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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의 변천

석탑의 종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에 따르면 西域(서역)으로부터 인도에 이르는 여러 나라에 泥塔(이탑), 塼塔(전탑), 石塔(석탑), 木塔(목탑), 七寶塔(칠보탑), 金銅塔(금동탑)이 있으며 경전에는 이밖에도 奔塔(분탑) · 牛奔塔(우분탑), 沙塔(사탑)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가 전파된 지역에서 탑파의 재료에 대한 제한은 없고, 어떠한 재료에 의하든지 福德(복덕)은 같으며 더욱이 목조탑의 비 영구성과 塼材(전재)의 비생산적인 점을 고려할 때 가장 영구적이며 보다 능률적인 석재로 造塔(조탑)함이 당연하였을 것이다.

衫山信三(삼산신삼)는 『朝鮮의 石塔』(조선의 석탑)이란 그의 저술에서 한국탑을 구분함에 있어 「多層塔의 形態」(다층탑의 형태)라 하여 一般型(일반형), 一般變形型(일반변형형), 八角型(팔각형), 圓型(원형), 有塔身座型(유탑신좌형), 模塼型(모전형), 四獅子型(사사자형), 粘板岩塔(점판암탑), 磨崖石塔(마애석탑), 特殊型(특수형)으로 분류하였다.

한국탑파의 형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다. 우선 1).재료에 의한 분류, 2).형태에 의한 분류, 3).발전양식에 의한 분류, 4). 시대구분에 의한 분류, 5)형식과 지역성에 의한 분류, 6).평면형태에 의한 분류, 7)기단형식에 의한 분류, 8)층수에 의한 분류 등이 가능하다.


1) 먼저 우리나라의 탑을 재료면에서 분류한다면 土塔(토탑). 木塔(목탑). 靑銅塔(청동탑). 金銅塔(금동탑). 石塔(석탑). 靑石塔(청석탑). 塼塔(전탑). 模塼石塔(모전석탑). 臘石製塔(납석제탑) 등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토탑이나 금속제의 탑이라 할 만한 것은 주로 사리장엄을 위한 공예적인 소탑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을 한국탑의 범주에서 제외시킨다면 한국탑은 목탑. 석탑. 전탑의 3종류로 국한시킬 수 있겠다. 석탑은 같은 석재라 할지라도 그 종류가 달라서 그 중에 다수를 차지한 것 이 양질의 화강석탑이며 간혹 청석과 안산암 또는 대리석을 사용한 탑도 있다.


2) 형태에 의하여 분류하면 크게는 典型塔(전형탑)(일반형탑)과 異型塔(이형탑)혹은 特殊型塔(특수형탑)으로 나누고(藤島亥治郞(등도해치랑)은 一般型(일반형), 變型(변형), 特殊型(특수형)으로 나눔) 작게는 方形(방형)의 일반형탑을 제외한 이형탑을 다시 세분할 수 있다. 즉 신라탑의 이형으로는 ㅇ.전연 다른 형태의 탑, ㅇ.기단부를 다른 형식으로 나타내는 탑, ㅇ.전형석탑에 장식이 되는 탑 등이다. 이는 다시 圓形塔(원형탑). 多角塔(다각탑). 模塼塔(모전탑). 靑石塔(청석탑). 寶篋印石塔(보협인석탑). 四獅子石塔(사사자석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3) 발전양식에 의하여 분류하면 始原樣式(시원양식), 典型樣式(전형양식) · 成熟期(성숙기), 過渡樣式(과도양식), 折衷樣式(절충양식), 混合樣式(혼합양식), 繼承樣式(계승양식) 등으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混合(혼합)과 折衷(절충)은 上代(상대)인 백제와 신라의 혼합, 절충을 의미하며 계승양식은 고려시대에 삼국의 故土(고토)에서 새로이, 부분적으로 옛날의 양식이 되살아난다거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양식을 의미한다.


4) 시대구분에 의한 분류에 의하면 고구려시대탑, 백제시대탑, 고신라시대탑, 통일신라시대탑, 고려시대탑, 조선시대탑 등으로 구분되며 이는 다시 세분하여 上代(상대)와 下代(하대), 혹은 前期(전기) · 初期(초기), 中期(중기), 後期(후기) · 末期(말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5) 식과 지역성에 따라 분류하면 시대와는 상관없이 三國時代(삼국시대)의 初期塔(초기탑)을 준거로 하여 그 모습과 장소에 따라 고구려형식탑, 백제형식탑, 신라형식탑, 고려형식탑으로 구분된다. 이를 衫山信三(삼산신삼)은 百濟式(백제식), 新羅式(신라식), 高麗式(고려식)이라 하였으며, 필자는 百濟系石塔(백제계석탑), 新羅系石塔(신라계석탑)이라 하였다. 이는 다시 후대인 고려시대에 고구려의 옛땅 開京(개경)지역, 백제의 옛땅 충청.전라지역, 신라의 옛땅 경상지역의 탑으로 구분된다.


6) 평면형식에 의하여 분류하면 正方形塔(정방형탑), 六角形塔(육각형탑), 八角形塔(팔각형탑), 圓形塔(원형탑), 亞字形塔(아자형탑), 八角形基壇(팔각형기단) 위 正方形塔(정방형탑), 方形基壇(방형기단) 위 六角形塔(육각형탑), 亞字形基壇(아자형기단) 위 方形塔(방형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7) 기단형식에 따라 구분하여 보면 8각형기단탑, 방형기단탑, 6각형기단탑, 원형기단탑, 亞字形(아자형)기단탑, 자연암반기단탑, 丸彫彫飾基壇塔(환조조식기단탑) 등을 들 수 있다.


8) 한국탑의 층수를 보면 3층과 5층의 경우가 가장 많고 7층과 9층도 많으며 13층의 경우도 있다. 한국탑의 층수는 모두다 홀수층이다. 이는 陽數(양수)로서의 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물론 敬天寺址石塔(경천사지석탑)에서처럼 현재 10층의 경우도 있으나 이는 석탑의 조형상 짝수의 층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십자형평면에서 방형평면으로의 접속부에 탑신이 생략된 것이라 생각되어 11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역사적 변모과정
삼국시대의 불탑

① 고구려

고구려의 탑으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영탑사(靈塔寺)에 8각7층석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평양 청암리 금강사지(金剛寺址), 대동군 상오리사지 등에는 8각의 목탑지가 남아 있는 점으로 볼 때 주로 평면 8각의 탑들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양식은 이후 이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에 계승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평양 영명사(永明寺) 8각5층석탑, 대동 광법사(廣法寺) 8각5층석탑, 대동 율리사지 8각5층석탑, 평창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 김제 금산사(金山寺) 6각다층석탑(이상 고려)이 있으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8각13층석탑, 남양주 수종사(水鍾寺) 8각5층석탑, 여주 신륵사(神勒寺) 다층석탑(이상 조선)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② 백제

백제시대에 건조된 석탑으로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은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미륵사지석탑과 충청남도 부여읍 정림사지석탑 2기뿐이다. 우리나라 초기 석탑인 2기의 각부를 살펴봄으로써 석탑의 발생과정을 알 수 있는데 우선 이 양 탑에서 건조 재료가 화강암이고 그 가구수법이 매우 견고함 점에 주목하게 된다.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은 현재 사지 서쪽의 원위치에 남아 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석탑의 시원을 여기에 두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을 하나의 석조 건물로 보는 동시에 그 양식이 목탑과 흡사함을 누구나 곧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탑은 이전에 선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표현하였기 때문에 석탑 발생계열에 있어서 마땅히 그 선두에 두게 되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석탑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또 하나의 탑이 충청남도 부여읍의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이다. 이 석탑은 현재 부여읍내 동남리의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높이 8.3m이며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낮은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 탑신을 놓고 정상에 상륜부를 형성한 것이다.

