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성곽의 역사

제1기 : 서기전 5세기~서기 4세기
<경주월성> <경주월성>

이때는 성읍국가의 발생에서 고대 전제왕권이 확립되는 시기로, 기록상 가장 앞서는 성곽은 왕검성이다. 또한 만주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에서는 중국과는 다른 형식의 한국식 성곽이 축조되었는데, 이러한 지형적 특징에 따르는 험고한 성은 자연히 산성의 발달에 있어 그 기본을 형성한 것으로 다음 단계의 고구려 성곽과 맥락을 같이한다.

고구려의 왕은 평시에는 평지에 살지만, 위급하면 평상시 준비한 양식과 무기가 있는 산성으로 들어가 적에 대항하였다. 한편 남쪽지역에서는 경주월성이나 대구달성과 같이 넓은 평야와 시내를 낀 구릉 위에 지형조건에 맞도록 구성, 축성하였다. 즉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방어효과를 낼 수 있도록 고지대에 성이 많이 축조되고 평지성은 별로 축조되지 않았다.

제2기 : 5세기~13세기
< 부소산성 군창지> < 부소산성 군창지>

이 무렵 고대 전제왕권국가의 성립과정에서 도성제가 생겨나게 되는데, 고구려의 도성제는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인 환도성의 결합형이 평양에서도 나타나 청암리토성과 대성산성의 관계로 이어진다. 그 뒤 장수왕대에 이르러 평양성은 내·외성의 이중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도성의 내·외성제는 백제의 웅진성에도 나타나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다. 또한 그 다음 사비기에는 내성인 부소산성과 나성인 부여나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경우에는 월성이나 금성이 왕이 머무는 내성이라면, 명활산성,남산성,선도산성 등은 나성의 구실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말과 8세기에 이르러 도성제는 지방도시의 축성에도 응용되어 충주의 경우 탄금대토성과 충주읍성이 평지에 있고 충주산성이나 대림산성과 같은 커다란 산성이 그 배후에 짝하여 있으며, 청주도 정북리토성이나 청주읍성의 배후에 우암산성과 상당산성과 같은 대규모의 산성이 짝하여 있게 되었다.

< 부여나성> < 부여나성>

고려시대에 있어서도 우선 도성인 개경에 그리 높지 않는 산허리에 왕성이 있었는데, 거란의 침입 뒤에 둘레를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쌓은 나성이 생겨나게 되었고, 조선시대의 한양 도성도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전통적인 축성계획의 연장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장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백제가 북방세력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청목령에서 서해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고, 이후 고구려의 천리장성, 신라의 패강장성,관문성 등이 축조되었으며, 고려에서는 다시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한편 북쪽의 발해에서는 중국식의 평지방형을 기본형으로 하는 도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대략 좌우가 대칭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제3기 : 14세기~17세기
< 북한산성 > < 북한산성 >

제3기는 화약과 화포의 사용으로 축성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는 시기로, 고려 말 조선 초 이후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이다. 고려말 대륙방면에서의 외침으로 극도로 피폐한 많은 주민들은 다시 왜구의 침입으로 곤란을 겪었다. 고려는 응급책으로 옛 성터로 백성을 피난시키고 개경에 내성을 쌓는 등 조처를 취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해안의 읍성을 수축하였다. 이후 조선왕조는 한양도성을 우선 축조하고 동북면지역의 영토개척과 서북면지역의 방어를 위한 진보 축성에 이은 행성의 축조가 진행시키면서, 한편으로는 하삼도의 연해읍성 축조도 병행하는 등 축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제4기 : 17세기~19세기
< 수원화성 > < 수원화성 >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명나라, 왜국의 세 민족이 전쟁을 치른 것이었다. 세 나라 성을 비교한 결과, 중국식의 성과 일본식의 성에도 우수한 점이 있다는 것이 알려짐에 따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축성방법에 대해서 반성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반성과 종합이 이루어진 결과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은 조선 후기 축성기법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성곽이었으며, 벽돌이 성곽 축조에 사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