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개요
탑명 개요 인물/사상/설화 유물/문양/의례
왕궁리
5층 석탑
지정 국보 289호 용화산
미륵신앙
왕궁터 설화
순금금강경판
유리제사리병/금제병합
청동여래입상/청동요령
마한민속예술제/익산돌문화축제
위치 전북 익산시 왕궁면
시기 고려시대 초기(추정)
구조 5층 석탑/8.5m
의의 백제탑계승

(1) 관련 기록

왕궁리 오층석탑은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왕궁면에서 남으로 2㎞ 지맥이 뻗은 낮은 언덕 끝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세워진 탑으로 현재의 유적지가 거대한 절터임을 알려 주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출판된 익산읍지인 『금마지(金馬誌)』에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十丈)이 되는 완전한 것이 있다. 속전에 의하면 마한시대에 만든 것이다(王宮塔在宮墟前 高十丈累石宛然 俗傳馬韓時所造).”는 간단한 문헌 기록이 전하고 있다. 1965년 조사 이전까지는 토단(土壇)을 갖춘 석탑으로 알려졌으나, 원래는 돌로 만든 기단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그대로 복원되었다.

(2) 문화재 지정 현황

왕궁리 5층석탑은 일차적으로 보물 제44호로 지정되었다가, 1996년 11월 29일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 사업>심의 후 국보 제289로 승격되었다.

건립시기

왕궁리 5층석탑의 조성 시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 편인데, 보수 전까지는
① 기단부가 단층인 점,
②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③ 옥개양식에서 폭이 넓고 편평한 백제탑계를 따르고 있는 점,
④ 탑신부의 돌 결구 수법과 옥개받침 수법에서 신라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1965년 보수 때에 알게 된 기단의 구성 양식이나 사리장엄구의 양식을 종합한 결과, 옛 백제 영역 안에서 후세에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 형식에 신라탑 형식이 첨가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탑의 외형과 특징

1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이 올려진 형태로 기단의 구조는 적심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목조탑과 같이 네 귀에는 부등변 팔각의 높은 기둥을 주춧돌 위에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또한 장대석을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식으로 올려놓았다. 이 평방 위에 초층 탑신이 놓이게 되고 아울러 기단갑석을 받도록 짜여져 있다. 네 기둥이 세워져 있는 중심에 해당되는 중앙에는 큼직한 심초석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목조탑에서 볼 수 있는 심주(心柱)에 해당되는 여러 단의 방형석재를 쌓아올렸다. 8각기둥과 방형석재는 모두 목조건축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돌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공간에는 잡석과 흙을 다져 메웠는데 흙 속에서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단에 해당되는 곳에서는 갑석과 면석의 부서진 부재가 발견되었는데, 각 면에는 2개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탑신은 신라의 석탑과는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탑들은 1개의 돌로 구성된 탑신이 많지만 왕궁리 탑은 탑신의 돌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은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새긴 주형의 4우석(四隅石)과 탱주가 조각된 중간면석으로 된 8장의 편풍돌로 짜여졌고, 2층은 사면 1석씩, 3층 이상은 2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우주석을 조각하였다. 얇고 넓은 옥개석은 편평하게 내려오면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올라갔으며 3단받침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수 중 탑의 제1층 옥개석 중앙과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추녀는 얇고 밑은 수평이나 모퉁이에서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여 주는 곳에 밑으로 풍령공(風鈴孔;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옥상(屋上)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도 적은데, 옥신을 받치기 위하여 다른 돌을 끼워 놓았다.

상륜부는 일부 파손되었으나 현재 노반.복발.앙화.보륜 등이 남아 있다. 상륜을 이루는 하부 요소는 대략 갖추고 있으나 상부의 것들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 관련 유적지 현황

(1) 왕궁리 유적(王宮里遺蹟, 사적 제408호)

왕궁리 유적이 위치한 익산시 왕궁면은 마한 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으며, 백제 무왕이 천도를 계획했다고 전해지는 중요한 지역이다. 궁궐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왕궁리란 지명 외에 왕궁평(王宮坪), 왕궁성(王宮城)이라는 이름도 전해 온다. 부여 문화재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발굴한 결과 현재 5층 석탑이 남아 있는 지역 너머 구릉 지대에서는 긴 장방형의 성터가 확인되었는데, 백제 시대 말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는 여러 개의 건물지와 백제 기와 가마도 발견되었다. 발굴중인 지역 중 5층 석탑 주변에서는 관궁사(官宮寺)라는 사찰명이 적힌 명문와가 발견되어 절터임이 입증되기도 했다.

