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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모전석탑

개요
탑명 개요 인물/사상/설화 유물/문양/의례
분황사
모전 석탑
지정 국보 30호(1962. 12. 20) 원효
자장
옥류/가위/바늘/고려시대 화폐
돌사자 2기/돌물개 2기
인왕상
경주세계엑스포
위치 경북 경주시 구황동
시기 신라 선덕여왕(634)
구조 (3층)/2.6m/모전석탑
의의 신라탑시원

643년 선덕여왕 3년, 분황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 보수되어 원형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재 탑신부가 3층까지 남아있는 상태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안산암을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塼石) 모양으로 깎아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1915년 해체 수리 때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되었고, 이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의 방형 석함 속에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쌓았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을 만들고 문비를 달았는데, 감실 속에는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문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하여 끼운 인왕상이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매우 동적이며 근육의 표현에도 양감이 강조되어 사실적인 조각표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중국의 톈룽산[天龍山] 석굴에 있는 수대(隋代)의 인왕상들과 비교된다.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조각솜씨가 부드럽고 사실적이다. 옥개부는 전탑 특유의 구조인 상하에 층단(層段)이 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길이가 약 13m이며, 높이는 약 1.06m의 야석(野石;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전탑 기단의 통식(通式)을 보여 주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 밑이 약 36㎝ 높아져 탑신쪽으로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그리고 기단 중앙에 1층 탑신을 받치기 위하여 화강암으로 한 층을 마련하였다.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동쪽면 사자상 - 4모퉁이에는 석탑을 보호하는 의미로 사자가 1마리씩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4마리의 사자가 아니라 6마리의 사자가 있었다고 하며 이 중 2마리는 석탑 수리 후에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동쪽 면의 2마리 사자는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쪽면 사자상 - 서쪽면의 사자는 석탑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늠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통일 신라 시대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탑신부는 길이 약 30~45㎝, 두께 약 4.5~9㎝의 진회색 안산암을 잘라 각층 옥신과 옥개부를 쌓아 올렸기 때문에 외형상 전탑과 같다. 위의 폭이 아래 폭보다 약간 좁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었는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이것은 내부에 공간이 있어 실제로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최근 머리를 새로이 만들어 올려놓았다. 문의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거의 원각(圓刻)에 가깝게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신체묘사의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는 7세기 신라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 층단이 있다. 옥개 받침은 1, 2층은 6단, 3층은 5단이며 낙수면은 1, 2층이 각각 10단이고 3층은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다(방추형).

탑의 가장 꼭대기 부분에 해당하는 상륜부는 현재 석탑에서는 앙화(仰花;연꽃장식)만이 남아 있으나 1915년 이전에는 노반·복발·앙화석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기단은 매우 크고 높으며 네 귀에 사자가 배치되어 있고, 1층 4면에는 문을 달아 감실을 만들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는 차이를 보여준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탑 관련 인물

(1)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선덕여왕 16). : 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 진평왕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진휼(賑恤)했으며, 633년에는 주(州)ㆍ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 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다만 즉위 이후 거의 매년 당나라에 조공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신라는 642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그 해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 성을 빼앗겼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南陽)도 고구려ㆍ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陜川)이 함락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군주(軍主)로 임명해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 불교의 상징인 황룡사구층탑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적 견제를 가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당 태종이 지적한 여왕 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1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이 이를 진압했으며,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

