安山岩(안산암)의 石片(석편)을 瓦塼(와전)과 같이 모방하여 쌓은 석탑으로 그 수법이 중국의 陝西省 西安府 慈恩寺 大雁塔(섬서성 서안부 자은사 대안탑)과 동일한 점에서 전탑형식에 속하는 것으로 신라탑의 초기양식을 전탑에 국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塼材(전재)의 비생산성과 비경제성은 결국 신라석탑의 독특한 양식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바로 신라 일반형 석탑 즉 전형석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분황사모전석탑과 관련하여 시기적으로 다음의 것으로는 慶北(경북) 義城塔里五層塔(의성탑리오층탑)을 들 수 있는데 이 석탑은 석재로서 전탑양식을 모방한 것이나 분황사석탑과는 달리 목조탑을 나타내는 새로운 착상과 古手法(고수법)의 간략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상기한 백제시대의 두 탑과 같이 기단부의 隅柱(우주), 撑柱(탱주)나 塔身(탑신)의 우주에 上狹下廣(상협하광)의 민흘림이 나타나고 있어 이 석탑도 백제시대의 두 석탑과 같이 목조탑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생긴 석탑발생의 초기적 유구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단층기단 위에 선 5층 석탑으로 총 높이 약 30.5척이며 초층 탑신에 나타나는 목조형식과 옥개부분에 나타나는 전탑의 계단형 쌓기는 전탑모양으로 되어 木塼混合(목전혼합)형식을 하고 있다. 이 탑을 흔히 模塼塔(모전탑)이라고 하나 민흘림 角柱(각주), 접시 받침형 柱頭(주두), 昌枋石(창방석)과 平枋石(평방석), 龕室(감실)등으로 보아 오히려 模木塔(모목탑)에 가까운 탑이며 미륵사지석탑이나 정림사지석탑과 같은 형식의 탑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초기석탑에서 살펴보았듯이 백제의 석탑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고신라는 화강암과 안산암을 혼용하여 전탑계 양식을 전형적 양식으로 삼았으며 목탑적인 요소도 다분히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양국의 초기석탑은 그 기본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석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한편 이들이 모두 7세기 초엽에 이루어진 사실은 두 나라 석탑 발생 시기를 거의 같이 하고 있다 하겠으나 서로 다른 조형 의장적 양식계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즉 백제의 석탑은 기존의 목탑에서, 고신라의 모전석탑은 수. 당의 전탑계열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겠으나 목탑적인 요소도 다분히 많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결국 이들 두 나라 시원 양식은 그 후 얼마 안 되어 삼국통일이라는 정치적인 새 시대를 맞아 하나로 합쳐지면서 또 다른 양식, 즉 전형적인 신라탑 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결국 선사시대의 지석묘를 비롯하여 고대분묘의 石室(석실)을 만들 때 화강암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던 전통적인 방식이 또한 불교에서의 예배대상인 탑파와 불상의 조성을 용이하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재료의 불합리한 점 때문에 목조건축을 석조건축으로 번안한 한국 석탑이 발생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