(2) 모질메산성(왕궁평성, 지방기념물 제1호)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금마을 뒷산 구릉지대를 지역주민들은 '모질메'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마한, 혹은 백제의 궁궐자리로 알려진 곳이다. 위치는 금마산에서 남으로 약 3km쯤 떨어져 얕으막하게 전주행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대지이다. 이 성은 구릉지를 일부 깎아내리고 주변은 흙으로 쌓아올려 세단으로 나누어 평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건물을 배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궁평성(王宮坪城)” 혹은 “모지밀산성(慕枳密山城)” 또는 “왕궁리성지” 등이라고도 불린다. 문헌상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관세음응험기」에 제석사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면서, 백제 "무강왕"이 이곳「지모밀지(枳慕密地)」에 천도했다고 기록하여 백제말기의 익산천도 또는 별도설을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 유적이다.

이 성은 1976년과 1977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결과 동서 230m, 남북 450m의 규모이고, 상부대관(上部大官)의 명문이 있는 기와 등이 알려졌다. 이후 '89. 9월-'90. 5월(국립문화재연구소), '90. 5월 이후(부여문화재연구소)로 연차적인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남벽과 북벽의 일부, 동벽의 남반부 및 서벽의 남북 모서리 등이 조사되었다. 성벽은 석축의 기단을 두고, 내부에는 판축(版築)을 하여 만들고, 성벽의 외측과 내측에 좁은 부석(敷石) 유구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수구를 만들고 있음이 알려졌다. 성벽의 너비는 340~360cm이고, 성벽 바깥에 보강시설을 겸한 부석시설을 한 부분의 너비는 110~120cm이다. 여기에 사용한 석재는 얇은 판석과 기와 등이다. 북쪽에서 남으로 약한 경사를 이룬 구릉을 이용하여 그 외연을 따라 성벽을 만든 것으로, 이 성의 안쪽 남쪽으로 치우쳐 왕궁리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은 발굴 결과 왕궁리에 존재했던 사찰과 관련된 유적이며 아울러 성곽유구였음이 확인되었다.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현존 5층석탑을 중심으로 1탑 1금당(정면 5칸, 측면 5칸), 1강당(정면 5칸, 측면 5칸) 형식의 사원건축 유구가 확인되었다. 석탑 하부에서 선대 유구(건물지, 목탑지)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 내에서는 적어도 세 시기(백제말기-통일신라 말기)에 걸쳐 유적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성은 일반적인 담장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큰폭이 약 3.2m정도의 궁궐 성벽이 일부 노출되어 백제의 궁성지로서의 가능성이 한 층 커지고 있다. 그리고 성의 축조기법이 백제 양식이었으며, 백제시대의 기와 및 와당을 비롯하여 토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고 있어 이 성이 지닌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남벽의 서측에 치우쳐 밖으로 돌출된 계단식의 유구가 발견되어 문이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을 두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성벽은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만들었던 흔적으로 기둥구덩이 잘 남아 있음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성의 용도와 축조시기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약간씩 다르다. 백제와 통일신라 초기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유물들과 성의 품격이 왕궁급과 견주어져 안승(安勝)의 보덕국(寶德國)과 관련짓거나, 이보다 앞선 시기에 백제 무왕(武王)이 이곳으로 천도(遷都)했던 유적 등으로 보려는 의견이 있다. 이 성은 한국의 중남부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지형의 이용 방법과 성벽의 구축방법이 나타나고 있어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이 크다. 현재 왕궁평성내에는 1997년 1월 1일로 국보 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춧돌, 백제 시대의 정원석으로 보이는 관상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석탑 동편 약 30m 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가마 2기가 발견되었다. 석탑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폭이 약 3m에 이르는 통일신라때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성곽 내,외부에는 폭 약 1m 가량으로 판석을 깔아 만든 부석시설이 발견되어 성곽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성곽은 잘 다듬은 방형의 석재를 이용하여 쌓았으며, 내외벽면의 사이에는 막돌과 흙을 혼합하여 채워 넣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성벽을 쌓기 위해 그 하부에는 약 6-12단으로 높이 약 60-200cm 가량의 석축을 쌓아 기초시설을 한 후 그 내외부를 토사로 보강하여 견고성을 보장하였다.