가. 미륵사지(彌勒寺址) 서탑(西塔)

소 재 지 : 全北 益山市 金馬面 箕陽里(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지정번호 : 국보 제11호
현 상 : 6층 옥개까지 遺存(유존)함. 現高(현고) 14.24m (45.078 高麗尺(고려척))
건립연대 : 미륵사의 창건년대와 동일한 시기로 보고 백제 武王代인 600부터 641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
정되고 있다. 물론 본 탑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백제 무왕대(600~641)설과 통일신라초기설 및 백제 東城王代(동성왕대)(478~501년)說(설) 등이 있으나 현재까지는 백제 무왕대설이 정설화 되고 있다. 즉 미륵사의 창건연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설화에 충실하고 미륵신앙에 뒷받침이 되었으며 또한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및 六朝觀世音應驗記(육조관세음응험기)에도 무왕대에 건립되었다는 내용이 있어 이를 정설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미륵사가 무왕대에 건립된 것이라면 “殿塔廊各三所創之”(전탑랑각삼소창지)라는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보아 본 석탑 역시 미륵사의 창건과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또한 “眞平王遣百工助之今存其寺”(진평왕견백공조지금존기사)라는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보아 무왕과 진평왕의 두 사람이 동시에 왕위에 올라있던 기간이 600~631년이기 때문에 진평왕이 百工(백공)을 보내어 미륵사 창건공사를 도운 것이 공사의 시작부터인지 그 도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600년에서부터 진평왕이 죽은 해인 631년까지의 일이라 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정림사지 발굴로 석탑주변의 판축기법이 정림사 창건당시(6세기 중반)의 것으로 보여 본 탑과 정림사지 5층석탑 중에서 어느 것이 과연 먼저 건립되었느냐 하는 논의가 제기되었으나 고유섭의 의견인 미륵사지서탑 선행설이 아직까지는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 미륵사지 서탑의 현황

우리나라 最古最大의 석탑이다. 원래 미륵사지에는 석조의 동서 쌍탑과 목탑이 있었는데 동탑과 중앙의 목탑은 탑지만 남아있다. 현재 서탑은 동북면 6층까지만 남아있고 다른 부분은 모두 허물어져 1915년 일본인들이 시멘트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교적 잘 보존된 동쪽면 중에서도 1층 부분만 완전한 모양으로 남아 있으며 2층 이상 6층까지는 남서쪽 모서리가 모두 깨져버려서 동북쪽 추녀 부분만이 겨우 남아 있다. 또한 깨진 부분과 틈서리가 수리 당시 콘크리트나 시멘트 몰탈로 채워져서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탑은 남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고 특히 6층은 콘크리트 위에 얹어져 있는데 그 기울기가 심하다.

이 탑의 최고부까지의 높이는 현 지반에서부터 14.24m-高麗尺(고려척)으로는 45.078-이고 기단 상면에서 지금 남아있는 6층 최고부까지의 높이는 12.945m(42.7185高麗尺(고력척))이다. 각층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으로 되어 있고 낮은 이중기단 위에 얹어져 있다. 1층의 경우는 목조건축의 기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즉 기단, 계단, 초석, 우주의 민흘림, 창방, 평방, 내부공간 등이 있어 마치 목조건축을 연상케 한다. 2층 이상은 탑신받침과 탑신, 옥개받침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의 구성은 각기 따로 된 別石材(별석재)의 우주와 탱주, 면석으로 조립되어 있다.

이 탑은 석탑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서 목탑을 연상하게 되고 축조기법은 목조탑형식을 충실히 모사하고 있다. 탑 1층의 중앙부에는 십자형 통로가 있고 그 중앙에는 擦柱(찰주)(心柱(심주))가 놓이며, 기둥에는 민흘림이 있으며 귀솟음 기법을 모든 층에서 보이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기둥에 민흘림이 있어서 자연히 안으로 쏠리는 오금이 생겼다고 하겠다. 또한 옥개석에서 완만한 반전을 보이고 우동마루가 뚜렷하다. 이는 목조의 가구기법이 응용된 결과라고 하겠다.

특히 근래에 이 탑의 층수와 동쪽탑과 같은가 다른가하는 점에 대하여 논란이 많으나 문화재관리국의 발굴과 동탑복원설계를 위한 자료에 의하면 층수는 9층이고 서탑과 동탑의 모습은 탑신부이상의 구조는 서로 약간 다르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이 탑이 9층이라는 논리의 근거는 근래에 발견된 露盤石(노반석)과 7, 8, 9층의 것으로 보이는 옥개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7층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적은 노반석과 현존하는 6층 옥개석의 크기보다 작은 옥개석이 발견된 점에서 비롯된다.

또한 최근에 동탑의 면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발견되었는데 면석과 기둥돌이 별개의 석재가 아니라 단일석에 기둥의 형상을 模刻(모각)한 형태에서 서탑의 축조형식과는 서로 다른 모습이다. 물론 이는 重修時(중수시)에 後補(후보)한 석재일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겠다.

㉡ 미륵사지 석탑의 축조 형식

ㄱ. 기단부

기단은 현재 지하에 埋沒(매몰)된 상태로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동탑지의 발굴에 의하여 동탑과 같은 모습으로 된 전형적인 이중기단보다 약화된 초기적이중기단 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상하의 2층으로 구성된 기단형식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의 구별이 없는 키가 큰 장대석(길이 5尺, 높이 0.5尺)을 제일 밑에 깔고 그 위에 상층기단의 지대석과의 사이에 넓은 판석(혹은 鋪石(포석)이라고도 함)을 깔아 하층기단의 갑석으로 하였다. 이 갑석은 지대석보다 4~5cm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이 갑석의 안쪽 단부에는 다시 상층기단의 지대석이 이어져 있다.

상층기단은 지대석, 우주, 면석 및 갑석이 갖추어져 있는 모습을 충분히 짐작케하나 상대갑석은 하나도 남아있는 것이 없고 바로 흙이 채워진 상태로 되어 있어서 1층 탑신부의 초석이 그 밑뿌리까지도 노출되어 있다. 또한 기단 각면의 중앙에 석계단을 설치하였는데 이 기단의 형식은 기단의 동.서 측면의 돌계단만을 제외하면 東院(동원) 金堂(금당)이나 中.西院(중.서원)의 金堂基壇(금당기단)과 같은 형식이며 따라서 이 시기 목조탑의 기단과 꼭 같은 형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단 상면에는 柱座(주좌)없는 方臺形(방대형)의 초석을 배치하고 초석 밑에도 일반적인 積心石(적심석)이 아닌 방대형의 초석과 비슷한 巨石(거석)을 받쳐서 기초를 굳히고 있다. 이것은 상부구조가 목조가 아닌 석조건물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적심석의 일종일 것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 부근에는 古拙(고졸)한 石人像(석인상)으로 보이는 조각이 놓여 있으나 동탑지에서 확인된 기단의 형식으로 보아 이것이 당초부터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석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며 후대에 어떤 이유로 그 곳에 놓인 것이라 생각된다.

기단내부의 구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탑의 기단에 의하면 우선 기단의 흙은 거의 황갈색점토질로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석괴가 무질서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백제시대의 건물지 기단부의 築土(축토)에서 판축수법이 발견된 사실이 있으나 동탑의 기단에서는 그와 같은 수법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미륵사지 서탑의 기단구조의 특징은 2중 기단이며 4면에 석조계단에 있는 점과 2중 초석 그리고 동탑에서 확인된 바로는 지대석과 갑석에 부연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백제시대의 건물기단에 부연이 없는 것은 이미 알려진 것이지만 동탑지에서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하층기단이 설치된 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鋪石(포석)과 그 밑의 지대석만으로 하층기단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견해도 있으나 포석만을 깔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그 밑에 잘 다듬어지고 규격화된 받침돌로 그것도 일정한 간격의 안쪽에 고였을 리가 없다.



ㄴ. 탑신부

탑신부는 동쪽면만 1층의 옥개까지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고, 2층에서 5층 옥개까지는 南端部(남단부)가 缺失(결실)된 상태이며, 6층은 탑신과 옥개의 동북쪽 모서리부분만 남아있다. 북쪽면은 1층부터 6층 옥개까지 그 동쪽의 절반부분이 남았고, 남쪽면은 1층 탑신의 동쪽 절반부분과 옥개 동쪽 모서리부분까지 남았으며, 서쪽면은 6층 옥개의 파손된 부분만을 보이고, 그 밖은 보강을 위한 축대와 콘크리트 피복면이 보인다.

동쪽면 1층의 3칸 중에서 가운데 칸에는 통로가 설치되었고 양쪽 夾間(협간)은 판벽으로 처리되었다. 기둥은 밑이 굵고 위가 가는 민흘림의 바른 네모꼴인데 흘림이 뚜렷하다.
초석은 네모꼴인데 위가 약간 좁은 6면체이고 윗면은 기둥자리 없이 평탄하며 갑석과 맞닿는 부분으로 추정되는 초석 옆면은 혹떼기 정도를 하였다.

