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한민족 전투원형세성산(細城山)전투

연관목차보기

세성산(細城山)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894년(고종 31) 11월 18일
전투지역 : 충남 천안시 목천 세성산
상세내용

1894년 11월 재차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충남 천안의 목천 세성산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한 전투.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이 자진 해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병한 청·일 양군이 철수하지 않고 서로 충돌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또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우리 정부에 갑오개혁을 강요하자 동학농민군은 재차 봉기하였다.

11월 초순 논산 소토산 근처에서 합류,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규모 연합부대를 구축한 동학농민군은 서울 진공을 위한 1차 목표를 공주로 정하고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북상하던 동학농민군들이 공주를 진격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 공주 외곽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이 견고하게 방어선을 구축하고 공격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한편, 10월 전의, 목천 등지에서 기포하여 이 고을의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한 북접계 동학농민군은 이 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김복용을 중심으로 목천 세성산에 진을 쳤다. 목천은 청주와 공주의 중간에 위치하며 서울로 통하는 요충지이며, 세성산은 목천의 남쪽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로 서북 편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늘어서 있고 동남쪽으로는 밀림이 연속되어 있다.


한편 일본군은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완전히 섬멸할 목적으로 후비 보병 독립 제19대대를 급파하였다. 그리고 조선 관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출발하여 3로로 나누어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남하하여 공주지역을 점령, 포진하였다. 공주지역을 일단 점령한 일본군과 관군은 배후의 위협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목천 세성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일본군과 관군은 2개 소대 병력을 세성산 북쪽 기슭에 매복시키고, 1개 소대를 동북편 산 위에 대기시킨 후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세성산 동남 기슭에서부터 기습 공격하였다. 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유리한 지형에 의지하여 한동안 저항하였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데다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두 시간만에 서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퇴각하던 동학농민군은 북편 산기슭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의 습격을 받아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궤멸되었다.

세성산전투의 패배는 농민군의 전략과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접의 우수한 전투부대가 궤멸되었을 뿐 아니라 지리산 요충지역의 상실과 함께 관군의 병력을 공주성 수비에 집결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투의 패배로 농민군 지도자 김복용이 현지에서 체포되어 참수당했으며 김화성을 비롯한 지도자들도 세성산을 빠져나왔으나 모두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