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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阿片戰爭)

* 시 기 : 1840~1842
* 전투지역 : 임칙서(林則徐)


1840~1842년 아편 문제를 둘러싼 청과 영국간의 전쟁.

18세기 이후 영국의 대 중국 무역이 적자로 이어지면서 동인도회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1830년대 은이 과다하게 유출되어 국가경제 및 국민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편흡연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청은 임칙서(林則徐: 1785~1850)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무역을 엄금하도록 하였다.

광조우에 부임한 임칙서는 1839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아편의 흡연과 판매를 엄금한다고 포고하고, 광조우에 거주하는 외국상인들에게 아편판매 금지와 그들의 상관을 봉쇄하고 출입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국 무역 감독관 엘리오트(C. Elliot: 1801-1875)까지도 체포하여 감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 상인들의 아편 2만 2백 91상자를 몰수하여 호문(虎門)에서 태워버리고 영국인을 마카오로 퇴거시켰다. 영국정부는 이 기회에 대중국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무력행사를 결정하였다. 1840년 6월 원정군을 광조우 근해로 파견하였다. 그 전력은 군함이 16척, 수송선 27척, 동인도 회사의 무장기선 4척, 육군용선 1척, 육군 약 4천명이었다. 임칙서는 영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광둥을 방어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역인 호문에 포대를 설치하였고, 포르투갈과 미국에서 대포 200문을 구입하여 대영국 전투에 대비하여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국 원정대는 예정대로 1840년 6월 중국연해에 도착하였으나 임칙서가 지키고 있는 광조우를 그냥 지나쳐 7월 아모이(厦門)를 거쳐 주산도의 정해(定海)를 점령하고, 또 영파(寧波)와 양쯔강을 봉쇄하고 북상을 계속한 군함 6척, 무장선·수송선 각각 1척은 8월에 톈진(天津)에 가까운 백하(白河) 하구에 도달하였다. 영국 원정 함대의 위용에 놀란 청정부는 광조우에서 교섭할 것을 약속하고 임칙서를 파면시켜 타협파인 기선(琦善)에게 교섭을 담당시켰다. 기선은 호문에 침입한 영국군의 압력에 가조약에 조인하자 도광제는 격노하여 기선을 파면시켰기 때문에 영국군은 공격을 재개하여 1841년 5월 광주성에 육박하여 배상금의 지불, 청군이 광주성에서 철수할 것, 영국군의 광조우 주둔을 승인할 것 등을 약속한 광조우 화약을 맺었다. 이때에 광조우 지방에서는 신사와 삼원리 일대의 농민 만여 명이 평영단이란 기를 들고 그 곳을 지나가는 영국군 1,000여 명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 후에도 영국군의 광주 입성에 반대하는 장기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영국정부는 보다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전쟁을 확대해 아모이, 정해, 영파를 점령하고, 이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에 육박하였다. 이에 청조는 양강총독 기영·이리포로 하여금 영국과 교섭하여 영국군함 콘 워리스(Corn wallis)호 선상에서 난징조약을 맺고, 1843년 6월 26일에 홍콩에서 두 나라 사이의 비준이 교환되었다.

1842년 8월 29일 양국은 난징조약을 맺고 종전에 들어갔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상하이 등 5개의 항구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중국은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시기부터 중국은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