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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아리랑

해설-삶의 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아리랑

김연갑

Ⅰ. 빛나는 위상, ‘아리랑 중의 아리랑'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산과 산을 이어 빨래 줄을 이을 만하다”고 하고, "무릇 나흘 동안 길을 걸어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고 한데서나 오늘날에도 정선 사람들 스스로가 ‘해뜨자 해 넘어가는 두메산골'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오지라는 인식은 예나제나 그대로임을 알 수가 있다. 가리왕산·비봉산·석병산·백운산·발왕산·고양산 같은 높은 산이 둘러 있고, 반점치·벽파령·성마령·비행기재·백봉령·꽃꺽이고개 같은 많은 고개로만 외지와 통하게 했다. 그래서 “탄광지역 다방 여종업원 월급이 군수봉급 보다 좋았다”는 한 때 우스개 소리의 유행으로만, 또는 ‘막장 인생의 마지막 절규'였다는 사북사태로만 정선을 알게 되었다는 사람이 꽤 많았던 것을 보면 1980년도 까지는 이 땅에서 가장 외진 별지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를 정선인들은 ‘무릉도원에서 산다'는 말로 스스로 보상 받으려하고, 외지의 시인 고은 역시 “태백산맥은 우리들의 자존심의 근거지이다. 정선은 바로 그 자존심의 눈이다“라고 하여 차라리 기꺼워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입지의 정선은 스스로 <아리랑의 고향>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이는 메나리토리의 소리, ‘정선아리랑'(‘정선아리랑'이란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937년 5월 3일, 경성방송 국악 방송에서 김봉선(金鳳仙)이 부른 것에서 확인된다.)이 불려지고 있다는데서 연유한 것인데, 이 소리는 ‘강원도의 아라리' 또는 ‘정선의 아라리'이다. 그런데 1971년 강원도가 이를 ‘정선아리랑'이란 이름으로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함으로서 정선군에 특화시켜 주었다. 그러으로 이 명칭에는 '정선의 아라리‘와 '정선아리랑‘이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변별 단위로 인식되고 있는데, 전자는 강원도 전역과 중청·경상도 일부에서 불려지는 메나리 토리의 ‘아라리' 소라를 말하고, 후자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1행으로 하는 여음을 후렴으로 쓰는 아리랑의 하나인 것임을 제도적으로 알려준 것이다. 그럼으로 적어도 정선이란 지명을 붙여 말 할 때는 '아리랑‘이 되어야 하고 그 성격은 본질적으로는 '아라리‘를 포함한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아리랑을 말 할 때는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서울·경기의 본조아리랑(경 토리), 전라도의 진도아리랑(육자백이 토리), 경상도의 밀양아리랑(경상도메나리 토리)을 일러 우리나라 <4大아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리 마뜩한 규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타의 아리랑과 정선아리랑과는 동류의 하나로 병렬시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 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선 역사성을 들어 보면, 밀양아리랑이 1920년대 초에, 본조아리랑이 1920년대 중반에, 진도아리랑이 1930년대 초에 오늘의 모습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아가 전승체계의 견고성과 사설(4천여수)의 적층현상과 같은 구비문학적 현장성과 전승력 같은 것으로 보아도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세 가지 아리랑 모두는 정선아리랑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주종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딱히 음악학적인 결론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는 무리가 없는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선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아리랑'인 셈이다.

Ⅱ. ‘말만 하면 아라리····', ‘찍어 붙이면 되는 소리'

강원도 정선에서 4대째 살아오는 송오리 자택에서 김연수님이 우리를 맞는 첫 인사는 “말하면 아라리지, 뭐 별소리가 있나요.”였다. 이 말은 예능보유자 김병하(59세, 와병중)가 평소에 “그냥 찍어다 붙이면 되는 소리”라고 한 말이나 “아라리는 콩나물 대가리도 없는 것”(유천리 주민)의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소리하는 것이 그저 일상적인 삶의 일부분임을 말 한 것으로 정선아리랑의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정선아리랑은 그저 말하듯 부른다.

정선아라리를 불러주신 김연수님 정선아라리를 불러주신 김연수님

한편 정선아리랑의 사설이 어떤 민요보다도 많다는 것도 쉽게 생활 가까이의 말들을 찍어다 붙이면 되는 속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서 설명될 수 있다. 즉 강한 암기성과 즉흥성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그 요인의 하나는 양식의 단순성, 다시 말하면 사설이 두 줄(4음보 2행 1련) 장절(章節)형식이라는 점에 있다. 정선아리랑이 모든 대상을 수용하는 ‘열린 소리'로 시공의 제한 없이 뻗어가고 올 수 있게 한 것도 여기에 기인 한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때문에 가장 민중적이고 생활적인 소리인 정선아리랑에 수심(愁心)과 산수(山水)편으로 분류 할 만큼 유형화 되었다거나 다른 어떤 서정민요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한문투 사설이 하나의 유형으로 존재한다든가, 고려말의 역성혁명 같은 역사적 사실과 그에 의해 출현한 <두문동72현>의 충절혼이 사설화 되어있는 연유도 이에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Ⅲ. 정선아리랑의 역사

지금까지 정선군에서 공시(公示)하고 있는 역사는 역시 려말선초의 고려유신들, 특히 정선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했던 이들과의 관련 전설에 근거한다. 즉, “처음 불리어지기 시작된 것은-(중략)-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으로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며 입지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 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 지고 있는 아리랑의 가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원가곡비 도원가곡비
고려유신 칠현비 고려유신 칠현비

이런 사실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정선인들이 자부심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눈이 올라나···”와 같은 연관되는 사설을 첫 소리로 앞세워 부르고, 한문투 사설들을 수용하는 특징을 보이게 되었다. 굳이 말 한다면 이는 전설(傳說)이다. 그래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는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기 보다는 이미 있어온 소리에 그들의 회한(悔恨)이 사설로 수용되어 공동체에 연대감을 촉발시켜 전승에 기여했을 수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Ⅳ. 정선아리랑의 특징

① 창곡 중심이 아니라 사설 중심이다. 창곡은 원초성을 유지, 변화가 거의 없고 사설은 시대 마다 확대되어 뚜렷한 적층현상을 보인다. 창에 대한 부담이 적어 자신의 심사를 표출하려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데에 안성마춤이기 때문이다.