(2) 선덕여왕과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

선덕여왕을 사모하다가 죽어서 화귀(火鬼)가 된 지귀(志鬼)의 사랑을 그린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처음에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되었으나, 『수이전』이 소실됨에 따라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 권20에만 전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 권4 이혜동진(二惠同塵)조에도 관련 설화가 일부 보이는데 단순한 영묘사(靈廟寺) 화재 사건에 관련된 기사에만 그치고 있어 설화의 전모는 알 수 없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에 지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고민한 나머지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하루는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지귀는 절간 탑 밑에서 여왕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여왕이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팔찌를 빼어 놓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깨어난 지귀는 팔찌를 발견하고 자신이 잠든 사이에 여왕이 다녀갔음을 알고 사모의 정이 더욱 불타올라 마침내 화귀로 변해 버렸다. 설화가 끝나는 부분에 왕이 술사(術士)에게 명하여 주사(呪詞)를 짓게 하였는데, 주사의 내용은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멀리 바다 밖에 내쫓아 가까이하지 않으리.”였다. 그 당시 풍속에 이 주사를 문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이 설화는 그 배경이 신라로 되어 있고 선덕여왕이라는 실제 인물이 나오는 등 다분히 풍토화되어 있으나 그 근원은 불전설화에 두고 있다. 즉, 용수(龍樹)의 『대지도론 大智度論』 권14와 중국의 불교설화집인 석도세(釋道世)의 『법원주림 法苑珠林』 권21에 실려 있는 「술파가설화 術波伽說話」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어부 술파가가 왕녀의 미모에 반해 식음을 전폐하자 왕녀가 만나자고 한다. 천사(天祠)에서 왕녀를 기다리던 술파가가 잠이 들었는데 왕녀는 그에게 목걸이를 빼어 놓고 간다. 잠이 깨어 그 사실을 안 술파가는 몸에서 불이 나 타 죽고 만다는 것이다.

「술파가설화」는 다양한 사건, 긴 분량, 술파가 어머니와 왕녀 아버지의 등장, 천신의 구실 등 「심화요탑설화」보다 풍부한 내용과 합리적인 사건 진행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것은 『대동운부군옥』이 백과사전적 문헌이기 때문에 수록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줄거리만 간추린 탓이며, 『수이전』에 수록되었을 본래의 설화는 훨씬 더 부연된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수록 문헌의 성립 연대로 보아 「심화요탑설화」는 「술파가설화」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술파가설화」가 수록되어 있는 『대지도론』이 이미 신라에 수입되어 경흥(憬興)과 대현(大賢)의 저서에 인용되고 있으므로 불경의 대중화 과정에서 「술파가설화」가 민간에 유출되어 구전되었고, 그 동안에 신라적 배경과 내용, 인물로 변개되어 「심화요탑설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수이전』에 문헌설화로 수록되게 된 것이다.

두 설화는 이처럼 선후 영향 관계를 맺으면서 설화적 주지(主旨)의 수용에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근원설화가 되는 「술파가설화」는 여자가 이성적 판단을 못 하고 감정에 휘말려 음심(淫心)에 빠지는 것을 종교적 입장에서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러기에 왕녀와 술파가와의 만남에 있어 천신이 술파가를 잠들게 함으로써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심화요탑설화」의 경우도 설화적 귀결은 그렇게 되어 있으나 종교적 의취가 탈색되면서 실제의 현실과 역사적 사실에 결부되어 다분히 풍토화되어 있다. 설화적 내용에서 선덕여왕의 미모와 신라 남성들의 자유분방한 애정 표현, 그리고 실제로 선덕여왕이 행차하던 영묘사와 그 절의 화재 사건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된다. 또 설화의 끝 부분에 부가된 민속적 기사도 사실과 부합된다. 지귀가 타 죽어 화신(火神)이 되고 주사를 지어 문 벽에 붙임으로써 화재를 막았다는 것은 화신의 유래를 말하는 민속적 신앙의 표현이며, 주사는 주문(呪文).주부(呪符) 등과 함께 민간 신앙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설화를 연기설화(緣起說話).영험설화(靈驗說話)로 보기도 한다.
이 설화는 국내에서 유화(類話)가 없는 독특한 것으로 종교적인 불교설화가 신라 시대에 토착화하면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결부되고, 이것이 다시 민간신앙에 연결되면서 민간설화로 토착된 것이다.

탑 관련 사상

(1) 법성종(法性宗) - 신라 5교의 일파.

