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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송림(松林)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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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松林)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811년(순조 11) 12월 29일
전투지역 : 평안도 박천군 송림동
상세내용

1811년(순조 11년) 12월 29일 평안도 박천군 송림동에서 벌어진 관군과 홍경래 반군간에 벌어진 전투.

이 해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에서 봉기한 반군은 북진군과 남진군으로 나누어 진군하였다. 북진군은 곽산·정주·선천·철산·용천 등을 점령하고 의주로 진격하였으며 남진군은 가산·박천·개천을 점령하고 평안병영이 있는 안주로 진격하기 위해 청천강변의 송림까지 진출하여 주둔하였다. 병력수는 약 800명 정도였다.

남진군은 봉기 후 기습공격이나 내응으로 쉽게 주변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으나 평북지역 방어의 거점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되었기 때문에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사 소식을 접한 안주의 평안병사는 주변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여 별도로 장사군관이라는 돌격대를 편성하고 반군의 근거지를 공격하려 하였다.

전투 당일, 관군이 송림동 어구의 풍진(楓津) 언덕 위에 진을 치자 반군이 먼저 공격을 가하였다. 이미 12월 24일부터 26일 사이에 미리 송림에 주둔하고 있던 반군은 전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제1대는 관군 전진의 후면을 포위하고 전진과 후진을 분단시키려 하였으며, 제2대는 전진의 전면을 차단하려 하였고, 제3대는 적현(赤峴)에서 풍진을 건너 후진을 포위·공격할 계획이었다.


병력수가 적은 관군은 후진이 붕괴되고 전진과 후진이 분단되어 각개 격파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때 송림에 도착한 곽산군수의 원군이 반군의 배후를 먼저 공격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반군은 관군을 포위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관군에게 대적하려 하였으나 배후를 공격당하자 전열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관군은 전투가 시작되자 장사군관 기병대 40명을 먼저 돌격시켜 이미 전열이 흐트러진 반군의 주력을 붕괴시켰다. 반군 지휘관 홍경래는 직접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치며 독려하였으나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관군의 추격을 받자 도주하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은 반군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주력이 무너진 이후의 전투는 섬멸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관군은 송림동 산골짜기를 수색하면서 반군을 추격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30여명을 생포하였다.

반군 지휘부는 가족을 이끌고 가산으로 피신하였으며 다시 생존자들을 이끌고 태천과 가산을 완전히 포기한 채 정주성으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반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이후 정주성 농성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