현재까지 성벽의 전체 높이를 알려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성벽의 두께 등으로 보아 적어도 장정의 키 높이에는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성곽의 웅대한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하여 점점 명확해지고 있는데 그 규모는 남북 약495m, 동서 약235m로 총연장이 거의 1.5km에 달하는 직사각형의 평지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대부분이 파괴되어 있는 상태이고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토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고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제석사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궁평마을 서편 마을 입구쪽에 있는 제석사지는 지금은 민가에 둘러쌓여 점차 그 흔적을 잃어 가고 있다. 이 궁평은 백제때의 내궁터로 알려져 있다. 내궁이란 내원당, 내불당, 내사의 성격을 띤 사원이다. 익산지역의 왕궁평성에 궁성을 조성한 백제 무왕은 당시 미래불인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미륵사를 창건하고, 궁궐 근처에서 제석천을 주로 모시는 내불당으로서 제석사를 창건하여 왕실의 번창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백제 무왕이 제석사를 건립한 것과 관련하여 『관세음응험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겨 새로이 정사를 지었는데, 정관 13년(639) 11월에 벼락과 비로인하여 제석정사가 재난을 당하게 되었다. 이 재난으로 불당과 7급부도(7층목탑으로 추정), 낭방등 당탑이 일시에 하나도 남지않고 전부 불에 타 버렸다. 그런데 이와같은 큰 화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원에서 기적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탑밑의 초석 속에 장치외었던 종종7보와 불사리와 동으로 만든 금강반야경중에서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을 넣었던 목칠함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사리병은 안팎에서 보이지 않고 뚜껑 또한 움직이지 않았으며 사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리병을 가지고 대왕에게 돌아가니 대왕이 여러 법사와 함께 참회한 후 수정병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부처님 사리 6개가 모두 병안에 있었으며, 이것을 모두 밖에서도 볼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왕은 여러 궁인들과 힘을 더하여 공경하여 받들게 되었으며, 다시 이를 거두기 위하여 탑을 쌓도록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훌륭한 불교적인 보물을 안치하였던 제석사는 칠급부도가 불에 타 버렸다는 내용에서 이 사찰에는 목조로 된 7층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석사지에는 목조탑지가 있었던 자리에 두 조각으로 갈라진 장방형의 큰 돌이 있는 데, 그 돌의 중심에는 네모골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것은 놀랍게도 탑아래의 심초석과 같은 것으로 이 네모꼴의 구멍은 바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곳인 것이다. 이 사실은 『간세음응험기』의 기록에서 나오는 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은 제석사지에서 불과 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왕궁리 오층석탑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너무나 흡사하다. 다만 동판 불경이라하는데 실제로는 순금제 금판 불경으로 구리와 금과의 차이가 나타날 뿐이며, 사리가 6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 왕궁리 오층석탑에서는 16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목칠함 속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금제함 속에 들어 있었던 점만이 다른 점이다. 제석사지는 백제 무왕에 의해서 창건된 사찰로 부근에서 '제석사'명을 새긴 고려시대의 기와가 발견되며, 석등의 지붕돌과 동종 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제석사지는 1993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시굴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가람 배치는 남북 일직선상에 목탑과 금당과 강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의 감람배치 임이 확인되었다. 금당지의 기단은 이중기단구조로 기단토는 20cm 내외의 두께로 다져쌓기를 하였다. 그리고 강당지의 기단구조는 단층이었으며, 주로 수막새와 암막새, 인각와, 명문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유물중에서 백제에서는 거의 발견이 안되는 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그 문양은 중앙에 귀신 얼굴을 배치하고, 좌.우로 인동당초문이 수려하게 뻗어 있다.