기둥 밑둥에는 기둥 사이에 초석에 약간 엇물려서 下枋石(하방석)이 지나가고 있으며 이 하방석 밑에는 고막이 돌이 놓여있다. 그런데 이 부재들은 목조건축에서처럼 벽면과 맞추어지지 않고 하방석은 면석보다 약간 튀어나오고 기둥보다는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게 설치되어 있고, 고막이 돌의 경우는 기둥보다는 약간 나오지만 초석과는 거의 일직선으로 설치하였다.

탑신 중앙칸에는 좌우에 좁은 벽석을 끼우고 그 끝에 문설주 같은 석재를 세웠으며 하방석 상면에는 문짝의 회전축돌기를 끼우는 구멍이 있으나 그 깊이가 너무 얕고 상하의 위치가 서로 일치하지 않아서 위 아래돌이 문비석을 끼우기 위하여 같이 사용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이 문 시설은 초층 탑신 4면의 중앙 칸에 모두 설치되었고, 그 내부에 십자로 된 통로 공간이 형성되었다. 그 중앙 교차부에는 평면이 장방형인 목탑의 心柱(심주)를 나타내는 듯한 방형대석을 여러 개 중첩시켜 만든 굵은 돌기둥이 있다.

또한 석탑의 동면 양협간의 기둥사이에 끼워진 벽석(面石(면석)) 중앙에는 창방석과 하인방석 사이에 샛기둥이 있으나 남면과 북면에는 이것을 세웠던 흔적조차 없고, 창방석의 하면이나 하방석의 상면에도 샛기둥(間柱(간주))이 닿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둥사이의 돌인 벽석은 후대에 보충한 석재임이 분명하다.

기둥머리 위에는 확실히 목조의 경우 평방석이라고 볼 수 있는 돌이 올려져 있는데, 긴 네모꼴 부재를 눕힌 모양이며 기둥보다 앞으로 튀어나왔다. 한편 기둥머리 사이에는 평방석 아래에 창방석을 끼워놓고 있는데 이것은 하방석과 마찬가지로 벽석(면석)보다는 앞으로 내밀었다. 兩夾間(양협간)의 기둥 사이에는 2매로 된 벽석이 끼워져 있으며 동면에는 샛기둥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평방석 위에는 包壁(포벽) 이 놓여져 있는데 이것은 평방석은 물론이고 기둥의 바깥선 보다도 오히려 안으로 들어가 있다. 여기에서 포벽은 탑신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긴 네모를 뉘어놓은 모양이며 평방석, 옥개받침과 더불어 수평적인 의장을 보인다.

포벽 위에는 3단의 옥개받침이 놓여져 있는데 그 중 상부 2단이 한 부재이고 그 아래 1단이 한 부재로 되어 있다. 이 段(단)들은 높이보다 내밀기가 길어서 옥개석을 깊숙이 받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또한 이 단의 아래 면은 수평이 아니라 약간 위로 치켜세웠는데 이는 추녀를 약간 反轉(반전)시킨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옥개받침의 단수는 1층부터 4층까지는 3단 5, 6층은 4단으로 위로 갈수록 단수가 증가한다.

옥개석은 양쪽 추녀의 끝이 약간 들린 듯하게 되어 있다. 양쪽 추녀돌은 그 크기에 있어서 비슷하며 양 추녀돌 사이의 처마돌들은 그 크기가 일정치 않은 6매의 돌로 구성되었다. 또한 추녀돌에는 30cm 내외의 내림마루(隅棟(우동))를 만들었고 추녀 끝에는 풍경을 달 구멍이 뚫려있다. 옥개석 위의 탑신괴임은 2, 3층이 1단 4, 5, 6층이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 포벽보다도 안으로 들어가서 놓여있다.

이 탑의 축조방법은 가구방식으로 보아 목탑의 번안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별로 異論(이론)이 없다. 옥개석의 반전, 모서리기둥의 귀솟음, 탑신에 있어서 오금법 등에서 목조가구적인 경쾌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층에 있어서 낮은 기단, 계단, 초석, 고막이돌, 하방석, 벽석(면석), 문설주, 문비, 기둥의 민흘림, 창방, 평방, 포벽 등에서 더욱 목조건축을 모방하였음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목조가구기법으로 거대한 석조건축을 유지하다 보니 대부분의 수평부재들이 상부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파괴된 상태이다. 물론 7세기 초반에 이처럼 엄청난 석탑조영이 이루어진 것은 대단한 역사였음이 분명하나 석탑으로 완성된 양식과 완벽한 가구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목조탑에서 석조탑으로 전이해가는 과도적인 상황의 탑이라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석탑의 기단은 낮고 1층의 軸部(축부) 즉 탑신이 거대하나 상대적으로 중량이 많은 석재들을 지탱하기에는 1층 옥개석 윗부분의 상부구조가 허약하다. 1층의 십자형 통로에서 보여주는 심주형 방형대석과 벽면의 짜임은 외부구조가 다하지 못한 구조적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생각되나 2층 탑신에서부터의 내부구조가 허약하다. 2층의 벽선 즉 우주나 탱주 및 면석이 지지되는 그 아래 부분의 수직하중을 목조에서처럼 기둥이 처리하여야 할 터인데 이 탑에서는 아래층의 옥개석이 지탱하기에는 구조적으로 무리가 생긴다.

또한 다수의 석재로 목조가구수법을 따르는 결구를 하였기 때문에 별석 상호간에 이완되고, 부재의 맞춤에 있어서도 장부맞춤이나 쪽매 등의 방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다소 허약하여 붕괴되기 쉬운 결함을 갖고 있다.

한편 십자형 통로에서 나타나는 구조기법은 대단히 우수한 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중앙의 심주는 1매의 석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몇 개의 돌을 쌓아올려 만들었으며 맞댄이음면의 정교한 정도는 대단하다. 이처럼 석재를 크게 쓰지 않고 작게 나누어 쓴 것은 이 탑에서 보이는 전반적인 수법으로서 돌을 2개 이상으로 나누고도 한 부재처럼 맞출 수 있는 가공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뜻한다. 맞추는 면이 서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약간 거칠면서도 고르고 가지런한 돌을 얹어서 끄덕거리거나 비틀어지지 않고 똑바로 올라가게 하는 가공기술이 뛰어난 것이다.

또한 통로의 천정은 양 벽면에서 2단 내쌓기를 한 위에 판석을 얹어서 마감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이 방법은 고구려 고분에서 널리 이용되었던 것으로 이 탑에서는 옥개받침의 수법과도 일치한다. 이 옥개받침은 역계단식으로 이러한 방법은 분황사탑처럼 전탑의 적출식기법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설과 고구려의 고분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양 설이 있어왔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의 옥개받침형식이 넓은 의미로 보아서는 단층적출형식의 범주에 있다고 하나 전탑이나 신라석탑의 수법과는 서로 다르다. 즉 적출의 폭이 다르고 옥개받침수의 변화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결국 이 탑의 옥개받침은 오히려 목탑의 긴처마의 하중을 보다 넓은 부분으로 안정되게 받치기 위한 Corbel식 기법이거나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하는 과정에서 공포를 간략화 시킨 의장적 기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石塔)

소 재 지 : 忠南 夫餘邑 東南里(충남 부여읍 동남리)
지정번호 : 국보 9호
현 상 : 5층까지 完存(완존)하고 5층 옥개석 위에 노반과 복발로 여겨지는 半球形(반구형) 석재 가 있음. 現高(현고) 약 9m,(30.79尺(척))
건립연대 : 이 탑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공훈을 기념한 刻書(각서)가 1층 탑신에 있어 대
당평제탑 혹은 약하여 평제탑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이 절터에서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文字銘(문자명) 平瓦(평와)가 발견됨으로써 정림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탑 역시 정림사지석탑이라 하였다.

이제까지 정림사는 6세기 중반에 초창된 사찰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으나 현존하는 석탑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충남대의 정림사지발굴보고서에 의하면 현재의 석탑은 사찰창건당시의 유구임이 틀림없다고 하였으나 金正基(김정기)선생은 오히려 사찰 창건시에 건립된 기존의 목조탑의 위치에 새로이 건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였다.