신라에서는 원효가 분황사에서 시작했다. 줄여서 성종이라고도 한다. 일체 만유는 동일한 법성에서 생겼으며 일체 중생은 모두 성불할 성품이 있다고 말하는 종지(宗旨)를 가졌다. 이것을 연구하는 학파를 삼론학파라고 하며, 특히 고구려에서 성행했고 이를 일본에도 전했다. 백제에서는 혜현(慧顯)이 수덕사에서 연구했다. 고려시대에 성종은 대각국사 당시 육종학(六宗學)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묘지〉에서만 보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종파라기보다는 학파로 보는 경향이 많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불교 교학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유학승들에 의해 중국 불교계의 움직임이 전해졌다. 이에 따라 신라 불교계에도 종파가 성립하게 되었는데, 삼국통일 이후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교종의 종파를 총칭하여 5교라 부른다. 흥왕사대각국사묘지(興王寺大覺國師墓誌)에 의하면 의천(義天)이 탐구하던 종파로 계율종(戒律宗 ). 법상종(法相宗) . 열반종(涅槃宗) . 법성종(法性宗) . 원융종(圓融宗) .
선적종(禪寂宗)의 6종을 들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통일신라에서 고려에 이르는 교종의 종파로 선적종을 제외한 5종파를 교종에 안배하여 왔다. 한편 의천은 법안종(法眼宗)을 비롯한 선종 승려들을 포섭하여 천태종을 개창했으므로 고려의 천태종은 중국과 달리 선종계열로 구분된다. 무인집권기에는 지눌(知訥)이 조계종(曹溪宗)을 성립시켰으므로, 그 후의 선종 종파를 총칭하여 양종이라 한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종파를 5교양종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견이 많다. 먼저 교종의 경우 5교는 1213년 최충헌(崔忠獻)이 지겸(至謙)을 왕사로 추천하면서 양종5교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화엄종과 법상종을 제외한 종파는 고려초에 찾아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선종의 경우에는 성립시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즉 신라말 고려초의 9산이 의천의 천태종 창립시 단일종파인 선적종으로 합쳐져서 지눌의 조계종과 함께 양종이라 한다는 견해도 있고, 9산파가 통합된 조계종과 천태종을 양종이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조계종은 남종선(南宗禪)을 계승한 선종을 의미하며, 고려초부터 사용된 용어라는 견해도 있다. 5교는 조선초에 이르면 각각 남산종(南山宗).자은종(慈恩宗).시흥종(始興宗).중도종(中道宗).화엄종(華嚴宗)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 때에는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교종과 선종의 모든 종파를 통합하여 선.교 양종으로 정리했다. 한국의 불교는 초기부터 종파적 불교보다는 회통적(會通的) 불교를 지향해왔다. 이와 같은 전통으로 말미암아 5교양종이라 해도 뚜렷한 종파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교의 전반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다른 글> 법성종(法性宗) - 고려 초에 성립된 불교 교종의 한 종파. 고려 대각국사(大覺國師) 당시의 불교학 분야 여섯 가지〔六學宗〕 가운데의 하나였다. 개성의 흥왕사 〈대각국사묘지 大覺國師墓誌〉에 의하면, 당시의 불교공부 분야로 여섯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법성종이 들어 있다.
일찍이 법성종을 삼론종(三論宗)이라고 단정한 바 있는 김영수(金映遂)는 그의 논문 〈오교양종에 대하여〉에서 “뒤에 다시 고찰하여 보니 법성종이 삼론종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곧 해동종(海東宗)인 것을 찰득(察得)하였다.”라고 하여, 법성종이 곧 해동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성종이 해동종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오늘날 그 전거(典據)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자료에서는 법성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법성종이라는 명칭도 다만 〈대각국사묘지〉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에도 법성종이라는 종파는 성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법성종은 성종(性宗)이라고도 하는데 상종(相宗), 즉 법상종과 상대되는 불교교의(佛敎敎義)의 전문분야이다. 중국에서의 삼론학(三論學)과 화엄학.천태교학 등이 거기에 속한다.
그래서 공성종(空性宗).천태성종(天台性宗) 또는 화엄성종(華嚴性宗)이라고 하는 사례를 볼 수가 있다. 그런 점 등으로 미루어 대각국사 당시의 6종 중에 들어 있는 법성종은 법상종(法相宗)과 상대되는 불교의 교리로서, 당시 불교학의 전공분야에 속하였던 학종의 하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종파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전과 후를 통하여 전혀 법성종이라는 종파명(宗派名)을 볼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분황사의 연혁 및 특징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번(幡), 당(幢), 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 『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하루는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다.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755년(경덕왕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6700근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 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승당(僧堂) , 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는 모전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등, 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 있으며, 1974년의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발견되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탑과 얽힌 일화

