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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석탑

개요
탑명 개요 인물/사상/설화 유물/문양/의례
정림사지
5층 석탑
지정 국보 9호(1962. 12. 20 ) 소정방
나당연합군
미륵신앙
매지창사설
‘정림사’銘기와
석불좌상 /소조불상조각
백제 벼루/기와/삼족토기
백제문화제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시기 백제7C 중엽
구조 5층 석탑 / 8.33m
의의 백제탑 전형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두 개의 백제 석탑 중 하나이다. 중국 당(唐) 나라 장군인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탑신(塔身) 4면에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놓아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미술사적 의의는 이 석탑이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탑이라는 점이다. 또한 목조탑의 구조를 지녔지만 돌로 표현된 탑으로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기단을 놓았는데,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2단의 높은 굄대 위에 면석이 놓여 있다. 면석의 높이는 낮고 각 면에 양쪽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마련되었으며 8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갑석은 두꺼운데, 이러한 기단부의 형식은 목조건축물 기단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갑석의 상면은 약간 경사졌으며 탑신부를 받는 굄대는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다. 초층 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3층은 4매석, 4층은 2매석, 5층은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은 점이 눈에 띈다.

각 층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 개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다. 특히, 두공(공포 부재의 총칭)을 변형시킨 받침이나 낙수면 네 귀퉁이에서의 기와지붕의 우동마루형 등은 목조가구의 수법을 잘 보여준다.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反轉)되어 더욱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5층 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다.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것에서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정림사지 탑은 큰 규모의 석조물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일본에 현존하는 호류사[法隆寺] 5층탑과도 비교된다. 이 석탑은 목조를 석조로 변형해 만든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석탑 연구의 매우 귀중한 예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탑 관련 인물

무왕(武王, ?~641)

백제 제30대 왕. 재위 600~641. 이름은 장(璋) 또는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무왕 직전의 혜왕과 법왕은 모두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 무렵 백제는 내외 정세가 악화되고 귀족 간에 내분이 일어났으며 왕실 권위가 약화되었는데, 거듭되는 왕의 단명은 그러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이 무왕의 즉위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던 것 같다. 41년간에 달하는 무왕의 재위 기간에 왕권이 안정되었는데, 이는 무왕 재위 기간 동안 집요하게 추진해 온 신라 침공과 같은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에 힘입은 것이다.

무왕은 신라 서쪽 변방을 빈번하게 침공함으로써 백제군이 낙동강 방면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적인 유착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무왕 대의 백제는 국제 문제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화된 왕권의 표징으로, 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歷宮)을 중수했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같은 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했다는 왕흥사(王興寺)도 완성되었다. 이 절은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 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절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왕이 건립을 주도했고 몸소 불공을 드린 곳으로서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므로 귀족 내부의 분쟁 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 대왕포(大王浦 : 충청남도 부여 백마강에 지금도 그 지명이 전함)라는 지명과 함께 전하는, 무왕과 신하들이 그 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는 표면적으로는 태평한 백제 지배층의 상황을 보여준다.

무왕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이 곳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의 성격을 띠는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또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 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던 것이다. 비록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옥천회전(沃川會戰)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 미륵사의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흔히들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 설화 속의 무강왕과 관련 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 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 설화와 무왕 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 설화 외에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首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탑에 얽힌 일화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다량의 기와편,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陶俑)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탑 사찰의 연혁 및 특징

◈ 명 칭 :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 지 정 : 사적 제301호 (1983. 3. 26)
◈ 면 적 : 59,245㎡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 시 대 : 백제시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현재 정림사(定林寺)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이 사지(寺址)는 창건 당시의 명칭은 사료(史料)에서 찾을 수 없으며 정림사라는 사명은 1942년 일본인에 고려(高麗) 재건시(再建時) 제작사용(製作使用)된 평와(平瓦)중에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문자명(文字銘)이 새겨진 것이 발견 되므로서 붙여진 사명이다. 여기에서 대평(大平) 8년은 요(遼)의 연호이며 고려 현종(顯宗)19년(1028년)에 해이다.

