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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전투(2)

시대 : 조선
시기 : 1896년 2월 28일~3월 21일
전투지역 :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관련유적 : 남한산성
상세내용

1896년 남한산성을 점령한 의병부대와 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을 기화로 조선의 각계각층에서 반일 기운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년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되자 반일 감정은 거병으로 표출되었다. 1896년 1월 경기도 이천의 백현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천 의병은 2월 13일 이천 서쪽의 이현(梨峴)전투에서의 패배로 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에 흩어진 군사들이 2월 25일부터 다시 이현에 집결하여 부대를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광주 의병과 여주 의병이 이천 의병에 합세하였는데, 각 지역의 의병이 통합되어 병력이 2,000여명에 달하게 되자 박준영과 김하락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의병부대는 2월 28일 남한산성으로 이동하여 친일 역당을 토벌하고 국왕을 옹위하기 위한 서울 진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의병은 남한산성을 점령함으로써 그들에게 가장 난점이었던 군수 물자의 조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형 또한 항전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기에 유리하였다.

남한산성을 점령한 의병 부대는 성의 수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군사 김하락의 총지휘 아래 각 군별로 성의 수비 임무를 분담하여 남문 수비 김태원(金泰元)의 선봉군, 북문 수비 신용희(申龍熙)의 후군, 동문 수비 김귀성(金貴星)의 좌익군, 서문 수비 김경성(金敬誠)의 우익군으로 나누었다. 의병이 남한산성을 점거하자 조정에서는 수도 경비군인 친위대의 일부와 강화도 위수군인 강화진위대의 일부로 1개 혼성대대를 편성하여 장기렴의 지휘 하에 의병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병이 견고한 성벽과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을 굳게 지켰으므로, 관군은 성에 접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의병이 성 밖으로 출격하여 관군을 급습하는 등 관군의 전열 교란에 적극성을 보였다. 3월 2일부터 사흘간 상호간에 소규모 탐색전이 있었으나 양편의 전과는 없었다. 3월 5일 북문을 둘러싸고 포격전이 벌어졌다. 북문 수비장인 신용희는 관군이 북문 가까이에 대포의 포좌를 설치하는 것을 보고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대거 출격하여 관군을 공격, 수십 명을 살상하고 대포 1문을 노획하였다.

남한산성을 점령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한 관군은 의병대장 박준영을 관직으로 매수하였다. 즉 김귀성을 수원유수에, 박준영을 광주유수에 임명한다는 조건으로 의병진에서 관군의 공격에 내응하도록 한 것이다. 관군측에 매수된 박준영은 3월 20일 밤 전 장병의 노고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연회를 베풀어 성문의 수비병들을 술에 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21일 새벽 서문과 북문을 열어 관군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관군이 성 안으로 진입하자 김하락 등 의병장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박준영과 그 아들들을 처단하여 전열을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혼란상태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성 안의 의병들은 분산한 채 성 안으로 돌입한 관군의 포위망을 각개 돌파하여 남한산성을 탈출하고 말았다.

의병 진영의 내분으로 서울 진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의병 진영의 활동이 대부분 각 지역에서 친일 개화파를 응징하여 일제 침략 세력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임에 비해, 이들은 서울로 직접 진공함으로써 국왕을 보호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왕정신을 보다 구체적으로 행동화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