(4) 낭산산성(지방기념물 제13호)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의 미륵산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거리에 상랑부락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성이 있는 낭산의 높이는 162m로 이 산성을 다른 말로 '구성', '북성' 또는 '마한성'이라고 부른다. 마한성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익산 일대가 마한의 도읍지라는 것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깬돌로 쌓은 석성인데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있으며, 둘레는 약 1,059m이다. 현재, 서쪽과 남쪽, 북쪽의 문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우물 1곳과 성의 동남쪽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석재들이 있어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에서 백제시대 것으로 보이는 토기조각들이 발견되며, 주변에 준왕이 노닐던 곳으로 전하는 석천대가 있고, 성은 토성이다.

현재 이 낭산산성과 관련된 문헌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진지왕 3년(578)조에 보이는 "신라가 알야산성을 쳤다."라고 기록의 알야산성은 바로 이 낭산산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백제시대의 알야산현을 신라 경덕왕 때 개명하여 야산현이라 부르다가 낭산현이라고 부른다."는 내용을 통해서 볼 때 더욱 그렇다.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면 낭산산성은 기록으로는 익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산성일 것이다.


(5) 연동리 석불좌상(보물 제 45호)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석불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백제시대의 아주 귀중한 석불좌상이다. 머리 부분을 제외한 몸체 높이는 156cm이며, 광배의 높이는 326cm인 화강암 불상으로 머리 부분은 최근에 만들어 붙인 것으로 원래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이 석불좌상은, 왼손의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중지와 무명지를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태안의 마애불이나 서산 마애불의 뒤를 이어 나타난, 완전한 입체적 석불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거대한 몸체의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묵직한 체구와 더불어 두발이 드러나지 않은 결과부좌한 견고한 다리 부분은 안정감 있는 자태이다. 불신을 위감은 법의는 통견으로 몸에 밀착에어 있으며, 배 모양의 거신광배는 중앙에 원형의 두광을 따로 마련하고, 이 안에는 16엽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그 둘레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적인 두광을 갖고 있다. 신광은 선으로 구분하고 그 밖에는 장식적인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일곱 구의 화불을 새겨 놓았다. 이와 같은 광배는 삼국시대 금동삼존불의 광배와 흡사한 것으로, 이 불상의 제작시기는 7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잇다.

이 불상의 머리부분이 상실된 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을 침입해 왔는데 안개가 짙게 끼여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 안개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걷히질 않았다. 그러자 왜장은 이것이 필시 이 부근에 있는 신이 조화를 부리는 이상한 것이 있을 것이라 하여 부하를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였더니, 이상한 것은 없는데, 이 석불만이 주변에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에 격분한 왜장이 칼로써 석불의 목을 쳐 밭에 버렸다. 그러자 안개가 걷혀 진군했었다."고 한다.

이 연동리 사지는 1989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가 되었다. 조사 결과 이 절터는 동서 13.8m, 남북 12.8m의 정방형에 가까운 금당만을 둔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로 4개소의 높은 기둥은 굴립주를 세운 기둥 구멍이 밝혀졌으며, 평주는 주좌가 없는 네모꼴의 주춧돌을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굴립주를 사용한 건축 구조는 우리나라 사원건축에서 처음 보이는 것으로 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폐사된 시기는 고려시대인 12~13세기경으로 보인다.

(6) 금마 도토성(지방기념물 제70호)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의 해발 87m. 굿대숲에 있는 테머리식으로 감은 성을 말한다. 이 봉우리는 북쪽으로 미륵산, 서쪽으로 오금산, 동쪽으로 금마산이 둘러 있다. 다른 말로는 '저토성' 혹은 '굿대숲 토성'이라고도 한다. 성의 주위는 375m로서 원형에 가까운 평명인데 남쪽 성벽 중앙부는 돌출되어 이 자리는 남문지로 보여지고 있으나 1991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부분적인 성곽 단면조사에 의하면 그 흔적은 발견 되지 않고, 다만 석축부분만이 노출되었다.

