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달구벌(達丘伐)전투

시대 : 통일신라
시기 : 839년(신무왕 1) 1월
전투지역 : 대구 일원
상세내용

839년 1월 장보고 휘하의 군사가 대구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전투.

836년 후사가 없던 흥덕왕이 왕위계승에 대한 아무런 유언도 없이 운명하자, 왕위를 놓고 근친왕족간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은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였지만 왕궁에서 벌어진 분규 과정에서 피살되고 왕위는 김우징의 사촌 김재륭(희강왕)에게 돌아갔다. 이때 김우징은 목숨을 부지하기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망명해왔고, 장보고는 이 근친왕족을 환대했다. 838년 1월 상황은 반전되어 희강왕이 김명 등의 일파에 의해 살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는 정변이 일어나자 장보고는 김우징과 김양을 앞세워 경주로 쳐들어가기로 하였다.

838년 12월 장보고의 군대는 청해진을 떠나 경주로 향했다. 도중에 김민주가 이끄는 정부군이 이를 저지하였으나 이들은 장보고 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보고 측의 기병대장 낙금과 이순행은 신라정부군의 대열을 깨고 그들을 흩어지게 했다. 김민주가 이끄는 정부군은 모두 도주했으며, 그들은 추격하여오는 장보고의 기병에게 순식간에 도륙당했다. 이 소식은 신라전역에 전해졌고 신라정부군 사이에 장보고의 기병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장보고의 군대는 낙동강을 건너 경주로 향하였는데, 이때 민애왕은 대구에 병력을 집중시켜 10만에 달하는 군사를 모아 놓고 있었다. 이는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지만 민애왕은 장보고의 5천명의 병력은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민애왕은 여유있게 전쟁을 관람하기 위해 대구분지 교외의 높은 지대에 올라가 큰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병력의 규모를 보고 측근들의 낙관적인 소리가 흘러나왔고 민애왕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낙동강을 넘어선 장보고의 군대는 대구의 화원에 육박해 작전회의를 열었다. 정부군의 병력이 10만이나 되어 대구 전체를 거의 다 덮을 정도라는 정찰병의 보고와 함께 갑옷과 군복을 차려입은 병력은 거의 소수이며, 나머지는 모두 급하게 징집된 농민들이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달구벌로 진입한 장보고의 군대는 정부군에게 먼저 자신들의 원정이 역적행위가 아니며, 국왕을 죽이고 즉위한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여기에 징발된 농민들은 싸움에 들지 말고 귀가하라고 선동하였다.

이윽고 장보고 군대가 정부군 진영의 한가운데 있는 관군을 향해 공격을 하자 관군의 대열이 깨지기 시작했다. 중앙의 관군의 대열이 깨지자, 훈련이 안 된 민애왕의 농민병들은 모두 궤멸되어 흩어졌다. 달구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보고 군대는 계속 진격을 하여 경주에 입성한 후 민애왕을 살해한 뒤 김우징을 신무왕에 옹립했다.