결국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로 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년~660년의 어떤 시기이며 또한 이 기간동안에 석탑이,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된 것이라고 밖에 아직까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석탑에서 진일보하여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 정림사지 석탑의 현황

낮은 2중 기단 위에 4면 각 1칸의 탑신을 구성하고 4隅柱(우주)가 있다. 각면 양 우주 사이에는 1층은 2매의 벽판석을 세워 8매석으로 구성하였으며 2층 이상은 면석과 우주를 단일석으로 하여 4매석 혹은 1매석으로 구성하였다. 옥개받침은 각형과 사릉형(모죽임형)의 2단의 받침인데 4매 혹은 8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며 추녀부분에서 약간의 경쾌한 반전이 있으며 뚜렷한 隅棟(우동)이 있다.

옥개석 맨 윗부분에는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석재가 보이는데 4각 2단의 노반 위에 반원형의 복발이 얹혀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재에는 찰주공이 뚫어져 옥개석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탑은 미륵사지석탑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양 탑 모두 목탑을 모방한 것으로 전자가 목조탑을 직역한 것이라면 후자는 석재의 성질을 살려 석탑의 전형적인 體貌(체모)를 갖추어 보려고 한 창안작이라 할 것이다.

ㄱ. 기단부

이 석탑의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하층기단을 극도로 약화시킨 초기적 이중기단이다. 이 탑은 건립된 이후 원상태로 현존하고 있으며 아직 해체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기단부에 대한, 특히 내부구조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현재까지 알 수 있는 바로는 지표상에 8매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저석을 놓은 다음 양 우주와 1탱주,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올려놓았다. 중석 위의 갑석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治石(치석)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다.

충남대의 정림사지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석탑의 기단부 밑의 구성에 대하여 발표된 바 있다. 이를 기초 판축토와 외곽석열 그리고 석탑 지대석하의 기석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초판축토(基礎版築土)는 그 토층이 상, 중, 하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기단 지대석 바로 밑의 최상층은 알이 굵은 황색사질토를 사용하였으며 그 두께는 약 30cm이다. 이 층은 외곽석열 밖으로 60cm의 범위까지를 점유하였다. 두 번째의 판축토층은 적갈색 점질토와 황갈색점질토가 섞여있다. 판축의 두께는 일정치 않으나 2~3, 5~6cm 혹은 그 이상이며, 견고하게 구축되었기 때문에 곡괭이질을 할 정도이다. 세 번째의 판축토층은 외곽석열 밖으로 약 3m 내외까지 미치고 있으며 상부의 2개 층보다 탄탄하지 않으나 더 두꺼운 판축에 준한 축토법을 사용한 것 같다.

외곽석열(外廓石列)은 석탑의 기단부 지대석 저변에서 평균 67cm 외측으로 4면에 길이 90cm~130cm 두께 35cm, 높이 50cm 내외의 판석을 1면 4개씩 세워 박아서 그 윗부분만이 지대석 저면에 수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외곽석열은 황색 판축토와 밀착되어 그 상부에 배열된 사실이 밝혀졌으며 석탑건립 당초부터 있었던 시설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외곽석열의 기능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우선 석탑의 하중을 견디는 지대석이 물러날 것을 방지하기 위한 예비조치가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으며 또한 기단과 연결된 석재의 일부라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탑구라 부르고 있으나 외곽석을 정교하게 다듬고 깊이 박아 놓아 분명 어떠한 기능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같은 견해들 중에서 필자의 견해로는 하층기단의 일부, 즉 지대석 하부에서 외곽석열 상부로 포석을 깔아 하대갑석으로 삼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그 이유는 이 외곽석의 상부와 외면이 노출된 부분만큼 15cm 정도 곱게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지대석 하부에 깔려있는 石塊(석괴)들이 지대석과 수직으로 나란히 다듬어져 일종의 받침턱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외곽석 상면과 지대석의 하면과의 층위가 수평이 아니라 5~7cm의 차이가 있어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기단형식과 같은 모습이 아닌가 한다. 특히 정림사 금당지의 기단형식이 이중 기단이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건립된 유구들이라면 그 형태 또한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지대석하(地臺石下)의 석괴(石塊) - 석탑 지대석의 밑에는 基石(기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석괴들이 놓여 있다. 서면에서 노출된 바로는 5개의 기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석괴들의 크기는 길이가 100, 82, 40, 85, 65cm이며 높이는 모두가 30cm 정도이다. 이들은 지대석에서 수직으로 5~7cm 정도 잘렸으나 그 밑에는 전면으로 약 15cm 가량 나오게 하여 배치하였으며 그 하부는 최상층의 판축토층과 밀착되었다. 이 기석들은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나 가공이 덜된 석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지대석과의 사이에 간격이 벌어져 있었으며 이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얇은 자연판석을 그 사이에 끼워서 보충하였다.

ㄴ. 탑신부

1층 탑신은 12매의 별석재로 구성되었는데 민흘림이 뚜렷한 4우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2장의 벽판석으로 탑신의 면석을 이루고 있다. 기단의 갑석위에는 거의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홈이 있는데 탑신부재들이 횡방향으로 이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1층 탑신은 2층 이상의 탑신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주의 민흘림이 뚜렷하여 전체적으로 보아 목조건축에서 보이는 오금법이 미륵사지석탑에서와 같이 시도된 것 같다.

옥개받침은 4매의 각형판석을 아래에, 그 위에 다시 8매의 각을 죽인 사릉형(모죽임형)판석을 얹은 2단으로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창방, 평방, 포벽 등의 석재가 없고 목조건축의 공포부분을 요령있게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옥개석은 8매의 석재로 구성 조립되었는데 평평하고 넓어 긴 처마를 연상케 하며, 산뜻한 추녀의 반전을 표현하고 있어 목조건축의 처마선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각 면이 만나는 부분에는 목조건축의 추녀마루와 같은 우동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끝에는 風鐸(풍탁)용 구멍이 뚫려있다.

2층 이상의 구성형식도 1층과 비슷하나 1층에는 없는 탑신괴임이 있고, 이층 이상의 탑신고가 급격히 감소하여 안정감을 보인다. 상륜부는 없어져 불명하나 노반과 복발이 탑의 정상에 현재도 있고, 5층 옥개석까지 찰주공이 뚫려 있다. 수년 전에 이 寺址(사지)에서 상륜부재가 출토되었으니, 곧 有孔圓形(유공원형) 蓮花紋石片(연화문석편)(원형 구멍이 있는 연꽃무늬 돌조각)으로서 이는 상륜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바, 이것으로 이 탑의 상륜부는 석제상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재는 탑신의 경우 2층 4매, 3층 4매, 4층 2매, 5층 1매이고, 옥개석의 경우 2층 8매, 3층 8매, 4층 8매, 5층 4매로 혹은 田字形(전자형)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성석재의 수는 149개이다.

특히 4층 탑신 남측면에는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舍利孔(사리공)이 있는데 목조탑파에서 그 사리장치를 탑중심초석에 비치하였던 것을 군수리사지의 탑심초석에서 발견된 것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어 서로 비교가 되는 수법이라 하겠다. 다만 아직까지 이 탑을 해체한 적이 없기 때문에 탑 내부에 사리장치가 있는지 여부는 판단키 어려우나 내부에 사리를 장치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4층의 홈은 감실형으로 추정된다.

③ 신라

백제에서 건조된 석탑 2기는 똑같이 석재를 사용하여 목탑을 모방하였으므로 목탑계 석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의 석탑발생의 사정은 백제와는 다르다.
신라의 석탑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벽돌탑, 즉 전탑을 모방하는데서 출발하였다고 보겠다. 그러나 그 받침 형식 등이 전탑의 양식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은 아니고 전체에 하나의 양식 발생사적인 계열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옛 것은 경주의 분황사석탑이다. 이 탑은 일견하여 전탑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이 탑을 구성하고 있는 그 재료는 전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석탑은 선덕여왕 3년(634년)에 낙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의 무왕대와 같은 때인데 신라 석탑의 출발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은 현재 전체높이가 9.3m로서 안산암의 소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치석하여 축조한 전조탑파의 양식을 모방한 석탑이다.



자연석으로 고르게 쌓은 넓직한 단층기단으로서 전탑 기단의 통식을 보이는 바 그 중앙에 탑신부를 받기 위하여 화강암 장대석을 결구한 1단의 높직한 괴임대를 마련하였다. 탑신부는 길이 30~45m, 두께 4.5~9cm의 회흑색 안산암을 절단하여 각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축조하였으므로 외형상으로는 전탑과 같다. 그러나 벽돌모양의 돌을 규격을 맞추어 정연하게 다듬어 쌓아기 때문에 模塼石塔(모전석탑)이라 칭해야 할 것이다.