정림사는 백제시대의 사찰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1980년(年)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금당지(金堂址), 중문지(中門址), 강당지(講堂址), 회랑지(廻廊址)등이 확인되었고 또한 석탑 기초의 판축기법(版築技法), 다량의 와당과 격목와(格木瓦) 등이 발견되므로 해서 백제시대의 창건임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문자와(文子瓦)의 발견수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기와 중에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고려 재건시의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람배치형식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南)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하였다.

주요 건물간의 거리를 보면 중문, 석탑간의 중심거리가 19.98m, 석탑, 금당간이 26.27m, 금당 , 강당간 중심거리가 31.70m 였으며 배치상 특이한 것은 가람중심부를 둘러싼 회랑의 전형(全形)이 정확한 장방형을 이루지 않고 남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동 , 서 양회랑 사이의 간격이 벌어져 엄밀히 말하자면 평면형이 제형(梯形)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각건물의 평면내용을 보면 중문이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5칸인데 건물사면에 차양칸(遮陽間)1칸씩 하층기단에 기둥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불이 건물지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회랑은 군랑(軍廊)으로 장방형(제형형식(梯形形式))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동, 서 회랑의 칸수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 생활용구와 소조불상편(塑造佛像片)이 다수 출토되었다.

주변 발굴 유물

(1) 중문

중문(中門)터는 석탑 중심에서 남쪽으로 19.98m 떨어진 거리에 있다. 석탑의 중심선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12㎝ 정도 치우쳐 있다. 발굴 조사에 의하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 회랑터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回廊)터는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의 길이는 서로 일치하여 백제 사찰의 전형적인 비례를 보여 주지만, 중문과 탑, 그리고 탑과 금당 사이의 거리 비율은 백제 가람 배치에서 보이는 1 대 1의 비율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다. 또한 평면상에서 보았을 때 회랑의 모습이 사각형을 이루지 않고 사다리 꼴을 이루고 있다.

(3) 부여 정림사지 석불좌상(扶餘 定林寺址 石佛坐像)

◈ 지 정 : 보물 제108호(1963. 1. 21)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 시 대 : 고려시대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정림사(定林寺)는 부여천도(扶餘遷都) 즈음인 6세기 중엽(中葉)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百濟)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었고, 그후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때의 번창을 알려주는 것이 석탑(石塔)이라면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 석불상(石佛像)이다. 현재의 머리와 갓은 후대(後代)의 것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상(毘盧舍那佛像)인 것이 확실하다.

(4) 정림사지 불상군

1979년 발굴 때 회랑지 서남 모서리 안쪽에서 출토된 불상군. 납석제삼존불상(높이 11.4㎝, 너비 8.2㎝)은 화재에 의해 손상이 심하며 우협시보살상, 본존의 윗부분, 좌협시보살상의 머리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삼존상의 아래에는 볼륨이 강한 연화대좌가 있다. 본존의 법의는 두꺼우며 대칭을 이룬 옷주름은 좌우로 심하게 뻗어 있다. 좌협시보살상은 백제지역에서 유행한 봉보주(奉寶珠) 보살상으로 역시 천의의 뻗침이 심하며 다리 앞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어 있다. 이러한 양식에 의해 이 삼존불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많은 양의 소조상 파편이 출토되었지만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중에서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은 아래로 하여 보주를 들고 있는 봉보주보살상은 귀중한 자료이다. 불두(佛頭)는 대부분 같은 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갸름한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짓고 있다. 다리 아래의 일부분만 남아 있는 소조반가상 파편도 출토되었다.

