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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이시애(李施愛)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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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李施愛)의 난

시대 : 조선
시기 : 1467년(세조 13) 5월~8월
전투지역 : 함경도 함흥, 길주 일원
상세내용

조선 세조 13년(1467) 5월 함경도 토호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조선초기 함경도는 여진족과 접하여 있는 특수지역으로 중앙에서 수령을 파견하는 대신 지방의 호족 토반 중에서 명망있는 이를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대대로 그 직임을 잇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즉위 후 중앙집권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도 출신 수령의 비율을 점차 줄이고 경관 지방수령을 파견해나갔다. 또 호패법을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법(保法)을 시행하여 군역자원을 철저히 확보하려 하였다. 이시애는 길주를 근거로 한 대표적인 호족이었는데 이러한 세조의 정책으로 인하여 지방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자 비슷한 처지의 호족과 함경도 도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1467년 5월에 이시애는 아우 이시합, 매부 이명효와 모의하여 먼저 하삼도의 군사들이 수륙 양방향으로 쳐들어와 여진인들과 함께 함경도의 군민들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동요하게 하고 기병하였다. 이들은 함길도절도사 강효문(康孝文)과 길주목사 설정신 등을 죽이고 길주 일원을 장악하였으며, 계속 남하하여 관찰사 신면을 비롯한 모든 중앙파견관리들을 죽이고 함흥까지 점령하였다.

정부에서는 반란 소식에 접하자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사도병마도총사로 삼고 어유소와 남이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구성군 준이 이끄는 중앙군은 철원을 거쳐 철령을 넘어 함경도 안변쪽으로 접근하고, 진북대장(鎭北大將) 강순(康純)은 평안도 병력을 이끌고 영흥으로 진격하였으며, 평로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은 황해도 병력을 인솔하여 문천으로 진군하였다.


관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함흥까지 점령하였던 이시애는 북청으로 후퇴하여 진을 세웠다. 6월 19일에 관군은 함흥을 점령하고 북청으로 진출하다 6월 24일 새벽에 반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잘 막아냈다. 이에 반군은 한 부대를 홍원 서편 신익평(申翌坪)에 주둔시켜 함흥과 북청 사이의 통로를 차단하고, 한 부대는 마어령(磨於嶺)을 넘어 2진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대문령(大門嶺) 넘어 진을 치고 장기전에 대비하였고, 관군 역시 북청에서 홍원으로 후퇴하여 장기전 채비를 갖추었다. 관군이 북청에서 물러나자 반군은 다시 북청을 점령하였고, 이를 계기로 재차 공방전이 벌어졌다.

7월 25일 야밤에 관군은 행동을 개시하여 반군을 격파하고 북청 역시 쉽게 점령하였다. 북청을 상실한 반군 주력은 북청 동쪽의 만령(蔓嶺)으로 이동하였으나 관군은 이곳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반군은 결사적으로 버텼으나 어유소 부대가 반군의 좌측을 공격하여 방어선을 와해시켰으며 백병전 끝에 반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만령전투 후 반군은 이성, 단천, 길주로 계속 패주하였으며 반군에 거짓 항복한 길주 출신 허유례가 반군의 군관들을 설득하자 전세가 기운 것을 파악한 이들이 호응하여 주모자 이시애와 이시합을 체포하여 항복하였다.

중앙집권화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세조는 자신의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함경도지역은 함길도에서 영안도로 이름이 바뀌고 이후 오랫동안 반역향으로 취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