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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甲山)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907년 12월 2일~1908년 1월 10일
전투지역 : 함경북도 갑산․삼수․북청
전쟁상대국 : 일본
상세내용

1907년 함경북도 갑산 일대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일본군과 접전하여 승리한 전투.

군대 해산 이후 전국에서 의병의 불길이 거세지자 일제는 의병의 무장 봉기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1907년 9월 6일 ‘총포화약취체법(銃砲火藥取締法)’을 공포하여 민간인들이 소지한 무기류를 압수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산악 지역에서 수렵으로 생계를 꾸리는 산포수들이었다. 이에 홍범도(洪範圖)와 차도선을 우두머리로 한 함경북도 북청 지역의 산포수들이 의병 봉기하여, 그 근거지를 북청 북쪽 50km에 위치한 작수동(作水洞)으로 하였다.

산포수 부대는 11월 22일 산포수들의 총기를 압수하여 호송중이던 일본군 총기 호송대를 급습하여 호송병을 사살하고 총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후치령을 장악하여 이곳을 통과하는 일본군 우편 호송대와 혜산진 소재 군용 목재창 고용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북청과 혜산진 사이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이에 미키 소좌 일행은 일본군 수비대 분견소가 있는 신풍리(新豊里)로 도주하였다. 25일 일본군 북청수비대에서는 2개 소대 병력을 동원하여 후치령을 공격하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들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후치령 전투에서 승리한 후 차도선은 부대를 이끌고 갑산 서북쪽의 삼수성을 점령하고 성벽을 보수하여 근거지로 삼은 후 갑산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다. 12월 15일에는 갑산-북천 가도의 장항리(獐項里)에서 일본군 화물 호송대와 우편 호송대를 급습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차도선 부대의 활동이 활발하자 12월 31일 혜산진 수비대와 갑산 수비대가 협력하여 삼수의 차도선 부대를 공격하였다.


차도선 부대 400여명은 삼수성의 성벽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의병 부대는 일본군이 날이 저물고 탄약이 부족하여 후퇴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성을 나와 출격하여 일본군을 혜산진으로 패퇴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동부 수비 관구 사령관은 북청의 보병 제50연대 제3대대장 미키 소좌로 하여금 북청수비대 병력 18명과 장항리 파견대 병력 50명, 성진 수비대 병력 80명과 기병 26명을 통합 지휘하여 삼수성의 의병을 통합하도록 하였다. 미키 토벌대는 1월 9일 중평장과 신풍 지역에 집결하여 삼수성에 대한 공격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이때 삼수성의 차도선 부대는 이날 삼수성을 떠나 운봉(雲峰, 중평장 남쪽 2km)에 진지를 점령하고 중평장으로 북상하는 장항리 파견대에 선제공격을 가하고서 신속히 갑산 쪽으로 이동하였다. 차도선 부대가 9일에 이미 갑산 쪽으로 이동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일본군은 중평장과 신풍에서 공격준비를 끝내고 10일 삼수성으로 진격하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이미 초토화된 삼수성을 발견하였을 뿐이었다

이러는 동안 차도선 부대는 일본군의 수비가 허술한 갑산을 급습하여 일본군의 허를 찔렀다. 의병 부대는 갑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원들을 사살하고, 우편국 등 각 기관을 소각한 다음, 이리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삼수성 공격 도중 갑산이 의병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미키 소좌는 장항리 파견대로 하여금 삼수 부근의 의병을 수색하도록 한 다음, 성진 수비대를 이끌고 급히 갑산으로 달려갔으나 차도선 부대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차도선 부대는 그 뒤로 어면사(魚面社)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산포수 특유의 빠른 산악 기동력을 바탕으로 인근 각지에 출몰하면서 일본군에 타격을 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