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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이야기김창조 가야금산조의 원형을 간직한 안기옥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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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조 가야금산조의 원형을 간직한 안기옥이야기

    김창조가 가장 아끼던 제자,

    산조의 역사상 김창조(金昌祖)는 '산조의 아버지, 산조의 효시'라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산조형식을 후세에 널리 알리게 된 인물이며 가야금산조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게 안기옥(安基玉 1894-1974)이란 제자가 없었다면 그의 가야금산조의 '원형'은 어쩌면 현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안기옥은 김창조에게 10년 간을 사사한 최고의 제자이며 김창조가 가장 아끼던 제자이다. 그리고, 김창조에게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일하게 안기옥에게만 김창조산조의 원형이 전수되었다. 안기옥은 김창조산조의 원형 그대로 보전함과 동시에 자신의 산조를 만들어 김창조산조, 안기옥산조 두 가지를 후대에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음악을 전공한 제자 김진(金震)에게 김창조산조를 들려주고 악보에 옮기도록 하여 귀중한 자료를 보존하는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처럼 안기옥은 산조의 역사상 김창조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안기옥은 1894년 5월29일에 전남 나주군 남평면 대교리에서 세습적인 기악연주가 안영길(安永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안영길은 농악대에서 상쇠였고 장구와 피리에도 능숙한 음악인이었다.
    안기옥의 나이 7, 8세 때 김창조의 공연단이 그의 고향 나주를 방문하여 공연하게 되었다. 김창조 공연단이 고향에 온 것으로 인해 김창조의 가야금산조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때 가야금을 꼭 배우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안기옥은 8세 경부터 가야금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어서 김창조의 제자로 들어가 순회공연을 따라다니면서 김창조산조의 선율을 익히며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12세 때 고을사또의 생일날 가야금 연주를 해서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야금을 시작한지 10여 년이 지난 1915년 어느 날 김창조는 안기옥을 무등사(無等寺)에 데리고가서 그때까지 배운 가야금산조를 연주하게 했다. 김창조는 연주를 다 듣고 나서 매우 만족해하며 그 배운 것을 후세에 널리 알리라고 당부하였다. 이것이 김창조에게 배움을 결산한 날이었다. 마치 무림의 고수가 배움을 끝내고 스승 곁을 하산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김창조 가야금산조가 바로 그때 전수 받은 것이다.
    이후 안기옥은 3~4년 동안 가야금산조를 복습하면서 백낙준(白樂俊)을 찾아 거문고를 배웠고 풍물음악도 배웠다. 그리고 1924년부터 1929년까지 약 5, 6년 간은 광주, 부산, 서울, 함흥, 청진 등지에서 권번을 꾸려 후대양성사업에 종사하였다. 이 당시 안기옥이 육성한 후진들은 진주에서만 150명이 넘었고 청진(청진조선악연구소)에서는 100여명의 연구생을 가르쳤다.
    1930년경에 전남 목포극장에 협률단이 조직되면서 안기옥은 예술지도를 맡게된다. 협률단은 전국각지로 순회 공연하여 민간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았고 주로 판소리, 민요, 가야금독주, 가야금병창, 무용 등을 연주하였다. 이때 가야금은 안기옥이 연주했는데, 일제의 지배를 받고있던 그 당시 그의 가야금 독주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처절하고 슬픈 정서로 된 느린 진양조는 청중들의 망국생활의 울분을 자아냈고, 중모리에서는 울분이 터져 장내에서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휘모리를 연주할 때는 새로운 기분으로 연주기교를 찬탄하는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단체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곧 해산되었고, 안기옥은 혼자서 지방구석으로 다니면서 가야금독주와 가야금병창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시기에 김창조에게 물려받은 가야금산조를 기초로 하여 새로이 발전시키는 일들을 하였다. 즉 김창조 가야금산조 장단에 없었던 엇모리와 휘모리를 창작하고 그밖에 몇 개 장절들을 새로이 창작하였다. 이로 인해 가야금산조의 장절이 풍부해졌고 연주기교에도 새로운 주법들이 개발되었다.
    1936년 말 안기옥은 함흥으로 이사하여 함흥과 청진에서 후대양성사업을 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 일본의 도쿄, 나고야, 시모노세키 등에 가서 공연을 했다. 그때 창에는 이화중선(李花中仙), 해금에는 유대복(兪大福), 장구에는 한성준(韓成俊), 가야금에는 안기옥 등 당대의 명인, 명창들이 연주하였으며 특히 도쿄에서 공연하는 기간에 도쿄방송국의 요청으로 가야금산조를 한성준 장구반주로 레코드에 취입했다.
    이후로 조국에 돌아온 안기옥은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와 함께 예술창조사업에 종사했으며, 1942년 말, 함흥으로부터 고향인 광주로 이사하여 가족 생계를 돌보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안기옥은 1946년 6월 다시 평양으로 이주하여 조선민족음악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되었다. 그리고 1948년에 협률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순회공연과 함께 후진을 양성했다. 이후 안기옥은 북한에서 음악예술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951년 민족고전예술극장청장으로 임명된 것을 비롯해서 1952년 공화국(북한) 공훈배우, 1956년 북한1급 인민배우 및 북한 최고대의원, 국제민족음악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국가훈장과 노력훈장을 받았다.
    1957년에 안기옥은 황해도 재령군으로 가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잠시 갈라져있지만 가까운 시기에 꼭 통일이 실현될 봄날이 오리라는 신념으로 중주곡 <새봄>을 창작하였다. 이 곡은 종래의 삼현육각 형식과는 달리 가야금 2, 거문고 1, 해금 1, 장구 1를 썼다. 장단은 씩씩한 전주로 된 살풀이 장단으로 되었고, 중간부분에서는 매 악기들이 독주를 하는 것으로서 씩씩하고 활기차게 연주되는 곡이다. <새봄>은 그 해 7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청년학생예술축전에서 창작상과 연주상을 수상하였다.
    안기옥은 1957년 여름에 평양에 있는 음악대학에서 가야금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이때 김창조 가야금산조를 원형 그대로 전수하였고, 이시기에 중국 연변에서 유학온 김진에게 자신의 가야금산조 및 김창조 가야금산조를 전수했다. 김진은 이렇게 배운 가야금산조를 후에 남한에서 김창조의 가야금산조원형을 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58년에 안기옥은 정남희(丁南希)남와 함께 <가야금 교측본>을 편찬하였다. 교측본에는 가야금연주법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외에도 민요를 가야금주법으로 개편하여 연주법 훈련을 종합적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여기에 영산회상과 김창조 가야금산조를 실었다. 이 교측본은 북한과 중국연변에서 가야금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교과서로 채택되어져 있다.
    안기옥은 1964년에 평양 중구역 의성동에서 70세 진갑잔치를 치르고, 1970년 은퇴 후 아들 성현의 집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73년 당뇨병 진단을 받고 1974년 1월13일 80세를 일기로 혜산에서 타계하였다.

    참고문헌

    양승희, <악성 김창조 선생>, (영암군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