초층탑신은 특별히 높으며 각면에는 감실을 개설하여 양측에 각각 화강암으로 인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조각수법에서 삼국기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옥개받침의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씩이고 3층은 방추형으로 모전석들을 들여쌓기 하였고 정상에 화강암으로 만든 仰花(앙화)를 얹고 있다.
이 탑에서의 특징은 보면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넓직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탑재는 백제 석탑과는 달리 회흑색의 안산암이다. 建塔(건탑)은 이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모양으로 절단하여 쌓아 올림으로서 전탑형을 이루었으니 백제석탑과 또한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고유섭의 지적처럼 석재에 대한 집착을 얘기할 수 있으려니와 한편 초층 4면에는 감실이 설치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인왕입상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이 주목되는 바이다. 즉 화강암으로 문을 가구하고 석비 두짝을 달았다. 문비는 치석한 판석인데 문주쪽의 좌우 양단 상하를 고정시켜 감실 안쪽의 좌우로 문을 열도록 시설하였다. 인왕상은 화강암 1석에 양각하여 양 문주 바깥쪽에 끼워넣었는데 감실 하였는바 감실을 수호하는 자세는 각면이 같다.

그중 한 면의 형식과 수법 등을 살펴보면 악귀 같은 조각을 밟고 서 있는데 머리에는 원형 두광을 구비하였으며 양쪽 팔과 가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한쪽은 올려서 내려치는 듯, 한쪽은 허리에 올려 상대적으로 힘을 모으고 있는 모습은 역시 금강역사의 표현이라 하겠다. 의문(衣文)은 유려하고 흉부의 장식도 주목된다. 이와 같이 일부에서 화강암재의 혼용은 있으나 근본적으로 주된 재료가 다르고 또 그 양식도 백제석탑과는 같지 않아서 거의 때를 같이하여 7세기 초반에 나타난 서로 다른 점을 알 수 있겠다.

7세기 전반인 삼국기말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에 세워진 최초의 석탑들이 서로 그 양식은 달리하였다 하더라도 그 후 얼마 뒤에는 이들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정치적인 변화가 문화전반에도 획일적으로 적용되어 신라적인 요소들로 통합되었는지 단정지울 수 없으나 삼국통일이 두 탑 양식의 통합을 이루었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삼국통일은 민족통일의 대업이었으며 그 성과는 비단 국토와 국민의 통합과 융화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문화와 예술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쳤던 것이니, 석탑에 있어서도 따로 발생한 양국의 서로 다른 석탑이 역사적 전환을 맞이하여 한 양식으로 통합됨으로서 한국 석탑으로서의 독창적인 새로운 양식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라석탑은 삼국이 통일됨에 따라 백제와 고 신라의 각기 다른 두 양식을 종합하여 신라석탑으로서의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한국의 석탑은 하나의 형식으로 집약 정돈된 것이라 하겠다.

삼국통일의 새로운 계기를 맞아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에서 가장 전형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이 감은사지 동서3층석탑과 고선사지3층석탑이라 하겠는데 이 양 탑은 똑같이 새로운 통일국가의 수도인 경주를 중심 삼고 있어 역사적 전환의 중심지에서 새로운 석탑양식이 발생된 사실에 주의를 끌게 한다.

특히 감은사지삼층석탑은 현재 경주 토함산 너머 동해구 대종천 북쪽대지의 감은사지에 동서로 쌍탑이 건립되어 있다. 감은사는 통일의 영주이신 문무대왕이 국가를 강건케하고 왜군을 물리치고자 창건한 호국대찰로서 대왕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심에 그의 아들 신문왕 2년(682년)에 이르러 낙성된 것이니 이곳의 동서 쌍탑도 같은 시기로 보아 건조연대의 하한을 682년으로 취할 수 있겠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된 직후 경주를 중심으로 불교가람의 건립은 절정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상대적으로 백제의 중심지였던 공주나 부여지방에서는 佛寺(불사)조영이 중지되었고 불탑의 설립도 없었다. 신라의 승리로 얻은 통일은 모두 불덕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불교가람의 창건은 곧 나라의 수호와 백성의 교화와도 일치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특히 사원건축에 남다른 발달을 보았던 백제의 많은 공인들이 통일신라의 불사건립에 참여한 사실은 통일신라초기의 사원건축이나 조형작품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불사의 조영과 더불어 탑파의 건립도 번성하였는데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 신라의 각기 다른 두 석탑 양식을 조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된다. 통일이라는 새로운 계기를 맡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중 시원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감은사는 삼국통일의 영주인 문무대왕이 창건한 호국사찰로서 그의 아들 신문왕 2년(682)에 낙성하였다. 지금은 폐사된 터에 동.서 3층석탑 2기가 전할뿐이다. 건립연대는 삼국유사 권2 萬波息笛條(만파식적조)의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682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양 탑에서는 삼국말기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석탑양식이 하나로 집약되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감은사지 3층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과 상륜을 형성한 한국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이 탑에서 특히 주목하여야 할 점은 각부구성이 백제석탑처럼 많은 석재로 구성되었다는 점과 낙수면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며 전각에서 반전이 뚜렷한 점 등이 목조건축의 구조성이나 의장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즉 기단부나 탑신부를 막론하고 목조 건축을 모방한 흔적이 뚜렷하고 목조건축적요소를 구현함으로서 신라석탑 나아가서 한국 석탑의 초기형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단 밖으로 판석을 깔고 그 밖으로 다시 장대석을 돌린 塔區(탑구)를 마련하였으며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동일석으로 다듬어 1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으며 갑석 또한 12매이다. 상층기단면석 역시 12매석에 갑석은 8매로 구성되었다. 하층기단은 탱주의 수가 3柱이고 상층기단의 탱주 수는 2柱(주)이며 초층탑신의 우주도 역시 4매의 별석을 세웠고 그 사이에 4매의 면석을 끼워 넣었다. 이들 우주와 탱주의 짜임은 홈을 파서 면석을 끼워넣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2층탑신석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모각한 판석을 4매로 조립하였다.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돌이 별석으로 각기 4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옥개받침은 각층이 5단이다.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이렇게 함으로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모태로서 자리하게 되었는데 갑석에 부연을 표현하였고, 옥개받침이 5단이며 낙수면은 지붕모양으로 경사를 나타나게 하였다. 또한 탑신의 괴임수법도 상층기단을 받는 하층기단 갑석 상면의 괴임은 각형2단이며 각층 옥개석 정상에 각형2단의 괴임을 각출하여 그 윗 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다.

이 탑의 형상이 고선사지석탑과 형태와 크기가 비슷한데 부분적으로 다른 점은 초층탑신에 감실형 模刻(모각)이 없는 점으로 이는 이미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덩어리를 이룬 괴체성의 석탑에 내부공간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옥개석의 물매도 고선사지석탑이 중후, 둔중함에 비하여 감은사지석탑은 平薄(평박)하고 완만하여 초기석탑임을 정연하게 나타내고 있다.

통일직후의 또 다른 석탑인 고선사지삼층석탑은 상하층 기단의 면석과 갑석이 여러 개의 석재로 결구되어 있고 하층기단의 탱주가 3柱(주)이고 상층기단이 2柱(주)인 점등이 역시 목조건축의 기단부를 모방한 신라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하층기단의 지대석과 중석이 동일석으로 되어 있음은 감은사탑의 경우와 유사하다. 탑신부도 초층은 면석과 우주를 따로이 독립시켜 8매석으로 나타내고 2층의 탑신은 4매석으로 조립하였는데 1매의 판석에 1우주와 1면석을 함께 모각하였다. 반면 3층의 경우는 1매석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이처럼 여러 개의 석재로 조립된 것이 역시 백제탑형식과 같이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각층의 옥개석이 층급받침과 낙수면이 별석인 8매석 으로 田字(전자)형식으로 조립되어 아직 단일석으로 塊體性(괴체성)을 보이지 않는 점등이 신라탑의 초기적 양식으로 주목된다. 또한 네 모서리의 전각에서 반전이 뚜렷한 것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의장적 수법으로 볼 수 있다.

