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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3층석탑

개요
탑명 개요 인물/사상/설화 유물/문양/의례
감은사지
3층석탑
지정 국보 112호(1962. 12. 20) 문무왕/신문왕/왜구
감은설화/호국신앙
이견대/만파식적
미륵신앙
사리장엄구 내외함
사리함 문양
(보살/사천왕)
경주세계엑스포
위치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시기 신라 신문왕(682)
구조 3층 /13.4m/동서양탑
의의 신라탑정형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동서의 쌍탑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양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로 되어 있으며 상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 위에 세워진 평면방형(平面方形)의 삼층석탑이다. 크기는 거의 동일하며, 안산반암(安山斑岩)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통일 신라 가람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일금당(一金堂) 쌍탑(雙塔) 가람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감은사 3층 석탑은 호국적인 사상과 통일 신라의 역량을 느끼게 하는 기념비적인 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탑은 높이 13.4m로 상·하 2단의 기단부와 3층의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기단과 탑신부에 나타나는 우주와 탱주의 모각, 낙수면의 경사, 추녀와 같이 반전 된 모습 등에서 목조 건축 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어 삼국 시대의 영향이 감지된다. 삼국 시대의 단층 기단에서 2층으로 이루어진 기단으로의 변화는 통일 신라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이 붙어 같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돌의 사용 수는 각 변마다 3개씩 이루어진 중석(中石) 부분이 12매로 각 면에는 양쪽에 모서리 기둥이 있고, 그 사이에는 3개의 사이 기둥이 있다. 갑석 또한 12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갑석 위에 2단을 이루는 괴임이 있어 후대의 중석과 옥신 받침의 시원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상층 기단은 하층 기단과 마찬가지로 12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각 면에는 양쪽에 모서리 기둥이 있고, 그 사이에는 사이 기둥인 탱주가 2개 조립되어져 있어 하층 기단에 비해 탱주 수가 줄어 든 것을 볼 수 있다. 후대로 내려 갈수록 이 탱주의 수는 더욱 줄어들어 상하 탱주 수의 비례가 2 : 2, 2 : 1 또는 1 : 1로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갑석은 모서리에 각 1매씩과 그 사이에 석재가 1매씩이 사용되어 총 8매로 구성되어 있다.

초층 옥신은 탑신부 중 높이가 가장 길다. 네 모서리에 있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그 사이의 면석들을 하나씩 다른 석재들을 사용하여 따로 조립하였다. 탑의 고준함을 더하는 부분으로 정연함이 돋보인다. 옥개석은 지붕 모양을 하고 있는 낙수면과 아래층을 이루는 옥개석 받침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다른 8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각기 떨어져 있는 석재들은 쇠로 만든 일자형 도구를 사용하여 옥개석뿐만 아니라 다른 석재들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옥개석 위에는 노반이 자리하고 있다. 낙수면은 층급이 사라지고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각에서는 목조 건물에서 보여지는 추녀와 같은 곡선을 주어 위로 반전이 나타나고 있으며, 끝은 수직이 아니라 사선을 이루도록 처리하는 새로운 수법을 가미함으로써 곡선미를 살리고 있다. 옥개석 받침은 각 층마다 5층을 이룬다. 옥개석 받침은 각기 다른 석재들을 사용하여 쌓아 전탑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후에 조성되는 석탑의 정형을 만들고 있다. 사리공은 제3층 탑신에 있다. 중앙보다는 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형상이다. 크기는 57×29.5㎝이고, 깊이는 29.1㎝이다. 이 바닥 공간에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직경 15㎝, 깊이 9.3㎝의 원형으로 이루어진 배수 구멍이 만들어져 있다.

현재 상륜부는 제3층 옥개석 위에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어졌다. 현재는 쇠로 된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을 뿐이다. 노반 이상에 보이는 찰주의 높이가 3.5m, 그 이하로 제3층 옥개석의 중심에 꽂힌 부분이 약 1.3m이다. 이 찰주의 중간 부분에 가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상륜부는 모두 석재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1960년 서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 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탑 관련 인물

(1) 신문왕(神文王)

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신문왕 12).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자는 일초(日招). 문무왕의 장자이며 664년(문무왕 4)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고 왕비는 김씨로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일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아들을 못 낳은 데다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년(신문왕 3)에 다시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태종 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波珍飡) 흥원(興元),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반란의 원인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신문왕비인 그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실과 모반사건 바로 전에 진복(眞福)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사실에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연루되었는데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하게 숙청하였다.