이 성의 축성과 관련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발굴 과정에서 '금마저'라 새겨진 명문와, 백제시대의 인각와, 토기류 등이 출토되어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가 고려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여단을 설치하여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지냈다.

(7) 백제토기 도요지(지방기념물 제14호)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미륵사지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1983년도에 전주시립박물관에 의해서 2기의 가마터가 발굴되었다. 발굴과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가마의 형태는 독사머리형 평면에 위로 올라가면서 경사를 짓는 등요에 속하는 것으로 천장은 아치형이다. 연대는 6세기 중엽으로 충정하며, 일본 스에키의 원류가 백제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명할 수 있는 귀중한 요지이다.


(8) 익산토성(사적 제 92호)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에 있는 산성인데, 둘레는 약 661m의 성으로 흙과 돌을 같이 사용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현재 산성 내에는 남문지와 수구지,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오금산성', '보덕성'이라 불리어 지는 데, 오금산성은 백제 무왕이 어려서 이곳에서 마를 캐면서 오금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보덕성은 보덕국왕 안승이 670년 6월 금마저에 자리잡은 후 684년 11월까지 보덕국이 자리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1980년과 1984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2차에 걸친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출토된 유물은 거의 토기편과 기와편이었다. 이러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이성의 축조 시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로서 백제 무왕과 관련하여 쌓아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유물이 같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시대말기에 축조되어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의 주변에서 거친무늬거울과 한국식 동검이 출토된 사실이 있다.

(9) 미륵산성(지방기념물 제12호)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의 미륵산 산정의 우제봉에서 동쪽으로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하여 쌓았다 하여 '기준성'이라고도 불린다. 미륵산은 표고 약 430m의 산으로 남쪽에는 만경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멀리 금강이 흐르고 있는 익산평야의 주산이다. 그리고 동으로는 여산의 천호산이 줄기를 두르고 운장산 등 노령산맥과 연결된다. 남북에 강을 끼고 있는 미륵산은 남.서.북의 세방면에 지류가 있어 해로로부터 진입로를 이룬 교통의 중심지이며, 동쪽은 소백산맥을 거쳐 신라.가야지방을 공방하는 후방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산성은 성곽의 총길이가 1,776m로서 성의 외벽은 갠돌을 면에 맞추어 쌓았는데 거의 수직을 이루고 있다. 성문에는 옹성을 설치하여 방어에 용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내에는 몇 개의 축대를 쌓아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여기에는 건물지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에 대한 1990년과 1992년의 2차 발굴조사에 의하면 백제시대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백제 이후부터 조선 초기까지 4차에 걸쳐 개축된 사실이 밝혀졌다. 고조선의 준왕이 쌓았다는 설이 있으나, 성의 형태, 출토 유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후에 그 중요성 때문에 여러 차례 개축하여 조선시대가지 사용하였다. 현재 미륵산성에는 잡석으로 이뤄진 성벽과 아울러 남쪽과 동쪽의 문지가 발견되며, 치 11곳, 우물 2개가 남아 있다.

