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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선(軍船)

사용시기 : 삼국
상세내용

군사적으로 이용할 목적에서 건조된 선박.

《경국대전》에 의하면, 군선에는 대맹선·중맹선·소맹선이 있어 전국 수군기지에 배치되었다. 대맹선의 규모는 군사 80인이 탑승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운선으로 이용될 경우에는 800석의 곡물을 운반할 수 있는 규모다. 조선 전기 전국의 진포에 배치된 대맹선의 수는 80척이었다. 각종 맹선 가운데 대맹선은 원래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에 함께 사용하기 위하여 개발되었다. 갑판 위의 상장(上粧)을 되도록 간편하게 꾸며 놓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중맹선의 규모는 군사 60인이 정원이었고, 전국 진포에 배치된 중맹선은 192척이었다. 소맹선은 군사 30인이 정원이었는데, 전국 진포에 216척이 배치되었다. 대맹선이 주로 조운 겸용의 병조선이어서 성종대부터 판옥선이 등장한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조운선으로 사용되었다. 군선으로서의 구실은 소운선이 주로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선·중대선·중선·쾌선·맹선·별선·추왜별맹선·추왜별선 등 여러 종류의 군선들이 증강되어 있었으나, 이들 군선들이 일정한 제원없이 건조되어 군선으로서 쓸모가 없었다. 군선에 대한 문제는 1461년(세조 7) 10월에 신숙주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는 각지의 군선을 개량하여 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하여 1465년에 병조선(兵漕船)이 개발된 것이 맹선의 전신이 되었다. 병조선은 세조대에 개발되어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하여 대·중·소맹선으로 개명되어 1세기 동안 조운과 전공에 겸하여 사용되었다. 《경국대전》에서의 맹선에 대한 제반 규제는 수군의 군비감축이라는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군선이 829척에서 739척으로, 선군이 5만 177인에서 4만 8천 80인으로 줄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조운선 829척 가운데 무군선이 57척뿐인데, 《경국대전》에는 737척의 군선 가운데 249척이 무군선이다. 세조대에 군용선의 감축이 있고, 오히려 조운의 사용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맹선은 군선으로서 너무 무겁고 둔하여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성종대에 이미 거론된 바 있다. 중종과 명종대에 계속 발생한 삼포왜란·사량왜변·을묘왜변 등에서도 맹선은 군선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1555년(명종 10)에 대형군선인 판옥선이 개발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어서 종형군선인 방패선이 등장한 이후로 맹선은 군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여 맹선이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춘 것은 아니었다. 그 구조와 선체의 모양은 일반 조운선으로 계승되어 조선말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명종대에 개발된 판옥선이나 거북선도 그 하체구조는 맹선과 다를 바 없었다. 맹선은 조선전기의 전형적인 한선(韓船) 구조의 배로서 고려시대의 조운선인 초마선(哨馬船)은 조선후기의 조운선과 같은 계통으로 평저구조를 보이고 있다. 즉, 넓고 평탄한 저판을 밑에 놓고 그 좌우 현측에 외판을 세워 붙였으며, 선수에는 ‘비우’라고 하는 평면선수재, 선미에는 평면으로 된 선미재를 세워서 선체를 꾸며 놓았다.

맹선 이후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군선은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명종 때 개발되어 임진왜란 중에 크게 사용되어 전선으로 발전한 전투함이다. 종래의 맹선이 선체 안에서 병사들이 싸울 수 있는 발판이 되도록 갑판을 깔고 배를 움직이기 위한 여러 개의 노를 달아놓은 데 반하여, 판옥선은 선체 위 전면에 걸쳐 상장을 꾸려 2층으로 만든 옥선(屋船)이다. 하체부분은 10여 줄의 기다란 각재를 가지고 평탄하게 꾸민 두껍고 튼튼한 저판을 밑에 놓고, 일곱 줄의 외판을 양현에 세우고, 15줄의 참나무를 세로로 꾸며서 평면으로 만든 선수재를 선체의 전면에 세우고, 선체의 후미에도 선미재를 세워 이를 고착한 다음에 그 위에 14개의 가목을 가로 걸치고, 그 바로 밑으로 내려가며 양현의 외판재마다 가룡목을 부재로 연결하였다. 선체의 상장은 가목 끝단에 현란과 평행하게 패란(牌欄)을 설치한 뒤, 패란을 기대로 하여 갑판을 깔고 그 주변에 여장이라 부르는 난간을 세우고 갑판 중앙에 따로 지휘소인 2층 누각을 설치하였다.

노역을 하는 격군(格軍)들은 아래 위 두 갑판 사이의 안전한 장소에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노를 젓게 되어 있다. 군사들은 상장갑판 위 넓고 높은 장소에 자리잡고 싸우기에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해전에 28척, 당포해전에 51척, 부산해전 때 74척이 투입되어 압승을 거두었다.

또 조선 후기의 무장선으로 병선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사용된 대형전투함인 판옥전선(板屋戰線)과 사후선(伺候船)만 가지고는 불편해서 임진왜란 이후 처음에는 잡용으로 쓰여지다 점차로 전선 또는 방패선의 보조적인 무장선으로 중용되기에 이르른 군선이었다.

조선 후기 수군의 군선 편제 단위는 전선(또는 귀선)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나, 방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등으로서, 병선은 각 수군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경무장선이었다. 전국에 배치되어 있는 병선은 1774년(영조 20)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161척으로서 군선 총척수 776척의 21%에 이르고 전선 117척과 방선 76척을 합한 척수에 맞먹는다. 병선에 대한 기록은 이미 광해군 때에서부터 자주 나타나며 인조 때에는 이미 널리 보급되어 군무외에도 미곡운반 및 잡용에 쓰여지다가 점차로 군선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병선의 구조는 《각선도본》에 나타나 있듯이, 일곱 줄의 기다란 각재(角材)를 가지고 평탄하게 꾸민 저판을 밑에 놓고, 그 위에 일곱 줄로 된 양현의 외판과 여섯 줄의 목재로 평탄하게 꾸민 선수재와 그림에 나타나 있지 않은 선미재를 각각 세워서 서로 고착하고, 그 상면에 10개의 가목(駕木)을 가로 걸쳐서 고정하고 그 밑으로 내려가며 외판조재(外板條材)마다 가룡목을 고착하여 선체를 꾸미고 두 개의 돛대와 각 현 세 개씩 6개의 노를 설치한 범노선이다. 저판을 기준으로 한 병선의 크기는 35~45척이다. 병선의 탑승인원은 1704년(숙종 30)의 《수군변통절목》에서 타공1명, 포수 2명, 노군 14명 등 모두 17명이다. 《전라우수영지》에서는 선장 1명, 사부10명, 포수 10명, 다공 1명, 노군 14명 등 모두 36명이다. 이렇듯 병선의 크기와 무장은 일정한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는 각종 군선에 대한 논란이 심하였는데 병선만큼은 시종군무 외에도 군량미와 진휼미의 수송 및 기타의 잡용 등에 활발히 활용되면서 조선 말까지 연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