문무왕 때 상대등이던 이찬(伊飡) 군관(軍官)의 경우 반란 모의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살해되었다. 반란사건에 대한 불고지죄(不告知罪)로 군관과 같이 막중한 지위의 귀족을 숙청한 것은 근거가 미약해 보인다. 신문왕이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가 위해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한 조처로 여겨진다. 이러한 신문왕의 의지는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 반포된 교서(敎書)에 잘 반영되어 있다. 682년에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도 위의 모반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만파식적에는 김흠돌의 반란과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전제왕권하의 신라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같은 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卿) 1인을 두었다. 진덕여왕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大舍)라는 관직을 설치함으로써 국학설립을 위한 준비가 착수되기 시작했고 신문왕대에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늘어난 중앙관서의 업무와 영역이 확대된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位和府令)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또 공장부감(工匠府監)과 채전감(彩典監)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例作府卿) 2인을 두었다. 687년에는 음성서장(音聲署長)을 경(卿)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船府卿)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舍知)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史)와 함께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 통치제도의 경우 689년에 왕경(王京)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해 위하여 68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을 설치했다. 한편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주)으로 바꿈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해 온 군정적(軍政的) 성격의 주(州)도 685년에 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와 청주(菁州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 영토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州制)를 비로소 완성하였다.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군.현을 정비하였다. 중앙의 군사조직의 경우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백제.보덕국 및 말갈인을 두루 포섭하여 9서당(誓幢)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동시에 689년에는 관리에게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歲租)를 차등 있게 지급해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은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이와 같은 중앙 및 지방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해 전제왕권 중심의 통치 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687년에 직계조상인 태조대왕(太祖大王) . 진지대왕(眞智大王) . 문흥대왕(文興大王) . 태종대왕(太宗大王) .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廟制)를 확립하였다. 이는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뜬 것이다.

692년에는 당나라로부터 무열왕의 묘호(廟號)인 태종(太宗)이 당나라의 태종에 저촉된다는 외교적 간섭이 있었으나, 무열왕의 업적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라 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낭산의 동남에 있다.

탑 관련 설화

(1) 만파식적(萬波息笛) -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졌다는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다. 점을 친 일관은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는데, 효소왕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했다.이 설화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게 되는 신비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만파식적은 환웅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은 성격의 신성징표이다.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왕권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립하고 지배계층의 동질성을 재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아버지 문무왕과 김유신을 등장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물(神物)설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조, 백률사조(栢栗寺條),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신증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 등에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탑에 얽힌 일화

동서의 두 탑 중 서탑은 1959년 12월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해체 당시 제3층 옥신의 상면 사리공(舍利孔 : 사리를 장치하기 위하여 탑재에 파 놓은 구멍)에서 사리장엄구가 창건 당시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장경(長徑)을 남북에 두고 중앙보다는 좀 남쪽으로 기울어져 파여 있다. 사리공의 크기는 57×29.5㎝, 깊이 29.1㎝이며, 평평한 바닥 북단 가까이에 직경 15㎝, 깊이 9.3㎝의 원형배수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이 사리공 속에는 청동제사리기(靑銅製舍利器)를 사각의 감(龕)에 담아두었을 뿐 이밖에 아무런 장엄구도 들어 있지 않았는데, 이들 관계유물은 조성연대가 뚜렷하고 발견장소도 확실하여 보물 제366호(감은사지서삼층석탑내유물)로 지정되어 있다.
탑 사찰의 연혁 및 특징

