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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風納土城)

이 칭 : 사성(蛇城)
시 대 : 백제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동
규 모 : 지정면적 121,235㎡
지정사항 : 사적 제11호
상세내용

한성백제시대 최대 규모의 토성.

이 성은 현재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 사이의 한강변에 위치한 평지토성으로, 반타원형의 평면 형태를 가진다. 이 성은 하남위례성의 후보 중 한 곳으로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도성의 결정적 증거는 찾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성 안의 주택 재건축으로 인한 발굴조사와 성벽조사를 통해 국내 최대의 판축토성과 막대한 유물이 찾아져 한성백제의 도성임이 밝혀졌다. 성벽은 복원된 북벽과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동벽과 남벽이 잔존하고 있다. 그나마 부분적으로 단절되었는데 북벽은 추정문지가 2개소가 있으며 동벽은 성내로 들어오는 차량도로가 중간중간 개설되었다.

풍납토성의 최초 조사는 성내부 유물포함층에 대한 시굴조사였다. 탐색갱을 통한 토층을 보면 한성시기에 해당하는 두개의 겹쳐있는 주거면이 확인되었다. 퇴적층내에서는 풍납리무문토기를 비롯하여 조질유문토기, 김해식유문토기, 신라식토기, 풍납리흑도 등의 토기류와 어망추, 기와, 철편류, 타제역석기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풍납토성을 위례성과 거의 동시기인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이 토성에서 출토된 토기류의 가장 큰 특징은 경질무문토기와 같은 재래적 토기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드는 대신 새로운 기술적 유형이 도입되어 나타난 타날문토기와 회(흑)색무문양토기 등의 사용이 보편화된다는 점이다. 나아가 회(흑)색무문양토기는 회(흑)색연질토기의 다양한 기종(직구단경호, 광구단경호, 뚜껑, 소호류 등)으로 발전하여 백제토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또 이 성에서 발굴된 건물지는 呂자형의 대형건물지로 건물 외곽은 ㅁ형의 도랑이 감싸고 있는데 그 바닥은 2-3중의 대형 판석을 깔아 놓았다. 이 건물지는 특수 공공시설로 추정되고 있으며 외부와 차단한 점, 심한 화재로 폐기된 점, 유물이 거의 없는 점 등으로 미루어 제의(祭儀)와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 196호 유구에서는 중국 서진대(西晉代)의 전문도기(錢文陶器)를 비롯한 시유도기(施釉陶器)가 6개체분이 출토되어 3세기 후반 백제가 서진과 교섭을 진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러점이 출토된 벼루의 존재와 가야·왜·영산강유역의 유물은 풍납토성이 활발한 대외교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성벽 전구간은 인위적으로 성토하여 축조하였고, 생토층인 모래층위에 형성된 점토층을 기저부로 하여 그 위에 성토하였다. 우선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의 중심토를 구축한 후 내·외벽을 덧붙여 쌓아나갔다. 내벽은 석축을 제외한 4개 구간, 외벽은 2~3개 구간으로 나누어 구축하였는데 중심 토루의 비스듬한 경사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대로 부어가며 성토하거나 위 흙을 섞어 다진 흙을 켜켜히 쌓았다. 이러한 방법은 고식의 판축기법으로 성토법과 판축법의 중간 단계인 것으로 판단되며 그로 인해 토성의 경사에 따라 최대 폭 43m, 높이 11m에 이르는 큰 규모로 축조되었다.

토루의 기저부는 최하층에 뻘흙 또는 점성이 강한 점토를 깔았는데 이는 성벽의 기초에서 유동성을 확보하여 붕괴되는 것을 막는 한편 측면 또는 하부에서 물이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법은 김제 벽골제나 부여나성에서도 보여지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뻘흙에는 인위적으로 식물유기체를 깔아 기초를 보강하였으며 때로는 목재를 가공하여 판축토 내부에 박아 목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내벽과 외벽의 마지막 토루 상단부에는 석렬을 깔고 석축을 쌓아 토루를 보강하기도 하였으며, 성벽 축조시 균일한 척도로 정확히 구간을 나누어 쌓아 당시의 측량술이 정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