탑신의 괴임형식은 상층기단 갑석위에 마련된 탑신 괴임대를 비롯하여 각층 옥개석 상면에 각출된 탑신괴임은 모두 높직한 각형2단인데 이것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석탑의 규모에 따라 축소되거나 변모되기도 하나 단의 수가 2단인 것은 불변한 것이니 시원적인 석탑에서 나타난 하나의 규범이라 하겠다.

이 석탑에서 나타난 하나의 특징은 초층 탑신 각면에 조각된 戶形龕室(호형감실)로 탑신부에 門扉(문비)를 조각한 것은 이 석탑이 가장 오래된 일로서 의성탑리석탑과 비교된다. 이곳 고선사에는 원효대사가 주석한 사실이 있고 그가 신문왕 6년(686)에 입적하였으니 이 석탑의 건립연대를 686년을 하한으로 할 수 있다. 이 탑의 조성연대를 삼국 시대로는 올려 볼 수 없고 감은사탑에 준하는 7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웅장한 형태라든가 남성적 기상이 흘러넘치는 위용은 삼국통일의 의지를 담고 있는 건실한 탑이라 하겠다.


이후 통일신라석탑은 감은사와 고선사 양 탑을 규범적인 것으로 본을 삼아 차차 축소되고 간략화 되어 변모해 가게 된다. 즉 양 탑과 같은 초기적인 가구형식은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복잡성이 차차 약화되고 간단해지며 단일석에 모각을 한 괴체성을 띠게 된다.

나원리 오층석탑에서는 탑신부에 있어 탑신은 2층 이상부터 옥개석은 3층 이상부터 모두 단일석이며 탑신에 양 우주가 각출되고 옥개석에는 하면에 층급받침이 단일석에 마련되어 변모된 양상을 보인다. 나원리 5층석탑 기단부의 형식은 고선사탑이나 감은사탑의 경우와 똑 같으나 초층 탑신의 구성에 있어 각면의 면석과 우주가 단일석으로 합쳐졌고 이 4매의 단일석은 판석으로 서로 엇물림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석탑조영의 간략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경주시 구황리 삼층석탑(일명 皇福寺址3層石塔(황복사지3층석탑))은 기단부에 있어서 하층기단의 탱주가 3개에서 1개가 감소하여 2개로 줄고 탑신도 각면을 판석으로 조립한 것이 아니라 단일석으로 만들었으며 우주도 별도의 石柱(석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각층 탑신석 모서리에 각출하여 모각한 것이다. 이 석탑에서는 孝昭王(효소왕) 元年(원년)부터 聖德王 5年(성덕왕5년)(692~706) 사이에 신문왕등 전대 왕족의 명복을 빌어 건립하였다는 명기가 나와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이들 탑 이후에 경주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석탑으로서는 월성군 장항리 오층석탑, 경주시 천군동동서삼층석탑, 불국사삼층석탑, 금릉 갈항사동서삼층석탑, 경주시 마동사지 삼층석탑, 경주군 용명리사지 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석탑들은 700년경부터 8세기 중엽에 건립된 3층 내지 5층탑으로 하층 기단의 탱주 수가 줄고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단일석으로 만들어지며 전체의 높이도 대략 3내지 7척 정도 낮아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모두 신라의 서울인 경주와 그 주변에 세워진 것들이며, 그 후 점차 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한 예로 9세기 중엽에 세워진 장흥 보림사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상하층기단 면석의 탱주가 下2柱(하2주), 上1柱(상1주)로 되어 있고 옥개받침은 아직 5단이다. 이러한 형식에 속하는 탑으로는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합천 청량사 삼층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 등이다.

시대가 통일신라말기로 내려오면 석탑의 규모가 작아지고 구성요소들이 간략화 된다. 이 시기는 왕위쟁탈을 위한 골육상쟁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사회가 혼란해 지고 이러한 사회상황 속에서 국왕이나 귀족의 願刹(원찰)에 탑파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탑의 예로는 남원 실상사동서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실상사는 흥덕왕과 宣康太子(선강태자)의 원찰인데 이 탑은 상하기단의 탱주가 상하 각각 1주이고 옥개받침 수도 4단으로 줄었다. 이 형식에 속하는 탑으로는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삼층석탑,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봉화 서동리 동서삼층석탑 등이 있다.

통일신라 하대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변화는 일반형 석탑에서는 기단부가 기본형인 2층기단이던 것이 단층기단으로 변한다. 이러한 예로는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봉암사삼층석탑 등이 있는데, 이같은 양식은 고려시대까지 계승된다. 또 자연암반 위에 기단면석을 조립하는 석탑의 예도 있는데, 경주 월성의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그 지역성을 강조한 형식으로 조영되었는데 이를 개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신라의 옛 땅 경상지역, 백제의 옛 땅 충청, 전라지역 등에서 건립된 탑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석탑

통일신라시대에서와 같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석탑은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예배의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석탑은 그 수효나 조형미에 있어서 당시 불교적인 조형미술의 중추를 이루는 것이었다. 즉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불교적인 조영이 거의 고려시대를 통해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불교적 조영의 성황 속에 그 중심을 이루는 석탑 또한 다수 건립되어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석탑의 유례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려시대의 석탑에 관하여 나타난 현상을 정리할 때 우선 그 석탑 건립이 전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신라는 삼국통일과 더불어 거의 고려와 상응하는 영역을 지배하였지마는 현존하는 신라시대 석탑은 지역적으로 볼 때 대체로 경주부근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 외의 것도 대략 구 영토인 영남에 편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의 故土(고토)에도 약간의 유례가 있으나 소수에 불과한 형편이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를 보면 수적으로는 개경 부근이 우세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 유례는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혁에 따르는 것으로 일반적인 추세는 한마디로 왕실 불교적 입장에서 출발한 한국의 불교가 수 백년을 지나면서 보다 보편화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좀 더 고려의 상황에 결부시켜 본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고려의 석탑 건립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국가적인 조영이라 하겠다. 고려시대 역시 불교가 국가적 종교, 왕실불교로서 번영하였음은 물론, 전대로부터 이어지는 호국 불교적 성격은 국초로부터 많은 국가적 사원의 창건을 초래케 하였다. 그리하여 그러한 국가적 조영의 경우 역시 수도인 개경이 월등 우세함은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개경의 법왕사.왕륜사 등 10사찰의 건립과 수많은 불사가 있었다는 기록 등은 불교국을 연상케 하며 곧 고려의 불사 건립의 정도와 아울러 개경이 수적으로 우세함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왕건 태조의 훈요10조에도 반영되고 있듯이 새로이 개재되는 도참사상의 영향은 이러한 국가적인 조영 역시 전국적인 형태로 행해진 일면을 나타내게 하여준다. 대체로 개경의 7층석탑의 건립과 연관되는 것으로 믿어지는 고구려의 옛 서울인 서경의 9층탑 건립, 신라의 옛 서울인 경주의 황룡사 9층목탑의 중수, 백제 구도 부근의 거대한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의 유례, 그리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곳에 천호산 개태사를 건립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면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석탑에 있어서 좀 더 주목을 끄는 것은 순수한 지방세력 내지는 현지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이다. 고려는 많은 경우 그 지방민의 발원에 의하여 석탑이 건립되었다고 믿어지며 이러한 경우가 오히려 고려시대 석탑의 전국적인 분포에 좀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석탑의 전국적인 분포나 그 건탑에 있어서 토착세력의 참여의 가능성은 바로 고려 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함을 짐작케 한다. 즉 전대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건탑양식에서 벗어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각 지방의 토착세력이 건탑에 관여했을 때 과거의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 있는 건탑의 양상을 보일 것이니 실제 이 시대의 석탑은 조형 양식상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 이래 전통양식을 계승함과 동시에 지방적 특색이 가미되어 그야말로 다양한 조형을 이루었으니 이 같은 석탑의 지방적 특색이란 신라시대에서는 그리 두드러지지 못하였던 것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석탑이 보급됨을 따라서도 그다지 큰 차별상을 나타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즉 신라시대에 있어서는 석탑에서 지방적 특색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설혹 신라의 중심이었던 경주를 벗어난 지방에 석탑이 건립되었다 하더라도 중앙의 양식과 그다지 다른 점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양식을 보이고 있음을 현존 유래에서 살필 수 있으니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예컨데,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신라시대 석탑의 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데 비하여 백제의 옛 땅인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예가 많다.