(1) 경주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 분 류 사지
◈ 면 적 26,807㎡
◈ 지정일 1963.01.21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 시 대 통일신라 신문왕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
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은 감은사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동해바다의 대왕암에 매장한 것으로 믿어진다. 감은사의 금당 밑에는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의 넋이 내왕(來往)할 수 있게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강당·금당·중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웠음을 밝혔다. 이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금당 밑은 교량구조와 같은, 돌로 된 기단을 형성하여 공간을 두고 그 위에다 건물을 올려놓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감은사지에 대한 조사는 1959년과 다음 해 초까지 서석탑의 해체복원과 더불어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바 있지만, 이때는 가람의 형식만을 확인하는 간이조사에 그쳤다. 그러나 1979년과 1980년 2년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조사되어 절터의 성격과 전모가 밝혀졌는데, 유구와 유물로 보아 이절은 고려 때까지도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람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남향을 하였는데, 남북축선상에 남으로부터 중문·금당·강당이 놓이고, 중문과 금당 사이 양옆에는 동·서 3층석탑이 놓여 통일신라시대부터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쌍탑식 가람을 보인다. 또 강당의 동·서 양측에는 보칸 3칸의 간살이 넓은 장방형 건물터가 동서축으로 놓여 이 양끝 남변에서는 동·서의 회랑이 연결되어 있다. 이 강당터 양측의 장방형의 건물터는 규모로 보아 승방터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이 동·서 회랑은 금당과 양 탑을 내곽으로 둘러 중문의 양측면에서 연결되는 남회랑과 만나게 되고, 금당의 측면에서 연결되는 측랑(側廊)과도 연결된 가람배치를 보인다. 중문 앞 가람의 남쪽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높은 축대가 확인되었고, 그 중앙부에는 축대 앞으로 나온 돌출부를 마련하여 이곳에 계단을 시설하였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 계단 터 앞에는 넓은 연못이 확인되었고, 진입도로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감은사의 출입은 원래 배를 이용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서회랑 터 서쪽으로 좀 떨어져서 정면 7칸, 측면 3칸의 부속 건물터도 확인되었는데 이 건물터 동편에서 주종소(鑄鐘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가람의 규모는 동·서 회랑간의 중심거리가 약 70m이고, 중문터에서 강당터까지의 중심거리가 63.7m로서 가람의 외곽선은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건물의 주칸 형식은 중문이 3칸×2칸이고 금당은 5칸×3칸, 강당은 8칸×4칸으로 우수칸을 이룬 것이 특이하다. 또 회랑은 보칸이 단칸인 단랑(單廊)이다. 감은사의 기단 특성은 금당터에서 기술했듯이, 기단 위에 건물이 설 자리는 석교가구(石橋架構)와 같이 초석과 보를 걸어 이 위에 장대석으로 마루처럼 촘촘히 깐 상판석(床板石)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초석을 배열하여 기둥을 세운 것이다. 기단의 동북쪽에는 기단 밖에서 건물 밑 지하 공간으로 통하는 암거가 시설되었고 기단 동쪽에도 작은 구멍이 있어 이들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기단 밑부분을 관통했다는 점으로 보아 배수나 환기를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건물기단에 공간을 둔 것은 익산 미륵의 금당터에서도 확인되어 주목을 끈다. 또 금당의 기단은 기단 밖에 거리를 두어 장대석을 돌리고 그 안에 폭이 좁은 판석을 덜어깐 2중 기단이다. 이것 역시 미륵사의 금당기단과 비유되는 것이다. 상층기단은 지대석 위에 면석과 갑석으로 짰는데 통일신라시대 다른 유구의 돌기단과는 달리 기단면에 탱주(撑柱)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또 갑석의 상외단부(上外端部) 모서리를 쇠시리하여 굴렸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곳의 계단석 꾸밈은 양측 소맷돌의 지대석이 밖으로 길게 뻗어 이 위에 삼각형의 면석, 그리고 사갑석(斜甲石)을 놓고 그 앞부리 쪽에는 둥근 돌기둥을 세워 끼우도록 구멍을 뚫어놓았다. 초석은 금당터의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가 방형에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원형 쇠시리를 한 주좌가 있는 초석이다.

동·서 3층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구조를 잘 보여 주는 중요한 건축 자료인데, 상·하층의 거대한 기단 위에 몇 개로 나누어진 석재를 조합하여 탑신과 옥개석을 이루고 특히 하층 기단 주위에는 탑구로 보이는 시설을 대석으로 맞추어 깔고 있음이 다른 신라 석탑에서 보기 드문 특징이다.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초기적 수법을 나타내는 석탑이다. 1959년 1차 발굴 조사 후 실시된 서탑의 해체 수리 시 삼층 탑신에 마련된 사리공 속에서 화려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고, 지난 1996년 동탑의 해체 수리 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주목을 끈 바 있다.

부장품 및 주변문화재

(1)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내 유물(感恩寺址 西三層石塔 內 遺物)

◈ 보 물 : 366호
◈ 분 류 : 불구류
◈ 수 량 : 일괄
◈ 지정일 : 1963.01.21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통일신라시대
◈ 부속문화재 : 청동제사리기 (보물 366-1), 청동제사각감 (보물 366-2)

1959년 12월 경북(慶北) 월성군(月城郡)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 감은사(感恩寺) 터 동서 2기의 3층 석탑 중 서쪽에 있는 3층 석탑 해체수리 때 3층 탑신에서 발견된 일련의 사리장엄구이다. 원래 감(龕) 안에 사리기(舍利器)가 장치되었던 것이나 감은 발견 당시 이미 부식 대파되어 있었다.