탑 주변 지역 특징

익산지역은 백제의 별도지 혹은 천도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당시 궁성으로 운영된 곳이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구릉에 자리한 '모질메산성' 혹은 '왕궁평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 문화연구소에 의해서 실시된 부분적인 발굴조사 결과, 남북 450여m, 동서 약 230m의 장방형의 구획과 궁장을 갖춘 행정적 시설이었음이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1989년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서 종합적인 발굴 결과 현재 드러난 상태로 볼 때 백제 수도에 두었다는 5부를 의미하는 인각와 등의 유물들과, 궁궐성벽의 노출을 통해서 궁성으로서의 성격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익산의 이러한 백제의 별도설, 천도설은 고산자 김정호가 지은『대동지지』에 "지금의 익산에 무왕은 별도를 두었다"라는 것과 더불어 중국 육조시대의 『관세음응험기에』 보이는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새로이 정사를 운영하였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본래 익산지역은 청동기 시대 이래로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의 문화중심지로서 수로를 통한 교통이 편리하며, 너른 평야와 접하고 있어 경제력의 확보가 쉬웠으며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특히, 성왕의 관산성 패전 이후 백제는 군사적인 정책을 북쪽의 고구려를 향하기보다는 서쪽의 신라를 향하게 되어 신라와 전투가 심해지게 됨에 따라 옛 마한세력의 절대적 지지와 호남평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옛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지역이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 강력한 백제를 건설하려고 하였던 자신의 정치적인 세력과 더불어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익산지역에는 무왕과 그 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쌍릉과 왕궁평성과 같은 궁성, 그리고 주변에는 익산토성, 도토성 등의 성이 남아있다. 아울러 미륵사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워졌다는 제석사지 같은 절터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볼 때 백제의 도읍지로서의 성격을 갖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백제 무왕은 익산지역의 경영을 통하여 과연 백제를 어떻게 이끌어 갔을까? 무왕3년의 아막산성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무왕 12년까지는 자체적인 힘을 보강하면서 통일왕조가 나타난 중국의 수.당나라와 외교적인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무왕 12년 이후 37년까지 양국간에 전투가 대단히 빈발해져 약 11회의 전투를 치루고 있다. 그 결과 백제의 완전한 승리가 6회, 백제의 패배 3회, 백제의 열세 1회, 결과를 알 수 없는 전투가 1회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는 주로 신라의 영토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볼 때 이 전투의 주도권은 백제가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554년 관산성에서 성왕의 전사 이후 위축된 백제는 세력을 강화시키고,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데, 핵심은 당연히 익산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무왕은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외교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익산지역의 문화 또한 활짝 피어나는 시기였다. 즉 통치에 대한 자신이 넘치고 성숙된 문화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자신감은 미륵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나 석탑의 조형, 그리고 연동리 석불좌상 등에서 나타나는 당당한 자세를 통해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왕이 익산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통치체제를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그 뒤를 계승한 의자왕이 이러한 정책을 계승한 것 같지는 않다. 이 지역에는 의자왕과 관련된 설화나 전하는 내용이 없을 뿐 아니라, 의자왕 즉위 초에 『일본서기』라는 역사책에 "의자왕이 왕족들과 다시 이름이 높았던 사람들을 섬으로 추방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보더라도 의자왕은 무왕의 통치정책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들 가졌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의자왕이 섬으로 추방하였다고 하는 세력은 무왕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세력이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탑 관련 인물

(1) 무왕(武王)

백제 제30대 왕(600∼641). 이름은 장(璋),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 신라 국경을 여러번 침공하였고,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한 원병을 여러 번 청하였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난 후에는 친당(親唐)을 하여 624년(무왕 25)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고, 당 고조로부터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에 책봉되었다. 627년 군사를 일으켜 신라에 잃었던 옛땅을 탈환하려 하였으나, 당나라의 3국 화해의 권유로 중지하였다.

630년 사비궁을 중수(重修)하였으며 638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그 밖에도 관륵(觀勒)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문·지리·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게 하였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유흥에 빠져 백제 멸망의 원인을 만들었다.


(2) 안승(安勝)

고구려 부흥운동 때 추대된 왕. 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 670년(문무왕 10)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한성(漢城;황해남도 載寧)을 근거지로 당(唐)나라에 항쟁하였다.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문무왕에 의하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당나라 고간(高侃)의 침입을 받고 이에 대처하는 방안에 대하여 검모잠과 대립, 검모잠을 죽인 뒤 신라에 투항하였다. 674년(문무왕 14) 신라에 의하여 보덕국왕(報德國王)에 봉해지고 683년(신문왕 3)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 성을 부여받고 신라 귀족이 되었다.

