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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강화도(江華島)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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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江華島)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637년(인조 15) 1월 22일
전투지역 : 강화도 갑곶진, 강화성
전쟁상대국 : 청나라
관련유적 : 강화성
상세내용

병자호란 때인 1637년(인조 15) 1월 22일 염하를 건너 강화도를 침공한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수전과 육전에서 모두 패배한 전투.

1636년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한 청군은 산성 중심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던 조선군과 접전을 피하고 신속히 남진하여 12월 14일에는 한양 부근에 도달하였다. 이 날 조선 조정은 왕실과 대신의 가족을 강화도에 우선 피난시키고 한성판윤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삼아 이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으로 임명하여 강화도의 수군을 통할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수군을 강화도에 집결시켜 해안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국왕 일행도 뒤를 이어 강화로 향하려 하였으나 청군 선견대에 의해 한강 하구가 봉쇄되었으므로 남한산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청군 주력이 남한산성 포위에 동원되었으므로 강화도에 대한 직접 침공 위협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판단하였다. 또 청군은 수전에 미숙하므로 도하공격을 쉽게 감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광성진 일대에만 약간의 수군을 집결시켜 두었을 뿐 김포반도 대안의 해안선에 대해서는 별다른 방어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화도 공략을 맡은 청의 우익군 16,000명은 12월 30일에 강화도 대안의 포구골, 성내, 포내, 원포 부근에 포진하여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주력인 여진족은 수전에 능하지 않았으나 침공한 청군에는 수전에 익숙한 항복 한병(漢兵)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장거리포인 홍이포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청군의 도하능력이나 수전수행능력은 조선군의 예상보다 훨씬 우수한 것이었다. 이들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 부근에서 선박을 모으고, 민가를 헐어 선박과 뗏목을 제작하였다.

청군이 도하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조선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청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침공을 막으려 하였다. 먼저 주사대장 장신 휘하의 강화수군을 광성진 부근에 배치하고 충청수사 강진흔이 이끄는 충청수군을 연미정 일대에 포진시켜 통진나루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강화해안에 3,000여 병력을 포진시켜 상륙을 저지하려 하였으며 강화부성에도 700여명을 두어 각 문루를 지키도록 하였다.


1637년 1월 22일 새벽 강화도 공략준비를 완료한 청군은 염하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먼저 홍이포를 발사하여 조선수군과 해안의 육군부대를 공격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포탄이 떨어지자 원거리 사격에 놀란 조선군은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포격 후 청군은 대소 선박과 뗏목에 병력을 분승시켜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벌이려 하였다. 조선군은 청군 선박을 요격하기 위해 갑곶 부근의 충청수군이 출동하여 청군 선박 10여척을 격침시키는 등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광성진에 포진해 있다가 갑곶으로 이동 중이던 강화수군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보강되었고 혼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강화수군을 이끌던 주사대장 장신은 청군 선단의 기세에 눌려 자기 휘하 선단에게 퇴각을 명하고 원배치지인 광성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고립된 채 분전하던 충청수군은 궤멸되었으며 염하에서 청군의 상륙부대를 저지하려던 계획은 실패하였다.

염하에서의 해전에서 패배하고 청군의 도하를 저지할 수 없게 되자 강화검찰사 김경징은 연안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해안에 포진하였던 병력을 강화성으로 후퇴시켰으며 자신은 광성진으로 달아나 주사대장 황신과 함께 육지로 피신하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은 대부분의 병력은 강화성으로 철수하거나 산간으로 분산 도주하였다. 해안에는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자리를 고수한 중군 황선신 이하 100여 병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청군은 해안에 조선군 복병이 배치되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먼저 정찰병을 갑곶에 상륙시켜 상황을 확인하였으며 홍이포를 이용하여 재차 원거리 제압사격을 가한 후 일제히 해안에 상륙하였다. 청군이 상륙하자 해안에 남아 있던 소수의 조선군은 지근거리까지 청군을 유인한 후 일제 사격을 가하여 다수의 청군을 살상하였으나 대오를 정비한 청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전멸당하고 말았다.


오전 8시경 갑곶 일대의 해안을 장악한 청군은 별다른 저지를 받지 않고 전진하여 오전 10시경 강화성에 도착하였다. 주장이 도주한 강화성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이 해안에서 후퇴한 병력 등 3,000여의 인원을 각 성첩에 배치하여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강화성을 완전히 포위한 청군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김상용 등은 이를 거부하자 정오경 청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청군은 먼저 화포로 집중사격을 가한 후 운제와 당차 등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조선군도 총포와 화살로 대항하여 오후 내내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청군의 포격에 성벽이 무너지고 문루가 파손되었다. 북문 방어망이 먼저 붕괴되어 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이어서 동·서·남문의 수비도 무너지자 청군이 일제히 성내에 돌입하였다. 남문을 방어하던 김상용은 형세가 기울자 부근의 화약궤에 불을 던져 자폭하고 말았다. 성 안 각지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청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청군의 학살과 약탈로 강화부민과 이곳에 피난와 있던 종실과 대신의 가족 중 상당수가 피살되거나 청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자결한 이들도 많았다.

강화성을 점령한 청군은 성 안에 있던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의 항복을 받은 후 약탈과 살육행위를 중지하였다. 이들은 비빈과 왕자·종실·대신 및 그 가족을 포로로 잡은 채 철수하여 남한산성 부근에 자리한 청태종의 본진에 합류하였다.
강화도 전투의 참패는 적정에 대한 안이한 판단과 정보수집 소홀로 올바른 방어계획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주장의 적전 이탈은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인조는 더 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강화도 전투는 조선의 항복을 재촉한 결정적인 전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