① 청동사각감(靑銅四角龕)

감은 깊숙한 장방형 상자에 방추형뚜껑을 덮고 4귀에 발을 단 형태이다. 측면에는 각각 사천왕상 1구와 그 좌우 8능형의 바탕에 새겨진 수환(獸環) 상하, 즉 측면 가장자리에 초화형(草花形)이 장식되었다. 이들 장식은 모두 별도로 동판(銅板)에 새겨서 잔 못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가장자리에는 꽃과 잎을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르 어자문(魚子文)으로 메운 가는 장식판으로 단을 돌렸다. 밑에는 ㄱ자형의 받침이 4귀에 붙어 있다. 뚜껑 둘레에는 몸뚱이 부분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과 같은 문양(文樣)의 장식판으로 단을 돌리고 다시 초화형(草花形)을 연속시킨 장식판이 대각선으로 十자형을 이루고 있다. 꼭대기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과 같은 정4각형 장식판을 덮고 중앙에 4능형 고리를 달았다. 여러 조각 가운데 사천왕상들은 모두 주상(鑄象)이며 제작 당시부터 일부 손상을 입은 흔적이 있다. 모두 몸에 화려한 갑주(甲)를 입었고 그 중 2구는 복부(腹部)에 사자형이 있다. 머리에는 원형 두광(頭光)이 있고 한 손은 허리에 대고 한 손에는 탑(塔)·보주(寶珠)·극(戟)·금강저(金剛杵)를 들었으며 발에는 소(牛)· 주유(侏儒)가 있다. 이 사천왕상들의 자세·옷의 무늬 등은 중국 당대(唐代)의 조상(彫像)에서 볼 수 있는 바이지만 표현 기법은 오히려 중앙 아시아의 조상과 상통하여 매우 주목된다(사천왕상(四天王像) 높이 21.6cm내외). 이 감(龕) 안에 사리기를 넣었는데 신개(身蓋)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신부(身部) 두면(頭面) 상부에 소형 자물쇠를 붙이고 비녀못을 꽂았다.

② 청동제사리탑(靑銅製舍利塔)

기단·신부(身部)·보개(寶蓋)의 3부분으로 구성된 보좌형(寶座形)의 사리기이다. 기단은 정 4각형으로 복련형(伏蓮形)의 복판연화(複瓣蓮華)와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된 하대 위의 1면에 2좌씩의 고식 면상(眠象)을 투각한 정 4각형 외벽을 세우고 그 안에 하단 정 4각형, 상당 8각형의 중대를 얹었다. 외벽과 중대 사이에는 각 면 2구씩의 신장(神將)을 별주하여 배치하고 있다. 상대 상면 주위에는 앙연(仰蓮)을 새기고 그 안에 2단의 정사각형 난간(欄干)을 돌린 중앙에 사리병을 안치하였다. 이 주위에는 4귀에 주악상(秦樂像)과 그 사이에 동자상 1구씩을 배치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사리병은 복발형과 연판(蓮瓣)·보주(寶珠)로 된 청동 외피 속에 넣었는데 복발형의 4면에는 고리가 달리고 그 위의 연판(蓮瓣)은 풍만 장대해 보인다. 수정제(水晶製) 보주(寶珠)는 2중의 작은 연판 위에 얹었고 청동을 오려 만든 화염(火焰)을 씌웠다. 이 안의 사리병은 수정제로(높이 3.8cm)금선(金線)과 금입(金粒)으로 뚜껑이 덮여 있었다.

(2) 감은사 지정십일년명 금고(感恩寺 至正十一年銘 金鼓)

고려시대의 금고. 지름 32.2㎝.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1979년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지 발굴 당시에 출토된 것으로서, 금동풍탁(金銅風鐸) 3점과 같이 발견되었다. 일반형의 금고로서 중앙부에 크게 자리잡은 자방(子房)을 중심으로 굵게 도드라진 띠가 동심원상(同心圓狀)으로 둘러져 3단으로 구획되었는데, 자방에는 가운데 크게 도드라진 연자(蓮子) 1개를 배치하고 둘레에 8개를 주출(鑄出 : 鑄型에 넣어서 만들어 냄)하여 넣어서 모두 9개의 연자가 들어 있다. 자방 외곽으로 10엽 중판(重瓣)의 연화가 가느다란 선조(線條)로 부출되었고, 그 둘레의 넓은 중간 구획에는 12엽 중판 연화가 크게 장식되었으며, 외구에는 물결모양의 당초무늬가 둘러졌다. 장식 의장(意匠)이 매우 거칠게 된 양상은 고려 말엽의 모든 공예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적 추이라 생각된다.

