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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성동리산성(城洞里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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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리산성(城洞里山城)

이 칭 : 태봉산성(泰封山城)
시 대 : 삼국
소재지 : 경기 포천군 영중면 성동리
규 모 : 면적 10,775㎡
관련인물 : 궁예(弓裔)
상세내용

태봉산(해발 180m)의 능선상에 축조된 테뫼식의 석축산성.

서쪽으로는 보장산(해발 555m)·종자산(해발 642m), 동쪽과 남쪽으로는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는 영평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포천천과 만나 한탄강·임진강에 합류한다. 동벽과 남벽의 사이로 포천-철원방향의 남북교통로와 전곡-이동방향의 동서교통로가 교차하며 이 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요충지가 바로 성동리산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성벽 둘레는 402m으로 협축식이 아닌 편축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성벽의 기초부인 암반을 L자형으로 굴착한 후 그 위로 장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수평을 맞추어가며 축조하는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일부 후대에 수개축이 이루어진 구간은 상부와 하부의 석재가 크기에 있어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양식은 장방형의 커다란 석재를 성벽 하단부부터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차츰 작은 석재들로 쌓아올리는 고려시대 이후의 축성방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대의 축조방법이라 할 수 있다. 뒷채움은 할석재를 가로넣기와 세로넣기를 교대로 하며 면석과 엇물리도록 축조하였다. 면석 역시 뒷뿌리가 긴 심석을 교대로 하여 쌓았기 때문에 면석과 뒷채움석이 톱니처럼 엇물려 그 견고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축조방법은 삼국시대에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

성문터는 남쪽 계곡부를 막아 축조한 남벽의 서측편에서 어긋문 형식으로 남아있다. 치성은 북동회절부에서 확인되었으며 북쪽의 철원과 동쪽의 영평천 방향에 접한 성벽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다. 우물은 성내에서 일정기간을 농성할 경우 가장 필수적인 시설이다. 성동리산성은 비록 장기간 농성하기에는 단점들이 많지만 이를 거점으로 삼아 주요교통로를 방어하고 주둔하기에는 충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성동리산성을 궁예가 축성하였다는 구전이 전하고 있는데 궁예와 관련된 전설을 가진 성들이 철원·연천·포천지역에만 수 개소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단순히 전설로만 인식하기보다는 이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태봉국의 왕인 궁예가 부하인 왕건에게 쫓길 때 하루저녁을 숙영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북강(한탄강)에서 이곳까지 군졸과 백성들이 일렬로 서서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달하여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러한 전설과 부합되는 증거가 한탄강유역에서 많이 채취되는 현무암 성돌이 성벽의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북동 치성의 경우 현무암으로만 축조되어 있어 궁예전설과 일정 정도 연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