부장품 및 유물, 유적

발굴 전까지는 기단부가 파묻혀 있어 토단처럼 되어 있었으나, 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원형이 복원되었다. 발굴에 의하면, 탑기(塔基)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不等邊 高柱形) 주춧돌이 놓이고, 이 우주석(隅柱石)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으며, 우주석이 1층 탑신의 우석(隅石)을 받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근처에서 갑석·면석들의 부서진 돌이 많이 발견되어, 각 면에 탱주(撑柱) 2개씩이 있는 단층 정4각형 기단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부서졌기 때문에 일부를 보강하는 한편, 토단(土壇)을 쌓아서 보호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 탑에서는 보수 때에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에서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탑신부에서는 정4각형 돌에 좌우로 2개의 네모 구멍을 뚫고 유개금동함(有蓋金銅函)을 각각 장치했었다고 한다. 동쪽 금동함(金銅函) 안에는 금제유개방합(金製有蓋方盒)이 있었고, 그 안에 금제연화대좌(金製蓮華臺座)와 연봉오리형 마개를 갖춘 녹색의 장두원저병(長頭圓底甁)이 있었다고 한다.서쪽 금동함 안에는 금제유개장방합(金製有蓋長方盒)이 있었고, 그 안에 절첩식 금구(折帖式 金具)로 연결되고 금대(金帶) 2줄로 묶은 순금판경(純金板經)이 있었다고 한다.

기단에서는 품자형사리공(品字形舍利孔)이 있는 정4각형 심초석(心礎石)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서는 광배(光背)·대좌(臺座)를 갖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 1구(軀)와 청동령(靑銅鈴) 1개가 발견되었다. 북쪽 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당했는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옥개석에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초석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이용하였으며, 좌우 두 곳에 네모난 홈(凹)을 만들고 유개금동함(有蓋金銅函)을 각각 장치하였다. 동쪽 금동함 속에는 금제유개방합(金製有蓋方盒)이 들어 있었으며, 그 속에 다시 금제연화대좌(金製蓮華臺座)와 연화형 뚜껑을 갖춘 녹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인 장경원저병(長徑圓底甁)을 보관하고 있었다.

서쪽 금동함 안에는 금제유개장방합(金製有蓋長方盒)이 있고, 이 안에는 절첩식금구(折帖式金具)로 연결된 금제 금강경(金剛經)을 두 줄의 금띠로 묶은 것이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는 사각형 모양으로 내함과 외함의 2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외함은 도금이 많이 벗겨진 상태이나 내함은 뚜껑이 달려 있고 표면에 연주무늬.연화무늬.원무늬[圓紋]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내함 안에는 녹색의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 연화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다. 이 사리장치를 안치했던 금제방합(金製方盒)은 1층 지붕돌 윗면 2개의 구멍 안에 각각 들어 있었다. 금제의 판경합(板經盒)은 4각형에 가까운 장방형이며, 뚜껑은 4변의 직각 변두리 위에서 너비 2.1cm의 모꺾기를 했고, 뚜껑 상부(上部) 중앙에는 21판(瓣)으로 된 2중 국륜(菊輪)을 양주(陽鑄)했고, 그 위에 금환(金環)을 달아서 꼭지로 삼고 있다. 지붕 위에는 반쯤 핀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고, 지붕 네 모서리와 합신(盒身) 4주(周)에는 보주(寶珠) 또는 화염문(火焰文)을 연상시키는 당초문(唐草文)의 한 변형을 중앙부의 4각권(角圈) 안에 선각(線刻)으로 부출(浮出)시키고 그 주위 간지(間地)에는 작고 큰 2가지 환문(丸文)을 압날(押捺) 장심해서 채웠다.


