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한민족 전투원형전차(戰車)

연관목차보기

전차(戰車)

이칭 : 병거(兵車)
사용시기 : 고려
구분 : 공성무기
상세내용

전투용 수레.

화력용 수레의 경우에는 화차라 불렀는데, 후대에는 전차에 화포를 장착한 것도 전차·화차 혹은 포차(砲車)로 부르면서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편의상 화기가 장착되지 않았으면 전차로, 화기가 있으면 화차로 구분한다.

전차전은 야전으로서 전차를 배열하기에 가장 알맞은 지형을 선택하여 정면공격으로 승부를 판가름낸다. 열을 이루어 정열된 전차들은 하나의 전술단위를 이루어 마치 높다란 벽이 들판에 세워진 형상을 유지한 채 이동한다. 6〜7보 전진하고는 전차가 멈추어 대열을 정비하고 네댓 번 충돌이 있은 후에도 전열을 다시 정비한다.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앞장서지 말 것이며, 겁쟁이라 할지라도 홀로 물러서서는 안된다’는 《손자》 〈전쟁〉에 나오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우리의 전차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었다. 국방의 기본개념이 산악이 많은 지형적 여건을 이용한 방어전략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전차를 제작해 전투에 투입하여 성공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 현종 1년(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시 통주성 방어전에서 고려군은 검차를 앞세운 영격작전(迎擊作戰)으로 초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고려의 검차에 대한 구체적인 도면은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송규빈(宋奎斌)이 《풍천유향》의 상승진(常勝陣) 도면에서 제시하고 있는 검차와 유사했으리라 짐작된다. 이 검차는 생가죽으로 싸서 적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방패 기능을 가지면서 창검들로 무장된 공격용 무기였다.

조선에서는 성하작전(城下作戰)에서 상당한 공격력을 갖춘 전차의 사용 여부에 대한 시비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443년(세종 25)에 함길도 도절제사 김효성(金孝誠)이 전차의 장점을 들어 이의 제작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세종은 전차의 불리한 점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였다. 전차에 대한 조선시대의 통념적인 인식은 중국과 같은 평원지대에서 가능하며 조선과 같이 험지가 많은 지형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왔으며, 전차 사용의 기본조건으로 평원 광야에 풀이 짧고 땅이 단단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효성은 5진(鎭) 성하작전에서 전차를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음을 다시 역설하였다. 야인은 기병전으로 속도전에 강함으로 직접 전차를 응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병기를 고루 갖추어 실은 전차로 기병과 보병을 보조한다는 것이었다. 김효성은 마융(馬隆)이 양주(凉州)토벌 시에 사용하였던 편상거(偏箱車)의 유리한 예를 들면서 전차전법의 시행을 주장하였으나 여진의 장기가 속도에 의한 기습전이었기에 전차에 의한 대응은 불리하다고 판단되어 결국 전차의 사용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김효성은 문종대에도 다시 전차의 사용을 주장하였다.

이후로 전차에 별다른 주장이 없다가 1498년(연산군 5) 7월에 김응문(金應門)이 소유마(小流馬)라는 전차 제작을 진상하였다. 조정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윤필상(尹弼商)은 목우유마(木牛流馬)의 제도는 제갈량 이후로 전해지지 않은 기술로 세종·세조대에도 시행되지 않은 어려운 것을 시행한 조치이므로 이를 다시 폐기 처분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전차제의 실시에 찬동을 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의 산천이 험지라는 점, 소유마 자체의 구조적 결함 등을 제시하면서 반대하여, 결국 전차를 시험한 연후에 폐기토록 하였다. 당시에 제작된 소유마 혹은 목우유마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제작 당시 중국의 제도를 연구한 결과였다는 점에서 《무비지》의 목우거(木牛車)와 유사한 형태로 추정되는데, 《무비지》에서 목우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목우거는 단단한 나무와 두터운 판자로 집을 만들고, 그 속에서 쇠가죽을 뒤집어 씌었다. 4개의 바퀴가 있어서 스스로 안에서 나감에 있어 성을 공격하는 병사를 가리어 숨겨 주었다”

조선에서 제작된 소유마 등은 목우거와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차의 일종인 우거가 제작·활용된 것은 변이중(邊以中)에 의해서였다. 변이중은 1593년(선조 26) 1월 30일 우거를 이용하여 죽산성을 공격하였다. 우거는 적탄에 견딜 수 있도록 복개를 씌웠으며 큰 황소로써 끌게 하여 병사들이 그 안에 숨어서 적진 가까이 접근하기 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성 밖 5리 지점부터 학익진을 펴며 진격하였으나 적들이 우거에 불을 던지며 반격하여 패하고 말았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조선후기 군영에 보유하고 있던 전차는 51량, 화차 187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