측면에는 도드라지게 횡선대를 두르고 양쪽에 고리 2개를 붙였는데 명문 76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에 의하면 1351년(충정왕 3)에 계림부(鷄林府)의 감은사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명문 속에 “飯子(반자)” . “禁口(금구)” . “小鐘(소종)” 등의 명칭이 보이는 것이 주목된다.


(3) 감은사지 동탑사리 장엄구(感恩寺址 東塔舍利 莊嚴具)

◈ 보 물 : 1359호
◈ 분 류 : 금속공예류기타
◈ 수 량 : 일괄(7점)
◈ 지정일 : 2002.12.07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중앙박물관
◈ 시 대 : 통일신라시대

1996년 감은사지 동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발견된 일괄유물 중 사리기 세트이다. 1959년에 발견된 감은사지서삼층석탑내유물(보물 제366호)인 청동제사리기와 구조가 비슷하며, 사리를 직접 안치한 내함인 전각형 사리기와 이를 덮고 있는 방추형 뚜껑을 가진 외함, 그리고 수정제 사리병 등으로 구성된다. 사리기 외함의 사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압출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사천왕상의 상하 및 좌우에는 운문을 새겼고 좌우에는 귀면 장식을 한 고리가 배치되어 있다. 사리를 안치한 내함은 기단부, 신부, 천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는 별도로 만든 사자가 있으며 기단면에는 안상을 크게 투조하였다. 투조된 내부에는 신장상과 공양보살상이 각각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단 상단부인 신부는 사리를 안치한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사천왕과 승상을 각 네구씩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외곽으로는 난간을 돌리고 네 귀에 죽절형 기둥을 세워 천개를 받치고 있다. 수정제 사리병은 높이가 3.65cm이며, 누금기법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받침,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2,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의 기록과 관련하여 제작연대(감은사의 낙성연대: 682년)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유물로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기와 전각형 사리기인 점은 같지만, 제작기법, 세부문양, 조형물 등에서 다소 다른 특성을 보인다. 문무왕과도 연관된 유물로, 정교한 누금기법 등 당대 최고의 기술과 노력으로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불교 공예품의 백미로 판단된다.

(4) 감은사 가람배치

삼국 시대의 탑은 대체로 일탑식 가람제도를 따라 단탑 가람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감은사의 가람 배치는 통일 이후 등장되는 쌍탑식 가람 제도의 초기 양식을 적용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정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탑의 배치는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사천왕사지를 비롯하여 망덕사지, 불국사 등 통일신라 사찰들에서 나타나고 있어 이 시기 가람 배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5) 중문지

중문지는 발굴 당시 초석과 기단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현존하고 있는 석재들을 가지고 살펴 봤을 때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였다고 한다. 제2차 발굴 당시 2개의 초석이 낭떠러지 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중문에 문짝이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중문지의 정면 가운데 칸에서 낭떠러지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확인되었다. 계단에 사용된 석재들은 금당지의 석재들과 같은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창건 당시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지의 크기는 가로 10.1m, 세로 5.8m이고 면적은 17.7평이다.

(6) 금당지

중문지에서 북쪽으로 정면에 보이는 곳이 금당지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를 가지고 있고, 중문지에서 금당지까지의 거리는 31.45m이다. 금당 초석 아래 바닥으로부터 석재들이 일정한 높이를 두고 지하 공간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은 문무왕의 "해룡(海龍)"에 대한 전설과 많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기단은 통일 신라 시대에 즐겨 사용된 가구식 기단으로 2중으로 되어 있다. 기단의 사면 가운데에는 돌계단을 하나씩 만들어 놓았다. 크기는 가로 15.5m, 세로 9m이고 면적은 약 42평이다.

(7) 금당지 밑바닥 석축 구조

금당지의 밑바닥 구조는 발굴 당시 서쪽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결실되어 있는 상태였다. 가장 밑에는 네모꼴로 생긴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장대석을 배치하였다. 양쪽 가장자리 1줄씩을 제외하고 중앙의 2줄 사이에 1줄과 그 양 옆줄 사이에 다시 방형의 보조용 석재를 1줄씩 놓아 총 9줄의 방형 석재가 위치하고 있다. 6줄의 장대석에는 남, 북으로 돌의 2면에 홈을 파 긴 석재를 얹고 있으며, 보조용 방형석에는 홈을 파지 않고 옆의 장대석 위에 얹어 있는 석재의 높이와 같게 석재를 올려놓았다. 또다시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전면에 마루를 깔듯이 긴 석재를 깔고 있다.