그 중 유리제 사리병이 들어있던 금제합은 뚜껑 위에 반쯤 핀 연꽃 봉오리로 있고, 몸체와 4기둥에는 불꽃모습의 덩굴무늬를 장식하고, 그 주변에는 구슬무늬를 눌러 새겼다. 금제경판이 들어있던 금제합은 뚜껑의 중앙에 국화를 새기고, 손잡이로 사용하기 위해 금고리를 달았다. 이 합들은 바깥쪽 외합 안에 들어있어 상태가 완전하고 도금 상태도 좋아, 원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고려 공예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사리합의 외함과 판경함(板經函)의 외함(外函)은 동제(銅製) 장방형의 매우 간소한 의장(意匠)으로서, 금제(金製)의 내함(內函)들을 보호하는 기능이 위주로 되어 있다. 이들 유개(有蓋) 외함(外函)의 뚜껑은 약간의 완곡(緩曲)한 배불림 형태이며 이들 외함(外函)의 내부는 도금(鍍金), 외부에는 주홍도장(朱紅塗裝)을 했다.

사리병 역시 또 하나의 사리함 속에 있었는데 내면 바닥에는 앙련좌(仰蓮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높이 7.7㎝의 녹색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하였는데 높이 1.8㎝의 연봉오리형 금제 마개로 막았다. 사리병은 녹색의 질 좋은 유리로서 이른바 장경병(長頸甁)의 양식과 곡선미를 매우 기품있게 나타낸 작품인데, 연꽃 봉오리 모양의 금제 마개가 덮였고, 또 앙련화좌(仰蓮華座)를 떠받친 정4각형의 병좌(甁座) 하대(下臺)를 갖추고 있다.

금강경경판은 1층 지붕돌 윗면 중앙에 뚫린 2개의 구멍 중 서쪽구멍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 역시 2중의 금동함 속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얇은 금판의 각 표면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蜜經〉이 17행으로 새겨져 있다. 이 판경(板經)은 순금판(純金板) 19장에 각기 17행(行)(자경(字徑) 0.6cm×0.7cm 내외)의 금강경문(金剛經文)을 뚜렷하게 압날(押捺)한 것으로서, 그 자형(字型)으로 보아 이것을 압날(押捺)하기 위한 자모(字母)는 활자 형태 또는 정밀하게 조각된 판목(板木)에 의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 금판 19매는 경첩으로 연결되어 전체를 접은 다음, 2줄의 금띠로 묶은 것으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보기 드문 예이다. 이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강경판은 보존상태가 좋을 뿐 아니라 새겨진 글자들이 정교하여, 발견된 유물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고려시대 불교 공예품이다.

기단부인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공은 品子형으로 되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주형광배(舟形光背)를 갖춘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立像)과 청동방울(靑銅鈴)이 들어 있었으며, 북쪽 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당하였다.

청동불입상은 총 높이 17.4㎝로 복련(覆蓮)과 앙련으로 된 원형대좌 위에 직립하였고,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고 상호가 원만하며 조각도 정교하다. 이 불상에는 화염문(火焰文)과 당초문(唐草文)을 투각한 거신광(擧身光)이 있었으나 보존상태는 매우 불량하다. 동제불상(銅製佛像)은 여래형(如來形)이며, 통견법의(通肩法衣)에 오른손은 들어서 현장(現掌)하고, 왼손은 드리워서 현장(現掌)했으며, 전신 광배(光背)가 구존(具存)되어 있는데, 두광부(頭光部)는 당초문(唐草文)의 변형 같은 것으로 구성한 원형을 이루었고, 그 변두리의 신광(身光)은 화염문(火焰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불상은 보존상태가 좋을 뿐만 아니라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고려시대 불상연구에 자료가 되고 있다.

◈ 각각 유물명칭 및 소장 박물관명

A. 금제사리합(金製舍利盒) : 국립중앙박물관
B. (香木포함) 금동사리외합(金銅舍利外盒) : 국립중앙박물관
C. 금동제경판내합(金銅製經板內盒) : 국립중앙박물관
D. 금동제경판외함(金銅製經板外函) : 국립중앙박물관
E. (金製마개포함) 유리제사리병(瑠璃製舍利甁) : 국립중앙박물관
F. 금제사리병(金製舍利甁)받침 : 국립중앙박물관
G. (金帶포함) 금제금강경판(金製金剛經板) : 국립중앙박물관
H.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 국립중앙박물관
I. 유리(瑠璃)구슬 : 국립중앙박물관
J. 청동요령(靑銅搖鈴) :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