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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공략전

* 시 기 : 1232년~1234년
* 전투지역 : 변경, 채주(蔡州)
* 관련인물 : 칭기즈칸, 오고타이, 툴루이, / 선종(宣宗), 애종(哀宗), 완안합달(完顔合達), 이자포아(移刺蒲阿)


몽골과 남송 연합군이 변경(지금의 남경)을 공격하여 금을 멸망시킨 전쟁

금의 세종(世宗)이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화(漢化)가 심화되어 오히려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가정 6년(1213) 칭기즈칸의 침략을 받아 금의 선종은 1214년 수도를 변경(南京 開封府)으로 천도하였다. 1215년 몽골의 재침으로 북쪽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여 몽골과 남송 사이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었다. 금은 줄어든 영토를 남방을 정벌하여 넓히고자 하였으나 금의 약세를 알고 있던 남송도 세폐(歲幣)를 폐지하여 쌍방간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가정10년(1217) 이후 금과 남송은 몇 년 동안 전쟁하였다.

1230년 오고타이 칸(太宗)은 금과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금을 친히 정벌하여 섬서(陝西)로 들어가 툴루이에게 봉상(鳳翔)을 공격을 명하여 이듬해에 점령하였다. 그리고 다시 길을 나누어 대대적으로 금을 정벌하여 그 다음해에 변경에서 서로 만날 것을 기약하였다. 또한 속불한(束不罕)을 남송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가도벌금(假道伐金)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 툴루이군은 봉상에서 위수(渭水)를 건너 남송의 영역으로 들어가 한수(漢水)를 따라 내려가려 하였는데 속불한이 송에서 살해되자 툴루이는 남송의 여러 지역을 공격한 후 돌아갔다. 몽골은 계속 동쪽으로 금을 공격해 요풍관(陝西 石泉縣)을 함락시킨 후 동진하였다. 1232년 정월 툴루이군이 당주(唐州)에서 변경으로 들어가려 하자 금은 완안합달·이자포아 연합군 15만 명이 등주(鄧州)로부터 몽골군을 공격하였다.

오고타이도 황하를 건너 정주(河南鄭縣)에 이르러 속불대(束不臺)를 보내 변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시 큰 비와 눈 때문에 금군은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툴루이와 금군은 삼봉산(河南 禹縣)에서 대규모로 싸웠지만 금군이 대패하여 정예를 모두 상실하였다. 이로써 변경 주위의 요지는 모두 몽골이 점령하였다. 1232년 4월 변경전투가 성공하지 못하고 인질과 재화를 담보로 화의하였다. 그런데 7월에 금군이 몽골사신단 30여 명을 살해함으로써 다시 변경은 포위되고 금은 양식도 원군도 없어 금의 애종은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1233년 4월에 변경을 지키던 최립(崔立)이 몽골에 항복함으로써 금 황실의 왕들은 모두 해를 당하고 후비(后妃)는 모두 포로로 끌려갔다. 5월 애종이 남쪽 채주(河南 汝南縣)로 옮기자 몽골은 탑찰아(塔察兒)에게 채주를 공격하게 하고 또 사신을 양양(襄陽)에 보내 남송과 연합하였지만 애종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1234년 정월에 채주는 양식이 떨어지고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1234년 금이 멸망하자 하남 지역을 경계로 남쪽은 송에 북쪽은 몽골에 귀속시켰다. 이어서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여 중원을 통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