(8) 금당지 지하 공간

방형과 긴 석재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지하 공간은 다시 사면에 다듬지 않은 길이 1.2m의 석재를 사용하여 가장자리를 막았다. 그리고 흙을 사용하여 사용된 석재와 건물 기단 사이의 공간을 막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금당 밑에는 높이 약 60㎝의 지하 공간을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문무왕이 죽은 후 해룡(海龍)이 되어 나라를 침입하는 자들을 막고자 바다에 조성된 대왕암과 물줄기가 연결되는 곳으로 바다의 용이 된 문무대왕이 금당으로 들어와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9) 금당지 기단

전체적인 기단의 형태는 2단으로 되어 있어 지대석 위로는 면석을 놓고 그 위에 다시 갑석을 얹었다. 지대석 바깥에는 판으로 된 돌을 깔고 외곽은 장대석으로 돌려 기단을 마감하고 있다. 하층 기단의 장대석과 연결되는 기단의 모서리에는 ㄴ자형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하고 있다. 하층의 장대석과 상단 지대석 사이에는 얇은 판석을 깔았다. 상층 기단에는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추고 있다.

(10) 금당지 초석

금당지에 놓여 있는 초석 즉 주춧돌은 응회암과 화강암의 두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다.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기둥이 얹혀지는 부분을 윗면에 원형 모양으로 새기고 아랫부분은 평평하게 돌을 다듬어 가로 방향의 장대석 위에 놓았다.

(11) 금당지 돌계단

기단의 사면에 하나씩 만들어져 있는 계단은 북쪽의 것이 가장 잘 남아있다. 전체의 크기는 길이 148㎝, 너비는 295㎝이고 석재는 응회암을 사용하였다. 금당의 기단과 맞닿는 부분에는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계단 측면 면석 위에 있는 삼각형의 돌과 기단을 연결하고 있다. 지대석에는 원형의 구멍을 뚫어 동자주를 세운 흔적이 남아 있고 삼각형의 돌 위에 있는 갑석에는 동자주가 밀려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홈을 파 놓았다. 발을 디딜 수 있는 디딤돌은 각 돌마다 약간의 크기 차이가 난다.

(12) 강당지

다른 건물지에 비해 그 파손 정도가 심한 강당지는 창건 당시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의 규모였다. 하지만 후대에 들어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기단은 단층의 가구식 구조이고 응회암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방형 의 초석을 사용하였다. 계단은 남쪽 면에만 2개를 배치하고 있다. 강당지의 북쪽에서는 가로로 긴 배수로가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28m, 세로는 10.4m이고 면적은 약 88평이다.

(13) 회랑지

사찰 전체의 공간을 나누고 있는 회랑은 중문의 동, 서 양쪽에서 시작되어 강당으로 연결된다. 남, 북 회랑 중간에서 금당쪽으로는 익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상태로는 서쪽의 회랑지가 여러 번 변형되어진 것으로 판단될 뿐 다른 곳은 정확한 추정이 어렵다.

(14) 익랑지

익랑지는 금당의 좌·우에 위치하여 동쪽의 회랑과 서쪽의 회랑과 만나고 있다. 동쪽 익랑지에 비하여 서쪽 익랑지는 훼손 상태가 심하지 않아 규모의 확인이 가능하다. 익랑지 서쪽의 길이는 20.3m이며 초석은 원형 초석이 1점, 방형 초석이 6점으로 총 7점이 남아 있으며 가구식 단층 기단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익랑지는 현재 불국사에서도 보여지고 있는데 불국사는 통일 신라 중기에 창건된 사찰로 시기적으로 볼 때 감은사에 있는 익랑의 조성 연대가 앞서고 있다. 따라서 통일 신라 초기에 이미 익랑은 사찰 건축의 하나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 대종천

대종천은 옛날에는 큰 강이었다고 한다. 1235년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황룡사 구층탑을 태워버리고, 황룡사의 대종이 탐이나 원나라로 가져가려다가 그만 봉길리 바닷가에 도착하기 전에 물 속에 빠뜨렸다. 대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디엔가 가라앉고, 이후 이 내를 대종천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파도가 거센 날이면 바닷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하고, 일제 때부터 요즘까지 대종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