(5) 세발토기

백제지역에서 출토되는 발이 세개 달린 토기. '삼족토기(三足土器)'라고도 한다. 공주시대에 출현하여 유행하였다. 백제식 뚜껑접시에 세발이 부착된 모양으로 세발의 형태는 원형과 각형(角形)이 있다. 각형으로 된 세발은 칼이나 대나무 같은 작업도구를 사용하여 4각이나 6각.7각을 만들었는데 원형의 것과 같이 끝이 뾰족하다. 세발은 따로 만들어 부착한 것이 많으며 세발의 끝이 밖으로 약간 벌어져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이러한 세발토기는 뚜껑이 있고 없음에 따라 뚜껑식과 무뚜껑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연대가 앞서는 무뚜껑식은 대체로 둥근 밑바닥을 가졌으며, 입이 크고 몸통은 공을 반으로 절단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그릇의 깊이가 다른 세발토기에 비해 깊다.

입술을 잘 막음질하였으며 그 숫자는 매우 적다. 뚜껑식은 몸통의 높이가 낮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바닥이 거의 편평하고 깊이가 얕다. 몸통의 뚜껑받이는 곧추 세워진 것과 약간 안쪽으로 쏠린 것이 있는데 모두 뚜껑을 받치기 위한 도드라진 단이 있다.

뚜껑에는 꼭지가 달린 그릇이 일반적인데 원형꼭지와 보주형 꼭지가 있다. 뚜껑은 대개 표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드림새가 곧게 내려오거나 안쪽으로 쏠린 것, 그리고 밋밋하게 이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크기는 비교적 다양하며 출토지와 형태 등으로 보아 일상생활용기가 아닌 의례용 식품공헌용 그릇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발토기는 백제지역 이외에서는 거의 찾기 힘들고 특히 금강유역에서 집중 출토하며 남쪽으로는 노령산맥 이북에서 유행하였다.

인근 지역의 특징

1975년에 발굴, 조사된 초촌면 송국리 선사취락지는 농경생활을 하던 청동기문화인의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이 곳에서는 주거지를 비롯해 민무늬토기, 간석기, 돌널무덤 등이 발굴되었으며, 탄화미도 발견되어 벼농사의 기원을 무문토기문화와 확실하게 연결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이 곳과 연관성이 있는 초촌면 산직리와 규암면, 은산면, 충화면, 석성면 등지에 고인돌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의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초산국(楚山國)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부여군은 백제시대의 소부리(所夫里)ㆍ대산홀(大山忽 : 지금의 鴻山)ㆍ가림홀(加林忽 : 지금의 林川)ㆍ진악산(珍惡山 : 지금의 石城)에 해당된다. 특히, 부여읍 일대는 소부리 혹은 사비(泗歷)라고 했으며, “부리”라는 말은 “밝다”, “붉다” 등에서 나왔다고 한다.
538년(성왕 16)에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그 뒤 6대에 걸쳐 120여 년 동안 백제의 수
도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번성기에는 가구 수가 13만여 호에 달했으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의 문무왕이 총관을 두었고 686년(신문왕 6)에는 사비주를 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 때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면서 부여를 그 속군으로 하였다. 이 때 석산현(石山縣 : 지금의 석성)ㆍ열성현(悅城縣 : 지금의 청양군 정산면) 등이 부여군의 속현이 되었다.

신라 말에는 후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곧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 뒤 성종 때 하남도(河南道)에 예속되었고, 예종 이후에는 청주목의 속군인 공주에 속하여 부여군이라 하였다.

고려 현종 때는 일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며, 1028년(현종 19)에는 정림사(定林寺)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엽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는데, 1376년(우왕 2)에 최영(崔瑩)이 홍산면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토벌하였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해 오다가 태종 때 팔도제(八道制)를 정비하면서 공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부여군은 부여현ㆍ홍산현ㆍ임천군ㆍ석성현으로 나뉘어 있었고, 4개 군현에 각각 향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6개의 사액서원을 비롯해 많은 서원, 사우가 세워졌다.

1895년(고종 32) 팔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획하면서 공주부 관하의 부여군으로 승격하였다. 1896년 13도제로 변경했을 때 충청남도의 군이 되었다. 1914년 부, 군통합령의 실시로 홍산, 임천 전지역과 공주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16개 면을 관할하였다.

1960년 1월 1일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1973년 7월 1일 석성면 현북리가 부여읍에, 장암면 사산리가 세도면에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을 뿐 큰 변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