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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성(王儉城)전투

시대 : 삼한
시기 : 기원전 109년~기원전 108년
전투지역 : 평양 왕검성 일대
전쟁상대국 : 한나라
상세내용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두 차례에 걸쳐 침략하여 벌인 전투.

고조선과 한의 관계는 한이 흉노정벌에 주력하는 동안까지는 별 충돌 없이 비교적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고조선이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기원전 110~108) 때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한나라도 흉노정벌이 끝나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고조선은 한나라에서 발생한 유이민과 정치적 망명객들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면서 선진문물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군사력을 강화해 갔고, 남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여 진국 등이 한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방해하고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고조선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중계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한 무제는 기원전 109년 섭하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고조선에 보내 양국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섭하는 귀국길에 올랐다. 섭하는 한 무제로부터 문책을 두려워하여 귀국 도중 패수에서 사절 일행을 호위하던 고조선의 장수를 살해하고 그 머리를 가지고 돌아갔다. 섭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요동군의 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 한편, 고조선의 우거왕은 이러한 사실을 보고를 받고 분개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조선군은 4월 패수를 건너 동부도위 휘하의 한군을 격멸하고 섭하를 살해한 후 그의 머리를 잘라 가지고 개선하였다.

이에 한군은 육군 5만명과 수군 7천명을 동원, 수륙 양면작전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육군은 패수의 조선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왕검성(현재의 평양) 방면으로 남하하여 공격하였고, 수군은 산동반도의 기지를 출발하여 서해를 건너 열구(列口 : 현재의 대동강 입구)를 거쳐 왕검성 남방에 포진하였다. 남북에서 고조선을 협공하려는 작전이었지만,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사상자만 내고 패퇴하였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한의 무제는 화전양면책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며 재차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


이후 한의 좌장군 순체는 주방어선인 패수 하류지역에 대해 양동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조선군의 배치가 비교적 소홀한 패수 상류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조선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순체의 군은 남방에 포진하고 있던 수군과 더불어 왕검성에 이르러 북서면을 포위하였고, 조선군은 지리적 여건을 이용하여 지연전으로 맞섰다. 이때 한나라 진영 안에서는 의견이 양분되어 혼란을 빚었는데, 양복은 무혈점령론을, 순체는 총공세론을 주장하였다. 결국 순체의 견해가 채택되어 한군은 왕검성에 대해 총공격을 재개하였고, 이에 맞서 우거왕의 총지휘하에 있던 조선군도 전의를 가다듬고 용감히 투쟁하여 한군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전선은 또다시 장기화되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조선군에 내분이 일어났다. 장기전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한 노인(路人 : 중앙장관), 참(參 : 지방장관) 등이 우거왕에게 항복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인 등은 왕검성을 탈출, 한군에 투항하였고, 이듬해 여름 참이 부하를 시켜 왕을 시해하고 다시 한군에 항복하였다. 이후 조선군은 대신 성기(成己)의 지도하에 결사적인 저항을 전개하였으나 성기도 순체의 사주를 받은 자에게 피살되어, 결국 왕검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