즉 전라북도에서는 익산군의 미륵사지석탑, 충청남도에서는 부여읍의 정림사지 5층석탑이 백제시대에 건조된 석탑인데 이곳 전북이나 충남지방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탑을 건립함에 있어서 이렇듯 전대인 백제석탑계의 양식을 따라 특히 새로운 요소로서 백제탑 계열의 양식을 가미한 고려석탑이 곳곳에 세워졌던 것이니 몇 기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충남지방에 있어서 전북지방에 있어서
부여군 무량사 5층석탑(보물 제 185호) 익산군 왕궁리 5층석탑(보물 제 44호)
부여군 장하리 3층석탑(보물 제 184호) 정읍군 은선리 3층석탑(보물 제 169호)
서천군 비인 5층석탑(보물 제 224호) 김제군 귀신사 3층석탑
공주군 계룡산 남매탑 옥구군 죽산리 3층석탑

이들 백제석탑계열의 석탑은 특히 옥개석의 양식에서 모두 판석형의 낙수면이고 대개의 경우 그 밑의 받침부가 別石(별석)으로 조성된 목조가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점 등이 일견하여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각부를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백제 석탑계열의 고려석탑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석탑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를 이룩하면서 도읍을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옮겼다. 이와 같은 중대한 변화는 당시의 조형미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니 자연히 불교적인 조형미술의 위축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불교미술은 초기에는 전대의 餘勢(여세)와 태조, 세조 등의 불교에의 귀의 혹은 보호에 의하여 몇 가지 중요한 작품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는 제 14대 선조대에 왜국의 침입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선조25년, 1592년)을 전후하여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기, 후기의 양시기로 크게 구별하고 있으니 이러한 시대의 구분은 곧 미술사상에도 적용되는 것인바, 조선시대 전기인 임진왜란 이전에는 곧 고려시대의 여운을 엿볼 수 있는 시기로서 모든 조형물에 고려적인 조성양식과 수법을 다소나마 간직한 작품이 출현할 수 있었던 여건을 갖추었던 때로 오늘날 실제로 그 유례를 상당수 남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는 그 후기가 될 것이며 이때는 전대인 고려시대의 여세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도리어 전란 때문에 오랜 전통이 대부분 단절되고 설혹 다소 전통이 이어졌다 하더라도 어는 일부분에 변형을 일으키고 있으며 따라서 조형미술이 점차 소멸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그 조성양식을 기존 유품에서 본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비록 그대로의 양식과 수법을 따랐다고 하더라도 기교의 감퇴와 조형을 위한 정신적인 내용의 결핍은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당연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추세에서 석탑의 건립도 자연히 단절 상태에 놓이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초반기에 있어서 고려 말기의 여운에서 여러 기의 석탑을 건조하여 오늘에 남기고 있으니 4각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으로는 다음의 몇 기를 대표작으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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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7층석탑(보물 제499호)
제7대 세조대 건립으로 추정,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율리 낙산사 경내
-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제9대 성종3년 (1472년)건립 추정,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삼송리 신륵사 경내
- 벽송사 3층석탑(보물 474호)
제11대 중종 15년(1520년)건립 추정,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楸城里 벽송사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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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형석탑의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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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
제7대 세조 12년(1466년)으로 추정, 서울시 종로 2가 파고다 공원내
- 수종사 8각 5층석탑
제9대 성종 24년(1493년)건립으로 추정, 경기도 양주군 송촌리 수종사 경내
- 묘적사 8각 다층석탑
제11대 중종 초년대인 1~16년(1506~1521년)건립으로 추정, 경기도 양주군 월문리 묘 적사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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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일반형 석탑을 볼 때 4각형 중층의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은 벽송사 3층 석탑이라 할 것이니 2층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하여 신라식 일반형의 전형을 따르고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즉 전체의 평면이 4각형으로서 상ㆍ하층기단에는 양우주가 모각되고 하층기단면석에 1탱주가 각출되었으며 상층기단갑석에는 부연이 정연하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탑신석이 각기 1석씩으로 각층 탑신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었다. 옥개석은 받침이 1.2층은 4단씩이고 3층은 3단이며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위에 보주가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각층의 체감비율도 착실하며 석재의 결구수법도 정돈되어 있는데 기단에 있어서 상층면석에 탱주가 생략되고 탑신부에 있어서는 옥개받침이 상층에 올라가면서 줄어들어 일률성이 없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인상을 주는 점은 전체의 조형이 무기력해진 점등과 아울러 시대의 降下(강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전기에 건조된 석탑 가운데 대표적인 또 하나의 석탑은 낙산사 7층석탑을 들 수 있으니 이 석탑을 볼 때 구조는 일반형 석탑과 같이 평면이 4각형으로 기단석 위에 탑신부가 놓이고 그 위에 상륜부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석탑은 순수한 일반형 석탑과는 달리 기단부에 연화문이 조식되고 탑신부의 각층에 탑신 괴임석이 끼어져 있어 이렇듯 특이한 가구가 주목된다. 그리고 상륜부에 있어서 노반석위에 청동제 상륜이 장식되었는바 원형의 복발과 앙화, 그리고 원추형의 보륜부등 그 형태가 곧 원나라시대의 나마탑을 연상시키고 있어 또한 주의를 끈다.

이렇듯 기단부에 연화문 조식이 있고 특히 각층 탑신마다 괴임돌이 끼어 있음은 이 석탑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니 이곳 부근에서 이러한 유례를 찾아본다면 연화문 조식의 예는 명주군 강동면 정동률리의 5층석탑에서 볼 수 있고 각층의 탑신괴임석 유례는 강릉시의 신복사지 3층석탑과 평창군의 월정사 8각 9층석탑등에서 찾을 수 있는바 월정사석탑은 기단부에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어 더욱 주목되는데 이들은 모두 고려 이래의 양식인 것이다.

상륜부에 있어서도 원대의 나마탑을 연상케 하고 있는 점은 이 석탑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 이러한 상륜은 충청남도 공주군의 마곡사 5층석탑이나 서울 경복궁내에 옮겨 세운 경천사지 10층석탑의 상륜부에서 약간의 흡사한 부분을 엿볼 수 있는 바라 하겠는데 이 양석탑도 역시 고려시대의 건립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볼 때 이 낙산사 7층석탑도 고려시대 이래 많이 건조하던 석탑에 나타난 시대적인 특징이 여기서도 발휘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 석탑은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로는 더욱 略化(약화)되고 무기력화가 엿보이니 이것이 곧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륵사다층석탑은 백색 대리석으로 건조한 4각형석탑인데 2층의 기단부를 구성하고 그 위에 여러층으로 중적한 탑신부를 받고 있는 점은 신라나 고려시대의 일반형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으나 각 부재의 세부조형에 있어 전혀 감각을 달리하는 석탑으로서 이른바 특이한 조법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즉 기단부에 있어서 지대석 상면에 연화문을 조식하여 화사한 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대개의 경우 기단석에 연판을 조각한 예는 많으나 이렇듯 지대석에 조식산 것은 아직 그 유례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기단 면석의 각 우주를 화문으로써 모각한 것이라든가, 특히 상층기단갑석을 하층기단갑석의 下半部形(하반부형)으로 조성하여서 둔중한 감을 다소라도 감소시키고 있는 것은 주목되는 의장이다.

또한 상층기단갑석 상면에 복판의 연화문을 조식한 유례는 흔히 볼 수 있으나 하면에까지 연판을 장식한 것은 드문 일이다. 상ㆍ하면석에는 雲龍(운룡)과 波狀紋(파상문)을 조식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그 조각내용이 다르기는 하나 신라와 고려시대 석탑의 기단부에서도 각종의 조각이 있음을 본다.

