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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土木)의 변(變)

* 시 기 : 정통 14년(1449) 7월 15일~8월 14일
* 전투지역 : 중국 토목보(土木堡:察哈爾 懷來縣 서쪽)
* 관련인물 : 영종(英宗), 왕진(王振), 우겸(于謙) / 에센


명의 영종이 몽골족의 오이라트 추장 에센과 토목보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사건.

무역의 필요에서 몽골족 오이라트는 명과 전통적으로 화평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명의 영종이 오이라트 조공사절의 숫자를 엄격하게 제한하여 무역을 억눌렀기 때문에, 1449년 오이라트군은 4대로 나누어 동쪽의 만주에서 서쪽 감숙에 이르는 명의 북방 변경으로 진공하였다.

1449년 7월 영종은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환관 왕진의 견해를 받아들여 50만 명의 대군으로 편성된 친정군을 발동하여 산서성 대동(大同)에 이르렀다. 오이라트 추장 에센(Essen, 也先)이 직접주력부대를 지휘하여 대동으로 진격하면서 그 선봉대가 묘아장(猫兒庄)에서 오호(吳浩)를 패사시켰다. 이에 명의 송영(宋瑛)은 주면(朱冕)과 석형(石亨) 등과 함께 양화구(陽和口:山西省 陽高北)에서 맞아 싸웠다. 명군은 7월 15일 태감 곽경(郭敬)의 잘못된 지휘로 대패하여 장군들을 비롯한 전군이 전멸하였다. 양화의 대패를 듣고도 7월 16일 왕진은 친정을 강행하자 대다수의 관료들은 친정을 반대하였지만 왕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7월 28일 원정군이 선부(宣府:河北省 宣化縣)에 도착하여 목도한 것은 들판에 가득한 명군의 시체들이었다. 이 때문에 위협을 느낀 왕진군은 대동을 거쳐 북경으로 귀환 할 것을 결정하였지만 도중에 퇴각로를 변경하여 선부에서 거용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귀환하려고 하였다. 8월 10일 명군이 선부에 도착하였을 때 에센군은 명군의 후미를 쫓기 시작하였다. 이에 명은 몽골출신 장군인 오극충(吳克忠)·오극권(吳克勤)의 형제를 파견하였지만 패사하자, 곽경의 지원을 위해 나섰던 주용(朱勇)과 설수(薛綬)가 지휘하는 5만 명의 기병은 주용의 무모한 지휘로 요아령에 배치된 에센의 복병의 습격으로 전멸하였다. 8월 14일 황제일행은 토목보(察哈爾 懷來縣 서쪽)에 도착하였을 때 광야는 안전을 위해 거용관으로 옮겨 주둔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왕진은 토목보에 주둔을 강행하였다. 오이라트군의 습격을 받아 명군은 궤멸당하고 정통제 자신은 포로가 되었으며 왕진은 살해당했다. 이를 ‘토목보의 변’이라고 한다.

영종이 포로가 되자 조정에서는 수도를 남쪽으로 천도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병부시랑 우겸의 반대로 고수정책을 취하였다. 에센은 나아가 북경을 포위하고 황제의 신병을 걸고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고 했으나 우겸 등은 북변에 장성을 쌓고 고수하자 성공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경태 원년(1450) 에센은 영종을 송환하고 화해하였다. 토목보의 변 이후 비록 영종이 에센의 석방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명의 국가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