② 단일 민요로는 물론, 전 구비문학 자료 중에 사설이 가장 방대하다.

③ 초(超)기능적이다. 기본적으로 내면을 다스리고 표출하려는, 그래서 노래 자체를 즐기려는 ‘놀이적 성격'이 내재해 있음은 물론 지극히 생활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④ 음악적 형태나 사설의 구조상 원초성과 토착성이 유지되어 있다.

⑤ 한문투(漢詩形) 사설이 유형형화 되어 있다. 이는 <한시율창설>과 <알리오설>의 한 배경으로 볼 수 있고, 이로서 ‘정선'아라리로 특화 된다.

⑥ 구비문학적 현장성과 전승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거의 유일한 민속음악이다. 또한 음악 공동체가 아직 존속되어있어 정체성과 통합성이 유지 되고 있다. 그래서 지역민들이 정선아라리로 일체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⑦ 전체적인 정조는 애잔함과 소박함을 특징으로 한다. 진도아리랑이 흥청거림과 신명성이, 밀양아리랑이 투박함과 남성적임이 특징인 것과 비교 되는 점이다.

⑧ 토속민요로 전승지가 가장 넓다. 강원도 전역과 경상·충청일부 그리고 경기 한강수계가 그 전승지이다.

⑨ 군(郡) 차원에서 전수·전승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군의 상징으로 까지 삼아 보존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통한 대중음악과의 접촉으로 토속민요의 전승체계가 급격히 위축되어 가는 현실에서 바람직한 방안일 수 있다.

⑩ 40여년 간 군 차원의 보존·발굴 상황이 축척된 가집(歌集)을 갖고 있다. 바로 1968년 이후 17판을 거듭해 온《정선아리랑》인데, 공식적으로 증보·축차 된 것으로는 독보적인 가집이다.

Ⅴ. 가창 양식

정선아리랑이 본질적으로는 사설 중심이라는 것은 가창양식에서도 확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느리게 부르는 ‘긴소리', 빠르게 부르는 ‘잦은소리', 그리고 ‘엮음소리'는 성음의 세련미나 예능의 유무에 의해 변조(變調) 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사설 표출 능력과 그 효율성을 위해 확대된 것이라고 본다. 이는 1960년대 강릉·삼척·정선 등지에서 녹음된 자료를 통해 볼 때 ‘레·도·라·미·솔'의 메나리토리 5음계와 3소박 6박자라는 구성상의 변화는 거의 없고, 사설의 확대 폭이 훨씬 크고, 사설의 적층현상으로 지역적 차이가 변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긴소리 -이는 일반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창자마다 차이가 있으나 세마치장단으로 악절과 마디와 같은 기본 틀에서는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를 오선보화 하면 9/8박자이다.


잦은소리 -긴소리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긴소리'에 비해 빠르고 물박장단이나 젓가락장단에 어울리고, 드물게는 후렴을 절마다 넣어 선후창으로 부르기도 한다. 독립적으로 불려지기 보다는 ‘엮음소리'와 같이 ‘긴소리'에 이어 불려진다.


엮음소리 -긴소리가 불려지는 중간에 또는 끝에 한 두 편이 불려진다. 2박·3박·4박의 불규칙한 박자로 역어나가다가 뒷부분을 늘어트려 맺는다. 그러나 “시간적인 질서와 음악적인 질서에 규제를 받지 않고 거의 동일한 음으로 단조롭게 이어”가다 ‘긴소리'로 되돌아오는 형식이다. 이는 사설측면에서는 확장현상이고, 음악측면에서는 변조형태 이다. 창민요에서 ‘복는형' 또는 ‘사설형'이라고도 하는데. 3·4조 내지 4·4조의 율조에 맞춰 빠르게 부르는데 맞게 되었다. 그래서 엮음형으로의 변화는 해학성과 율조성이 표현기법상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사설의 확장 부분과 악곡의 엮음 부분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연행상황은 주로 호기 있고 개방적인 남자들이 부르는 예가 많다. 이런 점에서 일부 창민요에서 볼 수 있는 ‘잦은'과는 다르게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외지의 전문 소리꾼에 의해 변조된 것으로 주장하나 사설의 확장을 정선아리랑의 속성으로 보는 측면에서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후렴 -정선아리랑에서의 후렴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경복궁 중수(1865~1872) 이후에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이나 본래적으로 덧붙임(addition)의 기능일 뿐이라는 논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0년대 녹음된 자료들에서 추정되는 바에 따르면 어떤 시점에선가 하나의 사설(각편)로 쓰이다가 1930년대 쯤 아리랑의 전국적인 두각으로 영향을 받아 후렴으로 정착 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 근거는 현지민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고, 후렴의 악곡이 본사의 악곡과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김옥심제' 정선아리랑 - 서울제정선아리랑이라고도 하며 정선아라리와 구분하기 위한 편의상의 명명이다. 이는 ‘후렴-사설-소리'로 구성되었고, 한오백년과 함께 주요음과 꾸밈음이 같다. 이 두 가지는 음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특히 설화상으로도 정선아리랑에서 분화되었음이 분명하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