그런데 전대에서는 8부신중이나 비천, 혹은 안상내의 사자상등 모두 불교적 조각이었는데 이곳 신륵사의 석탑에서는 용과 운문, 그리고 파상문이다. 이러한 문양은 흔히 전대의 석조부도에서 볼 수 있는 莊嚴(장엄)문양이며 4각형의 일반형 석탑에서는 전혀 없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석탑에서 나타나고 있음은 또한 주목되는 의장으로 시대적인 문제와도 아울러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앞 시대인 고려시대의 조형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앞 시대의 양식을 남기고 있으니 옥개석 전각의 반적이라든가 또는 기단부의 연판 배열이 우각으로 향하면서 斜形(사형)을 이루고 있는 거 등은 고려시대의 한 양식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인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반적인 미술문화의 현상이 그러했듯이 특히 불교 미술에 있어서도 많은 침체를 보이고 있다. 이 시대에 건립된 석탑은 전기에 비하여 극히 드문 편인데 이 가운데서도 건립연대가 확실한 석탑은 보살사 5층석탑이라 하겠다.
이 석탑은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용암동의 보살사 대웅전 앞에 건립되어 있은데 조선 제 19대 숙종 29년(1703년)에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이 석탑의 각부를 고찰함으로써 조선 후기양식의 일면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석탑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여진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구축하였으며 그 위에 5층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4각형 중층의 일반형석탑이다. 기단부는 층단을 이루지 않고 지대석 위에 1석으로 조성한 3단의 높직한 괴임대가 있으며 그 위에 연화대석을 놓고 탑신부를 받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초층탑신에는 각면에 글자를 음각하였고 2층 탑신에도 각면에 글자 1자씩을 새겨 놓았다. 동쪽면에 康熙.癸未(강희.계미)의 명문이 있어 이 탑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바 이렇듯 탑신석에 명문이 있는 예는 선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각층의 탑신에는 우주가 없고 옥개석은 모두 투박한데 하면의 옥개받침들이 너무 낮아 더욱 둔하게 느껴진다. 전각이 두껍고 낙수면이 급경사이며 네 귀퉁이의 전각에 반전도 없다. 그리고 상면에 탑신괴임대도 마련되지 않았다. 옥개받침은 초층만이 3단이고 그 이상은 2단씩이다. 상륜부는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높직한 복발형을 밑에 두고 중간에 낮은 보륜형을, 정상에 보주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각층의 비례도 잘 맞지 않고 옥개석도 투박한데 기단부가 다소 넓어서 그런대로 안정감을 보이고 있으나 역시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퇴화된 불교미술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탑

그 동안 북한의 석탑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조사해 놓은 내용을 중심하여 몇 기정도의 대표적인 석탑에 대해서만 거론해 왔었다. 그러나 이번에 약 50기에 달하는 북한의 석탑들은 사진만이라도 볼 수 있어 수수께끼였던 몇 가지의 문제가 풀리게 되게 되었다. 우선 북한에는 통일신라시대에 건조된 석탑이 현재로서는 1기도 없다는 것이다. 개성(開成) 흥왕리(興旺里) 삼층석탑이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신라식 일반형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건립 연대는 고려 초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밖에 신라 일반형 석탑의 전형양식을 보이는 석탑이 몇 기 있으나 그 건조 연대는 모두 고려시대이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불과 2기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본다면 북한의 석탑은 모두 고려시대에 건조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려시대 석탑은 지방적 특생과 각양각색의 새로운 특수형을 볼 수 있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고 하였는데 북한의 석탑들은 이러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

타내고 있다.우선 북한의 석탑은 단층기단이 대부분이다. 북한 지역은 고구려의 옛 땅으로 고구려시대탑파의 양식을 재현하였을 것인바, 고구려 목탑은 단층기단이어서 그 단층양식을 고려시대에 본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탑신부에 있어서도 옥개석의 각 변이 모두 곡선을 보이고 있는 점은 역시 목탑의 지붕곡선을 모방한 양식으로 생각된다. 석탑의 기단 평면이 정사각형, 6각형, 8각형이라 해도 단층기단인 경우는 대개 기단과 갑석에 연꽃문양을 앙, 복련 형식으로 장식하여 마치 불상대좌와도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 또한 가까운 북방지역의 탑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 지역에 가까운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도피안사(到彼岸寺) 삼층석탑 기단부가 8각의 불상대좌 형식인데 이 석탑의 건립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이다. 경문왕 5년(865)에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月精寺) 팔각구층석탑이 북방계통의 영향이라 일컫는데 이러한 모든 점을 종합해 본다면 중국으로부터 만주지역을 통한 영향 즉 고구려 양식의 재현이라는 뜻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석탑이 정사각형의 평면인 것도 많이 있다. 그런데 묘향산의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영명사 팔각오층석탑, 광법사 팔각오층석탑, 원광사지 육각칠층석탑 등은 그 평면 구성이 정사각형을 벗어난 6각, 8각의 평면인 동시에 층수도 다층이다. 이것은 건탑양식이라 하겠다. 물론 그 연원은 고구려의 목탑이었던 청암리사지 목탑, 대동군 상오리사지 목탑 등이며 이를 본받아 평면 8각의 구성이 실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의 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을 연구함에 있어 중요한 자료들임을 알 수 있다. 오랜 동안 전통적으로 이어 내려오는 건탑 양식과 지방적 특색이 결합되어 북한 지역에서 보다 많이 볼 수 있는 각양각색의 특수형식의 석탑이 북한지역 곳곳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 지역에는 신라시대에 건립된 석탑이 1기도 없다. 그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지배영역이 대동강 북쪽까지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한반도에 있어서 석탑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를 대관해야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 대해서는 남한지역의 신라석탑을 중심하여 충분히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석탑은 남한의 고려석탑에 북한의 고려석탑을 첨가하여 연구한다면 다양한 내용으로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며 조선시대 석탑 연구에서도 다소의 희망적인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소재지 시 대 크 기
흥국사(興國寺)
석탑(石塔)
개성직할시 자남동
개성역사박물관
고려 현종
12년(1021)
높이 2.16m
보현사(普賢寺)
사각구층석탑(四角九層石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정종
12년(1044)
미상
신광사(神光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 고려 충혜왕
3년(1342)
높이 4.78m
보현사(普賢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평안북도 향산군
북신현면 향암리
고려시대 높이 8.58m
학림사(鶴林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학림리
고려시대 높이 6.62m
불일사(佛日寺) 오층석탑(五層石塔) 개성직할시 내성동 공원 고려시대 높이 7.49m
영통사
(靈通寺)
오층석탑(五層石塔) 개성직할시 용흥리 고려시대 높이 6.5m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 개성직할시 용흥리 고려시대 높이 3.7m
동삼층석탑(東三層石塔) 개성직할시 용흥리 고려시대 높이 3.97m
현화사(玄化寺) 칠층석탑(七層石塔) 개성직할시 장풍군 월고리 고려시대 높이 8.64m
장연사(長淵寺) 삼층석탑(三層石塔) 강원도 금강군 장연리 고려시대 높이 4.33m
금장암지(金藏庵址)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시대 높이 3.87m
홍복사(弘福寺)
육각칠층석탑(六角七層石塔)
평양특별시 중구역 금수산 고려시대 높이 5.35m
자복사(慈福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평안남도 성천군 성츤읍 고려시대 높이 3.87m
장경사지(長庚寺址)
오층석탑(五層石塔)
평안북도 곽산군 원하리 고려시대 높이 4.89m
해주(海州) 구층석탑(九層石塔)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고려시대 높이 5.95m
자혜사(慈惠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시대 높이 5.95m
안국사(安國寺) 구층석탑(九層石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고려시대 높이 6.23m
영명사(永明寺)
팔각구층석탑(八角九層石塔)
평양특별시 중구역 경상동 고려시대 높이 4.54m
원광사지(元廣寺址)
육각구층석탑(六角九層石塔)
평양특별시 경상리 고려시대 미상
관음사(觀音寺) 칠층석탑(七層石塔) 개성직할시 산성리 대흥산성 고려시대 높이 4m
판문(板門)
흥왕리(興旺里) 삼층석탑(三層石塔)
개성직할시 판문군 흥왕리 고려시대 높이 4.87m
심복사(心腹寺) 칠층석탑(七層石塔) 개성직할시 장풍군 덕적리 고려시대 높이 3.53m
화정사 칠층석탑(七層石塔) 개성직할시 장풍군 고려시대 높이 3.3m
성불사(成佛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북도 봉산군 정방리 고려시대 높이 4.22m
문평면 상탑동 삼층석탑(三層石塔) 황해북도 봉산군 고려시대 미상
해주(海州)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시대 높이 4.63m
광조사(廣照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리 고려시대 높이 3.5m
복흥사, 칠층석탑(七層石塔) 황해남도 신천군 청산리 만덕산 고려시대 미상
연등사(燃燈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남도 안악군 연등리 고려시대 미상
강서사(江西寺) 칠층석탑(七層石塔) 황해남도 백천군 강호리 고려시대 높이 4.86m
정곡사(停穀寺) 오층석탑(五層石塔) 황해남도 은율군 사동 고려시대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