『동경잡기 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것으로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부장품 및 주변문화재

탑이 세워진 것은 분황사 창건과 같은 신라 선덕여왕 3년(634)으로 보고 있으며, 『동경잡기 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것으로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 고려시대의 중국 주화(鑄貨)가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리장치에 추가하여 고려시대에서도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을 넣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탑과 신라 경덕왕 14년에 조성한 거대한 약사여래 동상, 그리고 1101년 숙종 6년에 건립한 화쟁국사비가 남아 있다. 또한 약사여래 입상을 모신 보광전을 비롯해 요사채, 대종각, 화쟁국사비의 대석(臺石)과 석정(石井)이 있으며, 담장 안 남동편에는 탑재인 안산암 편(片)과 발굴 석조물들이 쌓여 있다. 금당 북쪽 벽에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영험하기로 유명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이 있었고, 솔거(率居)가 그린 노송도와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의 서남측에는 분황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가 서 있다.

당간 지주 - 황룡사에서 분황사로 넘어오는 길 왼쪽에 당간 지주가 서 있는데 분황사의 것으로 추정될 뿐 확실하지는 않다. 당간 지주는 사찰을 표시하는 깃발을 거는 막대기를 받치기 위한 돌기둥이다. 이 당간 지주는 당간을 받치는 간대를 거북 모양으로 한 것이 특이하다.

(1) 분황사 석탑 사리장엄구(芬皇寺石塔舍利莊嚴具)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 안에서 발견된 고신라 시대의 사리장엄구. 석함은 가로 62㎝, 세로 62㎝, 높이 4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5년 분황사탑을 수리하던 중에 제2층과 3층 사이에 있던 방형석함(方形石函) 속에서 발견되었다. 장엄구의 내용은 사리 다섯 알이 들어 있던 은합(높이 2㎝, 지름 3.8㎝)을 비롯하여 각종 옥류와 가위, 금.은바늘 및 침통, 패류.원륜(圓輪), 그리고 숭녕통보(崇寧通寶)와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등 다양하였다. 이들 내용물 중 여성이 사용하는 바늘과 침통이 포함된 점은 이 탑의 건립연대가 선덕여왕 3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왕실의 시납이 아닌가 생각되며, 숭녕통보.상평오수전 등 고려 시대의 동전이 들어 있는 것은 이 탑이 고려 시대에 보수되면서 창건 당시의 사리장치에 추가하여 후납되었음을 시사해준다.

(2) 대종각

분황사를 들어가면 오른편에 새로이 만들어진 대종각이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짝 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범종이 달려있으며, 그 앞에는 목어가 있다.

(3) 범종

범종은 당목(撞木)으로 쳐서 때를 알리거나 대중을 모을 때 사용하는 불교 도구의 하나이다.


(4) 보광전

분황사탑 뒤쪽으로 돌아가면 자그마한 보광전이 있는데, 현재 이 건물 안에는 약사여래가 자리하고 있다. 불상의 형식으로 보아 약사전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만, 후대의 어느 시기에서부터 보광전으로 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분황사 약사여래 입상은 질병을 치료하는 의미로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밑으로 향하게 수평으로 뻗고 중지를 굽혀 땅을 향하고 있다. 건칠제 약합의 뚜껑에 '중수개금화원(重修改金畵員) 육행서홍(六行瑞弘) 건융39년 (乾隆 三十九年) 을미4월25일조성야(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 라고 글이 쓰여 있어 1775년 영조 51년에 중수,개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전 뒤편에는 위치해 있으며 사찰에서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가 있다.

(5)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시도유형문화재 97호

◈ 분 류 석비
◈ 수 량 1기
◈ 지정일 1979.01.25
◈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숙종 6년(1101)에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그 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를 확인하고 "차신라화쟁국사지비부 김정희(此新羅和諍國師之碑趺 金正喜)"이라고 써 놓았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의 소찬(所撰)인 화쟁국사비가 있으니 오금석(烏金石)이라' 하였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비부만 남아 있고 네 모서리는 떨어져 나갔다.

