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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동녕현(東寧縣)전투

동녕현(東寧縣)전투

시대 : 근대
시기 : 1933년 9월
전투지역 :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
전쟁상대국 : 일본
상세내용

1933년 9월 한국독립군과 중국인 오의성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그리고 중국공산당 소속인 왕청현(汪淸縣) 유격대의 일부 병력이 연합하여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
삼차구는 동쪽이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변경지대로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래서 관동군은 국경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500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고, 만주국군 또한 1,500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키며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독립군은 왕청현의 험준한 산악지대인 대전자령(大甸子嶺) 일대에서 2개월 가량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오의성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과정에서 식량과 무기 등의 보급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한국독립군과 오의성부대는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고 있어 군수품이 풍부하고, 병기창이 있는 동녕현의 삼차구를 공격하여 군수물자를 획득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오의성부대에는 중국공산당의 유격활동을 지지하는 중국인들이 여러 명 있었고, 이들이 지휘자인 오의성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유격대는 이제까지 민족주의운동 계통의 무장부대에 대해 대결적인 자세를 취해 오던 태도를 바꾸어 민족통일전선의 차원에서 함께 투쟁하려는 자세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삼차구에 대한 공격에서도 그 일환으로 김일성이 지휘하는 왕청현유격대의 일부 병력이 참가하였다.
세 계통의 연합부대원 1,500여명은 1933년 9월 6일 저녁 9시부터 삼차구를 공격하였다. 계획대로 한국독립군과 오의성부대는 남문과 동문을 공격하였고, 중국공산당의 유격대는 가장 경비가 튼튼한 서문 밖의 서산포대(西山砲臺)를 기습하였다. 왕청현유격대는 서산포대의 정면을 공격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측면을 우회적으로 공격하여 적의 화력을 분산시킨 후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서문으로 들어갔고, 한국독립군과 오의성부대도 남문과 동문쪽을 점령하고 성문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전투는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지만, 연합부대는 성 안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시가전이 벌어졌고,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간 오의성부대원들 가운데 일부가 시내에서 노략질을 하는 등 통일된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관동군은 이 틈을 타서 서산포대의 대포와 탱크 등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반격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사충항(史忠恒)이란 중국인 지휘자가 적의 총에 맞고 부상을 입는 등 오의성부대의 손실이 급속히 늘어나고, 부대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한국독립군의 지도자 이청천 또한 부상을 당했으며, 강진해(姜振海) 등 여러 명이 전사하였다. 더구나 적의 증원 부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왕청현유격대를 선두로 연합부대는 삼차구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과정에서 규율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오의성부대원들은 자신의 지휘자인 사충항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에 왕청현유격대의 제3중대장인 황해룡(黃海龍) 등이 추격대의 공격을 피해가며 목숨을 걸고 그를 구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의성부대 사이에서 중국공산당 소속 유격대의 위신이 높아졌다. 반면에 한국독립군은 이때 입은 타격과 노획품에 대한 분배과정에서 오의성부대와 갈등이 일어나면서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청천 등 한국독립군의 주력은 중국의 관내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