(6) 분황사 석정(芬皇寺石井) - 문화재자료 9호

◈ 분 류 우물
◈ 수 량 1기
◈ 지정일 1985.08.05
◈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4-5

분황사 사찰 내에 마련되어 있는 팔각의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높이 70Cm로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신라시대 유물로 원형의 벽체를 쌓아 올리고, 외부는 팔각으로 다듬은 형태로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또는 우물 안의 4각형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뜻하는 것이다).

삼국유사 설화에 따르면, 795년(신라 원성왕 11년)에 당의 사신을 전송하면서 수상하게 여겼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대왕님, 저희들은 서라벌(徐羅伐) 동북(東北)쪽 금학산(琴鶴山) 기슭에 있는 동천사(東泉寺)의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護國龍)의 아내입니다. 어제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우리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 호국용을 구해주십시오." 라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이 "세 호국용이 있는 한 신라가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날랜 기마병 50명을 몸소 거느리고 사신을 뒤쫓아 그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에 이르게 되었다. 왕은 친히 잔치를 베풀고 당나라 사신과 주술사를 꾸짖어 "너희들은 어이하여 나의 용 세 마리를 잡아가지고 이 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 했더니, 그제서야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쳤다. 그 고기 세 마리를 들고 와서 각각 제자리에 놓아주었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용이 기뻐 뛰놀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 사신은 신라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여 돌아가서 "다시는 용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당의 임금에게 아뢰었다 한다. 이때부터 팔각정을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으로 '호국룡 변어정(護國龍 變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은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설화에는 멸망해 가는 신라를 다시 소생시키려는 의욕이 깃들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현재 그 옆에는 새로 만든 시설물을 통해 시원한 감로수를 맛볼 수 있다.

(7) 분황사 약사여래입상(芬皇寺藥師如來立像) 문화재자료 319호

◈ 분 류 석불
◈ 수 량 1구
◈ 지정일 1996.05.14
◈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2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육계(肉계)는 낮고 작으며 상호(相好)는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종교적 신비감이나 자태를 느낄 수 없는 다분히 세속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하거나, 불상의 얼굴이 동안(童顔)이다 하여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두꺼운 편이고 의습(衣褶)은 유려(流麗)하지 않으며 치마띠(군대(裙帶))는 화형(花形)으로 표현(表現)하였다. 대좌(臺座)는 장식(粧飾) 없는 판석(板石)으로 되어 있다. 1998년에 약사여래입상 개금불사시 약합(藥盒)뚜껑은 건칠제(乾漆製)로 확인되었으나 약합의 재질은 미상(未詳)이며 불상은 청동제로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작품으로 높이가 3.45m이다.

(8) 분황사 석조불상군

1965년 분황사의 뒷담에서 북쪽으로 33m 되는 지점에서 발견된 20여 구의 석조불상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진열되어 있다. 대부분 8세기 말이나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말기의 분황사파 조각이라고도 불린다. 발견된 상들을 분류하면 목이 잘린 원각(圓刻)의 불좌상 11구, 암판(岩板)에 부조된 불좌상 2구, 원각보살입상 1구, 불두(佛頭) 5점, 불상편과 광배 및 광배편 등이다. 이 상들 중에 수적으로 많은 불좌상들은 대부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고, 약합을 든 약사불상 1구,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상 2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상들은 각기 다른 형식의 법의를 걸쳤으며 조각수법도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시에 제작되지는 않은 듯하다. 법의는 통견(通肩)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입었는데, 우견편단의 경우 오른쪽 어깨 끝에 매듭장식이 표현되어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된 불좌상 형식의 다양한 변형과 토착화 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들이다.

인근 지역의 특징

(1) 경주

이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많은 유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신라 천 년의 도읍지로서 수많은 유물.유적을 간직하고 있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물.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만도 국보 30점(불국사삼층석탑 일괄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73점, 사적 72개소, 사적 및 명승 2개소, 천연기념물 2종, 중요민속자료 16종이 있다. 경주시 일원의 유물.유적은 크게 고분 및 그 유물, 불교관계 문화재, 성 및 궁궐지, 고건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경주시내 이외에도 천북면 모아리.오야리, 외동읍 죽동리에서 무문토기가 출토된 바 있고, 고인돌 또한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특히, 강동면과 천북면 모아리 등지에 무리를 이루고 있다.

삼한시대의 유적으로는 외동읍 죽동리, 강동면 안계리, 외동읍 입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 일괄유물과 조양동 토광묘군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이후의 신라분묘유적으로는 경주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노서동.노동동.황남동.황오동.인왕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서악의 무열왕릉을 비롯한 고분들과 인접한 충효동 고분군.김유신묘 등이 시내 서쪽에 있다.

또 낭산 산록에 선덕왕릉.신문왕릉.효공왕릉.신무왕릉이, 남산 기슭에는 헌강왕릉. 정강왕릉. 경명왕릉 .경애왕릉 등이 분포한다. 이 밖에도 금강산 서쪽의 고분군 및 남산주변 고분군 등 곳곳에 많은 고분이 있다. 이러한 고분가운데,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과 98호 남.북분 등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은 신라문화의 찬연함을 보여주는 유물이 된다.

불교문화재로는 불국사. 석굴암을 비롯하여 남산일대의 유적을 들 수 있다. 남산은 그 자체가 거대한 노천박물관이라 일컬을 만큼, 미륵곡. 불곡. 탑곡 등의 골짜기마다 사찰지. 불상. 탑 등이 산재한다. 또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고선사지. 흥륜사지. 굴불사지. 천군리사지 등을 통해서는 신라 불교사찰의 모습을 확인하게 하였다. 또한 현곡면에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月城羅原里五層石塔, 국보 제39호), 안강읍 옥산리에 정혜사지 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국보 제40호), 양북면 용당리에 감은사지 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12호), 건천읍 송선리에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 국보 제199호) 등이 있다. 그리고 내남면 용장리에 경주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慶州南山茸長寺谷三層石塔, 보물 제186호).경주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慶州南山茸長寺谷石佛坐像, 보물 제187호), 양북면 호암리에 기림사 건칠보살좌상(祇林寺乾漆菩薩坐像, 보물 제415호), 안동리에 월성 골굴암 마애여래좌상(月城骨窟庵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 율동에 월성 두 대리 마애석불입상(月城斗垈里 磨崖石佛立像, 보물 제122호)이 있다.

또한 배동에 경주 배리 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 양북면 용당리에 경주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사적 제31호), 감포읍 대본리에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 양북면에 경주 장항리사지(慶州獐項里寺址, 사적 제45호), 외동읍 모화리에 경주 원원사지(慶州遠願寺址, 사적 제46호), 진현동에 석굴암 석굴(石窟庵石窟, 국보 제24호) 등이 있다. 성지 및 궁궐지로는 반월성. 임해전지. 명활산성. 남산성, 건천읍 송선리의 경주 부산성(慶州富山城, 사적 제25호)과 외동읍 모화리의 관문성(關門城, 사적 제48호)이 대표적이다.

고건축물로는 안강읍 옥산리에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강동면 양동리에 무첨당(無需堂, 보물 제411호)과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옥산리에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 강동면 옥산리에 월성 손동만씨가옥(月城孫東滿氏家屋,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이 있다. 그리고 양동낙선당(良洞樂善堂, 중요민속자료 제73호), 양동 이원봉가옥(良洞李源鳳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4호), 양동 이원용가옥(良洞李源鏞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5호). 양동이동기가옥(良洞李東琦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6호)이 있다. 또한 양동 이희태가옥(良洞李熙太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7호). 양동 수졸당(良洞守拙堂, 중요민속자료 제78호). 양동 이향정(良洞二香亭, 중요민속자료 제79호)., 양동 수운정(良洞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 .양동 심수정(良洞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양동 안락정(良洞安樂亭, 중요민속자료 제82호), 양동 강학당(良洞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등이 있다. 중요 전적(典籍)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인 《삼국사기》(卷五十, 보물 제525호)의 목판본과 《해동명적 海東名蹟》(上卷 20枚, 下卷 23枚, 보물 제526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보물 제524호). 이언적수필고본일괄(李彦迪手筆稿本一括, 보물 제586호)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현곡면 오류리에 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 안강읍 옥산리에 동락당의 중국주엽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 육통리에 월성안강읍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8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신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계림, 첨성대, 포석정, 나정, 재매정, 동방와요지군, 반월성, 석빙고, 경주읍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